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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독일 전후사의 한 분수령, 슈피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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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라니이름으로 검색 02-03-06 21:03 조회7,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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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0/03/10  조회수 : 142

◆ 독일 전후사의 한 분수령, 슈피겔 사건

1962.10.26 저녁 슈피겔 편집인 클라우스 야코비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9시가 조금 지나서 수위가 두 사람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었던 그들은 연방경찰청의 칼 슈츠와 게르하르트 뵈덴이었다. 그들은 독일 경찰 특유의 예의를 보이면서 수색영장을 보였다. 이로서 '슈피겔 사건'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프란츠 요세프 슈트라우스(후에 CSU 당수 및 바이에른 주총리 역임)는 수년 전부터 슈피겔 발행인 루돌프 아욱슈타인과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사람은 서로 틈만 나면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던 중 62년 10월 초 슈피겔지는 나토의 추계 군사작전인 "팔렉스 62"가 끝난 후 독일군의 전력과 전략에 대해 "제한된 방어력"이라는 제하의 타이틀 기사(41호, 10.10자)를 내보냈다. 이 기사를 쓴 슈피겔지 기자 콘라드 알러스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비밀 문서 등을 참조할 수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그간 묵었던 원한까지 한꺼번에 풀 수 있는 복수의 기회를 이 기사에서 발견했다. 그리하여 연방검찰청은 10.27 슈피겔에 대해 국가기밀 누설죄와 공무원 매수죄를 적용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발행인 아욱슈타인과 기사 책임 편집인 알러스가 구금되었다. 함부르크와 본의 편집국에 대한 압수 수색이 실시되었고 몇 주간 경찰은 편집국 사무실을 점유했다.

▶ 슈피겔에 불리했던 상황

이 시기가 슈피겔에게는 매우 불리했다. 당시는 쿠바 위기가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대서양에서 미사일을 실은 소련 배가 하바나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미국은 이를 봉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가 이런 시점에서 일개 잡지의 운명에 대해 흥분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데나워 총리까지 연방하원에서 슈피겔지에 대해 "반역"의 징조를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슈피겔지는 당시 재정적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만일 이 잡지가 몇 번 발행이 안된다면 독자들은 등을 돌리고 광고도 철회될 것이다. 이는 당시 독일 유일의 시사잡지 슈피겔의 완전한 파산을 의미했다.

▶ 시민들의 항의

그러나 이러한 상황 전개 대신에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독일 전역에서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되었다. 시민들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위험에 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국가안보와 언론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되었다. 시민들이 항의하고, 예술인들이 시위하고,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해외에서도 독일 정부에 대한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 정부 내에서도 집권연정의 주니어파트너인 자민당은 62.11.19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의 사임을 전제로 새로운 연정 구성을 요구하며 자당 소속 장관들을 철수시켰다. 슈피겔 위기는 국가의 위기로 전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슈피겔 편집인 야코비는 구금에서 풀려난 뒤 함부르크 역에서 직원들의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나머지 5명의 기자도 풀려났고, 이제 슈피겔의 방어전이 시작됐다. 소위 '국가 기밀'이 사실은 전혀 기밀이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연방대법원은 재판을 열기를 거부했고, 모든 조사가 중단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연방하원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위증을 했기 때문에 62년 사임해야 했다. 슈피겔 사건을 비롯한 정치권의 동요는 결국 다음해 아데나워 총리의 사임까지 불러오고 경제장관 에르하르트가 63.10.17 후임 총리로 취임했다.

▶  68 혁명의 전초전

슈피겔 사건은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아데나워의 기민/기사연합은 2차대전 종전 후부터 그 때까지 공고하던 지도 정당으로서의 위치를 점차 잃어가게 되었다.

당시 다수 독일 국민들은 경제 부흥과 독일의 국제적 위상 상승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 국내 정치에 있어 여당의 경직된 모습, 정치 경제 사회 지역적 소수에 대한 과소평가, 보수적 복지정책, 지나친 민간자본주의적 경향, 경제적 부에 대한 과대 평가, 문화 및 교육 과제의 무시 등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이 슈피겔지 사건을 기점으로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하나의 시대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경제 기적의 시대, '수상 민주주의', 그리고 권위에 복종하는 신민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 길거리 시민들의 시대가 열렸다. 이 사건은 독일 사회가 처음으로 좌파로 무게 중심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기존의 가치가 전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1968년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는 하나의 언론이 사회와 역사 전체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 고스라니/  베를린천사 4호 9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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