제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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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456회 작성일 12-12-28 20:32본문
부활절 연휴의 토요일에 보쿰의 태오 내외와 성규가 통지도 없이 들이닥쳤다.
“태영 아제가 기차도 안 닿는 두메산골이어서, 보쿰 나들이가 쉽지 않을 거라구 하더니만, 여긴 정말 두메산골 다름없네. 형, 그래 신접살림 재미에 깨를 얼마나 볶았소?“
떠들썩하게 너스레를 떨며 성규가 승용차 트렁크를 열고 주섬주섬 짐을 내렸다. 십 킬로그램 들이 쌀 다섯 포, 깡통 고추장 다섯 통,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왜 된장 세 봉, 샘표 진간장 세 병, 소면 열 봉지, 새우젓 두 병, 삼양라면 두 상자에 흰 가래떡 한 뭉치까지 한국 식품을 꾸역꾸역 내려놓았다.
서독에 온 지 보름 만에 성주에게 이끌려 보쿰교회의 성탄절 예배에 참석했다가, 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서로 알게 된 태오내외와 성규를 맞이하기 위해 아래층 현관문까지 내려온 오복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이것들이 다 웬 거예요?“
“형수, 이 두메산골에는 한국 식품 파는 데도 없다고 하기에, 오는 길에 형수 서독 오신 걸 축하하는 뜻에서 싣고 왔으니, 어서 안으로 들여놓읍시다.“
반죽 좋은 성규가 오복보다 앞서 내려놓은 한국 식품들을 이 층으로 들어 날랐다.
“이사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아무리 집들이 초대를 기다려도 소식이 없기에 그냥 한번 찾아왔어요. 그래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이 박사 내외가 현모양처의 표본이라고 극구 칭찬할 만치 말이 별로 없이 다소곳한 자태에 부지런하면서도 알뜰한 작은 체구의 태오 안사람 장영옥이 생긋 웃으며 오복에게 다정스레 인사를 했다.
“예, 잘 오셨어요. 그런데 그냥 오시지 않고 뭘 이렇게 엄청나게 갖고 오셨어요?“
“이건 다 성규 조카님이 가져온 거예요. 저희는 그저 서독에서 부자 되시라고 거품 잘 나는 가루비누 두 통 달랑 들고 온 걸요.“
“다들 이렇게 고맙게 해 주시는데, 저희는 너무 멀고 차도 없어서 교회에도 못 나가고 그러네요.“
“별말씀을, 차도 없이 이 먼 데서 교회에 나오시면, 저희가 더 괴롭지요.“
태오가 듬직한 체구에서 나오는 점잖은 말씨로 오복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부활절을 성탄절로 착각한 거 아냐? 웬 선물이야? 이게 다. “
식품들을 모두 부엌에 들여놓고 거실에 둘러앉자 성주가 영문을 물었다.
“실은 우리 한마음조합에서 한국 식품 판매도 시작했거든, 그런데 지난번 조합원 회의에서 조합창립유공자인 형에게 감사의 뜻으로 한국 식품을 좀 가져다 드리자고 결정했거든, 그러니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받아줘.“
„한마음조합에서? 난 그동안 모임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아직도 조합원 자격이 있나?“
“무슨 말이 그래? 형의 연극 때문에 우리가 모여서 만든 조합이잖아. 그러니 최고 공로자는 형이지. 최고공로자를 빼놓는 단체도 있나?“
성규는 한국 식품을 싣고 온 연유를 설명하다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오복을 향하여 배를 쓰다듬으며 배고픈 시늉을 했다.
“형수, 점심밥 좀 빨리 챙겨줘유. 시동상 배고파 죽을 지경이유.“
“어마, 내 정신 좀 봐. 이 시간에 도착하려면 아직 점심 전일 텐데---.“
오복이 후다닥 일어나 부엌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뒤를 따라 영옥도 부엌으로 갔다.
“히히~! 이래야 우리 남자들끼리 이야기 좀 하지.“
성규는 싱겁게 웃고 나서 한마음조합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마음조합은 태영, 성규, 성주, 태오가 주동이 되어 연극 <사흘째 되는 날> 공연이 끝난 다음 날 태오의 집에서 태동하였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보쿰교회의 강영구 집사가 자신이 고안하여 직접 쇠를 깎아 조립한 가래떡 시계를 인수할 사람을 찾기에 성규와 태영이 합자하여 사 가지고, 인근 한인단체와 한인교회들의 행사 때마다 주문생산하는 한편, 명절 때에는 각지의 광산기숙사를 찾아다니며 가래떡을 파는 동안에 점점 수요가 늘어서, 연극 <사흘째 되는 날>의 공연이 끝난 후 출연자들을 모두 끌어들여 <한마음 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수익금을 모두 조합기금으로 적립하여 뜻있는 일에 쓴다는 것이 조합의 목적이었다.
성주는 한마음 조합 회지 창간호에, “한마음”이란, 조합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자는 한 마음(一心)아 아니라, 우리 겨레의 큰 스승이신 원효 스님께서 주창하신 한마음(一心之源)을 말한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금강삼매경>이 신라왕실에 전해졌는데, 신라왕이 이 경전의 강론을 왕실의 국사 대안 스님에게 청하자, 대안 스님이 답하기를 “저는 감히 이를 강론할 만한 학식이 없습니다. 우리 신라에서 이 경전을 강론할 능력이 있는 학자는 원효뿐이옵니다.“하고, 오늘날 국가학술회의 격인 <백고좌>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비주류인 원효 스님을 추천했다. 왕명을 받고 서라벌에 온 원효 스님은 이 강론 서두에서, “금강삼매라 함은 삼매의 가장 깊은 경지를 말함이며, 삼매라 함은 참선수행의 경지에 깊이 도달하여 흐트러짐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무릇 수행자는 금강삼매를 통하여서만 <한마음 一心之源>에 돌아갈 수 있다. 라고 풀이하셨다. 다시말해서, <한마음>은 진리를 갈구하는 수행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자성불自性佛>이니, 우리 한마음 조합원 하나하나는 모두 진리를 갈구하고, 진리를 향하여 매진하는 자성불을 그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쓴 적이 있었다. 교회식구들의 모임에 웬 부처님 이야기냐고 반발을 하는 조합원들도 있었지만, 원효 스님은 종교를 떠나서 우리 겨레의 큰 스승이라는 성주의 설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때마침 그 무렵 장 목사도 원효 스님의 가르침을 가끔 설교에 인용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한마음 조합이 한국 식품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큰 밭을 빌려서 무, 배추, 파를 생산하는 농장을 운영하겠다고 성규는 신이 나서 설명을 했다. 공동경작, 공동판매로 나오는 수익금은 모두 조합기금으로 적립하고, 나머지 농작물은 조합원 가정에 무상분배한다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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