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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슈피겔]20세기의 괴물 아돌프 히틀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슈피겔이름으로 검색 조회 4,683회 작성일 02-03-08 06:47

본문

인간의 야만성이「惡의 화신」을 權座에 올려 놓았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强者의 승리와 弱者의 절멸은 뒤집을 수 없는 眞理」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같은 「生命의 근본법칙」을 인류의 이름을 빌어 반대하는 것은 「自然에 대한 배신」이자 무의미한 거짓이라고 보았다
●히틀러가 인류에게 준 가장 큰 두려움은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터져나올 수 있는, 해명할 길 없는 野蠻性이 있다는 진실을 폭로했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고독한 大衆」의 열망을 폭로하였다. 고독한 대중은 자기에게 명령을 내려줄 강한 의지력에 대한 헌신의 욕구를 지녔고, 자신이 아니라 他人이 결정을 내려주기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譯者 安仁嬉 번역작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야콥 부르크하르트 著, 푸른숲, 1999)·「히틀러 평전」(요아힘 페스트 著, 푸른숲, 1998)·「발작 평전」(스테판 츠바이크 著, 푸른숲, 1998)·「광기와 우연의 역사」(스테판 츠바이크 著, 자작나무, 1996)

[역자 注] 독일의 유력 시사주간지 「슈피겔」誌(지)는 지난 1백년의 주요 사건을 되돌아보는 기획물 「20세기」를 연재했다. 지난 10월25일자 슈피겔誌는 이 기획의 마지막 주제로 아돌프 히틀러를 다루었다. 집필을 맡은 저명한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요아힘 페스트씨의 허락을 받아 번역했다. 페스트씨(72세)의 「히틀러 評傳」은 20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총 1백만부가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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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만큼 큰 기대감으로 시작된 세기는 없었다. 1901년 1월1일자 「시카고 트리뷴」지는 「20세기의 문턱에서, 앞으로 다가오는 세기는 全(전) 인류의 휴매니티와 博愛(박애)의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인류의 오랜 꿈은 조각이 나기 시작하더니 세기 중반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꿈을 되찾거나 아니면 변형된 형태로나마 계속 이어보려는 온갖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거대한 실망 과정은 시대의 공통 分母(분모)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수많은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였다. 학문, 예술, 이데올로기, 사회적 변화의 과정들, 정치적 동요 등이었다.

이 시대를 재촉한 수많은 문화 충격의 핵심적인 사상의 공급자들을 찾아보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독일의 世紀(세기)」라고 말할 수가 있다.


■  시대 단절의 상징 인물, 히틀러

맨 먼저 칼 마르크스의 유산이 있다. 이어서 니체,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에서 오토 한에 이르는 인물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놓칠 수 없다. 금세기를 진열해놓은 화랑에서 그가 차지한 위치는 그가 원인을 제공한 세계지도의 변화 때문에 얻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현대까지 지녀 온 문명에 대한 근본신념을 그가 상당 기간동안 완전히 박살을 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그는 시대 단절의 상징적 인물이 된 것이다. 20세기는 다른 어떤 세기보다도 더 많은 국가적 범죄자들을 배출하였다. 그것은 20세기 초에 제국주의자들의 말살전쟁과 수용소에서 사망자가 萬(만) 단위로 집계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런 대규모 살상에서 희생자들은 이름도 없이 오직 통계상의 숫자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부르주아 전쟁시대의 대량학살에 이어 레닌과 스탈린이 학살을 더욱 확대시켜서 지배도구로서의 국가 테러로 만들었다. 그들이 남긴 선례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수많은 群小(군소) 독재자들에 영향을 미쳤고, 이어서 마오쩌뚱, 폴 포트, 바티스타, 피노체트, 「카르파티아의 천재」라고 불리우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그리고 사담 후세인에게까지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야만성에서 히틀러는 단연 선두를 차지한다. 그를 그렇게 선두에 올려놓은 것은 희생자의 숫자만은 아니다. 작년에 발간된 「공산주의 黑書(흑서)」는 학살자의 숫자라는 점에서는 스탈린과 마오쩌뚱이 그보다 수백만이나 더 앞서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뒤발리에나 金日成(김일성) 같은 다른 폭력통치자들이 그보다 더욱 개인적인 잔혹성을 드러냈고, 이디 아민 같은 독재자는 그보다 더욱 큰 복수욕과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히틀러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의 이름에 결부된 두려움을 끝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의 공격의지의 과격성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기반이었던 서구문화의 온갖 규범을 내던져 버린 그 노골성이 그를 단연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가 일찍이 선언했듯이 그의 프로그램이란 「현존하는 세계관 자체에 대한 선전포고」인 것이다.



■  生命의 근본법칙



이 시대 거의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들의 권력의지를 이데올로기라는 겉옷으로 그럴싸하게 치장하였다. 비록 구멍이 뻥뻥 뚫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레닌과 뒷날 스탈린도 속으로는 철저히 비웃고 있었지만 어쨌든 미래에 대한 온갖 이데올로기적인 약속을 내걸었다. 히틀러에 대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주장하곤 하였지만, 그들은 그 어떤 신념의 확실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오로지 자기들의 개인적 권력의 확보와 확대를 위해서만 인정하였다. 히틀러는 그들과 달리 자신의 지배에 대해서 거대한 역사 이론적인 장식품을 내거는 일을 포기하였다. 그가 인정하였고, 스스로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지켰던 유일한 원칙이란, 개인이 되었건 민족이 되었건 자기주장과 정복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정치신념을 나타낸 책 「나의 투쟁」에 이미 「强者(강자)의 승리와 弱者(약자)의 절멸은 뒤집을 수 없는 진리」라고 표현되어 있고, 그 자신 언제나 거듭 그 사실을 고백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 더욱 격앙되고, 비정상적으로 詩的(시적)인 어조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것은 이것이 그의 확신의 핵심부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전쟁발발 직후에 그는 무력갈등을 유발한 자신의 조치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는 듯 어떤 외국의 대사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한, 추위와 더위가 존재하는 한, 사람들 사이에서나 민족들 사이에서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 산다면 그들은 타락하게 된다』 이와 같은 「生命(생명)의 근본법칙」을 특히 인류의 이름을 빌어 반대하는 것은 「自然(자연)에 대한 배신」이고 무의미한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총독사령부에서 계속된 이른바 「원탁의 대화」는 道德(도덕)이란 게으름이나 허약함의 표현일 뿐이라는 조롱으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유태인 증오에서 나온 모순을 보여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유태인은 존재의 근본법칙에서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국가형성의 능력이 없는 그들은 유사 이래로 생존공간을 얻기 위한 영원한 싸움을 피하였고, 자기들의 방식으로 세계지배를 확보하기 위해서 모세를 비롯, 사도 바울, 기독교, 레닌에 이르기까지 유태인들은 온갖 창조의 법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시인 디트리히 에카르트와의 대화에서 이같이 확언하였다.

『세계 지배를 위한 유태인의 공격은 수많은 가지를 뻗치고 있는데 그중에는 자본주의도 끼어 있다. 이어서 상당히 부조리한 결합으로서 볼셰비즘과 민주주의, 평화주의, 主戰論(주전론), 그리고 전체적인 「잡종화」를 부채질하는 인류의 平等(평등)이라는 사상도 여기 속한다. 상황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어디서나 이 「세계민족들을 중독시키는 종족」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종족은 모두에게 타당한 법칙의 바깥에 서 있고 그럼으로써 모두의 권리를 짓밟는다』 이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던 무렵 유럽에서 나돌던 하찮은 인종주의적 논문들의 여러 가지 망상들이 뒤틀린 모습으로 반영되어 있는 迷信(미신)적이고 病(병)적인 세계관이다. 그것은 물론 인류 공동의 자산은 아니었다. 세기 전환기 무렵 독일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과 마찬가지로 언제라도 동원가능한 反(반)유태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은 1918년 가을 1차 대전에서의 패배, 혁명, 뒤이어 나타난 화폐가치 하락, 그리고 全사회계층의 사회적 추락까지도 모두 다 유태인 탓으로 돌림으로써 反유태주의를 더욱 더 부추겼다.




■  欺瞞




이들 과격 민족주의자들은 1919년 초에 생겨났던 소비에트 정권 하의 혼란상에 격분한 뮌헨 지역에서 몇 가지 성과들을 거두었다. 최근의 연구들은 히틀러 자신도 당시 유태인과 공산주의자들을 쓸모 있는 敵(적)으로만 여겼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과격 민족주의자들은 시대의 혼란스런 곤궁과 공포의 모든 원인을 거대한 집단적 敵(유태인)의 탓으로 돌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유태인 증오는 그의 정치적 상승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뒷날 덧붙여진 주장일 뿐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주장들은 제3제국이 멸망한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역사가들에 의해서 그때까지는 접근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원천에 근거해서 생겨났다. 어쨌든 히틀러의 同시대 사람들중 그의 유태인 증오가 살인적인 결과로 나타날 것을 미리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처음으로 권력을 쟁취할 가능성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 히틀러는 그때까지 연설에서 언제나 들먹이던 反유태주의 구호들을 아예 멀리 하거나 아니면 하위직 지도자들에게 넘겨주었다.

아주 특징적인 일이지만 그는 권력을 장악한 다음에는 자신의 정치적 신앙 고백서인 「나의 투쟁」마저도 멀리하였다. 자신의 목표들을 그렇게 일찌감치 공표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당시 아직 출간되지 않았고, 먼 뒷날 1960년대에 와서야 알려지게 되는 이른바 「나의 투쟁-제2권」에 대해서 그는 그것을 보류한 일은 「병이 나은 것처럼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히틀러의 정치적 浮上(부상)에는 오늘날 이 문제를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欺瞞(기만)이 작용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런 기만을 원했고,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회적인 분노를 표출하기를 원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의기소침해진 독일 민족에게서 그가 열렬한 호응을 얻는 일이 가능하였던 전쟁의지조차도 그는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다. 전쟁 발발 1년쯤 전에야 그는 자신이 그동안 평화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왔음을 시인하였고, 국내 언론사 편집국장들을 향한 연설에서 독일인들이 전쟁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평화론자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  소박했던 독일 국민들의 기대



물론 그것은 1933년에 그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절반도 답변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의 많은 관찰자들은 히틀러의 정권장악을 도덕적인 斷切(단절)이라고 보고 있는데, 어째서 이런 도덕적 단절이 당시에는 감지되지 못했는가를 알려고 한다면 위의 사실을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당시 사건을 함께 겪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단절을 아예 느끼지 못했다.
당시 의회의 사회민주당 대표였던 루돌프 브라이차이트는 뒷날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게 되지만,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1933년 1월30일 정오만 해도 박수를 치면서 그 사실을 반겼다. 지금껏 히틀러는 공허한 약속으로 대중을 자극해 왔는데 이제는 그런 유령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노출된 수상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게 되었고, 히틀러는 허풍만 치다가 결국 몇 달 가지 못해 물러나게 될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절반만이라도 의식한 사람은 당시 거의 없었다. 히틀러는 사방을 향해서 사나운 협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경고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스럽고 靈(영)적으로 붕괴된 나라에서 정치가의 말은 거의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고, 특히 그의 말은 더욱 그랬다.

히틀러와, 기발한 자기찬양술이 만들어낸 「지도자 神話(신화)」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불확실한 희망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럽 대륙 전체에 걸친 정복전쟁이나 우랄산맥까지 이르는 거대 왕국을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동유럽에서 인종적인 「경지정리」와 超人(초인)의 꿈 같은 것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런 것은 히틀러 주변 인물들의 몽상 속에나 들어 있었다. 한 고비 한 고비 위기를 넘기기가 힘들던 당시 독일 국민의 기대는 훨씬 더 가까운 목표들을 지향하고 있었다. 실업문제 해결, 국가위신의 회복, 거의 無(무)정부주의 수준에 이르렀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1918~1933년)에 결핍되어 있던 公權力(공권력)의 회복 같은 것들이었다.






■  合法的 革命



國民國家(국민국가)의 형성과 社會主義(사회주의)는 19세기의 가장 강력한 두가지 조류였다. 이 두 가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 미래지향적인 제3의 길을 통해서 화해시켜 보려고 했던 히틀러 추종자들의 생각은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한 희망을 일깨웠다. 당시 여전히 경직되어 있던 사회적 제한들을 없애고, 사회정의를 더욱 확대하고, 상황의 변화를 지향하는 엄청난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히틀러의 정치 프로그램에서 공포정치의 예고만을 읽어낸다면 1933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오늘날 거칠게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의심과 우려도 또한 당시 존재하였다. 정권 반대자들에 대해서 일찌감치 시작된 탄압, 거리에서의 폭력행위들, 그리고 히틀러가 수상에 임명된 지 4주가 지나면서 벌써 중요한 기본법들이 효력중지된 것 등은 상당한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새로 권력을 쥔 자들이 쉬지 않고 만들어낸 축제 분위기나 선동된 환호성, 민족적 각성과 「나가자!」는 깃발만으로는 이런 걱정을 침묵하게 만들 수 없었다.
공화국 말기에 나타났던 현상으로, 길거리에서 시민전쟁을 방불케 하는 패싸움을 벌이면서 「피의 일요일」을 만들어내는 등 정치싸움이 폭력화했었기 때문에, 이제 정권이 바뀌고 가차없는 조치들이 행해지자 마침내 公權力(공권력)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해석을 가능케 했다.

당시 널리 유행했던 「합법적 혁명」이라는 모순된 개념에 딱 들어맞는 히틀러의 「권력장악」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때로 매우 혼란스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서서히 히틀러 정권이 이루어낸 아주 뚜렷하고 놀라운 성과들이 상황을 점점 더 압도하게 된다. 어떤 역사 서술이나 문학 작품도 당시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이중적인 감정을 충분히 적절하게 서술하지는 못하였다.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이미지이긴 하지만, 당시 독일인들은 리처드 3세(셰익스피어의 史劇에 등장하는 영국왕. 내면의 확신으로 악당이 된 인물)처럼 확고한 결심을 하고서 하룻밤 만에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악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히틀러의 정치적 상승에 대해서 만들어진 이론들은 바로 그런 주장을 펼친다. 독재자 히틀러를 설명하기 위해서 불확실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케루스케 사람 아르미니우스(서기 9년에 로마군을 격파한 고대 게르만 영웅)를 인용하면서 선조들의 系譜(계보)를 작성하고, 히틀러가 西(서)유럽의 문명화된 힘에 저항하는 게르만 성향의 완성자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나라의 역사는 평화로운 유럽을 위협하는 확장행위의 연속으로 변하고 만다.





■  히틀러 系譜說 / 先入見에서 나온 히틀러 해석들



이런 폭력적인 이미지는 과거 독일 민족의 지배자들을 악마적인 조명 속으로 밀어넣고 전혀 말도 안되는 경우까지도 포함시켜서 그들 모두를 히틀러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웃나라들의 협동작업으로 생겨난 독일 땅의 미니 領主國(영주국)들은 (30년 전쟁이 끝나던 1648년 국제회의 이후로 독일 땅에는 2백~3백개 정도의 小公國들이 존재하였다. 1871년 프로이센에 의해 통일되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국민국가로 되었다─譯註) 우직하고 속좁은 지방 영주들에 의해서 통치되었고, 19세기에 와서야 겨우 조금씩 합쳐졌다. 전체적으로 촌스러운 이 진열실에서 오로지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만이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진지한 역사학 쪽에서는 이런 히틀러 계보설을 곧바로 부인하였지만 이 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살아 있다. 독일을 全세계의 「통합적인 惡(악)」이라고 간주한 사람은 소박한 장군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기벽스러운 앨런 테일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동의하였다. 知的(지적)으로 보면 역시 소박한 다니엘 골드하겐(1996년에 미국에서 「히틀러의 자발적인 집행자들─보통 독일인과 대량학살」이라는 책을 내서 미국과 유럽의 주목을 받았다─譯註)도 그의 책에서 이런 생각을 표명하였다.
전쟁 직후 급격하게 늘어난 수많은 이론들의 바탕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즉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공공연히 자행한 수많은 못된 행동들, 전쟁과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최초의 설명들은 超(초)시간적이고, 간혹 형이상학적인 맥락을 보인다. 히틀러는 인간이 全能(전능)하다는 망상을 가진 것에 대한 「신의 형벌」이었다거나, 혹은 「파우스트적인」 원칙의 파멸이라고, 혹은 모더니즘의 묵시록적인 최후인물이었다는 식의 해석들이 그것이다.

■  先入見에서 나온 히틀러 해석들

「독일 금융자본의 극히 반동적이고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요소들」이라는 주제로 1933년 12월에 열린 국제 공산당 회의에서 순식간에 敎條(교조)가 되어버린 공산주의자들의 해석도 또한 마찬가지로 적절하지 못하다. 그에 따르면 히틀러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나치 徒黨(도당)이 힘들여서 출세시키고 돈을 많이 대주는 후보자」라는 것이다. 히틀러가 서방세계를 붕괴시킬 임무를 띤 스탈린의 꼭두각시였다는 냉전 시대에 떠돌던 소문은 공산주의자들의 해석에 대한 답변처럼 들린다. 그밖에도 옆길로 빠지거나 모순에 가득차 있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더 있다. 자본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한 마르크스주의 측의 해석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제물로 삼은 저 「파시스트 세력」에 떨어지지 않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많이 인용되는 막스 호르크하이머(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譯註)의 명제, 곧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파시즘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나온 다른 진술들이 그렇듯이 엉성한 상투어일 뿐이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구조의 변혁과 생활방식의 변화, 마르크스와 공산주의까지 합쳐서 근대 유럽에서 나온 모든 현상들은 형태는 다를망정 어쨌든 資本主義에 결부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선입견에서 나온 히틀러 해석들은 自家撞着(자가당착)에 부딪치곤 한다. 히틀러 시대 사람들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社會的(사회적)인 시각의 해석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들은 히틀러를 사회적인 조류들이 한 점에 집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해석한다. 강력한 그룹이나 사건들이 역사의 결정적인 힘이고, 히틀러는 단순히 그 매개자나 대표자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한스 몸젠은 히틀러가 「허약한 독재자」였다는 대담한 주장을 펴서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 知的인 논쟁에 자주 나타나는 극단성을 드러내면서 역사가 마르틴 브로차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히틀러가 「선전 및 자기 민족이 지녀온 지도자 신화의 희생자」였으며, 그의 외교적 목적은 「은유적」인 의미를 띤 것으로서 실현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의 활성화를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모든 해석들에는 히틀러라는 개인을 역사 밖으로 밀어내려는 노력이 들어 있다. 구조가 역사를 결정적인 힘이라는 역사해석의 모델에 그의 존재가 명백하게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에 극복되어 버린 견해, 즉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라는 견해가 그의 존재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론에 反하는 현상이 한 번 더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라는 인물을 빼고는 당시의 사건도, 오늘날의 세계상황도 아예 상상해 볼 수가 없다. 물론 그의 정치적 부상을 촉진시킨 조건들을 관찰에서 배제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고착된 전통의 요소들은 물론이고, 또한 그에게 길을 마련해준 사람들, 그러니까 과거 권력 엘리트 집단에서부터 통치와 엄격한 질서를 갈구하는 방향 잃은 대중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모든 개별적인 상황들은 결국은 다시 히틀러에 귀착된다. 레이몽 아롱은 이 독재자의 역할을 얕잡아 해석하는 일을 「멍청한」 짓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국 역사가 휴 트레버-로우퍼가 그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는 제3제국이 무너진 직후에 다음과 같이 썼지만 그것은 아직도 타당한 발언이다.

「망명자들과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절망한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가 장기판의 장기말에 지나지 않고, 다른 정치가들이나 아니면 어떤 외계의 힘이 그 장기판을 이끌어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그가 어떤 독자적인 힘들을 이용했건, 어떤 우연의 도움을 받았건 히틀러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일한 지배자였다. 그는 자기가 생명을 불어넣고, 스스로 창안해 냈으며, 그리고 개인적인 지도력을 통해서 그 자신이 파괴시키도록 예정된 저 역사의 움직임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군부도 융커 계급도, 금융계도, 대실업가들도, 그들이 어떤 도움을 주었거나 받았거나 간에 이 악마적이고 파괴적인 정신을 완전히 장악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시대의 「귀염둥이」 / 히틀러의 眞意─맹목적인 戰爭 意志




히틀러와 그의 정치적 부상을 둘러싼 傳說(전설)들 중에서 가장 집요한 전설은 그가 자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인물이었으며, 시대도─어쨌든 독일 바깥에서는 - 그를 적대자로 인식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파시즘 실험」에 매혹되어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이 찾아왔던 외국의 방문객들은 대개 그들 자신이 뒷날 고백하고 있듯이 그에 대해서 존경심과 심지어는 경탄마저 느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회식에서 프랑스 선수단이 입장하면서 히틀러식 경례를 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全세계는 히틀러가 그토록 자신감에 차서 떠벌린 국내의 만족감, 완전고용, 사회주의 제도의 정비 등을 찬양하였다. 그 뒤에서는 이런 번영을 위해서 희생시킨 사람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외국 방문객들은 폭력적인 행렬들을 분명히 보고서도 독일인 특유의 질서 욕구가 드러난 것이라고만 여겼다.
牧歌(목가)적인 분위기로 위장하고 있어도 좀더 정밀하게 관찰하는 눈길이라면, 히틀러의 부지런함이 권위적인 복지국가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원대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찮은 인간들의 행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대의 標識(표지)는 분명히 대중과 대중적인 방향 욕구, 화해의 욕구, 그리고 신념을 향한 갈망 등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히틀러는 그런 시대를 위하여 일종의 마법 공식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확고한 히틀러 적대자들, 특히 망명자들은 독일의 독재자가 토마스 만의 표현대로 시대의 「귀염둥이」가 되는 꼴을 쓰라린 심정과 분노를 품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히틀러의 眞意─맹목적인 戰爭 意志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자마자 이전에 국내 정치가들인 파펜과 후겐베르크 같은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은 계산착오를 한 외국의 정치가들은 그와 조약을 맺기 위해서 일종의 경쟁상태에 돌입하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정치권력의 역학을 분명 더욱 잘 알고 있었을 소련과 교황청이 맨 처음으로 히틀러와 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폴란드와 영국이 그 뒤를 이었고, 法(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 이 사람과 다른 나라들도 차례로 협상을 벌였다. 마치 유럽의 戰後(전후) 평화를 다시 잿더미로 만들려고 하는 히틀러의 분명하고도 도발적인 의도에 모두가 일조를 하려고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역사상 거의 모든 권력찬탈자들의 경우가 그렇지만 히틀러도 자신의 강점보다는 오히려 상대의 약점을 통해서 권력을 얻었다. 그의 敵들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의식, 확고함, 자기주장 의지 등이 모두 부족하였다. 공화국 말기에도 그랬고 1930년대 중반 고압적인 분위기의 국제협상에서도 그랬다. 그런 협상은 그의 기습작전에 언제나 말려들었고, 그것은 언제나 똑같이 분노, 강력한 말들, 기운없는 몸짓 등을 뒤섞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당시 행해진 수많은 공개적인 협약문들은 히틀러를 망상으로 이끌어갔고, 그는 자신의 의도를 점점 더 높이 키워나갔다. 특히 소련이 말은 없었지만 그의 가장 효과적인 동맹국 노릇을 했다. 소련의 지치지 않는 혁명 위협, 프랑스의 인민전선, 스페인 내전(프랑코와 공산주의자들 간의 전쟁─譯註), 그리고 약 1백만명에 이르는 사람을 죽인 대규모 「숙청」 등이 엄청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소련의 위협은 히틀러에게 「방어벽」 혹은 공산주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 노릇을 스스로 떠맡을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수많은 다른 방문자들이 그랬듯이 영국의 역사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히틀러가 위협받는 유럽을 위하여 스스로 떠맡은 「파수꾼」 노릇에 대해서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마도 이런 역할만으로도 히틀러는 그의 입버릇대로 「쉬운 승리」를 오랫동안 누리고, 독일을 유럽대륙 내 유일 강대국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르주아 상대방들을 너무나 얕잡아 보았고, 그들을 「작은 벌레들」이라고 불렀다. 그밖에도 그는 그런 정책에 꼭 필요한 인내심도 눈대중도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그는 전쟁을 원하였다.







■  勝利냐, 絶滅이냐


1938년 가을 뮌헨 협정에서 그는 외교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것이 자기에게서 무력대결의 기회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오히려 속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시점에서 그가 무력대결을 펼쳤더라면 겨우 며칠밖에 견디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랬다. 그는 뒷날 이렇게 탄식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거나 다 양보했어. 겁쟁이처럼 우리의 모든 요구에 굴복했던 거지』


『마지막 순간에 그 어떤 개자식이라도 좋으니 협상안을 내놓도록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고 뒷날 그는 고백하였다. 그러나 무력 대립의 기회를 놓쳤다는 그의 걱정은 근거가 없었다. 뮌헨 협정 이후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체코로 진입할 수 있었고, 곧 이어서 그가 폴란드 문제를 제기했을 때는 아무도 협상 중재자로 나서지 않았다. 그의 맹세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마침내 全세계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자료를 바탕으로 추측해 보자면 이 순간에라도 히틀러가 원하기만 했다면 다른 나라들은 협상에 응했을 것이다. 어쨌든 적어도 영국측은 그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고백들이 존재한다. 폴란드 침입의 문을 활짝 열어 준 1939년 8월 모스크바 조약(獨蘇 불가침조약) 과 더불어 히틀러는 전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갔고 가장 중요한 조건을(공산주의에 대항한 방어벽─譯註) 파기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주장처럼 공산주의 혁명만의 적대자가 아니라 모두의 敵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초조하게 갈망해 온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히틀러의 결심은 잘 보이지 않는 두 가지 결론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그에게 그토록 많은 성공을 가져다 준 정책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미 1937년 말부터 그의 태도는 그때까지 지녀온 신중함, 교활한 동의, 거짓 맹세 등에 그가 마침내 신물이 났고, 「뮌헨의 영웅」 시절에 보여주었던 원시적인 싸움꾼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쨌든 거의 6년 동안 계속된 통치기간에 행해진 모든 정치적 활약 중에서 전쟁의지만이 그가 진정으로 의도했던 것이다. 그 절반이라도 진지한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의 수사법에도 「勝利(승리)냐, 絶滅(절멸)이냐」, 혹은 「세계권력이냐, 몰락이냐」 같은 근본적으로 非(비)정치적인 대립쌍이 점점 더 자주 등장한다. 1945년 봄 발터 헤벨 대사가 마지막 순간에 정치적 해결을 찾아야 한다는 요청을 하자 히틀러는 『정치? 난 정치를 하지 않아. 그런건 너무나 역겨워』하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결론은 過激性(과격성)이다.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정치적 상황이 자신에게 강요해 온 외교적 고려라는 것을 깨끗이 끝내버렸다. 마치 해방된 것처럼 장애물을 전부 치워버린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문서로 남긴 살인명령은 1939년 10월에 서명된 「불치병 환자」 학살명령서로서 거기에는 전쟁 개시 날짜가 적혀 있다.

유태인을 절멸시키겠다는 공개적인 위협은 1939년 1월30일에 나왔지만 실행은 그해 9월로 연기되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전쟁을 「강제로 만들어내고」 난 지 4주만에 그는 히믈러에게 동부의 「종족 경지정리」를 명령하였고, 열흘 뒤에는 친위대와 관할경찰을 투입하는 등 학살작전을 착착 진행시켰다.

과격화의 의지는 해가 가면서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 아마도 이런 과격한 성향으로 인해서 전쟁 초기의 빠른 승리들이 그에게는 아주 적은 만족감만을 가져다 주었다. 일생동안 그는 東西(동서) 두 개 전선의 동시 전투를 피하는 것이 독일 군사정책의 원칙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에 승리를 하자마자, 그리고 영국이 쉽사리 패배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신의 세계분할 계획에 동참하지도 않으리라는 확신에 도달하자마자 소련을 향해 동부로 전쟁을 확대하였다. 소련침공에 대한 최초의 암시들은 이미 1940년 7월에 나오고 있다. 그는 냉혹한 잔인성으로, 그리고 모든 정치적, 인간적, 혹은 도덕적 고려를 깨끗이 무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여기면서 가차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다. 심지어는 주변에서 제안하는 해방구호들마저도 포기하였다. 그는 위장의 세월을 보낸 다음 마침내 자신의 야만적인 자유를 몽땅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  軍部와 國民을 共犯者로




1941년 3월30일, 러시아 전투가 시작되기 정확하게 3개월 전에 그는 거의 3백명의 각군 고급 장교들을 불러놓고 눈앞에 놓인 전투를 「세계관 전쟁」이며, 「反사회적 범죄」에 맞선 「절멸 전쟁」으로서 「서부전선 전투와는 아주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1941년 6월22일에 전투가 개시된 지 2주가 지나자 그는 동부에서 「종족의 파국」을 야기하는 것이 전투의 목적이라고 표현하였다. 보고서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軍部(군부) 지도자들은 대부분 깊이 당황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항의하거나 퇴역을 결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1941년 3월 30일은 사실상 軍部의 共犯罪(공범죄)가 입증되는 날짜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잘못」이었다고, 혹은 맹세나 복종을 핑계로 삼을 수 있었던 일이 이제는 적어도 거기 참석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공범관계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장교들 앞에서 속을 털어놓은 것도 바로 이런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몇 가지 있다. 처음에는 지도부, 그리고 점차적으로 폭력적인 범죄를 통해서 全국민을 자기자신에게 묶어두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는 독일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잔인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심리적인 무장이 되어 있지 않다고 탄식하였다. 자신의 「살인명령」을 「철거」, 「특별대우」, 「최종결정」 등과 같은 은어들을 써서 감출 수밖에 없다는 사정이 그에게는 퍽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분명한 태도로 그는 소련 전선을, 공범자를 만들어낼 기회로 이용하였다. 개인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의식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退路(퇴로)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러시아 전투에서 처음으로 채택된 방식, 곧 대량학살과 전투작전을 한데 뒤섞는 방식 뒤에는 이런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수많은 위기의 순간에 히틀러는 「스스로 퇴로를 차단할 것…. 그러면 훨씬 더 쉽고 단호하게 싸우게 된다」는 생각을 고집하였다. 그럴 때면 「부러진 다리」라는 비유를 즐겨 이용하곤 하였다. 히틀러는 문명화된 사람들의 고통을 암시하면서, 도시 하나를 파괴하면 다리 하나가 줄어든다고 말했다. 나아가서 그는 그런 원칙과 대량범죄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냈다.






■ 『뭘 원하는 게요?』



유태인 대량학살에 대한 히틀러의 결심을 입증할 만한 명백한 증거는 오늘날까지 단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나타난 결론, 즉 폴란드에서 이미 자행되었고, 소련 전쟁과 더불어 체계화된 학살명령은 원래 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관할권의 혼란과 일부 하급 장교들의 독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은 히틀러의 극단주의를 제대로 보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조치들이 자기 의지를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통치의 기본원칙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괴벨스는 일기장에 「지도자」는 이 문제에서도 「가장 과격한 입장」이라고 적어놓았다.
군사상황이 전망이 없어질수록 히틀러가 말살정책을 더욱 더 가차없이 추진해 나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증자료가 있다. 1941년 말에 모스크바를 바로 눈앞에 두고 닥쳐온 겨울의 위기와 더불어 그가 자신의 전략 전체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유태인 박해가 과격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시에 그는 미국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마지막 퇴로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기파괴를 代價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자기 민족을 향한 히틀러의 최초의 협박도 이 시기에 나왔다. 그는 국민을 향해서 1941년 11월27일에 이 전쟁에서 「독일 민족이 더욱 강한 힘에 의해 몰락하게 되더라도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1942년 여름 戰勢(전세)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가 패배가 거의 확실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독일 민족이 이 치욕을 이기고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고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조치들을 점점 더 강하게 취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온 모든 작전명령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실망과 증오라는 동기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의 파국에서도 그것은 함께 작용하였고, 戰線의 뒤쪽에 방어벽을 쌓는 것을 극구 반대한 것이나 서부전선의 아르덴 산맥 공격명령을 내림으로써 오데르 강변에 있던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으로 진격해 들어올 길을 만들도록 한 것 등 理性(이성)에 반하여 히틀러가 고집한 모든 명령들에는 이런 동기가 들어 있었다. 작전 참모 중 한 사람이 젊은 장교들의 인명손상이 너무 클지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뭘 원하는 게요? 그럴려고 젊은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닌가!』







■  자기 민족 파괴의 의지




전쟁의 국면이 바뀌면서 히틀러의 생각은 점점 더 스스로 촉진하고 연출한 몰락의 그림들로 가득 채워진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1939년 이후로 그는 「세계권력이냐, 몰락이냐」의 양자택일을 자주 들먹였고, 그것은 지금 산산조각나고 있는 자신의 세계권력 야욕이나 몰락을 정말 문자 그대로 뜻하였다. 바로 이런 의도에 따라서 1944년 가을, 적군이 독일 영토에 접근하고 있을 때 제국 영토의 「초토화 작전」을 명령하고, 적에게는 문명의 폐허만을 넘겨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종말을 뒤로 미루려는 의지만이 그를 지배하였다.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이중적인 파괴의도를 보다 확실하게 수행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것은 유태인 파괴와 자기 민족 파괴라는 의도였다. 독일 민족은 이 거대한 운명의 전쟁에서 약자로 판명이 났고, 따라서 몰락하도록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상당히 진척시켰다.
입증가능한 모든 자료들로 추정을 해보면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몰락의 과정에서도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절멸이라는 「근원적인 법칙」이 확증된다는 사실만을 보았다.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군인들은 그가 서술가능한 전쟁목표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전쟁은 모든 시대에 있는 법이고, 처음에 동쪽을 향해서 이어서 북쪽,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서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쪽을, 그러다가 다시 동쪽을 향해서 전쟁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의 공격의지가 일정한 방향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소련을 향한 전쟁과, 그가 정복하기를 원했던 「무한한 공간」에 대해서도 그는 명백한 개념을 갖지 않았다. 한동안은 원탁의 장광설에서, 「영원히 꽃피어나는 국경」을 가진, 산업화되기 이전의 「에덴 동산」을 말하곤 했다. 이 국경지역에서는 가장 精選(정선)된 사람들을 만나서, 지속적인 싸움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독일민족을 훈련시킬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중동의 석유자원을 강탈하는 일과 인도 습격까지도 거론하였다. 자신의 求愛(구애)를 그토록 고집스럽게 거절한 대영제국과 인도에서 한 판 붙어볼 생각이었다. 모든 것은 오로지 거칠고 순간순간 나타나는 매력적인 표상일 뿐이었다. 터무니없고 맹목적이고 치졸한 생각들로서 그는 거듭해서 이런 제국주의적인 백일몽 속에 빠져들었다. 거기에는 문명적인 사고는 전혀 없고 철저히 정복, 노예로 삼기와 착취, 그리고 다시금 서둘러서 새로운 정복, 새로운 노예, 그리고 새로운 착취만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1942년 11월의 연설에서 그는 「공격, 공격, 또 공격이 자기가 일생동안 지켜온 원칙」이라고 제시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유례없는 파괴작업을 수행하였다. 그의 특징이기도 한 선동적 기질, 냉혹함, 몽상 등이 뒤섞인 가운데 깊이 손상된 병적인 생각의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불안한 점은 그가 이런 광적인 절멸과 파괴작업을 위하여 심리적인 손상이 없는 하수인들을 무수히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글을 보면, 명령을 받고서 작은 지역인 루블린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것은 「극히 평범한 사람들」, 즉 경찰관들, 중년의 家長(가장)들, 특히 이 경우는 함부르크 노동자 계층 출신으로서 전혀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는 보통의 家長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고, 소대의 명령권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주 당연히 살해임무를 수행하였다.





■  히틀러의 복사판



세부사항은 차이가 있지만 그런 사건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히틀러의 이름과 결부된 두려움은 그 개인에게만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사람들에 대해서 폭로한 진실, 사람들이 언제라도 터져나올 수 있는 해명할 길 없는 야만성의 성향을 가진다는 사실에 귀착된다.
이런 생각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감은, 히틀러가 죽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의미가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특이한 사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베를린이 소련군에 접수되면서 총통 사령부 지하 벙커 출입구 근처의 폭탄맞은 자리에서 갈갈이 찢기고 절반쯤 불에 탄 모습으로 그의 시체가 발견되고 난 이후로 그가 던지는 그림자는 점점 더 깊어지고 길어졌으며, 그가 행한 惡行(악행)들에 대한 두려움은 빛이 바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커졌다. 그가 놓친 희생자들, 히틀러 이전, 동시대, 히틀러 이후의 권력자들이 학살한 수백만의 다른 희생자들은 세계의 기억 밖으로 밀려났다. 히틀러 문제에 대해서는 일종의 正敎信仰(정교신앙)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그 법칙을 인정하고, 악마 외에 또 다른 악마를 만들지 말라고 요구한다.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는 걸프戰(전)이 한창일 때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을 가리켜서 「히틀러의 복사판」이라고 말했다. 물론 「유일한」 복사판은 아니었다. 엔첸스베르거는 독일 대중과 이라크 대중, 그들의 맹목성, 자기파괴적인 복종 사이에서 어떤 연결 맥락을 찾아냈던 것이지만, 그는 검토해 볼 생각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단행위를 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결같은 反論에 부닥쳤다. 그것은 분명히 상투적인 해석틀 속으로만 전망을 확대할 뿐이다. 엔첸스베르거는 이런 해석틀에서 벗어나 범인류적인 문제를 보았고, 명백하게 파괴를 지향하는 지도자 유형, 그리고 그들의 광적인 몰락 욕구가 어떤 내적 연관성을 가지는지, 집단적인 질병과 그런 질병을 적으로부터 진단받으려는 욕구, 어린 아이 머리 위에 놓인 독재자의 손길에서 언제나 다시 느끼게 되는 감동이 도대체 어떤 자기연관성을 가지는가 질문하였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도로 발달된 국민조차도 펄럭이는 깃발 아래 무리를 지으면서, 공통의 맹세를 하면서 혹은 한솥밥을 앞에 놓고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대체 어떤 연유인가, 그리고 전체주의적인 열망은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1945년 봄 유령이 다 된 독일 정부를 위해 죽어간 최후의 독일 병사들은 과연 그런 전체주의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런 질문들은,. 계몽주의적인 통치자像(상)은 문헌과는 다른 것인가, 그리고 히틀러가 전체주의 시대의 상징인물이라면 그에 대항할 논박도 이미 찾아냈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만들어낸다.




■  고독한 대중의 열망 / 惡의 표상



계몽주의는 물론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현상이고, 통일적인 사상이라기보다는 고귀한 기대들이 결합된 목소리들의 혼합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식으로는 계몽주의에서 인간이 천성적으로 선하고, 분별력이 있고 이성적인 존재이며, 스스로에 대해서 알고 있고, 자기 결정력을 가진 존재라는 생각을 얻게 된다. 의문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낙관적인 계몽주의 인간관에 히틀러는 종지부를 찍었다. 20세기의 선동적인 권력자들과 달리 그는 「고독한 대중」의 열망을 폭로하였다. 고독한 대중은 자기에게 명령을 내려줄 강한 의지력, 공동체, 연극적 요소, 헌신에의 욕구를 지녔고, 모든 점에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결정을 내려주기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19세기 프랑스 정치학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고독을 두려워하며, 고독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만과 망상까지도 기꺼이 견딘다는 것이다. 이런 통찰이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독일에는 히틀러의 정치적 상승에 기여한 것 같은 공포심과 원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익숙한 국민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감이 사라지는 것, 사람들의 이주, 그리고 세계화, 이 모든 발전 하나하나는 깊이 뿌리박은 본능을 건드리는 것들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동원될 수 있는가, 문명·도덕·정의규범이라는 방파제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그리고 이런 것들이 더욱 강한 보루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등을 깨닫고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히틀러가 남긴 유산의 일부다.

■  惡의 표상

현대는 저 히틀러 시대가 남긴 가장 중요한 이 유산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에 문명을 위한 제한들을 쉬지 않고 무너뜨리고, 평범한 것에 대한 즐거움을 찬양하고, 禁忌(금기)들을 경멸하고, 방해가 되는 규범들을 비웃으며 좋아하고 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시대, 세계를 하나로 엮는 네트워크의 시대에 히틀러의 복사판이라니 얼마나 기이한 생각이며, 얼마나 당치도 않은 생각인가 하는 주장으로 시대는 그런 염려들을 달래고 있다. 그러나 인류학에 시대착오란 없다. 같은 일이 매일 새로 시작된다. 환경과 표어들이 바뀔 뿐이다. 그 누구도 밀로셰비치 같은 인물이 이 무대의 마지막 배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리고 「동화책에나 남아 있는」 기념비쯤으로 여겨지던 「악한 사람」이라는 표상을 히틀러가 세계에 되살려 놓았다는 것이 히틀러가 남긴 또 다른 중요성이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두려움을 위해서 살아 있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때 「惡」이라고 불리던 것이 실패한 사회정책, 사회적인 불리함 등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는 추상적인 표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해석들은 계몽주의의 인간상을 구해 보려는 의도를 품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끝나가고 있는 세기는 그것을 거부하였으며, 惡이 현실적인 권력이 되는 일이 가능하다는 예측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아직도 부정되고 있는 히틀러의 유산이다. 그것은 수많은 현상들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고 히틀러는 그것을 아주 뚜렷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그에게서 시대에 맞게 변신한 惡의 모습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한 개인으로서 그는 아주 공허하고 텅 비어 있어서 아무런 支持點(지지점)이 없는데도 그가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어째서 이 시대의 다른 어떤 권력자보다도 더욱 확고하게 논쟁이나 경고 속에 남게 되었으며, 현대의 의식에 아직도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가 하는 이유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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