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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일 초대수상 콘라드 아데나우어와 전후 재건기 독일 연방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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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라인킨트이름으로 검색 조회 7,365회 작성일 02-03-08 08:08

본문

작성일 : 2000/11/27  조회수 : 63

■ 라인의 가장

독일 초대수상 콘라드 아데나우어와 전후 재건기 독일 연방 공화국


뢴도르프에서 온 검정색 메르세데스 벤쯔 리무진 한 대가 아침마다 8시에서 9시사이에 쾨닠스빈터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던 라인 횡단선으로 덜커덕거리며 올라탔다. 드라켄펠트에서의 도강 동안에 한 나이 지긋한 신사가 그차에서 내려 발을 뻗어 운동을 했다. 빳빳하게 풀먹인 회색 중절모를 이마 깊숙히 눌러쓴 채. 1949년에서 1963년까지 14년동안 그러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수상 콘라드 아데나우어가 일하러 간다.

고향마을인 뢴도르프에서 소시민적 도시인 본으로의 그 편안한 도착을 그 자신이 선택했고 어떤 종류의 반대에도 완고히 옹호했다. 그 가증스런 나찌의 몰락이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최고위직을 그는 가장 근소한 표차이 즉, 첫 번째 표결에서 요구된 연방의회에서의 절대다수를 넘는 한표 덕분에 맡게 된 것이다.

그 자신도 수상선거에 참가했고 그 자신의 한표가 던져진 무효표 하나가 아니라는, 또한 44표의 기권표 중 하나가 아니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집권에 대해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표제어가 있고 이는 나중에 유럽의 한 친구인 룩셈부르크의 외상 요제프 벸흐에게 토로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더라면 독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수 없다."

슈피겔 특파원인 로타 륄은 기둥 뒤에 숨어 그 대화를 엿들었다. 아데나우어는 당시 즉, 1954년 9월 28일 독일과 유럽의 미래에 관한 한 회의를 위해 런던으로 여행했었다. 대체 73세의 한 가장이 어린 독일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이전의 적성국가들에 대해 독일을 대표할 수 있을까하는 초기의 의심이 지난 뒤 점점 더 많은 독일인들이, 결국에는 대다수가 그의 서방화정책이 독일의 재생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의심은 처음에는 정당한 듯 보였다. 그는 바이마르 시절 많은 이들에게 라인분리주의자로 통하지 않았던가? 한때 쾰른시장이었고 프로이센 국가위원회 의장이었던 그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나찌에 의해 권력을 뺏기고 물러서지 않았던가? 그 때이르게 연금생활자가 된 그는 나찌시절 동안 고향 뢴도르프에서 너무 관조적인 세월을 보내진 않았던가? 단지 그가 묻지도 않고 자신들의 땅에 그의 목양 넬케를 묶어 놓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던 이웃들에게 불평을 하거나, 내부에서 빛이나는 양말구멍기우개와 같은 놀라운 발명에 신경쓰는 데 몰두한 채.

뢴도르프의 그 노인, 두 번씩 상처를 했고, 일곱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수십명의 손자, 손녀를 둔 그는 곧 엄격한 가장으로 드러났는데, 그는 독일인들이 전쟁의 혼란으로인해 동경했던 모순을 용납지 않았다. 그 보수주의자는 사회민주주의자를 조국이 없는 놈들로 의심했는데, 그들은 분단국가 서독을 너무나 쉽게 동쪽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양도할 준비가 되어있고 따라서 조국의 몰락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 진영내의 좌익 변덕주의자들을 재빨리 그리고 무감각하게 해치웠다. 기민/기사연합의 좌익핵심인 사회위원회는 계속 아렌 강령에 사회화와 유사한 구절을 제출했고, 아데나우어도 서명했으나 이내 다시 사회적 시장경제를 위해 배척했고, 이것은 바이에른의 명예교수인 루드비히 에하르트가 문서화하고 아데나우어의 도움으로 당강령에 포함되었다. 바이마르의 경험을 가진 그 노인에게는 이념과 강령에서 벗어나 단지 한때 최초의 독일공화국의 붕괴에 일익을 담당한 루어 지역에서의 혼란을 방지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명백히 좌익으로 기운 베를린 출신의 동독 기민련 지도자 야콥 카이저를 그는 단호하고 요령있게 해임했다.

이따금 변동하는 다수의 시민세력과 함께 그는 많은 사민당원과 또한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적대시된, 그러나 결국 독일 전후정책의 기본노선으로 인정된 그러한 서방정치를 펼쳤다. 그것은 단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꾸밈없는 정책이었다. 그는 거기서 유럽인이라는 명성을 얻으려 애썼는데 수 10년후에 빌리 브란트가 자신의 동방정책의 구상에서 했던 것 같은 그런 사상의 구조물조차 세우지 않은 채 말이다.

그에겐 단지 독일 서부국경을 보장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 고정없이는 무기력하게 세계의 적인 공산주의자의 손아귀에든 것처럼 그는 느꼈다. 미군 포로생활서 돌아온 법학교수인 발터 할슈타인, 직업 외교관인 헤베르트 블랑켄 호른, 존경스런 기민/기사련의 원내총무이자 후일 외무장관인 하인리히 본 브렌타노, 한때 군장성이었던 아돌프 호이싱어, 꼼꼼한 국무위원인 한스 글롭케, 독일영화공사의 대본작가인 펠릭스 본 엨카르트 등의 충실한 친구들이 그를 도왔고, 엨카르트는 아데나우어 정책의 천재적인 판매인으로서 대내 대외적으로 그를 도왔다.

다시 강화된 독일에 대한 서방열강의 불신과 의무로 규정된 연합국의 루우통제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는 서독을 석탄 철강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도록 했는데 이는 후에 유럽경제공동체, 더 후일에는 유럽 연합이 되었고, 그 창설은 프랑스 외상 로베르트 슈망과 이탈리아의 알시데 드 가스페리 등의 유럽적 사고에 기반했다. 뢴도르프의 여우 아데나우어는 그들과의 친분을 믿었다.

프랑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르지위에 관한 협정을 맺었고 그것으로 자르란트는 독립적이 되고 영원히 독일과 분리될 것이었다. 단지 국민투표만이 자르분리를 막았고 아데나우어에게 최초의 중대한 패배를 선사했다.

미국에 대해 그는 재무장을 일관된 노선으로 요청했는데 이는 우선 유럽 방위공동체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나 프랑스에 의해 격침되었다. 결국 재무장한 독일은 곧 나토에 가입했고, 이때 바이에른의 주수상인 프란쯔 요제프 슈트라우스-처음엔 그의 핵장관이었고 나중엔 국방부 장관이었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슈트라우스와 아데나우어의 노선을 따랐더라면 독일은 곧 핵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노인이 그토록 연방의회에서 열정적으로 요구했으나 미국은 핵탄두가 아니라 단지 추진무기만을 주려했다. "머리가 없다면 사지가 내게 무슨 소용인가"라며. 그는 의회에서의 논쟁을 계속 회피했다. 사민당에 의해 궁지에 몰려 그는 어리석고 반복된 문장으로 자신을 옹호했다. "호이싱어가 그렇게 말했다." 사민당은 말문이 막혔다, 비록 쿠르트 슈마허, 프리쯔 엘러, 아돌프 아른트같은 유창한 연사들이 등단했었어도. 그는 승리했다.

그는 독-이 보상협정으로 미국계 이스라엘 로비에 호감을 샀는데, 그 협상은 법학교수인 프란쯔 뵘이 담당했다. 그가 은행인 헤르만 요제프 압스를 파견해 이차대전에서 서방의 적국이었던 독일과의 채무협상을 채결하도록했을 때 월스트리트와 런던 금융가는 안정을 찾았다.

제 2의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려야했는데 그 보상규정과 채무규정이 나치의 강화에 기여했었다. 히틀러의 아리안화 정책과 외국인노동자, 유대인 학살계획에 도이취 은행도 연루되었다는 압스 비밀서류는 도이취 은행의 비밀금고에 보관되어있었다. 50년이 지난 이제서야 슈뢰더의 사민/녹색 연정은 그 오랜 채무를 갚아야만 한다.

통일에 관해 아데나우어는 서방의 자신의 친구들-샤를르 드 골이나 존 포스터 덜레스-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것은 완고하게 들렸고 라인 왼편에 사는 서민의 오래된 격언인 "내 아들아, 결코 라인을 넘어서지 마라"의 잘못된 변형같았다. 어떤 다른 해석이 어려웠다. 아데나우어가 너무나 현실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러시아적 변종을 기술공들의 조국인 서독에서 부르던 말인 소프제트(Soffjets)의 오스트리아 중립화의 변종을 만들려는 모든 제안을 본 정부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소련은 우리보다 35년 먼저 오스트리아에 통일을 선사했다.

아데나우어 지휘하에 독일 대표단이 1955년 소련을 방문했을 때 아데나우어의 측근인 글롭케는 두려운 즉석연회 전에 숟가락으로 대표단에게 올리브유를 나누어 주어 러시아의 보드카 공세로부터 그들을 예방하려했다. 사실 최후의 독일 전쟁포로의 귀환과 외교관계의 재개이외에는 아무런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데나우어의 통일에 관한 미사여구, "평화와 자유 속에서"는 계속해서 35년 동안 모든 형태의 독독접근에 대한 안전한 보장이 되었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의 건설은 냉소적으로 서독의 한계정책의 실제적인 수단으로서 통용되었다. 선전문구상으로는 울브리히트-호네커 정권에 대한 환영 문으로서, 실제로는 철의 장막의 정확한 경계선으로서, 최소한 유럽에서의 냉전을 가열하려는 경솔한 시도를 방지하는 경계선으로서. 장벽 저편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당시의 동독 지배자는 자신의 양심과 타협해야 했다. 아데나우어가 자신의 서방정책-이후 사민당에의 해서도 존중된-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반면에 언제나 독일의 수상들에게 어렵게 열리던 정치활동의 한 분야인 내부에서는 사회적 경제적 원상복고가 전개되었는데 독일은 통일후 9년이 지난 아직도 이것으로 고통스러워 해야 한다.

아레너 강령은 곧 서류속에 파묻혀 버렸고 그 뒤를 사회위원회 위원들이 따랐다. 야콥 카이저로부터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고 칼 아놀드는 노르트라인 베스트 팔렌의 주수상으로서의 간막극이후에 정치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스 카쩌와 그의 후계자 노베르트 블륌은 기민련이 확정한 사회질서의 지주로서보다는 오히려 좌익의 알리바이로서 복무했다. 아데나우어는 1949년 선거에서의 기민당의 선거 승리에 기여한 호민관 루드비히 에하르트에게 우선은 매우 넓은 활동공간을 주었다. 그의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속류자본주의적 명제들이 독일인들이 그 뚱뚱한 에하르트에게 감사해야할 경제기적의 완수에 대한 독일인들의 동경을 충족시켰듯이.

독일의 거대 산업은 제동이 걸리지 않은 에하르트보다는 그들의 아데나우어와 더 만족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재무장이 이미 결정된 일이고, 바이에른 출신의 그 슈트라우스가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고 군비계약이 증대하던 시점부터. 비록 그는 그 샤쓰 바람의 바이에른 사람, 난폭하게 국방부 장관의 의자까지, 그리하여 뻔뻔스레 수상의 소파쪽을 흘겨볼 수 있는 한 지점까지 싸워 쟁취한 슈트라우스와 기본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여 그 바이에른이 지방권력 없이는 아무 것도 더 이상 되지 않게 되었고 결국 그는 슈피겔 사건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그때까지 연방수상에게는 어떤 사회적 세력과 연대하는가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그들이 자신의 보수적인 즉, 가부장적으로 운영되어지고 현상유지를 위해 변화에 적대적인 상호단체라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관점에 상응하는 한. 나찌의 뉴른베르크 인종주의법안을 주석했던 수상실의 국무위원이 자문하거나 후원하는 것은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백발의 명사인 한스 글롭케가 단지 자신은 자신의 주석서로 최악을 방지하려 했고 게다가 민족과 총통과 조국에 대한 공직자의 의무적인 선서에는 그것이 효과를 볼수 없도록하는 한틈새의 구절을 끼워넣었다고 말하는 확언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데나우어의 사례를 많은 이들이 본보기로 따랐고 한때 반나찌화를 빠져나갔던 많은 구나찌들은 다시금 국가와 사회의 주요지위로 스며들었다. 원래는 중고가 아니며 민주적으로 정통성을 갖는 사람들에게 속하는 지위로.

독일연방공화국의 가장 강력한 수상의 권력의 종말은 이미 1959년에 시작되었다. 그가 연방대통령에 나서려 했다가 연방대통령의 미약한 권한을 인지하고서 다시 물러섰을 때. 얼마후에 에리히 멘데의 자민당이 대들었고 자민당은 1961년 선거후에 단지 아데나우어 없는 연정에만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에하르트 정부를 염두에 둔 것이었고 게다가 슈트라우스도 그 정부에 추파를 던졌는데 그는 에하르트를 단지 짧은 섭정으로 생각했고 그이후 시기의 주연은 자신이 맡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종이사자에 지나지 않았던 에하르트에게 결코 아무것도 맡기지 않았던-무엇보다 그 노인의 유언장인 프랑스와의 우호관계-아데나우어는 이미 에하르트의 대체물 즉, 몬타동맹의 전 부의장인 프란쯔 에쩰을 내세웠고, 그를 신중을 기하기 위해 재무장관으로서 내각에 등용했다. 그가 그사이 쥐새끼들이 이미 식탁에서 춤을 추고 있음을 인지 했을 때 스스로 다시 등장해서 대드는 자들에게 복수를 가했다. 멘데는 변덕을 부리고 슈트라우스는 꼬리를 내렸고 에하르트는 언제나처럼 그대로였다.

아데나우어는 또한 작은 일에서도 전제군주였다. 한때 자민당의 하인쯔 슈타르케가 재무부 장관이었고, 그는 폐병 때문에 신선한 공기를 몹시 좋아하는 갸냘픈 인간이었다. 참가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 각료회의 동안 그 재무부장관이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고 한다. 아데나우어는 말없이 창가로가서 창문을 닫았다. 슈타르케의 두 번째 시도를 수상은 간략히 막았다. "창문은 닫힌 채로"라고. 창문은 닫힌 채로 였다.

그러한 권위주의적 행동은 오래 가지 못했으며 공교롭게도 슈트라우스가 수상의 몰락을 불러냈고 그 과정에서 그스스로도 몰락했다. 슈피겔은 강건한 슈트라우스에 대항한 언론출판상의 투쟁으로서 1962년 표제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주요 활동무대인 연방군의 결점을 보도했고 슈트라우스로 하여금 대응조치를 하도록 만들었다. 추정된 반역죄로 슈트라우스의 적극적인 관여하에 루돌프 아욱슈타인과 몇 명의 편집인들이 체포되었고 나중에야-아욱슈타인은 3개월이후에야-석방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연방의회에서 거짓말을 했다. 아데나우어는 꼬임에 빠져 단순한, 그러나 명백히 거짓인 문장을 말했다. 아욱슈타인은 돈을 벌기위해 체계적으로 반역을 저질렀다라고.

자민당은 내각을 떠났다. 슈트라우스는 퇴진해야 했다. 아데나우어의 마지막 몇 달이 시작되었다. 결국, 1963년 10월 15일 87세의 아데나우어도 퇴진했다. 기민/기사 연합이 이미 4월에 에하르트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에. 뢴도르프의 노인의 예언을 완전히 확인해준 후계자, 1965년의 놀라운 선거승리에도 불과하고 총 단지 3년동안만 수상이었던 허약한 수상. 아데나우어는 좋아하지 않았던 에하르트의 노력들을 미심쩍게 지켜보며 단지 그를 위해 마련된 연방의원실-본회의장과 교섭단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의 사무실로 물러났다.

1967년 4월 19일 그 노인은 죽음과의 긴 밤동안의 투쟁이후 죽었다. 우리 언론인들은 용바위아래에 서서 언덕위의 아데나워 생가의 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을 지켜보았다. 7명의 의사와 뢴도르프의 약사가 새로운 산소병을 산 위로 힘들여 나르는 동안 경련하는 불빛이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아침 무렵 드라켄펠스는 조용했고 그 노친네는 갔다.

결국 한 시대가 끝났다. 독일의 서방세계 공동체로의 재가입, 서독 사회의 재건이라는 시대가.

원본 출처: 슈피겔 99년/20호 에리히 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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