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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199회 작성일 12-12-20 21:13

본문

 
다음날, 연수원 교사를 통해 클라우젠호프의 사무장 뮐러 부인의 쪽지가 성주 앞으로 왔다. 성주의 부탁으로 여기저기 네 식구가 살만한 집을 찾아보았는데, 연수원 서쪽으로 팔 킬로 미터 가량 떨어진 ‘레데’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알맞은 집이 나왔으니, 오늘 당장 레데 시청 사회과의 엔팅 부인을 찾아가라는 내용이었다. 성주는 쪽지를 연수원장에게 보여주고 허락을 받아, 오후 두 시간의 강의를 빼먹고 부지런히 자전거를 달려 레데 시청을 찾아갔다.
금발의 중년 여인 엔팅 부인은, 찾아간 성주를 반갑게 맞아, 지멘스 중앙기술연수원의 연수생이 맞느냐고 물었다. 성주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뮐러 부인에게서 듣기로는 연수가 끝나려면 앞으로 일 년 반이 남았다는데, 연수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냐고 또 물었다.
가능하다면, 여기서 직장을 구해 서독에서 살고 싶지만, 그게 안 되면 돌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성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알았다. 그러면 나와 함께 집을 보러 가자.“
엔팅 부인의 차를 타고 채 오 분도 안 가서 멈춘 곳은 복홀트에서 보르켄으로 가는 67번 국도에서 갈라진 마을 길로 십 미터 가량 들어간 곳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이층집 앞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예순 살이 넘어 보이는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린데만 부인, 이 분이 내가 추천한 한국사람 헤르 한입니다. 집을 보러 왔습니다.“
엔팅 부인이 쾌활한 말씨로 성주를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헤르 한. 들어오세요.“
린데만 부인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도 썩 달가워 하지 않는 얼굴빛으로 성주를 2층으로 안내했다.
기역자로 꺾인 복도를 따라서 작은 거실이 하나, 침실이 둘, 그리고 욕조가 달린 화장실과 부엌이 따로 있었다. 그만하면 네 식구가 살기에 넉넉했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보증금도 없이 월세가 이백오십 마르크라는 점이었다. 그 금액으로 이만한 집을 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성주가 만족해하자 엔팅 부인이 언제 이사 들어오면 좋겠냐고 린데만 부인에게 물었다. 린데만 부인은 무엇인가 한참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성탄절과 연말연시에는 집안이 분주하니까 새해 첫 토요일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나오는데 린데만 부인이 엔팅 부인을 잡고 무엇인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엔팅부인이 깔깔거리고 웃으며 성주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헤르 한은 참 운이 좋은 사람 같다. 아까 린데만 부인이 말하기를, 자기는 혼자 사니까 말벗 할 수 있는 가족이었으면 좋겠기에 외국인은 안 들여 놓을 생각이었지만, 시청 사회과에서 추천하는 사람이라 마지 못해 방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거절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막상 헤르 한을 보니까 아주 선량한 사람인 거 같아서 마음에 든다 하더라.“
엔팅 부인은 자기의 추천이 받아들여져서 기분이 아주 좋은 듯했다. 시청 앞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 성주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올라타려고 하자, 엔팅 부인이 가구는 준비됐느냐고 물었다. 성주가 우선 꼭 필요한 것만 중고품으로 사려고 하는데, 여기 레데에 중고가구점이 있느냐고 물으니, 앤팅 부인이 어깨를 으쓱대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그럴 것 같아서 준비를 좀 해 놓았지. 비록 쓰던 것이지만 새것과 다름없는 것들이니까 살 필요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성주는 자기도 모르게 천주교식의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엔팅 부인”하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막상 중고가구를 산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주말밖에 시간이 없는데다가 어디 가서 어떤 것을 사야할 지도 몰라서 실로 난감한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성주를 보면서 엔팅 부인은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헤르 한, 혹시 천주교 신자?“
지금은 아니에요. 중학생 때 천주교회에 다니면서 교리공부는 했지만, 영세는 안 받았습니다.“
여기 레데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적인 천주교도시다. 그래서 아직 여기는 개신교회가 없고, 극장도 디스코텍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술집도 몇 개 안되는 아주 경건한 도시다. 외국인이 들어와 살게 되는 건 내가 알기에는 아마도 헤르 한 가족이 처음일 것이다. 그러니 모두 관심이 대단할 것이고, 그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아까 린데만 부인처럼 첫인상이 좋으면 무한한 호의를 베푸는 인심이 있는 도시다. 하기는 하도 작아서 도시라기보다는 동네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엔팅 부인의 설명을 듣다가 성주가 말을 끊었다.
그런데 엔팅 부인, 헤르 한 대신에 ‘성주’라고 이름을 불러주면 안 될까요? 나는 누님이라고 부르고, 사실 나는 여자 형제가 없이 남동생들만 있어서 어릴 적부터 늘 누님이 한 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 이렇게 친절하게 해 주시니 꼭 누님 같은 생각이 들어서---“
성주가 서투른 독일말로 더듬거리며 어렵게 말을 꺼내자마자 엔팅 부인은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받아들였다.
! 그거 환영이야, 대환영이야. 성주!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한국사람 성주의 누님이야. 그리고 내 이름은 마리아야, 그러니 이제부터는 마리아라고 불러.“
, 마리아 누님. 정말 고맙습니다.“
야아!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야. 마음 같아서는 어디 가서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딩덴까지 자전거로 가려면, 날이 너무 어두워지면 안되니까---“
마리아는 정말 아쉬운 듯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님, 준비해 주신다는 가구는 언제쯤 가지러 가면 되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성주 이사 들어오기 전에 내가 그 집에다 다 들여놓고, 이사 들어오면 바로 쓸 수 있도록 다 해 놓을 테니까.“
? 어떻게 그렇게까지야---“
누나가 주는 첫 선물이야. 내 차가 크면 자전거를 싣고 딩덴까지 데려다 주면 좋으련만, 보다시피 차가 작아서---, 그럼,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가봐.“
그래요, 누님, 고마워요, 또 봅시다!“

성주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자전거 전용도로를 신이 나서 달렸다. 돌아올 시간이 한 시간이나 더 지나도록 소식 없는 성주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던 오복은 성주가 미처 들어서기도 전에,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 주인집 전화번호라도 적어 가지고 다니다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이라도 해야지, 사람이 왜 그리 답답하냐고 잔소리를 퍼붓다가, 좋은 집을 구했다는 대꾸에 금방 온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복이 차려 놓은 저녁 밥상 앞에 앉아, 성주는 집을 구하게 된 자초지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려주었다. 가구까지 모두 준비됐다는 성주의 이야기에 오복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고마운 사람이 있어? 당신이 이제야 복을 받기 시작하는가 봐. 그래서? 마리안가 그 여자와 누님 동생 하기로 했다구?“
, 즉석에서 대환영이라는 거야. 그리고 이사 들어가기 전에 가구 들여놓아 주는 건 누님의 첫 선물이라는 거야.“
성주가 즐거워하며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있는 사이 오복은 화장실로 가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성주가 그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을 결혼 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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