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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통일 후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의사의 체험

페이지 정보

작성자 Eichhorn이름으로 검색 조회 8,877회 작성일 02-03-14 16:47

본문

작성일 : 2000/12/20  조회수 : 43 , 줄수 : 81  

한독 의학 심포지엄 99.4.2-3

통일후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한 의사의 체험

독한의학회 사무총장
Cottbus 병원 전원장
Thomas Eichhorn교수


존경하는 이 교수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장벽이 허물어지고 4년후 직장과 생활환경을 서독에서 동독으로 옮긴 의사로서 겪은 체험과 느꼈던 김상을 여러분 앞에 피력할 수 있게 해주신데 대해 우선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곳에 오늘 참석하신 몇몇 한국분들과 저는 이미 Cottbus에서부터 알고 있는데, 이분들은 스스로 동독 소재의 큰 병원에 대해 나름대로의 인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이 분들에게 특별히 안부를 여쭙는 한편 다시 뵙게 되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난날 저희들은 독일 측 대표단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극진한 대우를 받았고 또한 한국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첫인상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통일이 되면서 나타난 문제점과 그에 따른 평가에 대한 저의 견해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연설 서두에 먼저 저의 약력을 잠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부친의 가족은 동독에 있는 작센출신입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고령의노인들의 친척 방문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자연스러운 잦은 왕래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제 처의 소개로 저희는 라이프찌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알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저회 가족은 국경성이 허물어지기 일년전인 1988년에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냈습니다. 저의 직장을 동독쪽으로 정하기 이전에 저는 이미 외견상 동독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저는 이비인후과 전문의 수련을 Kleinsasser교수에게서 받았습니다. 1985년에는 Marburg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의 지도의(Oberarzt)가 되었으며 수년간 위임을 받아 이 과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교수논문(Habilitation)을 통과한 후 저는 Cottbus 사립병원의 이비인후과 과장을 공개 채용하는데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가장 동쪽에 놓여있는 인구 120,000명의 이 도시는 제가 이전에 거주하던 곳으로부터 약 500km 떨어져 폴란드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학 및 시청 소속 심의기관의 심사를 거쳐 저는 채용승인을 받았습니다. 이번 과장초빙은 거의 동독의 역사에 해당되는 40명의 세월안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생소한 지역의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엇꼬, 다른 공무원들이 행정조직에 의해 채용되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고위층이 아닌 곳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처음부터 소위 말하는 기초자본이라 할 수 있는 확실한 근본적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두번째 사실도 저의 업무 시작을 위해 과소평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병원 업무와 더불어 동시에교수 촉탁을 받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저의 책임한계를 축소시키면서도 사교상 높은 생활수준이 보장될지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과장직을 맡으면서 개인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의로 동독으로 이주한 사실 또한 과소평가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생소한 지역에서 일을 하는데 장기적으로 필요한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제 견해로는 투철한 개척정신과 그러한 모험에 대한 포용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종류의 일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키려 하는데는, 안일하게 여지껏의 일상적인 업무를 답습하는 그러한 사고구조는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좋지 않다 하겠습니다. 의학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그리고 필요한 구조개혁업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필코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독일의 다른 한 지역에서, 저는 특별히 도전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의 기독교적인 기본 관념 또한 동독행 결정에 확실히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겠습니다.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항상 지대한 관심사였습니다. 여기에서 그러한 일이 저에게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시련의 시기에 처해 있는 전체 사회에서 저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항상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저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의 시대에 저에게 주어진 이러한 임무를 수행해 나가게 된 것이 제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저는 상대적으로 의료 혜택이 좋은 서독에서 온 전문의라는데 대한 의미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고, 동독에서 맡은 새로운 임무에 대해 어떻게 계획을 세워 해 나갈까 생각하며 제 자신은 의지에 불타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왜 새 연방주에서 일을 하려는지에 대한 동기를 설명한 첫번째 연설을 들으셨습니다.즉 피상적인 관심이 저의 진로 변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생각이 적어도 유사하게 실현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Cottburg에서 제가 일을 시작했을 무렵 저는 이 병원에 온 첫번째 서독출신의사였으나 다른 직업군에서는 벌써 그들의 업무를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나름대로 첫인상을 남겼으며 그로써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의 한 표상을 인식시켰습니다.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구동독에서 일확천금을 노렸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서독에서 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거나 일부지만 동독에 와서 그 지역 주민을 사기치거나 해서 성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동독에서도 점점 그 가능성이 없어져 간다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명백해졌습니다. 허나 전체적으로 볼 때 사람들 사이에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겨났으며 불필요하게 선동을 하고 그로 인해서 양자관계가 악화되도록 부추기는 추세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들 중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개혁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고 또한 업무상 필요한 신뢰를 구축할 때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단체에서는 오늘날까지 아직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직장을 바꿀 수가 있었을까요? 헤센주와 피고용 관계에 있는 저에게 관할관청으로부터 현재 체결되어 있는 고용계약조건에서 반년간 휴가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기간 동안 과연 동독에서 일을 해도 좋을지 최종적 결정을 내리기 전에 새로운 일자리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써 모험을 감행하는데 주저하기를 최소화하기 때문에 저는 이러한 규정이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외에도 그것은 동시에 긴 견습기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와 더불어 그곳에서 직업적 전문성 내지는 대인 적응력 부족으로 채용거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저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저와 같은 상황에 있는 다른 동료들에게도 같이 적용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만, 개인적인 이유로 저는 저의 가족이 있는 거주지와 새 일터를 2년 이상 왕복 출퇴근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달에 두번정도 주말에 가족을 만나러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국격이 개방되던 첫해에는 서독의 생활수준에 그래도 어느정도 상응하는 주택이 동독에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고 또한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또한 언급되어져야 할 부분이 있는데, 제가 과거에 가볍게 여겼던 것들을 직접 겪었던 바, 절약을 해야 하고 적은 물질적 재원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하에서 많은 일들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상적인 물질에 대한 수습제한을 받을 경우 그때서야 사람들은 젖어 있던 습관과 소유물에 얼마나 집착을 하고 있으며 여지껏 누려운 생활양태에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연역적 추론으로서 여지껏 누려오던 생활수준을 이 사회에서도 그래도 윶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전혀 적합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동독측의 초빙을 수용하면서 어떠한 상황을 발견했으며 초창기에 부딪힌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의료장비의 설치 및 기구의 보급정도가 현저하게 저조하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이러한 사실을 제가 오기 이전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관련해서 말씀 드리자면, 그렇게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어떻게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는지 경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독측 동료들이 수십년간에 걸친 결핍속에서 일을 하다보니, 저희 서독 출신 의사들에게는 가히 인상적이라 할, 주목할 만한 즉흥적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또한 알 수가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제가 나름대로 평가한 이곳의 열등한 질적 수준으로는 탁월한 일처리를 할 수가 없다는 점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비인후과에서 저는 섬세함을 요구하는 부문에서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창기에 수술실에서 진부하게 다음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곤 했던 기억을 아직도 뚜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간호사, 내게 주었던 것과 같은 기주 중에 두단계 작은 것으로 줘요."

기구 공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제눈에는 아직도 해부학적으로 섬세한 구조 및 그에 적응된 업무수행과 관련해 정밀성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제가 요구했던 수준에 상당하는 기구의 도입을 위해, 적어도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 당시에 재정적인 제한은 전혀 없었습니다. 허나 반년이 지나서야 원무과의 도움으로 수술 기구류를 도입해 Marburg의 그것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섰다고 얘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로써 질적으로 동등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이 구비되었다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수의 수술환자가 생겼으나 외과 수술의 여부를 적절히 결정하면서-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저도 즉흥적인 조치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환자처치에 있어 더이상 결핍상황은 나타니지 않았습니다. 이미 강조해 설명했던 목적과 같이, 적응을 위한 첫번째 단계로서 환자진료를 위해 중요한의료장비와 의료기구의 설치 및 도입에 착수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저의 동의하에 건축상 개선되어야 할 점들은 뒤로 미뤄졌는데, 예를 들면 무엇보다도 환장듸 입원환경 정도라도 좀 더 편안하고 아늑하게 개선한다던가 위생적으로 만족할만한 조건을 실현하도록 목표를 세운다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동의 수리 및 진찰실의 신축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전체직원들을 기획 및 결정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화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저는 그 과정에서 저희들의 복안이 이상적인 설비 및 가구비치와 관련해서 확실히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역출신 동료들은 오히려 아늑하고 거실 닮은 설비와 장식에 신경을 쓰는 동안 저는 기능적이고 실질적인 설치에 더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개의 독일국가에서 각각 다른 취향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 시간이 한참 흐룬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6년의 시간을 동독에서 보낸 지금에도 가끔씩 건물관리직원에게 복도 전체에 조명등을 켜도록 하되 수명이 다된 어두운 조명뿐만 아니라 매 두번째 조명등만 꺼놓을 것을 부탁하곤 합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추상적이나마사람들의 특성이 아주 집중적으로 고착되어 있으며, 견해를 바꾸고 선회 학습하는 능력이 거대한 한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또한 제 스스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익수고해 있던 작업과정을 얼마나 고집하며, 더 좋은 지식을 거슬러 아주 어렵게 포기를 한다는 것을 늘 확인하곤 합니다. 새로운것을 도입하려는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에게 거역심리가 있다고 간주하고 불필요하게 이것을 더욱 더 내용면에서 그 사람에게 연관시킵니다. 그러나 저는 사물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질적인 특성과 일치한다고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변화는 집단의 거대한 흐름에 반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 변화를 야기시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고 또한 낡은 관습적인 것에 대해 배후에서 항상 들고 나오는 비판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겠습니다.

만약에 외부로부터 어떤 사람이 단단하게 형성된 공동체로 영입되어 이러이러하게 변화를 추구할 경우, 그룹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왜 아직도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까?" 이순간에 이들은 명예와 가치관에 손상을 받고 제안된 개혁안의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그룹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선 반대하기를 시도합니다. 두번째 단계에 가서 감정적인 요소가 극복되고 난 뒤에야 겨우 사무적인 일에 대한 협상이 진행되어진다고 보겠습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부드러운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정도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직원들에게도 정신적으로 심화가 되었다는 확신을 한 뒤에야 다음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저는 초창기에 바로 진료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과 아주 직접적인 접촉이 필요하다고 느꼇으며 늘 같이 있었습니다. 직위만 가지고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지시만 해서 수행해 나갈 수 있다고 저는 전혀 믿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적인 중재와 현장참여 그리고 앞서 가는 것만이 개개의 사고와 아이디어를 올바르게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전문적인 권위를 인정받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접근이 차차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두머리를 수용해서 관심사에 부단히 접근하면서, 계속적이고 조화로운 발전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고 봅니다.

다읔으로 저는 코트부스에서 인적 상황과 관련해서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단지 숫자상으로만 봐서는 제가 그전에 있었던 마르부르크 병원과 거의 같은 크기의 규모로서 직원 수가 약간 하회하는 정도였습니다. 이 사실은 코트부스가 대학부속병원을 보조하는 형태가 아니라 중심 의료기관으로서, 동시에 교육과 연구를 수행해 나가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제게 60 침대가 배당되었는데 현재까지 10명의 동료의사가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가까운 동료들 중에는 그 행정조직에서 일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과 어떠한 형태로도 그들과 같이 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저는 특별히 운이 좋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할 때부터 저의 제안에 매우 호감을 보였고 우수한 전문지식과 숙련도를 겸비해, 제게 이미 커다란 원조자가 된 동년배의 한 여지도의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나이가 전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의사들은 다만 천천히 제게 동조하고 있고 일부는 현재까지도 제가 희망하는 최소범주내에서도 저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동료들에게서 주로 저는 정신적인 융통성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저는 그들이 일할 때마다 올바로 수행하도록 세부사항까지 지시를 해 늘 단단히 주의를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동료들에게서 점점 향상되어 관찰되는, 그럭저럭 하는 동안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와 함께 같이 일할 수도 있는, 그래서 그들로부터 기대도 되는, 그리고 제 견지로는 그것으로써 논리적으로 얻은 귀결을 새로운 상황에 응용할 수도 있는 그러한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행동양식은 확실히 낮은 업무욕구와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크게 본 견지에서 저는 제 부서에서 겪은 경험과 관련해 의사들이 이룩한 성과에 대해 충분히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허나 제가 서독 연방주로부터 후에 초빙해온 조수의(Assistent)들 중 몇몇은 인간관계에 있어 동독에서 성장한 동료들보다 더 큰 문제를 노출하기도 했었습니다.

젊은 조수의들은 수술 분야에서도 그들이 그전에 일했던 곳에서보다 더욱 경쟁적이라고 말씀드리면서 그들에 대해 계속 언급하겠습니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그들의 역할이 요구될 때에 커다란 문제없이 극복해 나갔습니다. 후속적으로 또한 그들에게 환자를 대하는 방법 및 환자에 대한 의사의 태도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 것인지 재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외람되고 건방진 행동과 관련해, 제 부서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다고 반복해서 주의를 시켰습니다.

얼마 전부터 서독 지역 연방주에서는 재정상태의 악화와 경쟁상황의 심화로 인해 여러 직원들에게 요구사항이 많은 환자들에 대해 병원에 입원홰 있는 동안 손님으로서의 대우를 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한 변화에 대해 직원들의 행동 또한 자연스럽게 바뀌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동독의 동료들을 전반적으로 더 쉽게 이끌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독의 같은 그룹과 비교해서 개인주의적 성향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들의 업무에 대한 준비성 및 개인적인 책임감은 병원장이 가끔 요구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동료직원들의 숙련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부분적인 원인 중에, 한편으로는 동독에서는 실제로 일찍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일이 서독에서보다 근본적으로 더욱 일반화되어 있꼬,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 코트부스뿐만 아니라 구동독전체에 걸쳐 저의 고향에서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두 부부가 하루종일 일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두 부부 모두가 8시간의 직장 일과 후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을 처리할 시간이 모자라고 글호 인해서 또한 빡빡하게 시간을 쪼개서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병원 일과시간에 이어져서 개개인의 근무일과표 작성시 정시에 근무종료가 되도록 해야 하고 그래서 잔여업무는 그대로 남겨두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병원 외의연구업무에 종사하는 동료들에게도 역시 비슷한 정도로 연구할 시간이 충분하지가 않아서 때때로 그들에 대해 학문적 적성 재평가를 거부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사람들 중, 대부분 병원 내에서 여지껏 서독 출신 의사를 상사로 모시고 집중적인 접촉을 갖지 못했던 동료들과 같이 일을 할 때마다 항상 놀라워 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어떤 개혁작업이 유익하고 성공적이었는지 알았꼬 다른 한편으로는 가끔 쓸모없게 된 다른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어떻게 부드럽게 포용할 수가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내재된 문제로서, 무엇보다도 코트부스에서 저의 업무 시작 시기에 법적 규정가 관련해서 우리는 동독에서 형식상 서독의 규정에 절대적으로 따르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씁니다.구조개편을 불러왔던 아주 커다란 문제점들과 그리고 여전히 부진한 설비와 관련해서, 서독에서도 한 시긷의 불경기때 나타났던 경우처럼, 재정 편성상의 제한을 감수해야만 했던 점을 저는 매우 부3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저희가 부당하게 가끔씩 불이익을 받을 때마다 사회적 완충역할을 할 강력한 제도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매우 시급하게 필요한 재건시기에 금방 다시 갑작스럽게 절약을 해야 한다는 점은 제가 서독에서 처음 직장 생활하면서 봐왔던 지속적인 재건방식과 비교해서 들어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서독의 병원들이 살아남게 하기 위해 우리를 살벌한 경쟁속으로 몰아넣는 것보다 동등한 의학 발전을 위해 동독의 독특한 상황을 먼저 고려했더라면 했습니다. 자금할당과 관련해 일률적인 제한을 그렇게 빨리 계획하기에 앞서 체제상의 동등 상태를 기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90년대의 초반기에 양쪽의 의학시스템을 모두 경험한 저희들에게는 상부 명령중 몇몇 사항은 동독측에 부적합하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의 견해로는 건당 총액 계산 및 특별 수당에 관한 도입은 오히려 상황이 안정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이루어졌더라면 했었습니다. 동시에 저희들은 전국에 걸쳐 법에 규정 명시된 정도관리 검사를 아주 어렵게 통과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질의 기구와 장비 뿐만 아니라 그 시기에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한 직원들을 데리고 불공평한 상태에서 테스트를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곳에서는 환자들의 불평 표출이 서독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는 사실과 요즈음에야 이곳에서도 점차적으로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래도 저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희 모두가 독일어를 쓰고 있기는 하나, 40년 간의 분단 연사 속에서 저희들은 동일한 단어와 문장으로 서로 다른 내용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동독과 서독으로부터 문서화된 같은 원문조차도 내용상 다르게 해석되었던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서독출신 동료들 뿐만 아니라 저도 원무과로부터 전달된 중요한 메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해서 다르게 해석되는 서로 다른 표현방법에 대해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40년간의 문화적 영향, 더나아가서 서로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수백년간 공유해 왔던 동질성이 융화의 결정적인 고리라고 여전히 믿기는 하나, 전후 양국민들이 겪었던 서로 다른 환경적 영향력 또한 간과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양쪽 사회 내부에는 부분적이지만 아주 상이한 가치 및 표준 체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놀라우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는데, 서독에서는 전혀 배치되는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던 사실 정황이 동독에서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하곤 했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볼때 현재에도 여전히 상이한 생활형태 및 가치가 통일 후의 주된 문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허나 추구하는 목적에 대해 그 가치가 인정되고 동시에 유익하다고 생각한다면, 저희는 같이 앞으로 진일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때때로 저는 일부분이나마 동독사람들보다는 저의 미국 친구나 서유럽 친구에게서 더 커다란 본질적 동질성을 찾아내곤 그에 대해 심사숙고하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의 세계속으로 완전히 융화되기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아마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10년 내지는 15년 후에 양국민들이 무수히 섞이고 다시금 같이 긴세월을 보내고 난 뒤에야 좀더 나아보리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이전에 서독에서 맺었던 친구 우정은 오늘날에도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보며 여전히 정기적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 이 주제가, 본질적으로 더 절실하게 남북 분단을 경험한 한국이 통일이 될 경우 더욱 더 강조되어 부각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종합적으로 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행동성향과 관련, 서독에서 늘 익숙해 있던 사람들의 성향과 비교해 볼때 동독에서는 미지의 전혀 다른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편으로는 동독에도 너무나 친절하고 자율적이며 정감 넘치고 가정적인 사람이 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계산적이고 냉혹하며 미개하고 위협적이며 공격적인 인간 타입도 있습니다. 현재 독일에서는 후자의 그룹을 요주의하며 주목하고 있습니다. 제 견해로 볼 때 서독에서는 외관상 잘 조절되고 있는 단일화 절차가 동독에서는 사회 전체에서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동독 사람들은 너무나 늦은 시기에 서독의 문화적 성향과 접촉하게 되어 단지 마지막에 부분적 조류만 뒤따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눈에는 요컨대 그것이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칠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동독 사람은 아마도 표준을 찾아내는 필수적이고 정확한 판별 방법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허나 저희들은 이미 교육을 통해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가 코트부스 지역에서 서독의 평균 실업률보다 거의 세 배 더 높은 실업률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매일매일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 처해있고, 어찌할 수 없는 결과 속에서 더욱 더 물질적이고 감성이 없이 오직 기본적인 욕구 충족만을 추구하는 시민을 양산하고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예를 들어, 환경친화적 정당인 녹색당의 지지 및 기본적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일궈낸 사회조류가 동독에서는 불허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안일한 사고 및 행동 구조로부터 어느정도 긍정적인 측면을 이끌어내기에는 어려움이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그런 연유로 동독에서는 보다 더 강력하고, 살기 좋게 정돈된 국가나 그에 상응하는 공동체를 서독에서보다 빈번하게 희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서독 사람들이 선호하지만, 장단점이 있는 다수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을 현재까지 동독에서는 찾기가 힘듭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번 강연에서 서독인으로서 동독에서 생활한 저의 경험과 감상이 여러분에게 어느 정도 전달되었기 바랍니다. 그리고 수십 년간 분단되었던 두 국가의 재결합에 있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여러분들께서도 어느 정도 접했다는 점은 제게도 관심사라 하겠습니다. 더 상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을 위해 하시라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년간 저는 특별히 많은 경험을 했다 하겠습니다. 지난 날 독일이 극복해 왔고 또한 계속해서 극복해 나가야 하는 그러한 상황이 한국에서도 생긴다면, 현재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분의 파트너(북한측)와 접촉하는데 있어 사려 있고 신중하게 대처해 나가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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