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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히틀러: 긴 그림자를 가진 악마와의 계약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경래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7,289회 작성일 02-03-15 09:19

본문

◆ 긴 그림자를 가진 악마와의 계약

hitler.jpg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아돌프 히틀러를 신봉하는가? 제국의 신화와 지도자의 신화가 독일민족을 사로잡았다. 비나찌주의자들, 학식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직자들 조차 베르사이유 조약과 맑시즘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해 반대하였고 독일인들은 몰락하였다..

히틀러는 얼마 전에야 비로소 죽었다. 왜냐하면 독일인들에게 경이로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37년 이후로 제네바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는 망명자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는 전후 직후인 1945년 출판된 「독일의 문제(Die deutsche Frage)」라는 책을 통해 가해자인 독일인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는 '독일인들은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물이었다', '폭력적인 집단 체면을 처음으로 극복한 사람들이다', '전후 독일인들에게 최악의 운명인 승전국의 통치를 감당해야만 했다'고 서술하였다.

뢰프케의 이러한 독일 현대사 해석은 아데나우어(Konard Adenauer) 시대에 대한 삶의 환상으로 되었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만약 이러한 자기 기만이 없었다면 경제성장의 기적이나  독일연방의 성공적인 역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히틀러 처럼 단지 대중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독일인들에게 인기있었던 정치가는 결코 없었다. 히틀러와 그에 의해 건설된 독일간에는 국민들의 고통을 유보할 수 있는 어떤 깊은 동의가 있었던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은 1945년 5월 독일과 독일인들에 관한 자신의 연설에서 이를 파우스트와 메피스토간의 계약에 비유하였다.

유대인의 말살에 대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독일의 정치문화에 반유대주의가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독일인들의 대다수는 나찌의 유대인에 대한 살인 앞에서 뒤로 물러섰다. 나찌의 휘장만을 사용하며 제국의 깃발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든 1935년의 뉘른베르크 법률(N rnberger Gesetz)에 대한 저항은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국적박탈에 관한 이 법률의 핵심에 대해서는 단지 소수의 독일인들만이 반대를 하였다. 히틀러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에서도 유대인 해방에 반하는 행위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었다.

히틀러에게 있어 반유대주의는 성공의 비결도 방해물도 아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년에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선전활동의 전면에 체제, 정당, 맑시즘, 베르사이유 조약과 그에 따른 배상에 대한 투쟁을 내세웠다.      

1930년 혼란에 허덕이고 있는 의회민주주의가 한 사람만이 단독으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체계로 전환되었을 때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한편으로 국민들에게 제1차세계대전의 패배이후 생겨난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호소하였다. 다른 한편, 이를 통해 히틀러는 무력화된 민족의 변호인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일인에 의해 단독 결정권을 갖는 체제로 인해 자신들의 문서화된 참정권을 빼앗긴 국민의 변호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1930년대 초 정치와 경제의 위기로부터 정치적으로 최대의 다수가 되는데 있어 그 책임을 극좌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당시 히틀러의 편에 있었던 사람들은 독점자본이 아니라 시민전쟁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독일공산당(KPD)은 계속적으로 이를 부채질 하였다.

1932년 11월 6일의 두 번째 제국의회 선거에서 나찌주의자들은 2백만표 이상과 그들의 230석의 제국의회 의석중 34석을 잃었다. 그에 반해 공산주의자들은 6백5십만표 이상을 추가로 획득하였고, 그 당시까지 89석이었던 의석을 100석으로 확대활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히틀러의 패배로 간주하였으나 이는 성급한 판단이었다. 히틀러의 이러한 패배와 공산당의 성공은 이후 그에게 아주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실업률이 절정에 달했던 1932년 말과 1933년 초에 재차 실시된 선거에서 독일공산당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10월혁명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기업가 그리고 대토지 소유자들을 공포로 몰아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최고 군사령부의 힌덴부르크(Hindenburg)는 이러한 국가의 위기로부터 탈출하는데 있어 보수적인 정치가들에 의해 제한을 받는 제국의 수상으로 히틀러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의회의 해산과 새로운 선거를 1933년 가을까지 유예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러한 위기 해결책은 제국의회의 해산 이후 60일 이내에 새로운 선거를 해야한다는 제국의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었고, 히틀러를 새로운 제국의회의 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제국의회의 수상은 헌법에 충실한 자신의 정적들을 무력화시키며 공무원들과 제국 군대의 충성을 확실하게 하는 방법으로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였다.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이후 말하고 행동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독일국민의 대다수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당이 조롱의 대상으로 되면서 의회민주주의는 좌절되었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기억은 모든 독일인들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

30개가 넘은 정당을 독일밖으로 쫓아낸 히틀러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와 빵을 약속하였다. 또한 그는 실업자들에게 계급투쟁 대신 민족공동체 의식을 일깨웠고 위대한, 명예로운, 강력한 그리고 영광스러운, 정의로운 새로운 독일제국을 맹세하였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민족독일을 말하였다.

제국은 히틀러와 그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의 교량이었다. 당시 시사평론가인 발데마르 구리안(Waldemar Gurian)은 제국은 독일국내, 국외정책의 구호로 되어야 하며 베르사이유 조약과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제국을 독일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개념은 1930년대 초 독일에서는 새로운 르레상스를 맞이하였다. 공화국의 정치적 가치가 낮아질수록 제국의 정치적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따라서 국민들에게서 제국에 대한 지지는 높아졌으며, 이는 대독일의 건설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100년 정도 뒤늦게 민족국가를 건설하였다. 독일의 제국을 주장하는 우익 이론가들은 이 양국에 의해 독일의 민족국가 건설이 늦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또한 독일제국을 유럽의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국가로, 또한 볼셰비즘의 저지자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히틀러는 1934년 10월 뉘른베르크의 제국전당대회에서 "이제 우리 민족은 유럽의 번영 그리고 유럽의 문화를 붕괴시키는 밀물의 방파제이다"라고 연설하였다.

2년 뒤 히틀러는 같은 장소에서 스페인의 시민전쟁을 악의 시기가 도래하는 신호라고 선전하면서 "그리스도교의 2000년의 역사가 끝나가는 이 시기의 가장 커다란 세계적 위험에 대해 우리는 수년동안 알려왔고 그것이 무서운 현실로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잔악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은 무장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라인란트(Rheinladn) 비무장 지대를 점령하였다. 3주 뒤 독일인들의 98.8%는 히틀러를 위한 제국의회 선거에서 그에게 찬성표를 보냈다. 다시금 2년 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였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독일인들의 히틀러에 대한 열광은 끝이 없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다른 서구세력의 개입없이 독일의 이러한 불의의 습격이 성공하는 동안 독일의 학식있는 사람들은 나찌의 이론가들로 활동하였다. 우익적 성향의 역가인 칼 고트프리트 후겔만(Karl Gottfried Hugelmann)은 체코민족이 위대한 독일제국에 가입한 것이 제국의 의미상 정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독일인들의 다수가 원하지 않았다면 2차세계대전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나찌 독일군대의 급속한 승리에 기뻐하였다. 더욱이 1940년 6월 14일 파리를 싸움없이 점령하였을 때 독일인들의 기쁨은 그 극에 달하였다. 이해 여름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1918년 패배의 굴욕에서 독일을 해방시킨 인물로서 생각하였다.

독일학계의 히틀러에 대한 환호가 평범한 독일인들보다 덜 한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와 그의 나찌주의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던 역사학자 프리트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같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도 다른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쁨, 경이로움 그리고 군대에 대한 자부심이 나를 지배한다. 더욱이 슈트라스부르크(Stra burg)를 되찾은 것에 어찌 가슴이 두군거리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이 시기에 또 다른 역사학자는 독일의 전쟁개시에 대해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들추어 내었다. 괴벨(Goebbel)에 의해 출판되어진 「제국」이라는 잡지에서 페터 리카르트 로덴(Peter Richard Rohden)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특별한 사명에 대해 알리고 있다. 그에 의하면 억압과 착취가 아닌 정의로움과 평화를 목표로하는 진정한 제국적 질서의 관리자는 단지 게르만 민족과 로만 민족의 공간내에 있는 이탈리아와 독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940년 12월 이후 준비되어 1941년 6월22일 실행에 옮긴 소련에 대한 습격에 대해 하노버의 신교 주감독인 아우구스트 마라렌(August Marahren)은  "우리민족과 유럽의 민족들이 모든 질서와 서양의 기독교적 문화의 적대자들에 대한 전투를 호소" 한 히틀러에게 감사하였다. 아이히슈퇴트(Eichst tt)의 로마-카톨릭교회의 주교인 미하엘 라클(Michael Rackl)은 소련과의 전쟁을 십자군전쟁에 비유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신성한 전쟁, 신앙과 교회를 위한 전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위한 전쟁이라고 하였다. 정신병자들의 학살에 대해 그당시 다양하게 반대했던 뮌스터(M nster)의 주교인 클레멘스 아우구스트(Clemens August)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1941년 10월 14일의 주교교서에서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유대인과 볼셰비스인들의 권력에 관한 히틀러의 말을 인용하면서 1939년 8월에 체결된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간의 상호불가침조약은 6월 22일 소멸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독일의 역사학계는 볼셰비즘과의 결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제국을 신의 부름이며 그로 인해 신성한 역사적인 사명의 관리자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1941년 이후 새로이 개교된 제국대학(Reichsuniversit t)의 교수로 있었던 헤르만 하임펠(Hermann Heimpel)은 이것이 바로 독일제국의 역사적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독일 나찌 친위대의 교육과정에서 두명의 명망있는 중세역사가인 헤르베르트 그룬트만(Herbert Grundmann)과 프리츠 뢰리히(Fritz R rig)는 왜 단지 독일제국만이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모든 유럽의 성전에서 그 선두에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선전하였다. 독일 중세기사단의 역사에 정통한 에리히 마쉬케(Erich Maschke)는 일반 국민들을 위해 제작된 책자에서 단지 독일인들만이 유럽의 운명과 문화를 연결시킬 수 있으며 그러한 것이 현재와 미래를 위한 독일인의 과제라고 말하였다. 현대사 연구가인 라인아르트 비트람(Reinhard Wittram)은 독일인은 새로운 질서를 현실화시키며 이를 통해 유럽을 다시금 하나의 전체로 만들 수 있는 유럽의 군인이라고 설명하였다.

학자들의 이러한 행태들은 기회주의적인 환심사기가 아니었다. 학자들은 위대한 독일제국의 지도자에게 자신들의 지식과 믿음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독일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이들 학자들과 히틀러 사이에는 어떤 친화력이 생겨났다. 이러한 친화력은 소비에트연방의 침입만이 아니라 볼셸비즘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로까지 이어졌다.

히틀러에 대한 지도자의 신화는 많은 것들을 억누르고 있었으며 이러한 신화를 영향력을 갖고 있어 히틀러 정권은 적은 수의 첩보원으로 충분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과는 달리 전쟁 중 독일인들이 굶주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또한 이러한 지도자 신화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점령지에서의 무자비한 수탈로 독일내에서는 1916 - 17년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이 반복되지 않았다.

배반 그리고 패배를 뜻하는 1918년 11월이 다시는 존재할 수 없다는 히틀러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그의 정권은 독일의 노동자들에게 독일 백인종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달하기 위해 모든 물질적, 선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인종적 자극의 그 정반대에는 허위의 인종적 증오가 있었다. 히틀러가 독일인들 앞에서 유대인 말살을 비밀로 했었다고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유럽지역에서 유대인 말살계획의 세부사항을 독일인들이 알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1941년 미국의 참전과 함께 세계대전으로 변한 이후 최소한 독일의 점령지역에서 유대인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즉 히틀러는 1942년 1월 30일 정권 9주년 행사에서 "우리 모두는 이 전쟁은 아리아민족이 절멸되거나 또는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사라졌을 때 끝날 수 있다"고 명백하게 밝혔다. 또한 히틀러는 최악의 적이 천년동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타도할 시기가 왔다고 연설하였다. 그러면서 요한계시록의 20장을 독일인들이 최후의 심판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위임받았다고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히틀러의 제3국이 망하기 직전에야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히틀러에 대해 잘못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신은 우리들에게 지도자를 보냈는데 이는 우리 독일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독일을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이 당시 일반인들에게 공개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의 제국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제3제국에 의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제국의 신화는 지도자의 신화에 의해 그 의미가 변절되었다.

독일인들이 싫건 좋건간에 히틀러와 연계되어 행하였던 문제에 대해 어느 누구도 토마스 만(Thomas Mann)의 '독일과 독일인'에 관한 연설보다 심도 있는 대받을 할 수 없다. 토마스 만은 1933년의 악마와의 계약에 대한 마지막 근거를 독일인들이 극복할 수 없는 중세에서 찿았다. 토마스 만에 의하면 성공적인 혁명에 대해 반추해 보았던 서구의 다른 민족들과 달리 독일인들은 결코 내부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독일인들에게 있어 자유의 개념은 항상 외부로 그 방향이 향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유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단지 독일인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독일인들에게 있어 자유의 개념은 군국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찌주의는 자유롭지 못한 민족에 의해 전세계를 노예화하겠다는 개념을 더욱 증폭시킨 것이다.

히틀러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그를 위해 사용되어진 독일의 신화들은 그에 의해 파괴되었다. 히틀러의 몰락으로 독일인들은 점차적으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즉 독일은 그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히틀러는 단지 독일의 신화만을 파괴한 것이 아니다. 그와 나찌주의는 지난 독일의 역사에 관한 자유로운 견해를 막아 버리는 강력한 바위와 같은 독일의 신화로 되었다.

통일 이후의 새로운 베를린 공화국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과거의 잔재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만약 새로운 공화국이 이러한 것을 한다면 독일 역사의 단절과 영속성은 지금보다 더욱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독일인들이 진정 유럽으로 가고자 한다면 그들은 알아야만 한다. 그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지금보다 더 용기 있게 제기한다면 그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1933년 악마와 계약을 맺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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