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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독일통일에 있어 구동독 대학교수의 개인적인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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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berender이름으로 검색 02-03-14 16:46 조회6,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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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0/12/20  조회수 : 21 , 줄수 : 71  

로슈토 대학교 미생물학과장
H.Oberender교수

구동독 출신의 의학자이면서 DAAD의 간부회원으로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또한 무한한 영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 친절하고 극진하게 환대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리며, 한국의 아름다운 경치와 문화 및 역사에 무척 매료되었습니다. 거의 왕래를 불허하고 있는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분단된 한국에서, 독일의 통일과 더불어서 제가 오늘 여러분앞에 서게 되어 감회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같은 국적의 사람들이 강제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엄청난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곧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양측국민의 희망과 염원이 실현되길 기원드립니다.

통일과정에 있어 당면했던 문제점과 어려움을 좀더 잘 표현하고자 먼저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의 동독내 상황을 잠시 설명하고자 합니다. 서독과는 반대로 구동독에서는 극히 일부의 청소녀늘만이, 한반에 25-30명 되는데 그중 약 2-3명 정도가 대학입학 수능시험(Abitur)자격을 얻습니다. 독실한 종교적 집안의 학생들과 체제에 반대해서 비판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해온 부모의 학생들은 불이익을 받고, 노동자나 농부집안의 학생들은 특정한 혜택을 받습니다. 허나 객관적으로 볼 때 대다수의 우수한 학생들이 정규 또는 야간학교를 통해 대부분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하겠습니다. 반면 몇몇 학생들은 정치적 이유로 수준높은 교육혜택을 받기도 합니다.

탁월(ausgezeichnet)한 수능성적을 얻은 학생은 확실하게 의과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고, 매우 우수한(sehr gut) 성적을 얻은 학생 또한 의대입학 기회가 좋은 편이라고 하겠습니다. 구동독에서의 의학교육과정은 그 내용면에서 서독의 그것과 비교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대학교내의 다른 학생들고하 마찬가지로 러시아어 및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에 대한 학점을 이수해야 합니다.

의예과의 시험은 구두로 치루어집니다. 4학기 이수후에 치루어지는 제 1차의사국가고시(Physikum)s는 엄격한 선별과정을 거쳐 뽑힌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비율의 학생들은 항상 통과하지 못하는 장애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966년도까지는 12학기 이수후 모든 과목에 걸쳐 한꺼번에 치르던 국가고시가 각과목마다 따로따로 치뤄지더니 수년후에는 시험제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1967년부터는 구동독에서 Physikum을 통과하면 임상학과들에 대해서는 매학년을 이수 후에 구두시험을 일률적으로 치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실무수련의(Arzt im Praktikum) 과정에 비유될 수 있는 12개월의 의무수련의(Pflichtassistant) 과정은 1967년 졸업생부터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요사이와는 달리 새학기시작전에 재시험을 치를수가 있었기 때문에 정규 학업년수는 댑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통일과 함께 서독의 의사면허취득규정(Approbationsordnung)이 그대로 답습되었습니다. 1990/91년에 입학한 학생들은 구동독의 규정에 따라 교과과정을 이수했던 반면에, 도르트문트에 있는 중앙 입학허가심사위원회(zentrale Zulassungsstelle)로부터 새 연방주 소재의 의과대학으로 입학허가가 난 1991/92년 학생들에게는 과도기 규정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들은 Physikum까지는 구동독의 규정에 따라 공부를 했고 Physikum을 통과한 후에는 서독의 규정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험규정의 전환에 따른 선다형(multiple choice) 형태의 필기시험은 학생들을 거대한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필기시험의 객관성과 우위한 변별력에도 불구하고 새 연방주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서 제도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대학교수들이 많은 비율과 무거운 비중을 두고 구두시험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개인적인 체험과 느낌에 중점을 두어서 통일 후의 제 경험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89년 가을 로스톡(Rostock)에서 저는 더 많은 자유를 위해 국가 공안당국의 상존에 반대하는 첫번째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시위가 분단된 독일을 통일로 연결하리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첫번째 시위행진 때 저희는 불안해 했고 바로 전에 있었던 미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저는 커다란 행복감에 젖어 있었고 모든 동독국민들도 희열에 들떠 있었으며 크나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의대학부에서는 교수, 수련의 및 중간 의료진에서 선정된 대표위원회(Sprecherrat)가 구성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의학 미생물학 연구소의 바이러스학부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전임강사(Dozentin)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교수(Professor)로 칭한다는 것은 더욱 안될 말이었습니다. 대표위원회의 동료들로부터 저는 연구조교로 선출되었고 대표위원회의 회장단에 선임되었습니다. 저희들의 목적은 학부위원회(Fakultaetsrat)과 대학 평의원회(Akademischer Senat)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구성되도록 할뿐만 아니라 교수와 조교 및 비연구 직원들의 구성비율을 조교와 비연구직원들이 적게 선임되는 쪽으로 조정해서 구동독의 주변인사들이 계속해서 대학내 정책에 관여ㅏ는 것을 저지하는데 있었습니다.

대학 평의원회의 회원으로 선출된 저에게 새로 구성된 평의원 위원회(Senatskommission)의 국제문제를 담당하도록 책임이 맡겨졌습니다. 수십년간 서구세계로부터 차단된 채 살아왔던 저는 장벽이 허물어지기 몇주전인 1989년 가을에 처음으로 구동독 시민자격으로 공무수행차 특별 케이스로 DAAD의 장학금을 받아 자아르브뤼켄 대학교에 갈 수가 있었습니다. 일을 추진해 나가면서 한꺼번에 여러 연방주의 대학으로부터 온 손님들과 접할 수 있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받아왔던 제약의 영향으로 평의원 위원회의 일을 해나가는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며 지대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동시에 저희 연구소내에서도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검사실의 일이 마찰없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저희는 수준있는 의학 미생물학 분야, 다양한 진단분야에 대한 지식, 교수법상의 많은 경험 그리고 당시 동독수준을 상회하는 좋은 연구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새로운 실험방법의 도입이 불가피했으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분자생물학적 실험방법을 필요로 했습니다. 분자생물학분야는 서독측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낙후된 상태라 하겠습니다.

늘 결핍에 젖어있던 저희들에게 갑작스럽게 매일마다 회사영업사원들이 방문을 해서는, 여러가지 기구, 실험세트, 시편 등을 선보였던 일은 매우 신기한 느낌을 갖게 했었습니다. 저희들의 전연구소장님은 처음으로 한 큰회사의 영업사원을 도서관에 초대해 차를 대접하면서 모든 연구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저희들은 그가 가방에서 꺼내놓은 세포배양병, 플라스틱대롱다용도피펫 등을 보고 처음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허나 저희는 나중에 매우 비싸게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용도 피펫은 사용하기가 아주 불편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경험부족을 악용해 서독연방주 소재 대학에 납품했던 가격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을 제시했던 유명한 큰 회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면밀히 테스트와 비교를 해야 했습니다. 반면에 저희에게 충실하게 도움을 주었던 서독출신의 동료들의 고마움은 잊을 수가 없다 하겠습니다.

저희들의 실험실장비는 단계적으로 개선되어 나갔고 첫번째 실험공간이 정돈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후속 수요품이 지속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동독 소재 대학교의 대규모 연구예산 신청이 독일 연구공동체(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로부터 받아들여졌으며 장학재단으로부터도 많은 재정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되자마자 저희 학교 학생들도 즉시 장학금을 신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DAAD에 특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DAAD는 구동독정부와 자국정부간의 협정에 의해 이곳에서 장학금을 받던 외국인학생들에게 졸업때까지 대신 장학금을 지급했던 것입니다. 또한 동독출신 학생과 과학자들을 위해서 DAAD는 대학외국담당부(Akademischer Auslandsamt)와 공동으로 여러차례에 걸쳐 정보교환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도움과 원조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대학교수들에게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강의실에는 이렇다 할 슬라이드장치 하나없었고, 전문잡지도 턱없이 부족했고 의학분야에서는 -요즈음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도서관도 충분하지가 않았으며 복사기조차 없었습니다. 어쨌든 어려운 전환기 시점에 동독소재 대학의 의과대학강좌 초청을 수락한 서독측 교수들은 저희들을 존경할만 하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일은 서독측 연방주 출신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아니었고 또 현재도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현저하게 제한된 재정예산을 가지고 필요한 건물을 신축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고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저희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열악한 환경속에서 일을 해왔었는지, 그 사실을 잊어버릴 것이라는 느낌도 가끔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좋은 의사들이 양산되어 나왔습니다.

새로이 보직을 받은 교수가 특별수당없이 기본급만 동독쪽으로 갔다고 친구나 친척들이 놀라워한다는 사실은 저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러한 얘기들은 일반적인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의과대학 학부내에 교수들뿐만 아니라 연구요원들까지도 동서독간에 점차적으로 잘 융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라 하겠습니다.

의대학부내 모든 직원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점은, 경우에 따라 일자리를 잃어 버릴 수도 있다는 익숙치 않은 불안과 불확실성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대학내 다른 학부처럼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감축해야 할 필요는 없었으나 의대학부도 인원구조조정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저희는 알고 있었습니다. 1990년 6월에 대학은 의과대학 내에 4140 자리를 신청했으나 주의회는 3463자리를 승인했습니다. 1991/92 학년도 이후 의대에선 이미 88%로 줄어서 약 250자리가 아직도 없어져야 된다는 계산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채용될 자리가 결정이 나기 전에 구조조정을 통해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또다른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동료직원들은 평가사정을 받았는데, 이 평가사정은 2개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나는 명예위원회를 통한 심사였고 다른 하나는 전공에 따른 적성평가였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명예위원회는 의대학부의 회원중에서 선출했고, 개개의 동료직원은 명예위원회(Ehrenkommission)에 질의응답서를 통해 자기소속사람에 대한 진술을 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서방세계로의 여행경력, 훈포장 경력, 특전혜택경력 등이 진술되어져야 했습니다. 그외에도 국가공안기관에서 비공식으로 일한 경력에 대한 서면 해명서 및 신원조회에 대한 종의서가 요구되었습니다. 며예위원회는 업무처리에 있어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왜냐면 그들의 추천이 당사자의 차후운명을 근본적으로 좌우했습니다.

대학학부의 직원이 전문성과 관련해서 적성을 갖추고 있는지의 여부는 관련근무규정에 따라 작성된 성적표에 의해 결정됩니다.

박사학위 B(교수논문 Habilitation에 상응함)를 소지한 교수, 전임강사 및 과학자들은 교수임용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임용심사위원회는 신영방주출신 4명 그리고 구연방주 출신 4명의 교수로 구성되었습니다.의학에는 수술분야, 비수술분야 그리고 이론분야를 각각 전담하는 3개의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이 임용심사위원회는 임용신청자의 전문성과 관련한 적성을 판단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수임용은 해당직위에 대한 법적 절차 없이 이행되었습니다. 신청서에는 경력과 연구 및 논문 발표목록에 관한 사항과 서로다른 교수의 추천서 2부를 첨부해야 했는데, 구연방주 출신 교수만을 추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다년간 성공적으로 연구와 강의를 해왔떤 몇몇 교수들에게는 이러한 것이 사기를 저하시켰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임용승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과 실망을 느꼇을 것입니다.구동독시대에 이미 교수나 전임강사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의대학부에서는 더이상 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의학(Sozialmedizin)을 전공한 동료의 경우가 제게 슬픈 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그녀는 공산당원도 아니었고 다년간 오직 열심히 해서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얼마전에야 교수직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승인을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로는 그녀의 해당 분야상의 학문적 연구가 구동독에서 유난히 이데올로기적인 강제성과 제한성 아래서 이루어져 통일독일측에서 내놓은 요구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강제성하에 있지 않았던 전공분야의 또다른 두 동료들돟 교수논문을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용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전임강사를 역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문적 연구원자격으로만 계속 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어려운 조건하에서 이뤄낸 업적을 인정받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교수임용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한사람은 법적소송을 내서 승소를 했지만, 원하는 자리를 지원하는데 필요한 법원의 판결문은 너무 늦게 나왔씁니다. 하나 다른 한 사람은 후속으로 따르는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교수임용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학문적인 업적에도 붉하고 명예위원회의 권고에 의해 의대학부를 떠나야 했던 교수들의 경우는 특히 애석하다 하겠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 클리닉의 과장은 그렇게 그의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1992년에 시행된 채용사정에서는 전문지식 및 명예위원회의 추천이외에 사회적 이해도 고려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채용가능한 자리에 지원자를 모두 채울수가 없어서, 55세 이상 된 동료들에게는 사회정책상의 준정년규정(Vorruhestandsregelung)에 따를 것을 권장받았습니다.

1990년까지 총 799명의 의사, 연구원 및 교수들이 의대학부에서 일을 했고 1992년에 인수된 후로는 589명이 남았으며 1998년에 저희 학부의 의사와 연구원의 총수는 573명이었습니다.

교수 재임용시에 사회적인 존경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교수 재임용위원회(Uebernahmekommission)가 추천서를 대학 평위원회(Akademische Senat)에 제출하면 평위원회는 표결을 해서 주정부의 문화성(Kulturministerium)에 최종 결정을 신청하게 됩니다. 재임용 전에는 43명의 정규교수와 22명의 비정규 교수 및 25명의 전임강사가 있었는데, 문화성의 결정 후 1992년 10월 대학 대강당내 게시판에는 62명 굣에게 재임용이 인정 공고되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교수직위나 전임강사직위를 가진 적이 없어 직접 교수가 된 14명의 행운아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5명의 전임강사중에 19명만이 재임용되었습니다.

전체 대학교수의 수를 고려해 본다면 이것은 90명에서 71명으로 감원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우라 하겠습니다.인원조정은 1998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저ㅢ 의대학부에는 현재 60명의 교수가 재직중인데 그중 21명은 구연방주 출신입니다.

구연방주 출신의 동료교수들과는 반대로 대다수의 다른 교수들은 공무원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서독출신의 동료와는 반대로 저희들은 연금보험료, 실업보험료 및 연대할증료(Solidaritaetszuschlag)를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신연방주의 공공서비직에 책정된 월급료는 1991년 7월에 구연방주 그것의 60%였습니다. 1992년 5월에는 70%로 올랐고 1998년9월까지 점차적으로 86.5%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동독 소재의 대학에 새로이 보직을 받은 구연방주 출신의 교수들은 똑같은 경우로 구동독으로 온 구청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100%의 월급을 받았습니다. 1993년에 이러한 불평등 대우는 더이상 지속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이 채용되는 교수는 동부독일에서도 똑같이 월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소한 저희 동독인들에게는 월급자체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전과 비교해서 저희들의 생활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하겠습니다. 허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의과 대학생들에게 동독소재 대학교가 매력을 끌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지난 수년동안 확실하게 현대적인 강의실 신축, 건물의 보수, 중환자실의 증축, 수술실의 개선, 병리검사실 확장 등 장족의 발전이 있기는 했으나 계속 증가하는 재정적 수요때문에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많은 의대생들이 제 1차 국가고시후 구연방주 소재 학교로 떠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허나 교수진들의 노력으로 Rostock의대가 1997년도 시행된 국가고사에서 전독일에서 두번째로 높은 합격율을 보였으며 그러한 걱정에 대한 외견적 현상은 여지껏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 2,3차 국가고시에서는 저희 학교가 평균치에 들어 있으나 인적자원의 부족 때문에 합격율을 높인다는 것은 현재로선 어렵다 하겠습니다.

저는 동서독간에 부단한 노력을 통한 개혁이 운 좋게 잘 진행된데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고 양측에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동독인들은 짧은 시간내에 생활전반에 걸쳐 거의모두 개선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앞으로 더욱 더 커다란 변화가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이 쟁취한 자유속에는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과 기회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내적인 통일이 계속되기를 기원합니다.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양측 사이에 인도정신과 이해와 관용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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