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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베를린 장벽 설치의 정치적 배경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시습이름으로 검색 조회 9,294회 작성일 02-03-15 02:49

본문

◆ 베를린 장벽 설치의 정치적 배경

▶ 58년까지의 상황
▶ 58년 이후 새 국면
▶ 소련의 최후 통첩
▶ 4개국 외상회담
▶ 독일 국내정치 상황
▶ 미 세계전략 변화
▶ 장벽 건설의 전야
▶ 장벽 건설 D데이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는 동서독에 분단 정부가 들어선지 10여년 만에 이루어졌다. 이는 10여년간의 양독의 통일과 긴장 완화 노력이 일단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 58년까지의 상황

50년대말 서독과 서방 강대국들은 독일 통일 노력과 병행해서만 군축과 유럽 안보가 진전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동독과 소련은 유럽 안보 문제와 '긴장 완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1956.3.23 로마조약으로 유럽경제공동체(EWG)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가운데 유럽의 정치적 통합도 장기적으로 진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서독의 비중이 나토와 이를 넘어서는 범위에서 점차 증가되었다. 1952년 서독-이스라엘 배상협약으로 서독의 도덕적 입장이 강화되었고, 이스라엘이 공식 외교관계를 포기, 서독-아랍권 우호관계도 손상되지 않을 수 있었다.

동독이 소련의 '위성 국가'로 동구에서만 머물러 있는 동안 서독 총리와 대통령의 잦은 해외 방문은 서독의 국제적 위상은 날로 높아졌다. 또한 아데나워의 국내 정치적 위상은 1957년 총선에서 CDU/CSU가 과반수 득표(50.2%)를 기록해 절정에 달했다. ◀  ▲

▶ 58년 이후 새 국면

1958년부터 '독일 문제'를 둘러싸고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미국은 '견고한 억제 전략'을 채택, 서독군을 서방의 '방패'로 삼는다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고,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봉기로 인해 한결 더 독일 문제에 있어 소극적 태도를 보여 양독이 분단 이전으로 돌아가는 시나리오는 거의 희망이 없어졌다.

또한 56년 10월 수에즈 운하 사건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점점더 미국으로부터 독립적 정책을 펴나갔으며, 동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를 포함해 중부 유럽에 '반핵 지대'를 만들자는 계획과 이와 관련해 동독의 여러 가지 '양독 연합 계획'이 아데나워 정부로부터는 거부되었으나 독일 SPD를 비롯해 서방 국가 여론의 호의적 반응을 얻었다.

서독 하원이 58.7.2 만장일치로 승전 4개국(미,소,영,프)이 동독의 이러한 양독 연합 제안에 대해 검토하는 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도록 독일 정부가 적극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독일 정부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 소련과의 직접 접촉을 강화해 독일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고 했다. 이는 주로 오스트리아 방식을 동독에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국가통일 대신 '인간적 고통의 경감'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흐루시쵸프에 보낸 특사는 결국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는 소련이 양독 간의 평화조약 체결과 서독군의 핵무기 포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  ▲

▶ 소련의 최후 통첩

서방의 독일 정책은 흐루시쵸프가 1958년 11월 베를린 최후통첩을 내걸어 서방의 약점을 찌르자 그 한계에 부딪혔다. 58.11.27 소련은 EAC 합의(44.9.12) 와 이에 결부되는 개별 협약들이 독일 항복 직후 몇 년 간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다.

소련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통합과 동독 소속을 주장했다. 소련은 서베를린 시민의 재산권과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통합 베를린을 자치권을 가진 자유도시로 설정할 것이며 동서독 모두 이 자유도시에 대해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소련은 향후 6개월간 미,영,프의 서베를린-서독 지역 간의 군사적 수송을 현 상태대로 방치할 것이지만, 이 기간 중 모든 당사자들이 국제적 긴장 완화를 위해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소련과 동독이 협약을 통해 준비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조치에는 동독이 자신의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지역, 즉 서베를린까지 자신의 주권하에 두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방 승전 3개국은 소련의 이 선언에 대해 1달간 서로 상이한 입장을 보이다가 58.12.31 이 최후통첩 거부를 선언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3개국은 아데나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측이 이 선언의 최후통첩적 성격을 철회한다면 베를린 문제를 전체적인 독일 문제와 유럽 안보 문제의 틀 안에서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흐루시쵸프는 59.1.10 양독 평화조약 제안으로 답하는데, 여기에는 스탈린이 52년 주장한 대로 독일의 중립국화와 독일과 폴란드 국경을 오데르-나이세 강으로 확정하는 것을 포함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제안과는 달리 흐루시쵸프는 평화조약이 동서독 정부 간에 체결되고 통일 문제를 양독 정부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점을 못박았다.

소련의 단호한 강공에 비해 서방 승전국들의 전열은 흐트러져 있었다. 흐루시쵸프가 심지어 서방 수도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위협하던 이러한 긴장의 절정에서 맥밀란 영국 총리가 5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59년 3월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6개월 시한이 지나기 전에 4개 승전국은 동서독 옵서버가 참여하는 가운데 4개국 외무장관 회담을 여는데 합의했다.  ◀  ▲

▶ 4개국 외상회담

아데나워는 4개국 외무장관 회담에 반대했다. 그가 서방 강대국에 대해 지니는 영향력은 58년 이후 미국의 새로운 정책 등으로 인해 53-55년의 워싱턴-본 '주축' 시대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아데나워는 베를린에 대한 승전 4개국 지배 유지가 서독 정치 안정의 전제조건이며,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만이 소련의 세계 지배 야욕을 억제할 수 잇다고 믿었다. 그는 서베를린을 적의 영향력 하에 들어간 '창 끝'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소련측에 유리하게 전개된 힘의 역학관계 변화 때문에 이제 아데나워는 더 이상 '중부유럽 해방'을 주장하지 못하고 단지 서베를린 유지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힘의 정치'에서 수세로 몰린 아데나워는 당시 테오도르 호이스 연방대통령이 3선 출마를 포기하자 자신이 대통령으로 출마하겠다고 나서는 패착을 범하기도 했다. 대통령으로서 보다 더 강력하게 서독 외교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아데나워 총리는 불과 몇 주후 이 계획을 철회했는데, 이는 국민들이 처음으로 그의 동요를 인식하게 된 계기이다. 57.7.1 농업장관 하인리히 뤼프케를 연방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이러한 곤란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제네바 외상회담(59.5.11-8.5)은 처음부터 교착 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여전히 독일 문제의 단계적 해결과 그 첫단계로 자유 선거 실시를 주장했다. 미국은 전국적 자유 선거를 통한 동서독의 '대통일' 이전에 역시 자유선거를 통한 동서 베를린의 '소통일'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소련 역시 기존의 평화조약 제안에 머물렀다. 이제 문제는 서방이 외상회담 결렬을 선언할 것이냐, 아니면 베를린 문제를 독립적으로 다루어 회담을 풀어나갈 것이냐는 것이었다.

6.1부터 시작된 비밀 협상에서 서방은 처음으로 베를린 문제를 따로 나누어 다루어 나갈 것을 용인했다. 이것이 55년 이후 독일 문제 논의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와 관련한 서방의 구체적인 제안을 소련은 거부했으나, 미국에서의 아이젠하워-흐루시쵸프 회담(캠프 데이비드 회동(59.9.26-27))이 합의됨으로서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해 나갈 길이 열렸다.  ◀  ▲

▶ 독일 국내정치 상황

소련의 최후통첩으로 야기된 신 베를린 위기(1차 베를린 위기는 1948/49년)는 서독 국민들에게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위기 전에 아데나워 정부는 57년 총선 압승을 통해 정국 안정을 이루었다. 루드비히 에어하르트의 '사회 시장경제' 정책 성공으로 인한 국민들의 부의 증가로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야당 SPD의 비판은 효력을 잃었다.

SPD는 59.11.15 역사적인 '고데스베르거 강령'을 통해 이제까지의 '노동자 정당'에서 '국민 정당'으로의 변신을 꾀했다. 이제 SPD는 1949년 이후로 서독 정부가 펴온 복지 및 경제 정책에 대해 동의했으며, 외교 정책과 군사 정책에 있어서도 1960.6.30 소속 의원들의 하원 연설을 통해 서독이 나토 회원국 지위를 통해 서방에 결속되는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독 정당들의 정책 방향 일치는 하필이면 서방의 독일 정책이 위기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또한 1960년 봄 동독의 농업 집단화는 동서독 사회의 간극을 더욱 벌려놓았다.  ◀  ▲

▶  미 세계전략 변화

캠프 데이비드 회동으로 이루어진 베를린 위기의 짧은 휴지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60년 초부터 흐루시쵸프는 다시금 소련-동독의 별도 평화조약을 체결하겠다고 위협했고, 60.5.16/17로 예정된 파리 정상회담은 소련 영공의 미 U2 정찰기 격추 사건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결렬됐다. 흐루시쵸프는 60.5.20 베를린 문제를 6-8개월 내에 새로운 정상회담에서 다루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아이젠하워의 모스크바 초청을 철회함으로써 베를린과 독일 문제를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루려고 하였다.

60년 9월부터 흐루시쵸프는 베를린에서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있어 서방의 태도를 시험해 보았다. 그는 이전까지 용인되던 서베를린에서의 서독 하원 회의를 '평화 파괴적'이라며 거부하고, 서독인의 동베를린 방문을 체류 허가제를 도입했으며, 서독지역-서베를린의 도로, 철도, 항공 교통을 방해했다. 흐루시쵸프가 서베를린을 완전 봉쇄하지 못한 것은 베를린의 4개국 통치 구조를 주장하는 서방의 반응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미국의 '핵을 통한 억제 전략'에 직면해 동독 지역과 동베를린에서의 소련의 군사 행동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61.1.20 민주당의 케네디 미 대통령 취임과 함께 미국의 세계전략의 결정적 전환이 찾아왔다. 미국적 원칙의 세계 질서 창출을 위한 '전지구적 참여' 정책은 이제 서방 지역에서만의 지도적 역할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중동부 유럽과 독일 등에서 소련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군사 전략에 있어서도 소련의 도발에 대한 강력한 보복 전략에서 단계적이고 유연한 대응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이에 대해서 아데나워는 격렬히 반대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는 유럽에서의 현 상황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서의 미소 간의 균형 유지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소련이 침공하는 경우에도 동부로의 반격이 아니라 이전의 국경선 방어가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그렇지 않아도 허약해져가고 있는 아데나워의 정책과의 연합전선이 찢어지게 되었다.

서독은 케네디의 정책이 서독을 비롯한 동맹국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케네디는 베를린 문제에 있어 현 상태 유지를 꾀하며, '세 가지 본질적 문제'(서베를린의 연합군 주둔권, 연합군의 서베를린에의 자유로운 접근권, 서베를린의 생존력)에 집중하려 했다. 이제 베를린이 아니라 단지 서베를린만이 논의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동베를린은 이러한 범위에 더 이상 속하지 않으며, 소련이 동베를린 내부에서 행하는 어떠한 행동에 대해서도 미국의 이해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동베를린 내에서의 소련측의 도발은 59/60년과는 달리 전혀 소련측에 위험 부담이 없는 것이다. 45/46년 합의된 베를린 전지역에 대한 4개 승전국의 통치는 48년 이후 소련과 동독에 의해 조금씩 잠식되어왔는데, 이제는 이것이 실질적으로 확인되었다. ◀  ▲

▶  장벽 건설의 전야

케네디-흐루시쵸프 회담(61.6.3/4 비인)은 양측의 목표에 대해 분명한 시사점을 주지 못했다. 케네디는 베를린 문제에 있어 소련측의 공세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는데, 이는 61년 4월 1차 쿠바 위기에서의 허약한 태도와 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소련측이 위기를 심화시키는 것이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소련과 동독은 이제 상황을 걷잡을 수 없도록 만들기로 했다. 베를린 장벽 건설에 대한 어떠한 의혹도 없는 상황에서 동독의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61.6.15 별안간 "아무도 장벽을 쌓을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렇지 않아도 58년 흐루시쵸프의 최후통첩, 59년 제네바 외상회담 등을 거치면서 동독으로부터의 탈출자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소련과 동독측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울브리히트의 밑도 끝도 없는 선언은 오히려 서베를린 봉쇄가 임박했다는 불안감을 유포시켰으며 새로운 탈출의 행렬을 불러왔다.

여타 동독지역에서 동베를린으로의 진입로에서의 통제는 간단한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로써 동독시민의 불안감이 더욱 조장되어 탈출자가 더욱 늘어났고 결국 '평화 유지'를 위해 모종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당위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케네디는 61.7.25 라디오방송 연설에서 자신의 '세 가지 본질적 문제'를 선언했는데, 이러한 발언들로부 인해 결과적으로 미국 언론이나 유력 인사들 사이에서는 이제 소련 뿐 아니라 미국 측에도 평화 유지를 위해 동서 베를린 격리를 통해 탈출자의 물결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매일매일 탈출자 수가 발표되어 제2의 '6월 17일'이 임박했다는 불안감을 조성하게 되었다.

미국 정가의 주요 목표는 동서 베를린 격리를 막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는 것이 되었다. 독일을 통해 미소가 새로운 전쟁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미국 외교를 지배했다.

동서 베를린 격리 문제에 있어 미소 간에 얼마나 분명한 합의가 있었는지, 미국측이 얼마나 동독측의 베를린 장벽 건설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서독정부는 정보부를 통해 동독이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독의 전독일 문제 장관 에른스트 렘머가 베를린 격리 며칠 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은 지나친 선의의 해석이었다. 서독정부로서는 닥쳐오는 위험을 경고함으로써 탈출을 더욱 가속화시키느냐 아니면, 탈출자가 동독에 머물기를 충고함으로써 후에 도덕적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느냐라는 딜레마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 ◀  ▲

▶  장벽 건설 D데이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의 엄호 하에 이루어진 동독의 D데이는 8월 12일(토요일) 밤으로 신중하게 결정되었다. 이 당시 서방의 정부 수반들은 아무도 자신의 자리에 없었고, 서독에서는 61.9.17 총선을 위한 선거전이 한창이었다.

동독측은 처음에는 철조망으로 동서 베를린을 갈랐으며, 그 후 수년 간에 걸쳐 점점 더 세련된 수단을 동원해 콘크리트 벽과 탈출 방지 시설을 설치했다.

61.8.13 독일 문제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동서독의 완전한 분리가 서방 연합국과 서독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독일 민족의 역사가 임시적으로가 아니라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완전히 다른 형태를 가진 두 개의 국가에서 펼쳐지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비록 아데나워가 8.13 즉시 "연합국과의 합의 하에 적절한 대응 조처가 있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베를린의 서방측 당국이 소련측에 항의하는 것도 8.16에야 이루어졌고 그 다음날에야 미, 영, 프가 소련 정부에 대해 항의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의 압력 하에 서독 국민 감정의 진화에 나선 아데나워는 8.16 동베를린과 동독에서 우려되는 봉기를 저지하기 위해 소련 대사를 만났다. 이 회담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새로운 현실에 대한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바로 이날 서방의 무력함에 좌절한 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는 자신과 우정을 쌓고 있는 케네디에게 서한을 보내 "독일 전후사에서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이는 베를린이 자유로의 탈출구이며 통일에의 희망으로서의 위치를 잃어 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서독지역으로부터도 고립된 것을 의미한다"고 항의했다. 그는 "불법적인 소련의 행동을 더 이상 좌시하지 말고 최후의 결연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촉구했으나 이 서한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48/49년 베를린 봉쇄 시 '공중 다리'를 놓았던 미국의 클래이 장군이 서독정부와 베를린 시의 촉구로 미 정부 대표로 파견되었다. 그는 점차 서방으로 향하고 있는 서베를린 시민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다. 45년 이후 처음으로 서베를린에서 반미 시위가 있었다. 서방에서는 이러한 신뢰의 상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서 베를린 격리가 위기의 끝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위기의 전주곡임을 끊임 없이 암시하려 했다.

마지막에 서방에 남은 것은 좌절과 포기 뿐이었다. 외국인을 위한 최후의 통로인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미소 양국의 탱크를 대치시켜 상대방에 대해 무력을 과시했던 클래이 장군이 처음으로, 이제 변화된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매우 오랜 협상을 거쳐야만 베를린과 독일의 상황이 개선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방측에 유리한 근본적 변화는 없을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표명했다.

곧이어 실시된 서독 총선에서 아데나워 총리는 SPD 총리 후보인 빌리 브란트의 위기 관리를 위한 거국 내각 수립 요구를 거부했다. 이 선거에서 CDU/CSU는 과반수는 상실했으나 최다 득표를 거둬 FDP와의 2년 시한부 연정에 들어갔다.

이제 동서독은 완전 분리되었고, '종전 시대'는 지나갔다. 동베를린에서 소련에 대항한 봉기가 일어난 1953.6.17을 '독일 통일의 날'로 삼아 동독 붕괴의 희망을 버리지 않아온 서독은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서독의 '6월17일 거리'에 대한 동독의 대답은 '8월 13일 거리'였던 것이다.

베를린천사 1999년 11월 1일 제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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