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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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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2-21 19:23 조회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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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생 가족들과 어울려 이 집 저 집으로 돌며 떡국 잔치와 윷놀이를 하면서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떠들썩하게 지낸 후, 새해 들어 첫 토요일, 승용차가 있는 강일의 도움을 받아 성주 가족은 레데로 이사를 했다. 딩덴의 방은 삼기 연수생으로 들어와 방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던 부부에게 물려주었다.
린데만 부인의 집에 도착하니 마리아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색해하는 오복과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친동기간처럼 반겼다. 마리아가 이끄는 대로 거실에 들어서니, 유리 미닫이가 달린 아담한 장이 놓여 있고, 부부침실에는 침대와 머릿장, 그리고 전신거울이 달린 참나무 재질의 옷장이 세워져 있었다. 아이들 방에는 두 개의 침대와 소나무 재질의 작은 옷장과 책상과 의자가 각각 두 개씩, 그리고 부엌에는 불판이 네 개나 달린 전기곤로와 냉장고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닦았는지 새것이나 다름없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구석 쪽으로 네모난 식탁과 의자 네 개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 세탁기와 거실 소파는 아직 못 구했어.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구해줄 게.“
마리아가 미안한 듯 다음을 약속했다.
아니, 됐습니다. 누님, 이걸로 충분합니다. 우리 살림하는 데는 하나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누님, 나 평생 누님 은혜 잊지 않을게, 정말 고마워, 감동이야 감동!“
성주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존댓말과 남매간의 친칭을 섞어가며 마리아를 껴안으니, 마리아는 그러는 성주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천주께서 내게 보내주신 남동생인데, 내가 보살펴 주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그러면서 마리아는 옆에 엉거주춤 서 있는 오복을 끌어당겨 안고 볼에다 입을 맞추었다. 옷 가방 세 개만 덜렁 들고 이사를 들어온 성주와 오복은 완벽하게 준비된 살림살이에 감격해서 한동안 넋이 나간 듯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럼 우선 짐 정리를 하고 있어. , 갔다가 이따 세 시쯤 데리러 올 테니까, 아이들하고 외출채비를 하고 있어. 우리 집에서 환영파티가 있으니까.“
마리아는 더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서둘러 나갔다. 모든 게 거침이 없이 시원시원한 마리아의 언행에 오복은 감탄했다.
당신, 누나 하나는 참 잘 얻은 거 같아.“
하는 오복의 두 눈이 축축이 젖어들었다.
그런가 봐. 이게 웬 복인지 모르겠어.“
성주도 감격에 겨워 목소리가 잠겼다.

마리아의 차로 성주의 네 식구가 도착해 집안으로 들어서니 응접실 가득하게 들러 앉은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로 맞이했다. 마리아는 어리둥절 서 있는 성주네 식구들을 한 사람씩 소개한 다음 성주와 오복에게 둘러앉은 사람들을 앉은 차례로 소개했다. 전신전화국장인 마리아의 남편 엔팅씨와 팔순의 노모, 성주의 둘째 아들 준기와 동갑인 마리아의 외동딸 바바라, 그리고 성주의 집주인인 린데만 부인과 부인의 딸과 사위인 닌하우스 내외, 시청의 주민등록과 직원인 스테판과 코넬리아를 소개 받고 인사를 했다.
소개가 끝난 뒤, 마리아가 샴페인을 한 잔씩 따라준 후, 잔을 높이 쳐들고,
우리 레데 최초의 한국인 가족 입주를 환영한다“라고 건배를 선창했다. 모두 “환영한다. 친하게 지내자. 레데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등등의 덕담을 해주며 샴페인을 마신 후, 계피 향이 진하게 나는 케이크와 커피를 내어온 마리아가 성주와 오복의 등을 툭툭 치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둘이서 마리아를 따라가 보니, 응접실 옆방에서 윤기와 준기가 바바라와 손짓 발짓으로도 의사가 통하는지 깔깔거리며 어울려 놀고 있었다. 성주는 그 광경이 너무나 고마웠다. 어린 것들이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 와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있을까 속으로만 앓고 있었는데, 이렇게 웃고 떠들며 노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문득 오복을 바라보니 같은 생각을 했는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하염없이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런 두 사람을 돌려세우며, 힘을 내라는 듯 두 사람의 등을 토닥거렸다.
집으로 돌아와 나머지 옷가지들을 모두 챙겨 정리한 다음, 성주는 두 아들을 불러 앉혀 놓고 말했다.
, 이제부터는 열심히 독일말 공부를 하자. 윤기는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준기도 유치원에 가야 하니까, 가기 전에 우선 인사하는 말, 우리 집이 어디라는 말, 나는 한국에서 왔다 하는 말부터 배우자. 그러고 나서 책 사다가 읽는 법을 좀 배운 다음 학교에 다니자. 자신 있지?“
, 자신 있습니다.“
두 아들의 씩씩한 대꾸에 성주는 이제부터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다 하는 각오를 굳혔다.

저희끼리 떨어져 자는 것이 처음인 아이들을 위해 오복이 아이들의 방에 들어가 있는 사이, 성주는 밀린 공업수학의 복습을 하느라고 오복이 옆에 와 앉아 있는 것도 몰랐다.
천상 공부나 하고 살아야 할 사람이 어쩌다가 없는 집안에 태어나서---“
오복이 옆에서 혼잣말하며 인기척을 냈다.
애들은 잠들었어?“
혼자 자는 게 처음이어서 께끄름한가 봐, 준기는 엄마도 같이 자자구 해.”
그러겠지. 그 녀석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 젖 만지면서 자야 했잖아?“
에이- 그건 아니다. 좁은 방에서 붙어 자니까 어쩌다가 잠결에 더듬기는 했어도.“
당신 먼저 들어가 자. 난 그동안 너무 바쁘다 보니까 밀린 공부가 많아서 조금만 더 하고 들어갈게.“
혼자 들어가서 잠이 와? 내일 하고, 같이 들어가자 으응-“
그럼 그래”
성주는 책을 덮고 오복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생긴 뒤로 처음으로 누구 눈치 살필 것 없이 둘만이 오붓하게 끌어안고 가시버시의 정을 주고받는 첫날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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