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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녹색의 세계권력 - 1. 초기의 자연보호운동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2,485회 작성일 02-03-14 03:23

본문

작성일 : 1999/04/18 조회수 : 206 , 줄수 : 39



■ 해방의 세기: 녹색의 세계권력(슈피겔 99.3.8 Jochen Boelsche)



1. 초기의 자연보호운동 - 1969년 현대환경운동이 탄생하기 이전



haehne.jpg첫 동인은 한 여성에게서 비롯되었다.  겉치레를 좋아하는 여성들 때문에 세기전환기에 화려한 깃털을 자랑하는 극락조(Paradiesvogel)과 백로(Silberreiher)는 멸종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47살의 슈바벤지방의 Lina Haehle는 박제당한 새를 보고 충격을 받고는 1899년 2월1일 슈투트가르트의 Liederhalle에서 조류보호연맹(Bund fuer Vogelschutz: BfV)을 결성했다.  새이름을 가진 그녀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모자투쟁(Hutkampf)는 국민운동으로 승화되었고 황제조차 황후에게 깃털장식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새의 반입과 사냥금지(Einfuhr  u. AbschuBverbote)를 내렸으며 독일의 폐션계는 Lina Haehle덕분에 엄청 손실을 입었다.(gewaltig Federn lassen)



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보호단체가 창설된지 백년후인 올해 2월20일 새 애호가들은  리더할레에 모여 과거를 회고했다. 이 단체는 현재 독일자연보호연맹(Naturschutzbund Deutschland: Nabu)라는 이름으로 회원이 약 25만명인 큰 단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백주년행사는 새처럼 즐겁게 지저귀면서 자축할 기분은 아니었다.



"식물.동물종의 격감은 변함없이 드라마틱하다"고 Nabu회장 Jochen Flasbarth(37)는 백년의 조류보호역사를 결산한다. 약 2백만의 저명한 독일 자연보호.환경보호주의자들이 공동으로 펴낸 "개벽 21세기"(Aufbruch 21) 제하의 강령에서 독일최고의 조류보호가는 우울한 성적표를 매긴다. "세계적으로 환경의 위기는 모든 부문에서 제동없이 계속 되고 있다."



황제집정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은 단지 극락조의 생존을 위해서만 싸우지 않는다. 21세기의 문턱에서 환경파괴에 직면해 "인류의 자기파괴"(Selbstzerstoerung der Menschheit)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백년전통의 자연보호는 과연 공염불이었던가? 많은 "경종을 울리는 추세와 경향"에도 불구하고 Flasbarth는 반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방지가 자연.환경을 파헤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지구적 윤리"(planetarische Ethik)와 환경세(Oekosteuer)라는 캐치플레이즈를 위해 복무하는 현명한 정치가들이 필요하다.



20세기의 환경운동의 역사를 보면 체념과 신뢰 두가지에 다 근거가 있다. 일단 약 80년동안은 자연보호가들은 다른 지역에서 처럼 독일에서 미친놈이나 고립분파주의자(Sektierer)들쯤으로 놀림감이 되거나 조소 의 대상이 되고 혹은 심지어 박해를 받기도 했다. 자연보호운동은 몇세대동안이나 모든 대중운동중에서도 극락조구제와 같은 개별적인 몇몇 성공사례를 제외하면 아마도 가장 영향력이 없는 운동에 속했다.



그러나 80년대에는 환경운동은 미국, 독일 혹은 일본과 같은 고도산업국가지역에서 엄청난 정치적 영향을 가진 부문이 되었다. 그 힘은 일부 장관이나 다국적기업을 능가한다.



굴욕적인 거부의 역사와 휘황한 Success Story로서의 자연운동, 이 두가지의 독법이 다 가능한 최고의 예가 독일이다. 환경운동은 독일에서 80년대이래 수십번이나 거듭 수질, 공기와 식품 보호법을 관철하고, 독성물질을 금지시켰으며, 원자력계획을 중지시키는 성공을 거두었고, 심지어 녹색당이 콜정부를 대체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재 독일에서 녹색당출신이 부총리로 재직하고있다는 사실은 국제환경운동이 이 환경파괴의 세기가 지나고 다음세기에는 "환경의 세기"(Jahrhundert der Umwelt)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를 품게 한다. 물론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슬픈 현실이 지구의 다른 가난한 지역에서 벌어진다. 19세기말에 독일에서 자연보호운동을 태동하게끔 만든 급속한 공업화를 자연파괴가 반복된다.



1904년 베를린의 음악교수 Ernst Rudorff에 의해 창설된 "고향보호연맹(Bund

Heimatschutz)은 낭만적-반동적 정조를 가지고 있다. 이 민중적 근대화의 적대자들은 라인강상류지역에 수력발전계획을 "인류에의 범죄"(Rudorff)라고 비난했고 "모든 것을 같게 만드는"(gleichmacherisch)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해 투쟁했다.



이 당시 이미 국가적인 자연보호도 생겨났다. 1906년에 프로이센 문화부는 산하에 자연기념물관리소를 만들었다. 이것은 큰 나무나 기괴한 바위같은 개개의 대상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미국국립공원 Yosemite(1864)dhk Yellowstone(1872)을 본따 대규모의 보호구역을 만드는 것은 국가가 하지 않고 자연보호공원연맹같은 민간기구에 넘겨주었다. 이 단체는 기부금으로 36평방킬로미터의 Lueneburger Heide를 사버렸다. 고향보호가이자 프로이센의 첫 자연보호담당자 Hugo Conwentz가 자꾸만 꾸물거리자 하노버신문 편집자 Hermann Loens는 1911년 보수적 관습적인 국가의 자연보호를 비판한다. 뢴스처럼  초기 환경운동좌파들도 "자연미의 파손"를 비판한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자연보호운동의 좌파들도 깜짝 놀라 움츠러든다. 나찌는 잔인하게 자연보호가들의 모든 집을 몰수해 버렸다.



나찌는 보수적인 고향보호자들과는 별 어려움 없이 궁합을 맞추었다. Lina Haehnle의 조류보호가들도 나찌족속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지도자의 뒤를 따르렵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들중 많은이들이 진지하게 희망을 가졌다. 피와 땅을 외치는 나찌들은 기계의 반대자이며 자연의 사도이고 저주받을 현대화를 멈추게 할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나찌의 "자연보호의 이데롤로기적 도구화"는 실제로는 "실제상에서의 무시"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 나찌문양 철십자가 도처에 드리웠던 시절엔 자연파괴속도가 그 어느때보다 빨랐다.



1935년에 제국자연보호법이 발효된다. 이것은 이미 바이마르시대에 기초가 된 것이다. 그러나 노동력투입이나 고속도로 건설, 탱크기동훈련, 나찌의 자족농업지향정책에 따른 "생산투쟁"은 모든 자연을 짓밟았다. 고향보호가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나찌의 선전가 Alfred Rosenberg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내놓았다. "기술이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변질된 것이다."(Nicht, die Technik toetet alles Vitale, sondern der Mensch

ist entartet.)



조류보호제국연맹(Der Reichsbund fuer Vogelschutz)은 Obersalyberg의 지도자 소유지(히틀러소유지- 히틀러는 조류애호가였다)에 5천개의 인공새집을 공급했다. 전쟁때는 전선의 병사들이 지침규정에 따라 새새끼들에게 겨울모이를 공급했다. 이것은 후에 연맹의 역사기술자가 말했듯이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위해 환영받았다. 나찌가 자연보호를 떠맡은 것은  전쟁패배후에 이 땅에 저주처럼 흔적을 남겼다. 역사가 Sieferle가 썼듯이 '자연보호'라는 말은 동서독을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금기시되었다.



동독은 처음부터 녹색빛깔의 신념이 부흥하는 것을 탄압했다. 환경데모는 스타지가 다룰 사안에 속했다. 경제부흥의 서독에서도 이렇다 할 저항없이 강과 들판은 오염중독되었고 전원적인 풍경은 콘크리이트로 뒤덮였다. 소수의 환경주의자들은 분파주의자들로 폄하되었다. Sieferle에 따르면 대부분의 좌파들에게도 황당하게 자연보호는 "파시스트적 테마"에 속했다. 새를 죽이는 해충약에 대해 쓴 Rachel Carson의 베스트셀러 "침묵의 봄"(Der stumme Fruehling)은 1962년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자연보호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서독에서는 메아리가 없었다. "자연의 위험, 인간의 위험"(Natur in Gefahr, Mensch in Gefahr)라는 모토아래  자연보호자들의 단합집회인 1963년의 최초의 대규모 자연보호시위도 반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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