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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슈토이버는 누구인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7,030회 작성일 02-03-21 06:45

본문

♣ 2002/1/16(수) ♣ 조회:257

■ 슈토이버는 누구인가?  

독일야당 총리후보 에드문트 슈토이버

▶화려한 학창생활과 정치입문

에드문트 슈토이버(Edmund Stoiber)는 1941. 9.28일 독일 바이에른주의 작은 마을 오버라우도르프(Oberaudorf)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입대하여 독일남부의 산악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그는 뮌헨대학에 진학, 법률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졸업과 함께 1967년 제1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조교생활을 하던 그는 1971년 제2차 사법시험 합격과 법학박사학위("현실문제를 반영한 주거침입"이란 형법관련 탁월한 논문) 취득후 바이에른주 총리실 국토개발·환경문제 담당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슈토이버는 학창시절부터 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1974년 바이에른 주의회 의원에 선출된 후 오늘까지 줄곧 주의회 의원직을 고수해 오고 있다.  흥미 있는 것은 정치활동 이외에도 1978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1982년까지 복권업체의 법률고문으로도 활동했었다는 점이다.  

▶실력과 행운을 겸비한 정치총아

슈토이버는 1978년 당시 기사당 당수겸 바이에른주 총리였던 프란츠 요셉 슈트라우스(Franz Joseph Strauss, 1915-1988)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바이에른주 기사당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가 "슈트라우스를 빼다 박은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슈트라우스가 1980년 기민·기사연합에 총리후보로 나서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게 패배했지만, 당시 기사당 사무총장이던 슈토이버는 독일전역에 정치인으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슈토이버의 정치적인 스승인 슈트라우스가 1982년 헬무트 콜(Helmut Kohl)연방총리의 등장과 함께 연방정치보다는 바이에른주 정치에 몰두하게 되자, 슈토이버는 정치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높였다.  예컨대 그는 공동집권여당인 자민당의 노동시장정책, 연금정책 등 경제정책이 일관성이 없다고 강력히 비난하는 등 소신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제고시켰다.  

▶정치적 대부의 죽음과 독자적인 정치인생 추구

1988년 권력과 모사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던 슈트라우스가 사냥을 즐기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기사당과 바이에른주 정계에는 지각변동이 일었다.  당시 바이에른주 내무장관이던 슈토이버는 슈트라우스의 사망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그의 연설은 날카로워졌고, 실용주의적이며 단호한 결단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약 5년간의 바이에른주 내부장관 시절(1988-1993) 그는 치안, 외국인법, 극우주의문제 등을 주요 테마로 다루었으며, 극우정당이 부상할 경우 피해자는 기사당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한 바 있다.  특히 1992년 연방내무장관과 16개주 내무장관 회의에서 극우주의와 외국인혐오에 대처할 강력한 법률을 제정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자신의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기민당·기사당의 공조체제는 끝장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하고, 기민당의 통치력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1989년 슈토이버는 기사당 부총재겸 당기위원장이 되었으며,  명석한 판단력을 앞세워 기사당 내부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쇄신함으로써 사실상의 바이에른주 총리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 기사당총재이자 주총리이던 테오 바이겔(Theo Waigel, 헬무드 콜 내각의 재무장관)이 각종 부패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슈토이버의 영향력은 막강하게 되었다.  1993년 슈토이버는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주총리가 되었으며, 주정부내의 부패를 척결하는데 앞장섬으로써 독일전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은 슈토이버가 바이에른주를 부패와의 전쟁뿐 아니라 독일최고의 하이텍 산업중심지로 만드는 투쟁가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방차원에서 재무장관으로 활동하는 바이겔 기사당총재를 겨냥한 슈토이버 바이에른주 총리의 포탄은 그 불똥이 콜 총리에게까지 번져갔다.  슈토이버는 콜 총리의 유로화 조기도입일정에 이의를 제기하는등 정면도전 했다.  나아가 슈토이버는 1995-1996년 1년간 연방 참의원 의장을 역임하는 동안 연방과 각 주간의 재정균형제도가 개편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콜 총리의 실패와 대권에의 꿈

1998년 총선에서 헬무트 콜 연방총리는 사민당에게 참패했지만, 바이에른주에서만은 기사당이 53%라는 훌륭한 지지를 확보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콜과 슈뢰더가 벌인 전쟁에서 바이겔 기사당 총재는 콜 총리와 함께 공동패배자가 된 반면, 슈토이버 기사당 부총재는 패자중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1999년초 기사당 대의원 94%의 지지를 받아 그는 기사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슈토이버는 기사당 총재이자 바이에른주 총리가 된 것이다.

바이에른 주민들은 슈토이버가 오는 9월 총선에서 슈뢰더 현 연방총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가정생활·취미 등

카톨릭신자인 슈토이버는 1968년 결혼하여, 1남2녀(손자2명)를 두고 있다.  바이에른주에서 생산되는 승용차 BMW를 애용하는 그는 스키, 등산, 축구 관람이 취미이며, 정치인으로는 아데나우어, 케네디, 드골을, 음악인으로는 베토벤과 비틀즈를, 화가로는 고흐와 다빈치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끝.

자료제공: 베를린의 문화홍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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