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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쉰들러 2] - 쉰들러의 생애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스라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8,140회 작성일 02-03-15 02:43

본문

◆  쉰들러의 생애

▶  유태인 구명 활동

쉰들러는 1908년 4월 28일 수데텐 지방의 츠비타우에서 농기계 생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실업학교를 졸업하고 브륀의 기계제작 전문학교에서 몇 학기를 공부했다. 18세부터 그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가 경제위기 과정에서 파산하고 나서 쉰들러는 1930년 브륀의 한 회사에서 판매담당자로 근무했다. 1937-39년간 그는 브레스라우에서 독일의 스파이 방첩대를 위해 일했고 39년에는 31세의 기업가로 크라카우로 오게 된다.

크라카우에서 그는 낡은 에나멜 공장을 인수해 "독일 에나멜공장, 오스카 쉰들러, 크라카우"를 설립했으며 그 공장에서는 곧 1,200명 이상이 일하게 된다. 1940년에 이 공장은 전쟁에 있어 중요하다는 등급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쉰들러는 폴란드에서 체포된 사람들을 노동자로 투입할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나치에게 1,200명의 폴란드 노동력을 요구했는데, 그중 600명은 유태인이었다. 이들은 크라카우의 게토 출신으로 매일 쉰들러의 공장으로 출퇴근했다.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업가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게토가 1943년 해체되었을 때 쉰들러는 크라카우-플라스초브 강제수용소 간부들을 장식품, 돈, 술로 구워삶아서 자신의 노동자들이 계속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몇 개월간은 이러한 일들이 쉽게 이루어졌지만 그 후에 강제수용소 소장 아몬 괴트는 유태인들이 강제수용소와 쉰들러의 공장을 출퇴근하며 일하는 것을 금지했다. 쉰들러는 자신의 노동수용소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시 나치들을 매수해 강제수용소로부터 유태인 1천명을 자신의 공장에 만들어진 노동수용소를 위해 얻어낼 수 있었고 이밖에 추가로 유태인 4백명을 더 요구한다. 세 번에 걸쳐 그는 유태인 보호자이자 협력자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다. 그러나 이때마다 그와 친분이 있는 독일군 장교들이 그를 도와서 풀려나게 해준다.

크라카우-플라스초브 수용소가 1944년 동부전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해체되자, 쉰들러와 '쉰들러 유태인'의 상황은 절망적이 되어갔다. 이곳 강제수용소와 쉰들러의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유태인들이 가스실 행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쉰들러는 자신의 회계 담당자인 이착 슈테른(Izak Stern)과 상의, 공장을 수데텐 지방의 브륀리츠로 옮길 것을 결정했고, 유태인 노동자들을 모두 데려가기로 했다. 몇 시간동안 슈테른은 이미 가스실 행이 결정되어 있는 유태인들의 명단을 작성했고 이것이 쉰들러 리스트이다.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쉰들러는 다시 한번 나치 간부들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상당부분을 투여해 매수했다.

쉰들러는 수데텐 지방을 담당하고 있는 라이헨베르크의 나치 지방장관을 매수해 유태인들의 노동 금지령을 철회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공장 설비들을 판매해 구한 보석과 금을 이용해, 9백명의 유태인을 석방시켜 브륀리츠로 데려갈 수 있도록 그로스-로젠 강제수용소 간부들을 매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나머지 재산을 여비서를 시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소장에게 보냈다. 이 소장은 이전에 만날 때 이 여비서에게 눈독을 들였었는데, 그녀는 쉰들러의 돈과 금을 가지고 불가능한 일을 성사시켜냈다. 그녀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3백명의 여성들을 브륀리츠로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몇 개월전에 쉰들러는 심한 병에 걸려 가축을 수송하는 기차에 실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120명의 유태인을 구해낼 수 있었다. 쉰들러는 노동자 공급을 요청해 나치로부터 이 기차의 유태인들을 얻을 수 있었다.

▶ 전후 행적

스필버그의 영화와 이 영화의 근간이 된 호주 작가 토마스 키넬리(Thomas Keneally)의 책도 쉰들러의 2차대전 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있다. 알려진 것은 쉰들러가 1962년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의인의 거리'에 기념식수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나 그가 그로부터 4년후에야 연방공헌십자 훈장(Bundesverdienstkreuz)을 수여받았다는 사실이며 그 이후 2년 간 헤센주와 당시 연방대통령 하인리히 뤼프케로부터 적은 금액의 명예연금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그가 여론의 관심을 끌기 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유태인의 구조자는 전쟁 후 어떻게 살았고 그 자신은 그가 전쟁 중에 했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

이번에 발견된 여행가방은 그의 전후 삶을 재구성해 볼 수 있는 정보들을 제공한다.이는 비록 파편적 정보들이지만 그의 삶을 모자이크 식으로 만들어볼 수 있다. 이러한 모자이크에 따르면 오스카 쉰들러는 크라카우와 브륀리츠에서의 활동이 그의 나중의 생애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 후 그는 '보호자'로부터 그의 유태인들로부터 보호받는 입장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이들 유태인으로부터 재정적 곤란을 어느정도 타개해 갈 수 있었고 심리적 안정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그와 함께 이 역사를 영화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오스카 쉰들러 생존자 기금(Oskar Schindler Survivors Fund)를 설립해 그를 도왔다.

쉰들러는 1945년 이후 여러 방식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다. 그는 이미 전쟁 중에 헝가리에서 유태인 배급 연합위원회(Joint Jewish Distribution Committee)와 접촉을 가졌었는데, 이 위원회가 전쟁 후 몇 년 간 쉰들러 부부를 도왔다. 쉰들러는 40년대 말에 아르헨티나에서 모피 생산을 위한 비버 사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50년대 중반에 쉰들러는 독일로 돌아와 신발, 플라스틱 제품 생산자, 음료수 도매상, 시멘트 공장 운영 등에 종사했다. 쉰들러는 1953년에 '부채 조정(전시에 받은 손해 조정 절차)'을 신청했으나 이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행위를 영화화시켜 사회적 인정과 지원을 받으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951년에 이미 독일의 프리츠 랑 감독이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60년대 초에 가서야 메트로-골드윈-마이어와 함께 진지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폴란드 유태인과의 법정투쟁으로 그는 많은 재산을 잃어 버렸다. 폴란드 유태인들은 그가 에나멜 공장을 독일군의 무력 하에서 강제수용했다고 비난했다. 쉰들러는 '쉰들러 유태인'들과 함께 이에 대응했다. 그는 또한 전후 독일에서 그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육체적 공격을 견뎌내야 했다.

쉰들러는 전쟁이 끝나는 날 자신의 유태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한 바 있다. "나는 당신들이 인간적이고 정의롭게 행동하기를 간청합니다. (나치에 대한) 판결과 복수는 이에 대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남겨놓도록 합시다"라고.

불과 몇 년 후에 그는 파시즘 후의 정의로운 독일이라는 그의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1948년에 그는 유태인 A. J. Levy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의 독일에는 네오 나치즘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종 동구로부터 스며들어오는 나치 공산주의의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그리고 반유태주의는 오늘날 2차대전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 고스라니(gosrani@berlinreport.com)  ◀
베를린천사 1999년 11월 1일 제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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