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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68학생운동 또는 68문화혁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13,294회 작성일 02-03-14 01:34

본문

작성일 : 1999/04/18  조회수 : 185 , 줄수 : 86  

■  68 학생운동 /68 문화운동  
(한독레포트 2호 요약발췌)


  1. 동기

  초기에는 학생운동 또는 심지어 학생폭동으로 불리던 이 운동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혁명"으로 불 리는 이유는 그만큼 독일사회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각 나라마다 직접적인 계기는 다르고 흐름의 양상도 달랐지만 운동은 기본이념과 뿌리는 같았다.

  이 학생운동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당시의 정치, 사회적 조건을 보면 월남전에 시달리고 있던 미국에서는 참전을 거부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소리가 점차 커져 갔고 과거 사회규범을 깨는 젊은 히피층의 생활양식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자유분방한 태도는 독일에도 급속히 확산되었다.

  특히 전후세대사이에는 당시 독일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의식이 고조되었다. 이 전전 세대는 소극적이던 적극적이던 상당수가 히틀러 독재에 동조했으나 이것의 정신적인 청산작업은 거부해 왔다.

  60대말까지 독일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을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즉 교육청은 전체 교사들중 상당수가 나치정권에 동조자였으므로 교사들간에 있을 수 있는 감정대립을 피한다는 당치도 않은 이유로 학과과정에서 나치시대 역사들 제외시켰다.

  물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자율성, 개방성, 다원성, 개인의 주체성은 이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당시 결혼한 부인은 남편의 사인없이는 은행구좌를 개설할 수 없었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제한되어 있었고 성폭행으로 임신한 경우에도 낙태는 금지되어 있었다. 오늘에 비해 본다면 마치 암흑기를 연상케하는 사회상이다.




  2. 전개양상

  독일내 68운동은 베를린,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 전체 대학 도시로 확산되었지만 그 거점이자 도화선은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시는 전승 4개국 통치하에 놓여 있어 젊은이들이 이 도시에 거주하면 군복무를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반항의식이 강한 전국의 학생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67년 이 베를린에서 팔레비 이란왕의 방문 반대데모 때 한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학생들의 반응은 격렬하였으며 학생층이 폭넓게 의식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체 학생의 65%가 이를 계기로 정치의식화되었다.

운동의 양상은 반미, 월남전 반대, 보수언론반대, 기성세대가 간직해온 가치관, 규범, 도덕적 표상들에 대한 거부, 사회전면에 깔려 있는 권위의식에 대한 거부, 한걸음 더 나아가 자본주의체제의 극복에 이르기까지 확연히 정치적인 색깔을 띠었다.

  당시 학생들이 내건 대표적인 슬로건들은 다음과 같다.

- 나이 30이 넘은 자를 신뢰하지 말라. (Traue keinem ueber 30.)

-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Es ist verboten zu verbieten.)

- 너를 파괴하는 것들을 파괴하라. (Macht kaputt, was Euch kaputtmacht.)

- 모택동 만세! (Es lebe Mao!)

-  USA SA SS! (SA, SS는 히틀러 특수부대임.)

- Ho-Ho-Ho-Chi-Min!

  - Fremd-, Bestimmung, Emanzipation, reflektieren, faschis toide Tendenzen, ins BewuBtsein heben, repressive Gewalt, autoritaere Struktur등의 사회과학용어가 즐겨 쓰여졌다.

  당시의 탈권위주의적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 68년 함부르크 대학에서는 오랜 전통에 의해 재래식의 엄숙한 예복을 걸치고 거행된 대학총장 취임식이 데모학생들에 의해 방해되었고 이 '전통의식'은 학생들의 조롱꺼리가 되었다.

- 고등학교에서조차도 하부구조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교과내요에 관해 학생들과 합의를 본 후에야 내용을 선택한다는 기현상도 일어났다.

- 교사들에게 교육의 '기회균등'은 중요한 실천목표로서 지식층을 부모로 가진 학생들에게 감점을 줌으로써 '균등사회'를 이룬다는 과격한 양상도 나타났다.

- 대학내의 학생식당과 구분되어 있던, 좀 더 크고 고급으로 꾸며진 교수식당은 폐쇄되고 교수식당과 학생식당간에는 더 이상 구분이 없이 평등이 이루어졌다.

- 당시 포르노잡지는 파리의 에펠탑 밑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 겨우 귀할 수 있는 희귀품이었다.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는 포르노형잡지 St. Pauli는 선풍적인 인기로 120만부의 부수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20만부를 넘는 정도수준을 유지한다.

- 대학기숙사는 층마다 남학생, 여학생으로 엄격히 구분되었던 것이 없어졌다.

- 대학 학과내에 존재하던 권위주의적인 연구소 소장제도가 없어지면서 정교수의 힘이 약화되고 교수, 학생, 중간구조층의 3자협의체가 구성되었다.

- 학생들간에는 존대말이 사라지고 'Du'가 일상화되었다. 심지어 교수들에게도 도발적으로 Du를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사회과학부에서는 교수, 학생들간의 존대말이 사라져 갔다.

  이상에서 보듯  반권위주의적 교육, 여권신장, 성해방, 가정내에서 구성원간의 역할조정, 평상복착용, 일상언어사용 등 문화전역의 변화를 시도했으며 아래로부터의 의사결정이라는 철저민주주의 (Basisdemokratie)를 강력히 요구했다.


  3. 마무리과정과 성과

  이 68운동은 2년간의 격동기를 거친 후 8년간에 걸쳐 서서히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이 운동이 격렬하게 발생했던데 비하면 빠른 시일내에 진정된 셈이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겠다는 학생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당시 번영하는 경제상황에서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이던 노동자들은 이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전단을 뿌리는 학생들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보였다. 1천만명이 총파업을 벌였던 프랑스와는 대조적이었다.

  또 정부는 곧 학생들의 요구에 응해 대학의 신설, 대학구조개혁, 교육개혁 등의 무마정책을 성공적으로 펴나갔다. 또 69년에는 사민당의 Willy Brandt가 집권해 공산권과의 유화정책(Versoehnungspolitik), 동방정책(Ostpolitik)을 끈기있게 밀고 나갔다.

  68운동의 가장 큰 허점은 구심적인 조직체의 부재했다는 것이다. 학생들도 운동성과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각기 성향을 달리하는 여러개의 공산당이 창설되고 약 10만명의 온건파는 사민당에 입당했다. 1971년에는 전국적으로 392개의 극좌파단체가 난립했다.

    이 혁명은 독일인의 사고방식, 생활양식을 전격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덕목으로 꼽히는 관용(Toleranz)의 자세는 68세대에 의해 결정적으로 확립되었다.

  딱딱하고 융통성없는 전형적인 독일적인것(typisch deutsch: 지금 독일인 사이에서도 이말은 욕에 가깝다)을 거부하고 청바지,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고 영국, 프랑스, 미국식의 다국적 문화가 스며들었다.

  교육면에서 이제 대학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은 동등한 비율이 되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현저히 증가했고 낙태문제는 거의 자유로울 정도로 허용되었다. 언어면에서도 미혼, 기혼을 가름하는 '양'(Fraeulein)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독어단어에서 사라졌다.

  68운동의 또 다른 성과로는 68운동세대가 주축을 이룬 녹색당의 창립을 들수 있다.  녹색당은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68운동은 권위주의 해체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으나 그 대안에는 무력했다는 비판이 있다.  보수적인 한 언론인은 "68세대가 히틀러보다 더 많이 가치관을 파괴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작성일 : 1999/04/18 [Time: 09:06] IP from 131.220.244.159  
▣ 작성자 : jayuroni (jayuroni@berlinreport.com)  조회수 : 125 , 줄수 : 19  

■ 68년 운동권 세대의 그후  

  68세대 운동권은 이제 98년 적군파의 자체해산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사회에 동화흡수되었다.

  남학생들이 주도하던 사회주의 학생회(SDS)에 반기를 들었고 아도르노 교수에게 달걀세례를 퍼부어 그를 절망시켰던 한 여학생은 공장노동자를 거쳐 이제는 한 시립여성학교를 운영한다.

  법학을 공부하고 현재 레스토랑을 공부하는 투사, 경찰과 투석전을 벌렸고 모택동의 영접을 받기도 했던 녹색당 시의원, 부동산으로 거부가 되어 구동독의 유명출판사를 인수한 사람...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의 수는 엄청나다. 이 중에는 녹색당에서 창당시부터 활약해온 인사들이 많지만 좀 더 온건한 길을 택한 사민당 인사들도 많다. 슈뢰더, 라퐁텐 재무장관, 샤르핑 국방장관을 비롯해서 현재 사민당이 집권한 주수상의 대부분이 68시절 활약하던 극렬파 투사출신들이다.

  최근 언론에 오르내린 인물론 콘 벤딜(Con-Bendit)이 있다. 그는 유대계출신으로 독일과 프랑스 두나라가 생활근거지였다. 그는 프랑스 낭뜨대학에서 68운동이 처음 터질 때부터 주동인물이었다. 80년대부터 그는 독일 녹색당원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프랑크푸르트 시의원, 주정부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유럽의회 의원으로 재직중이다.

  그런데 98년 9월 중순 톱테러리스트로 지명수배를 받던 Klein이 체포된 후 그는 자신이 계속해서 재정지원을 해왔음을 고백했다. 옛 동지의 의리로 오랫동안 범법행위를 해온 것이다.그는 유럽연합의회의원으로 치외법권의 혜택을 받고 있으나 기민당측의 공격은 만만치 않다.

  현 독일 외무부장관 Fischer도 80년대초 헤센주 경제장관 암살 당시 사용된 권총이 그의 차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이처럼 68세대 정치가들중엔 암묵적으로 적군파와 관련을 가졌던 사람이 많다.

학계에 진출한 교수는 약 30명 정도된다. 교수는 커녕 대학을 사회의 피난처로 삼고 있는 만년학생들도 꽤 있다.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고 있으나 몇년전 베를린대학에서 집계한 바에 따르면 독문과 학생중 1400여명이 10년이상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이중 150명은 45학기 이상이 된 68세대의 잔류자로 밝혀졌다. 최고 학기기록은 무려 57학기다. 독문과 이외 사회과학부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68세대 은둔자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참고: 한독 리포트)




작성일 : 1999/04/18 [Time: 09:08] IP from 131.220.244.159  
▣ 작성자 : jayuroni (jayuroni@berlinreport.com)  조회수 : 116 , 줄수 : 33  
"뒤늦은 집권: 68 세대의 승리와 좌절"  

■ "뒤늦은 집권: 68 세대의 승리와 좌절" (쥐도 98.8.31)

- 93년 클린턴 미 대통령의 취임은 미국에서는 역사적 세대교체였는데, '세계 최고권력자'인 미 대통령 자리에 처음으로 베이비붐 세대이고 2차대전이 아니라 60년대에 청년기 경험을 하였으며 청년기에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마리화나 흡연 경험이 있으며 성도덕이 다소 느슨한 인물이 오른 것임. 독일에서는 그를 '68 세대'라고 부를 것임.

- 물론 92년 대선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당선에는 그의 새로운 비젼보다 오히려 경제와 실업 문제 등 내정에서 외교분야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당시 부시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이 큰 몫을 했음. 독일에서도 오는 9.27 총선에서 1968년 청년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슈뢰더 SPD 수상후보가 집권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인데, Juso(청년사회민주주의) 의장이었던 그는 한때 자신의 진보적 정치성향 때문에 클린턴 대통령처럼 자당 내에서도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이제는 당시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음. 언론은 클린턴의 경우처럼 슈뢰더의 여성 관계에 대해 집중보도하기도 했는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러한 부분이 총선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여짐. 또한 콜 수상은 유럽통합 정책 등을 통해 큰 업적을 세웠으나 내정에서는 기록적 실업 등으로 인기를 잃고 있기도 함.

- 30년전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68세대의 선두주자가 이제 독일 최고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는데, 그가 내놓은 정책 프로그램들은 30년전 68세대의 정신에서 다소 달라진 부분도 많음. 그러나 이는 정치적 변절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독일 정치가 수행해야 할 과제가 크게 변화했기 때문임. 68세대의 이념을 잘 대변하고 있는 녹색당은 과거의 이념에 지나치게 얽매어 있어 선거 때마다 의회진출 제한선인 득표율 5%를 넘기기 급급한 현상을 보이고 있음. SPD내에서도 좌파에 속하는 라폰텐 당수는 90년 총선에서 수상후보로 콜 수상에 맞섰으나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음. 그러나 SPD 내에서는 68 세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이후 세대인 슈톨만 경제장관 내정자 등이 68 세대의 특징이었던 새로움에의 대담한 용기, 미래의 비젼, 개혁의 추구 등 덕목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짐. 결국 슈뢰더로 대표되는 68세대의 집권은 그 세대의 실패를 나타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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