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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1,434회 작성일 12-12-26 20:05

본문

 
영주를 배웅하고 오복과 함께 방으로 돌아오는데, 성주는 긴장이 풀리느라 몰려드는 피로감에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 피곤하다. 오늘은 일찍 자자.“
하면서 곧바로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오복이 등 뒤에서 빈정거리는 투로 한마디 던졌다.
피곤도 하시겠지.“
무슨 소리야?“
온종일 연극을 하느라고 피곤하셨겠다고---.“
연극? 무슨 연극?“
성주는 또다시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반문했다.
아빠가 오늘은 피곤하셔서 일찍 주무신다. 너희도 일찍 자거라.“
오복은 아이들 방 잠자리 단속을 한 뒤에 성주를 따라 침실로 들어와 앉았다.
참 질긴 인연도 다 있다. 그 여자가 서독에 와 있다니---“
오복이 영주를 알고 있다는 듯, 성주에게 들으라는 듯 혼잣말로 하는 소리에 누워 있던 성주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다 알고 있는데, 왜 나를 속이려고 해?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맹문이인 줄 알아?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영주 씨가 당신 첫사랑인 거 나도 알고 있으니까.“
?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걸?“
그러니 이제 실토하시지, 나 없는 두 해 동안 여기 서독에서 첫사랑 다시 만나 얼마나 좋았는지, 설마~ 당신 한국에서부터 영주 씨가 서독에 있는 줄 알고 작정하고 온 거는 아니겠지?“
아니야. 아냐, 그런 일 없어, 맹세코 없어.“
없기는 뭐가 없어? 얼마나 그 집에 가서 살았으면, 그 한나라는 애가 당신을 그렇게 따라? 꼭 아버지와 딸이던데.“
여보, 제발 짐작으로 사람 잡지 마. 첫사랑인 건 사실이지만, 당신한테 죄지은 일은 전혀 없어. 맹세해.“
성주는 어떻게든 수습을 하기 위해 결백을 주장하며 정색을 했다.
정말 결백하다고 맹세할 수 있어?“
그럼, 그렇고 말고. 결백하니까 영주가 그렇게 당당하게 찾아올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무슨 일 있었으면 어떻게 얼굴 들고 당신 있는 데를 찾아와?“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튼 냄새는 나.“
아이고 제발 믿어줘, 오라비 누이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성주는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양심에 가시가 찔렸지만, 그래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거짓말로 둘러댔다. 오히려 오복은 담담했다. 영주가 성주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투의 장난기 섞인 오복의 닦달을 받으며, 성주는 차라리 모든 걸 실토해 버릴까 하다가 그게 오복의 까닭수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마음 속에 잠을쇠를 굳게 채웠다.

성주가 서독으로 떠난 이듬해 음력 정월, 작은 집에서 제사를 드리고 설날을 함께 지내자고 해서, 삼 형제 식구들이 성주만 빼고 다 모였었다. 제사를 드린 후, 시어머니와 아들들은 안방에서 고스톱을 치고, 세 동서는 설거지를 끝내고 건넛방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다가, 둘째 동서 앨범을 구경하게 됐는데, 오래된 가족사진 한 장이 오복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성주 삼 형제와 시어머니, 그리고 시어머니 옆에 오복이 본 적이 없는 단발머리 여고생이 앉아 있었다. 오복이 “이 여자는 누구냐?“라고 물으니, 둘째 동서는 배시시 웃으면서 “형님은 모르는 것이 좋아요.“하고 딴전을 피웠다. 셋째 동서도 궁금한지 누구냐고 둘째를 닦달했다. 둘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 여고생이 아주버니의 첫사랑인데, 아주버님이 대학 입학하고, 입주가정교사로 들어간 병원 집에서 야간고등학교 다니면서 간호사로 일하던 정영주라고 일러 주었다. 시어머니가 딸이라고 하면서 귀여워했지만, 딸이 아니라 맏며느리로 받아들여 달라는 바람에 기절초풍하신 시어머니가 다시는 집에 발걸음을 못하게 했다며, 형수한테는 절대 비밀을 지키라고 애아빠가 함구령을 내렸으니, 혹시라도 나한테 들었다고 하지 말라고, 둘째는 두 동서의 입단속을 단단히 했다.

그 후 오복은 시어머니와 단둘이 일산 외삼촌 댁에 다녀올 기회가 있어서 기차를 타고 다녀오는 길에 넌지시 물었었다.
영주 씨라는 여자, 예쁘고 참하게 생겼던데, 왜 며느리로 안 삼으셨어요?“
? 네가 그 애를 어떻게 아냐?“
둘째네 앨범에 그 여자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있던데요.“
그 애들은 그 사진을 여태 갖고 있더냐?“
시어머니는 잠시 말을 잊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문을 열었다.
, 말도 말아라. 그때야 내가 얼마나 기고만장했는데. 청상과부가 고생고생해가며 삼 형제를 키웠는데, 맏아들이 줄곧 우등생으로 수재 소리 들어가며 일류대학에 척 들어갔는데, 좋은 집 딸을 며느리로 들일 생각이 왜 없었겠느냐? 영주 그 애가 참 바지런하면서도 참하고 싹싹했느니라. 인물도 그만하면 빠지지 않고, 그런데 의지가지없는 외톨토리라는 게 며느릿감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수양딸이라면 그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셈이지만, 여고생 어린 것이 굳이 맏며느리 노릇을 하겠다니 내칠 수밖에. 지금 서른이 넘었으니 어디 좋은 데로 시집가서 아이들 낳고 잘살고 있겠지. 찾을 수 있으면 찾았으면 좋겠다. 딸 삼아 오가며 살게. 참 아까운 애였는데---“
그리워하는 시어머니의 눈빛을 보며 오복은 강한 질투를 느꼈다. 속이 상해서 시어머니의 속을 떠보려고 오복은 일부러 시어머니의 아픈 구석을 찔렀다.
그런데 그 여자보다 더 못한 저는 왜 허락하셨어요?“
큰애가 군대 갔다 오더니 무슨 귀신에 씌었는지 사람이 변해서 왔더라. 월남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니 월남에 가서 살겠다고 하지를 않나, 다니던 대학에 복학도 안 하고 취직을 하더니, 때로는 직장도 안 나가고 사나흘씩 집을 나가 어디를 헤매고 다녔는지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지를 않나, 아무튼 간이 콩알만 해 지고 조마조마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던 참에, 네 큰언니가 너를 중매했는데, 뜻밖에도 너와 결혼하겠다고 하더라. 다행이다 싶었지. 결혼하고 아이들 낳으면 마음 잡겠지 하고 두말없이 그러라고 했지. 그런데 결혼하고도 마찬가지야. 그 뒤로는 네가 더 잘 알잖니? 참 사주팔자는 못 속인다더니, 애아범 어렸을 때, 내가 사는 게 하도 팍팍해서 어디 가서 점을 보았는데, 큰애는 먼 타향에서 살아야 잘 산다고 하더라. 고향에서는 무슨 살이 끼어서 되는 일도 없고 단명할 팔자라나 뭐라나. 그러더니 월남이다, 서독이다 하고 밖으로만 돌고 있잖니? 다 제 팔자이니 어쩌겠니? 너도 그런 남편하고 살 팔자려니 하고 참아 보아라,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여행길의 마음 풀림 탓인지, 평소답지 않게 시어머니는 한숨을 섞어가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오복이 시어머니의 장탄식을 들으며, 남편이 어머니에게 큰 불효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마디 더 했다.
말 나온 김에 아주 다 털어내 주마. 영주 그 애가 애아범 군대 갔을 때 강원도 인제 그 첩첩산중에 있는 부대까지 찾아와서 제대할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살자고 매달리는 걸 아범이 뿌리치고 월남으로 가버려서, 그 애가 부대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더라. 아범이 군대 가서도 부대 높은 사람 아이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나하고도 친해진 박 상사 부인이 신당동에 있는 친정집에 오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나한테 언니 언니 하면서 지냈는데, 아범 월남 간 다음에 남편이 제대해서 식구들이 모두 서울로 이사 와서 한동안 오가며 지냈는데, 그때 그러더라, 영주가 한 달 넘게 부대 근처에 방 얻어 놓고 인제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고.“
영주라는 그분, 어지간히 애 아범을 좋아했었나 봐요. 그 먼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찾아간 걸 보면.“
좋아하다 뿐이냐, 아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하늘처럼. 때로는 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질투가 날 정도로---.“
 

댓글목록

ImNebel님의 댓글

ImNebel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겨레님,안녕하세요.지금 전 저 오른쪽에서 아마도 젊으신 Überraschung님이 자꾸 제 틀린 맞춤법을 쫓아 다니는것 같아 무서워서 이쪽으로 피신 왔어요 하하하.전 이 이야기에서 정치 나오는 부분보다 이런 사적인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어요,좋아요,감사합나다.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글 쓰실 때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자신이 없으시면, 좀 귀찮기는 하지만 맞춤법 검사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교정을 보시면 됩니다.  무엇이 왜 틀렸는지 설명과 함께 교정해 주기때문에공부도 됩니다.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peller.cs.pusan.ac.kr/

triumph님의 댓글

triumph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셔요, 그럼 검사프로그램 이 있다니 앞으로 종종 쓸 수 있겠네요.
앞으로 오복의 행동처리가 기대됩니다.

ImNebel님의 댓글

ImNebel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와,감사합니다.콤퓨터에 무지라 이런것 있는줄도 몰랐네요.정말 좋으네요.그런데 댓글에서 틀린 맞춤법은 수정 할수 없나 수정란이 안보이네요.그렇지 않으면 전번에 쓴 몇개  틀린 맞춤법을 고칠수도 있으련만, 아무튼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ImNebel님의 댓글

ImNebel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미안합니다,제가 위에 또 틀린 맞춤법을 썼네요.'좋으네요' 가 아니고 '좋네요' 인데 그래도 저에게는 '좋네요' 는 좀 소리가 욕같이 들리고 '좋으네요'가 더 부드럽게 들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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