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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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528회 작성일 12-12-25 21:28본문
삼월 들어 햇볕이 따사로운 휴일을 맞아 아이들과 숲속 공터로 배드민턴이나 치러갈까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영주가 한나의 손을 잡고 찾아왔다.
“외삼촌! 외삼촌!“ 하고 달려드는 한나를 안아 올리며, 성주가 놀란 얼굴로 말도 못하고 바라보자 영주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오빠, 오래간만이야! 통 소식이 없기에 클라우젠호프의 뮐러부인에게 주소를 물어 찾아왔지. 식구들이 오고 이사까지 했으면, 이 서독땅에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불러 집들이를 해야지, 오빠는 어찌 그리 무심해?“
그러다가 성주의 뒤에 서 있는 오복과 눈이 마주치자 더욱 밝은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언니! 오빠한테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저 영주에요, 정영주. 무심한 오빠가 신접살림 재미에 푹 빠져서 토옹 소식이 없기에 물어물어 찾아왔지 뭐예요.“
“아, 그래요? 잘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오복은 뜨악하니 대답은 하면서도, 어떻게 된 거냐 하는 눈빛으로 한나를 안고 서 있는 성주를 쳐다보았다.
“아 참! 당신은 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 외가 쪽으로 친척동생되는 간호사야. 어릴 적에는 친했었는데 크면서 헤어졌다가 서독에 와서 우연히 만났어.“
성주는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얼버무렸다.
“언니, 이거 서독 오신 걸 축하하는 선물, 약소하지만 받아줘요. 우리 조카들은 어디 갔나요?“
영주는 거실에 들어와서 들고 온 선물꾸러미를 오복에게 건네주면서 아이들을 찾았다.
“웬 선물을 다---.그냥 오시지 않구---“
오복이 내키지 않는 낯빛으로 영주를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무언가 짐작이 가는 듯한 얼굴빛을 지으며 부엌으로 갔다.
“자, 앉아. 아직 거실 소파도 들여놓지 못했어. 그래, 그동안 잘 지냈어? 아이들은 이웃집 아이들과 자전거 타고 어디 놀러 갔나 봐.“
오복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성주는 계속 허둥댔다. 그 모양이 재미있는지 영주는 연신 방글대면서 물었다.
“아이들 학교는 들어갔어?“
“응, 큰애는 이학 년에 편입했고, 둘째는 유치원에 다녀. 한나는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나?“
“아니야, 내 후년이야.“
“그렇던가?“
영주가 부엌에 있는 오복을 소리쳐 불렀다.
“언니, 뭐해요? 들어오시지 않구.“
“예, 차 좀 가져 가려구요.“
오복이 끓는 물이 담긴 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인스턴트커피 병과 봉지 인삼차, 그리고 각설탕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와 영주의 맞은 편에 앉았다. 한나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성주의 무릎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나야, 외삼촌 힘드시다. 이리와 앉으렴.“
영주가 손짓해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성주의 무릎에 앉아 재롱을 떨었다.
“외삼촌, 왜 집에 안 와?“
갑작스러운 한나의 물음에 찔끔해서 성주는 영주에게 눈짓하며 한나를 영주 쪽으로 내려놓았다.
“으응, 한국에서 한나 오빠들이 와서 외삼촌이 아주 바빴단다. 나중에 외숙모하고 오빠들하고 같이 갈게.“
“오빠가 착하고 예쁜 여자다 하시더니, 정말 그러네, 언니 참 미인이시다.“
영주는 오복을 건너다보며 간살을 떨었다.
“원, 별말을 다, 그럼 내가 아가씨라고 불러야 하나? 애 아빠 누이동생이면?“
“어머! 한국에서는 남편 누이동생을 아가씨라고 불러요? 난 친오빠가 없어서 그런지, 그런 줄 몰랐네. 그런데 서른이 넘은 여자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다.“
영주가 호들갑을 떨며 오복의 호감을 사려 하는 작태가 드러나게 눈에 보여 성주는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 고마워요, 아가씨. 값이 꽤 나가는 것 같은데, 웬 비싼 화장품을 다---.“
오복이 부엌에서 선물꾸러미를 풀어보았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걸 살까 저걸 살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한국에서 나오실 때 화장품은 챙겨서 오시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한국사람들이 유럽여행 오면 제일 많이 사 간다는 랑콤 회사 영양크림 하나 하고 콤팩트 분 하나 샀어요. 크림은 얼굴 피부에 영양을 주어서 얼굴이 부드러워지고 윤이 난대요. 립스틱도 하나 살까 하다가 언니가 어떤 색을 쓰시는지 몰라서 그만뒀어요. 그건 잘못 사면 무용지물이잖아요. 동화책은 조카들 주려고---.“
영주는 끊임없이 종알댔다.
아이들이 들어오자 성주는 영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큰절로 인사드려라! 너희 고모님이시다.“
윤기와 준기가 영주에게 어른을 처음 뵙는 인사로 큰절을 하고 앉자 오복이 동화책 두 권을 가져다주었다.
“이거 고모님이 너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우와-! 그림 있는 동화책이다.“
윤기와 준기가 한 권씩 나누어 들고 책장을 펼치는 걸 곁눈으로 보니, 애니메이션 그림을 곁들인 안데르센 동화집과 그림 형제의 동화집이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드려야지.“
오복의 채근에 윤기와 준기가 벌떡 일어나 꾸벅 절을 했다.
“고모님, 고맙습니다.“
“어머, 어머, 얘들 좀 봐! 나 이런 인사는 처음 받아 봐, 아유 귀여워라.“
영주가 아이들을 덥석 끌어안고 뺨에다 번갈아가며 입맞춤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는 오복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성주는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오복과 영주가 부엌에 함께 들어가 마련한 저녁밥을 아이들과 다 함께 둘러앉아 먹은 뒤, 영주는 또 놀러 오겠다며 돌아갔다.
댓글목록
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에구, 떨려라. 오복이 눈치챈 것 같아요. 제 마음이 다 떨리네요.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초롱님, 성탄절 즐겁게 보내셨을 줄 믿습니다. 오복이는 영주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