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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딴지일보]사라진 나라, 동독을 알켜주마

페이지 정보

작성자 퍼옴이름으로 검색 조회 6,395회 작성일 02-03-08 22:44

본문

사라진 나라, 동독을 알켜주마
1999.11.15.월요일

딴지 독일 특파원 아르쉬로흐

안냐심까..독일 특파원 아르쉬로흐 임다. 꾸우벅~~~~


먼저 지난번 헬가 피히트 할무이 돕기에 적극 동참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슴다. 지난 24호의 사고를 통해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는 독자 니들이 서명해준 덕분에 임다. 박수우~
짝짝짝...


할무이 상 받으러 한국에 가시니, 기쁘기는 하지만 할무이만 가고
내는 여기 남았다는 생각에 괜시리 고향생각 났심다.. 훌쩍~ 그래서
본기자 고향을 찾아 나서기로 했슴다. 내 고향이 한국이지 어디냐구?


한국이 제1의 고향이기는 하지만, 독일에서의 고향은 옛날
동독지역으로 체코와 가까운곳에 있는 드레스덴(Dresden)임다. 거기에
처음 유학와서 1년동안 살았슴다. 드레스덴이 어떤 곳인지는
본기자가 옛날에 쓴 "신나찌를
까발겨주마
"를 보시면 알검다. 거기는 여전히 신나찌 넘들이
난리 부루수를 땡기고 있지만, 본기자에게는 항상 따뜻한 고향임다.
항상 나를 반겨주는 제일 친한 친구넘들도 거기에 삼다.


그런데 이번에 놀러가서리..많은 것을 느꼈슴다.


mauer1.jpg


올해로 독일 통일 10주년이 됩니다만, 동독은 아직도 하나의
독일이 아닌 서독이 정복한 "

식민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슴 아픈 현실임다. 통일 10년이
넘었지만, 동서독의 격차는 하나도 변하지 않거나, 오히려 더
벌어진 느낌을 받았다 이검다.

독일의 실업률은 올해 9월 현재 노동부 발표로 전체 평균 10.1%이지만
요걸 살짝 디비보면 서독은 8.3%이고 동독은 무려 17.2%라는 말임다.
그러니까 동독에서는 다섯명중에 한 명꼴로 실업자인 셈임다.
더구나 서독에서의 실업자 수는 점점 줄어 들고 있는데, 동독은
거의 변함이 없슴다. 동독인들에겐 희망이 없다 이말임다.


b30.jpg오는 11월 9일은
역사적으로 베를린 장벽이 동독민중들의 손에 의해서 나가 자빠진
날임다. 동시에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알려온 이날을 어찌 걍
넘어가겠슴까?


그래서, 이번호에는 동독을 함 디벼볼까 함다. 사실과
통계에 기초를 둔 분석도 있지만, 살면서 동독인들과 그들의 문화와
부대끼면서 느낀 것들도 사진과 더불어 소개 할까 함다. 그니까 좀
딱딱하거나 못 알아 듣겠는거는 넘어가면서 읽어도 무방함다.


특히 울나라 자칭 통일을 준비한다는 뇬넘들 잘읽고, 정신
차리시기 바람다.


자 그럼 감다.




1r-s.gif

점점 높아가는 국가에 대한
불신

지난 10년간 동독의 생활수준은 졸라 높아 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독국민들의 정치적인, 경제적인 불만 역시 거기에 비례하여 점점
더 높아가고 있다. 씨바 살기 좋아졌는데 뭔넘의 불만이냐구? 잘 함
들어바바바.


동독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의 붕괴 직후 동독에는 그들의
모든 정치 경제제도가 하루아침에 사그라 들고, 서독의 제도가 그
자리에 떠억하니 들어 앉게 되었다.


그 제도들이 뭐냐구? 우리가 고딩때 사회시간에 배운
의회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 이런거쥐... 대다수의 동독국민들은
이런 서독의 제도가 대빵인줄 알았다. 공산당 일당 독재에 신물이
난 동독 국민들에게 의회민주주의는 한층 발전된 민주주의로
받아들여졌고, 시장 자본주의는 개인적이고 능력위주의 제도로,
낙후된 동독경제를 일으켜 세울 비아그라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거기에 곁다리로 끼어서 다른 서독의 제도들, 거니까 보건, 학교,
직업교육제도 등도 전부 서독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왜냐구? 나라가
망했으니까! 그것도 동독인들 스스로가 시민혁명을 통해서 장벽을
무너뜨리고, 서독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말이다. 물론 통일의
과정에서 첨부터 동독인들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주장한 건
아니지만, 서독과의 통일논의 과정에서 동독정부는 스스로 무너져
갔다.


그럼 통일 10년을 맞이하는 지금, 이런 제도들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을까? 답은 '글쎄올시다' 이다.


여전히 의회민주주의는 그전처럼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긍정되고
있지만 독일 정치기구들에 대한 신뢰나 연방의회, 정부, 경찰, 법원,
군대 등에 대한 신뢰는 제자리 걸음이거나, 오히려 떨어졌다.


한 연구소(Allensbacher Institut fr
Demoskopie
)에서 1995년 초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동독
사람들의 73%가 국민들이 법앞에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고,(서독은
67%), 72%의 동독사람들이 자신들은 법에 의해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독은 33%), 53%의 동독사람들은 독일의
사회제도들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서독 28%), 서독과 비교해서
엄청난 불신이다.


Berlin2.jpg90년 초에는 대다수의
동독인들이 독일의 경제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이기
우찌된 일인가 말이다..


대다수의 새 독일
국민들은 우짜뜬 지금의 새독일 연방 국민들은 시장경제를 하나의
착취라는 개념으로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단지 10%정도만이 독일의
정치, 경제 시스템이 약자들에게 사회적 안정과 보호를 보장한다고
믿는다.


새 독일 (Die neuen Bundeslundern) : 씨바 졸라 웃기는 말이다.
독일에서는 통일되고나서 동독은 새로 연방에 편입되었다고 해서
새독일 연방이구 옛날 서독은 구독일연방으로 불린다.


동독에 가보면,
전부 낡은 건물에 높은 실업률로 하나도 새 거 같지 않은데,
이름만은 근사하게 새독일 연방인것이다. 이름 얘기 쬐매 더하믄
보통의 일상용어에서 서독인은
베씨(Wessi)
부르고 동독인은
오씨(Ossi)라고 한다.


서쪽의 West라는
단어와 동쪽의 Ost 라는 단어에서 따온말인데, 대부분의 동독인들은
자신들을 오씨라고 부르면 졸라 싫어한다. 나중에 예를 들어 줄께..


2r-s.gif동독넘들은 전부 빨갱이?


그치만 동시에 개인의 물질적 상황들은 통일 이후에 더
나아졌다고 많은 넘들이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넘들의
대다수는 구 동독 시절과 비교해서 더 나아졌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도 왜 도대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졸라 불만 많은
세력들이 되가고 있는가? 울나라하고 비교해보자. 1960년대 박통
이후에 울나라에서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이라는 구호하에 철저히
뭉게져 버렸다. 여기에 궁민들도 어느 정도 살게 되니까 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박통을 인정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지까지 하는
엽기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박통이 죽은지 2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거기서
헤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울나라가 좀 심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회학에서는 경제발전이라는 경험적인 삶들이
민주주의라는 주체적인 삶들을 누르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동독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경제적 지위들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국가기구들에 대한 신뢰도나 법치국가에로의 긍정,
시장경제의 수용들이 오히려 퇴보되고 있다. 많은 서독의 기자들과
학자들은 동독에서 독일의 법치국가나 서구적인 시장경제의 수용이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로 동독넘들이 과거 사회주의 시절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일종의

색깔론을 들먹인다.

bd2.jpg

bullet11.gif (134 bytes) 이넘들의 주요 근거는
하나의 권위적인 시스템을 몇십년 동안 경험한 사람은 민주주의
제도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독국민들은 몇
십년동안 국가감독하에 스스로의 능동성없이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장경제와 개인들의 사회참여 혹은 개인 책임 등을
요구한다는 것은 성숙되지 않은 동독인들에게 너무나 성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생동안
사회주의 선전에 내맡겨져있던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당연히
착취로 받아들여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동독사람들의
국가기구에 대한 회의, 관료적인 질서, 동독인들의 낮은 성취욕,
그들의 정치적인 소극성, 그리고 낮은 준법정신, 이 모든것이
그동안 동독인들이 사회주의라는 잘못된 제도를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싸잡아 비난한다.

실제로 독일의 정치,
경제적인 시스템들에 대한 동독인들의 긍정도는 통일 첫해인 1989년에는
대단히 높았었다.

c4.jpg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감소 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77%의 동독사람들이 시장경제를 신봉하였으나,
2년이 지나서는 간신히 50%정도만이 긍정을 하였다. 그 사이에 약 3분의
1정도의 숫자가 이탈한 것이다.


1990년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서독의 제도를 그대로 넘겨받는 데 찬성을 했다. 그러나 5년뒤에는
연방의회와 정당들을 시작으로 학교교육과 직업교육, 보건에
이르기까지 회의적으로 보여졌다. 동시에 지난 몇년 동안 싸그리
없어진줄 알았던 사회주의에 대한 호의는 점점 더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1990년 7%에서 1995년 24%로 뛰어 올랐다. 또한 구
동독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은 지난 10년동안은 동독지역에서만
지지를 받았으나, 98년의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5%이상의 득표를 하여,
마침내 연방의회내에서 원내 교섭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동독지역에서는 20% 안팍의 지지율로 녹색당과 자유당을 앞서고
있고, 일부지역에서는 지역 연립정부에 참여까지 하고 있다.
공산당이 싫어서 통일을 한사람들이 도대체 왜 이럴까?

많은 이들은 이런
불온한 사상(?)들이 1989년 이후에 하나의 잠복기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통일의 과정에서 잠시동안 그 의미를
잃었었으나 오늘날 커져만 가는 통일의 틈사이로 다시 그 의미를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요약하면,
동독의 경험을 가진 나이든 사람들과 사회주의 선전선동에 감염된
뇬넘들이 서독과 비교해서 서독인들의 동독인들에 대한 지나친
평가 절하와 불평등으로 인해 점점 늘어 났다는 것이다.


바뜨, 본기자 이 시점에서 이런 주장 하는
넘들에게 한마디 안할 수 없다.


조까 !

이렇게 씨부리는 넘들은 다분히 극우적인
성향인 넘들이며 자신들 주장의 전제조건을 지조때로 만들어서
얘기하고 있다. 그 조건들은 동독사람들이 동독시절에 그들에게
주입된 것들을 쉽게 벗어 던질 수 없게 사회주의화 되었다는 것이다.


본기자 줏어들은
바로는 이런 걸 바로 사회화 가설(Sozialisationshypothese) 이라 부르는데
이제부터 이게 왜 틀렸는지 디벼 줄란다..

이거 조심해야 한다.
울나라도 통일되면 분명 많은 부칸 인민들을 민주주의교육이 덜된
넘들, 아님 전부 빨갱이들, 그것도 아님 졸라 불쌍하게 보거나
할텐데, 바로 위와 같은 눈으로 그들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색안경
벗어야 21세기 명랑 사회 구현한다. 그러니 함 들어봐
!



bullet11.gif 어떤 하나의 관념( 예를 들어
사회주의 )이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개나 소는 빼구..)들에게
정확히 주입되었다는 의미로의 사회화는, 이런 사회화가 완벽히
진행되어서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 그 사회의 사회구조와 문화가
광범위하게 일치된 관계일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동독은
안정과는 전혀 거리가 먼 나라였다. 동독의 시스템은 사회구조와
문화 사이에 깊은 틈을 갈라 놓고 있었고, 정치 질서와 일상생활,
공식적인 지배계통과 개인적인 자각같은 것도, 위에서 부터 아래로
역시 쫘악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동독의 시스템들은
인민들의 마음을 얻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Wache2.jpg더우기 동독이 생긴 이래로 SED정권(동독의 유일
집권당이었던 독일 통일 사회당)과 국민들 사이에는 아주깊은
불신의 골이 있었는데, 이것은 2차대전후 60년대 까지 동독경제가
서독에 뒤쳐지지 않을 때까지는 비교적 작았으나, 그 이후로는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점점 많은 수의
동독 국민들이 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 씨바 어떤 개가 짖냐"하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서구의 사회 시스템에 점점 많은 가치를 부여
하게 되었으며, 서구사회는 많은 이들에게 완전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준이 되었다.

즉, 동독을
평가할때 그 시스템과 동독국민들의 문화, 삶은 서로 따로 떼어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동독은 그
시스템 자체가 비효율적인 것들이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국민들은 스스로 낮은 노동성취욕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동독은 관료국가였기 때문에 국가 비밀경찰들과 그들이 만든
감시구조는 동독 국민들에게는 정치적인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민주주의에로의 참여
등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동독이 비민주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독의 관계속에서
민주주의적인 관계들을 창출해 내고 싶은 욕구들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가 비효율적이 었기 때문에 노동 성취도에 대한 올바른
방향성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국가 시스템이 모든
부문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감독하고 참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로운 사회의 참여를 동경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
사회의 주입된 가치, 즉 공식적이고 선전 선동에 의한 가치들은
국민들 사이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고, 기냥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b46girl.jpg
밤무대
아가씨들도 동참한

동서독의 통일

좀더 자세하게
디벼보면 그 옛날 동독시절부터 살아왔고, 89년 장벽붕괴의
주역이며, 지금의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90년이후의
변화하는 국제관계속에서 움직였던 동독인들은 항상 같은
넘들이라는것이다.


뭔 말인가 하면,
지금의 자본주의 제도의 잘못된 점을 동독인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만, 동시에 옛날 동독제도의 잘못된 점은 더 잘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동독인들이 서독의 제도들과 시장경제의 수용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은 사회주의적인 입장들로의 회귀가 아니라 통일의
부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라 해석 할 수 있다.

결국 지금
동독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장경제에 대한 점점 낮아만 가는
신뢰도는 이넘들이 사회주의자들이라서가 아니라 동독의 경제적
문제와 현재 보여지는 서구 자본주의 모델의 위기하에 어쩌면
당연히 나타나야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리고,
동독사람들이 보고 놀란 자본주의의 또 다른 행정관료적인
모습들은(우리식으로 말하면 관리들의 복지부동) 그들이 서구의
국가기구시스템에 대한 환상을 깨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직도 많은 수의
동독 국민들이(1995년 72%) 스스로 자신들을 이등국민이라고 느낀다.
이 수치는 지금까지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1989년 이후에
동독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즉시 훨씬 더 나아질 것을 기대했다.
그들은 지난 40년 동안 상대적으로 그늘진 삶을 살아왔기에 서독의
잉여물들을 넘겨받고, 서독의 제도가 동독에 도입되면 경제성장을
이루어 내리라 믿었던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서독의
경제 기적은, 1989년 이후 동독인들에게 자신들도 이제 그 발전의
선상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몇십년 동안 가져 보지 못한
것들을 만회할 좋은 견본이었다.


B21.jpg

창문너머의
장벽


이런 동독인들의
생활과 바램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영화를 하나 소개한다.
독일영환데 통일 10주년을 맞이 하야 이제 막 개봉한 따끈따끈한
영화로, 제목은 존넨알레(Sonnenallee) 라고 우리말로 하면, "태양의
거리" 혹은 "햇빛거리"쯤 된다.

실제 동베를린에 있는
졸라 긴 거리의 이름이지만, 당시 어두웠던 시대를 빗댄 역설적인
제목 같기도 하다. 70년대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졌을
때 이
거리 한가운데를 장벽이 뚫고 지나갔다. 여기 뿐만아니라, 베를린의
많은 지역이 바로 자기 집앞을 장벽이 지나갔다.


B25.jpg

정원손질
하러 가기 위해 

벨을 누르는 모습


사진에서 보듯이
바로 자기집 창문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더 엽기적인 경우엔
자기집 정원을 가로 지른 집들도 있어서, 당시만해도 자기 정원을
가려면 벨을 눌러서 보안원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단다.

이 영화는 바로 장벽
앞에서 서독의 발달된 문명을 동경하는 동독인들을 나타낸 것으로,
보통 서독에서 만든 동독소재영화는 거의 동독인들을 희화 시키는
것인데, 이건 같은 코미디영화이기는 하지만, 전혀 비하하는 내용이
아니고, 동독넘들 스스로도 소품 하나 하나가 자신들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라고 했다.

독자 니들 중에 혹시 영화
수입하는 뇬넘들 있으면 꼭 수입해서 비디오로 라도 울나라에서
볼수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영화 정말 재밌다. 


d.jpg

동독에서의 생활을 얘기하자면, 몇시간을 해도
모자라지만, 그중 기억에 남는 거로는 전화 얘기다.

본기자 이미 94년에 핸드
샀다. 돈이 많아서? 아니. 동독에는 전화가 없기 땜이다. 상상이나
해보라 전화없는 생활을.


통일 5년이 지난 그 당시만
해도 전화신청하면 보통 1년을 기다려야 했구, 그것도 운이 좋아서,
전화케이블이 건물까지 연결된 집에만 전화가 가설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건물 밑으로 땅파서 전화국서부터 전화케이블 새로
묻어야쥐..아마 몇
년은 걸릴껄.. 한국에 전화해서
생사여부를 부모님께 확인시켜야 하는 유학생 신분인 본기자. 하는
수없이 핸드
을 샀다.


근데 이거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왜? 친구넘들이 전화가
엄쓰니까.. 걸때가 없는 것이다. 쩝.. 

대신에 거의 모든 집앞
문에는 두루마리 휴지같은 종이 뭉치가 걸려 있다. 요것이 뭐에
쓰는 물건인고하면 '친구들이랑 술마시다가 언넘을 부르고 싶다.'
요러면 울나라에서는 쉽게 핸펀 한
통화면 달려온다.


바뜨 동독에서는 그
집까정 자전거 타고 가서 불러와야 했다. 그넘이 집에 없으면? 그
두루마리 종이를 잘라서 메모를 남겨 놓는다. "

영구야 학교앞이다 술마시러와라, 땡칠이도 와있다
"
뭐 이런내용이겠지..
그럼 신기하게도 한 시간쯤
지나면 그 넘이 찾아온다.


어릴 때부터
전화없이 살아본
적이 없는 본기자 첨에는 무지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하나도 안 불편하더라. 이 전통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지금도 드레스덴의 집들 앞에는 많은 메모지들이 붙어
있다는 말씀.


이상 전설따라
삼천리 였슴다..

3r-s.gif동독과 서독넘들의 동상이몽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동독인들이 통일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독넘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근빠따로
서독넘들에게도 통일은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못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통일은 직접적으로 와 닿는 그 무엇이 아니었으며, 이미
동독의 상황은 더
이상
그들에게 흥미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독일의 분단은 깊이 내면화되어 있었고, 또
사람들마다 독일의 통일을 위하여 상반된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다.

b42wessi.jpg

무너지는 장벽을 서독인들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다.


그들도 지금의 우리가
부칸에 대해 별로 아는 것과 다를바 없이 동독에 대한 정보의 부재
속에
온리 추측만으로 동독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요 추측이란
무엇이었나?

동독인들에 대한
험담과 평가절하들이었다. 즉 서독과 동독 사이에는 똥꼬깊수키
이미 대화의 단절이 있었던 것이다. 서독인들이 동독을 통해
보았다는 것들은 파산된 경제와 비민주주의, 국가 비밀경찰을 통해
지배받는 사회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동독사람들은 그들이 똑같은 사람으로 대우 받을
것이라
믿었고, 아까와 같이 서독인들이 말하는 것은 그들이 옛날
동독에서의 생활에 대해 자기들끼리 이미 비판하던

것들이니까
동독의 국가시스템에 반대했던 자신들은 오히려 더 좋은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독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억울하게스리 이 모든 추측에 따른 책임을 자신들이
몽땅 다 뒤집어 쓰는 것이었다. 파산된 시스템의 협력자로서, 그
시스템의 나쁜 것들을 물려 받았기에 동독인들 역시 그 시스템처럼
비능률적인 넘들이라는 선고를 서독으로부터 받고 만 거시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졸라 나가 놀다가 돌아온 형제 자매를 반갑게 맞이하고
기뻐하는 한 핏줄이 아니라 냉엄한 심판관의 자세로 맞았다. 물론
그들을 자신들과 같은 독일인으로 인정하는 것도 거부했다.

동독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것과 서독인들이
동독으로부터 넘겨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서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평가절하했다. 사실 동독에 대한
평가 절하는 동독시절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없애 버리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었다.

b38.jpg

그러나 비효율적이고 통제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낸 혹은 동조한 이들이라는 서독인들의 의심과 책임추궁에
대한 동독인들의 대답은, 그러한 동독의 국가체제 내에서도 그들은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노력했으며 이것이 없었다고 한다면 89년의
장벽 붕괴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독인들은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부터 동독인들의 성취욕과 성취능력의 부족을 추론했고,
그 시스템의 권위적인 성격으로부터 그들의 예속성을 이끌어 냈다.
심지언 성스럽게 보장되어있는 국가로부터의 연금 청구권으로부터
동독 국민의 비자주성을 들추어 냈다.


이넘들도 뒤집어
보는 데는 딴지이상으로 소질이 있는 넘들인가 부다. 이에 대해
동독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무(
)에서 유()를
창조하는 비형식의 예술가로서 이해했다. 그들은 부족한
경제속에서도 수출품을 생산해 냈으며, 또한 당에서 요구하는
정치적 요구들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국가행정도
공산당 제멋대로인 사회주의의 정글에서의 생존경쟁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식으로. 사실 동독의 모든 제도들이 서독보다
못했던것은 아니다. 다만 서독에서 동독시스템의 우월한 면들도
한꺼번에 평가 절하로 묶어 버렸다. 예를 들어 직업교육을 포함한
교육시스템, 주택공급, 사회보장과 의료보험 이런
것들은
많은 이들이 동독도 서독 못지 않게 우수했다
고 한다.


Ampel3.jpg

본기자가 보기에 아무리 동독에서
넘겨받을 게 없다고 해도, 이것만은 꼬옥 서독으로 도입하고 싶다.
뭐냐구? 좀 엽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바로 신호등이다.

그중에서 횡단보도에
설치된 건너가라는 표시인 이 파란 신호등은, 정말 엽기적으로
생겼다. 말로 하면 조디 아프니까 사진으로 보여줄께.

ampel1.gif

ampel2.gif

신호등 그림을 확대한 것


어때 ? 모자 쓴
땅딸한 넘이 아주 구여운 모습으로 건너가고 있지? 서 있을 때는
앙증맞게 팔을 벌리고있고.. 이 신호등을 좋아하는 것은 본기자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서독넘들도 이게 서독꺼보다 좋다고 한다.
근데
이 동독의 신호등이 멋대가리없는 서독의 신호등으로 전부 바뀔
계획이다.


벌써 부터 여기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은 동독신호등 구호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걸
보고
본기자 한마디 안할 수 없었다.


" 씨바
전국민이 원하는데 저걸 꼭 바꿔야 하냐? 도대체 이유가 뭐야?"
했더니 평소에는 띨띨하던 본기자의 꼬봉 도미닉 넘 왈, "너
세상 어느
나라에서 정복자가 식민지의 제도를 역수입하는거
봤어? 자존심이 상해서 안할
껄" 하는 것이 아닌가 (음..
이넘에게도 이렇게 날카로운 면이 있을 줄이야..) 글타 서독에서는
그 신호등이 못
생겨서가 아니라 단지 동독의
문물이라서 없앨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trabi2.jpg동독을
대표하는 문물(?)을 꼽을 때 신호등과 함께 당근 동독의 티코라고
불리는 트라비Trabi(Trabant의 줄인말)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차가 왜 유명한고 하면, 이넘의 차는
차체가 쇠로 만든게 아니다. 정말 엽기적인 넘이다. 일단 사진을
보고 얘기하자. 이차는 그야말로 경차로 울나라 티코와 견줄만하다.
최고시속 100키로라는 어마어마한 속도에, 배기량 600cc 와 26마력의
힘(울나라 마티주는 800cc, 51마력) 을 자랑한다.


이 넘의 차체는 뭘로
만들었느냐.. 정확한 성분은 알수 없지만 플라스틱의 일종으로,
보통차는 발로 차면 차체가 찌그러지지만, 이넘은 발로 차면
플라스틱이 뿌러져서 구멍이 뻥 뚫린다. 상상해보라. 차 문짝에
발자욱 구멍이 뻥 뚫린것을... 그래도 동독때는 이 차를 하나
배급받으려면 최소한 10년을 기다려야 했단다.

blin91tra.jpg

아는 넘 중에 면허증이 없는 넘이
있어서 이유를 물어보니까, 면허증 있어봤자, 자동차 배급받을려면
늙어 꼬부라 질텐데 뭐하러 면허증 따냐는 거다.

그래도 트라비는 동독
시절만 하더라도 동독을 대표하는 자동차로 동구권에 수출도 하고,
많은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궁민차" 였다.


통일 이후에는 대부분의
동독산업처럼 이 자동차 공장도 문을 닫고 지금은 생산도
중단되었다. 그래도 많은 동독넘들은 아직도 이차를 사랑하고
아낀다. 아마도 이 차를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나
보다. 그래서 100키로도 안
나오는 속력으로 서독의
아우토반을 당당하게 달리는가 하면 징한 경우엔 이차를 개조해서
스포츠카로 만들기도 한다. 그럼 이차가 고장나면 어떻게 고치지?
수리점도 없는데...
이 방법도 한 골때림 함다.


트라비는 통일이후에 거의
폐기 처분되어서 지금도 30만원 정도면 살

수 있다. 그러니 차를
고칠려면 아예 차를 한대 사서 거기서 부품을 뜯어서 쓴다는 것이다.
본기자 사는 동네 언넘도 이 차를 두
대 사서 수시로 부품을 뜯어 쓴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수요를 공급이 못
따라갈 정도다.


통일 이후에는 이 차를
주제로 영화도 찍었다. 물론 서독넘들이 찍은거라 내용은 별로다.
차를 타고 동독가족이 첨으로 서독을 여행하며
벌이는 각종 엽기행각을 찍은 건데, 웃긴다기보다는 서글프다(이
영화를 보고싶은 뇬넘들은 울나라에도 비디오로 "트라비에게
갈채를"(Go Trabi Go)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으니 찾아 보기 바란다).


글고 울나라에도
티코를 주제삼아 티코 시리즈라는게 있듯이 독일에도 이차를
주제로 트라비 시리즈가 있다. 내용은 티코 시리즈랑 비슷하다.
몇개 소개해보면,


- 트라비 중고차의
가격을 두배로 올리는 방법은?

답: 기름을
만땅으로 채우면 된다.(휘발유 값이 더 비싸니까)

- 트라비가 최고
속도로 달릴때는?

답: 견인차에
견인되어 갈때

- 미국넘이
우편으로 트라비를 주문했다. 도착한 트라비를 보고 미국넘
말하기를

"우와
독일넘들은 너무나 철저해..진짜를 보내기전에 먼저 플라스틱
샘플을 보냈잖아!!!"



뭐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대부분의 동독을 소재로 한 코미디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을 비하하는 내용들이다. 아무리 서독넘들이 동독을 비하해도
동독넘들은 할 말이 없다. 왜냐면, 동독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이미 사라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래서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첨에는 마치 외국에 온 것같이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말은 통한다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식으로 하면 찐한 부칸 사투리이므로 처음 누구를 만나면
"너 도대체 어디서 왔냐?"하는 질문을 받는다. 이걸 좀더
깊쑤기 디벼보면..

4r-s.gif잃어버린
나라, 잃어버린 정체성


동독인들이
자본주의사회에 불만을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향수란 지난 날에 대한 열망적 요구이다. 아무도
옛날의 동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 약 15%이하의
사람들만이 옛체제를 희망한다.- 이들은 대부분 옛날 관료들이다.
이들은 통일되고 자신들의 권력을 잃어 버려서 지금 사회에 졸라
불만이 많다. 예를 들어 동베를린은 울나라 평양 처럼 고급
관료들만 살았던 곳인데, 얼마전 끝난 베를린 선거에서 구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은 무려 40%넘는 표를 얻어, 동베를린에서
제일 많이 득표한 정당이 되었다. 보통 다른 동독지역에서 민사당은
약 20%정도를 득표하는데 그 두 배이상을 얻었으니, 골때리는 일이라
생각해 동독넘한테 물어보니, 그들은 대부분이 옛날 관료들이라서
그렇단다. 그넘들에겐 당빠 옛날 체제가 더 좋았겠쥐
)


이들 이외에 통일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다. 사람들은 다만 그들 스스로의
자긍심과 가치를 실현하려 할 뿐이다.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로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느끼고
싶어 한다. 이런 소외의 예를 들어 줄께.


m3f3-1.jpg

본기자 지금 서독에서 독일뇬넘들과
같이 한집에 살고 있다. 울나라 드라마 "넘 셋, 뇬 셋"
생각하면 돼겠다.

나까지 전부
네뇬넘이 사는데, 두 뇬넘은 서독에서 온, 즉 베씨(Wessi)이고, 나머지
한뇬은 동독에서온, 즉 오씨(Ossi)이다.

이 오씨뇬 이름은
프란치스카 인데, 올해 수물두살의 팔팔한 뇬으로 통일 당시에는
그니까 열 두살로 거의 암생각없던 때였다. 동독시절의 기억이라야
단체로 행진하고 뭐 그러던거란다. 이뇬 동독체제 졸라
싫어한다.

지금은 토목공학
전공하고 있는데, 만약에 동독 안에서라면 대학공부는 어림도
없었다. 왜냐고? 이뇬 이모가 서독으로 도망갔거덩. 글키 땜시 이뇬
가족은 항상 이웃들에
의해서 감시당했고, 당성이 좋아야 가는 대학은
꿈도 못꾸었다. 그니까 동독 싫어 하는건 당근빠따쥐..

wache3.jpg

장벽위의 동독 국경수비대

이들은 동독 탈출자를 사살했었다.


얼마전 우리
가축 네마리가 오손도손 앉아서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이런 저런
얘기하다 주제가 동독으로 흘렀다.

과연 동서독의 차이는
없는가 하고 농담반 진담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만 가축
중에
한넘인 크리스티안이 조디를 놀리기를, "야 프란치스카 그거
알어? 너만 없으면 말야, 우리가 너 오씨(Ossi)라고 부르는 거?"하고
말했다. 물론 농담이다.


우리는 한번도 이뇬을
오씨라고 부른적 엄따. 근데 이뇬 얼굴 맛탱이가 확가더니, 걍
밥먹다 말고 지 방으로 가뿌렀다. 크리스티안 넘이 아무리
농담이었다고 해도, 걍 가버린 것이다. 보통때 같으면 웃고
넘어갔을 텐데, 좀 이상했다.


그때 또 다른
가축구성원인 다니엘라 뇬이 말하기를, "야 크리스티안 이
씨바야! 너 오늘이 뭔날인지 알어? 오늘이 바로 동독 창건 50주년
기념일이야, 아침 부터 프란치스카 뇬이 두
번씩이나
말했단 말야" 라는 거 아닌가.


이걸 도대체 우찌 이해
해야 할까? 동독체제로부터 누구보다 불이익을 당한 뇬이 동독
창건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더구나 그
당시 이뇬은 겨우
열두살정도였는데 말이다. 이뇬이 사회주의자라서 그럴까?


절대 아니쥐.


울나라 고향이 물에 잠긴
수몰민을 생각해보자, 설사 그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해서, 두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해도, 막상 고향이 물에 잠겨서 없어지면, 좋아할
넘들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님 가난이 싫어서 조국을 등지고
이민갔던 동포들이 그래도 항상 울나라를 못잊어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통일 독일에서 동독인들은
그들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서독인들과
동화되지도 못하고, 항상 주변부로서 소외를 느끼고, 그런 감정이
프란치스카 뇬을 자극했던거다.


5r-s.gif도둑맞은
인민의 재산!!

ballspiel9.jpg

이러는 사이에 동독인들은 서독인 들에
대하여 더이상 10년 전처럼 심하게 저자세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높게 표현하기 위하여 서독과 서독인들을
의식적으로 평가절하 한다.

사람들은 통일이후에
몇수십억에 달하는 서독의 원조를 감사해하지 않는다. 동독인들은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할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원조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스스로의 평가 절하라고 느낀다.


본기자 이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독인들이 지금 해주고 있는
원조는 어쩌면 동독인들이 받아야 할 보상의 발톱만치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구? 들어바바바.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였다. 공산주의는 개인 사유재산이 엄따. 따라서 모든 생산수단(공장,
부동산, 자동차..기타 등등)은 국가에 속한다. 국가는 인민의
것이므로, 동독국민들은 서독국민들이 받은 월급을 개인을 위해
저축하는 것처럼 그들이 일해서 받아야 할 댓가를 국가에 헌납했고,
거기서 배급을 받아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모든
시설이나 기업은 당근 인민의 것이라는 야그다. 따라서 통일되고
서독기업이 동독기업을 샀다면, 당근 그 구입대금은
동독국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님 최소한 우리사주 형태로라도
배당을 해줬어야 한다. 근데 서독정부는 이런 동독국민들의 권리는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트로이한트(Treuhand)라는 국영신탁회사를
통해서 동독 기업들을 거의 헐값에 서독으로 팔아뿌렀다.


그 기업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어떠한 동의도 없이. 당근 팔린 기업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우리
사주는 고사하고 거의 전부 짤리고
말았다. 통일의 와중에 그들이 평생을 바쳐 일했던 소중한 인민의
재산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실업수당을 원조해 봤자 뭔 소용이 있냐 말이다.


6r-s.gif장벽은
아직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동독인들은
동독에 살아본 사람들만이 그곳에서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동독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얼마나 깊고,
그 사이에 서독과 동독인들이 언젠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체념이 얼마나 깊은 지를 보여 준다.

b6.jpg동독인들은
점점 서독인들과 경계를 가질려고 한다. 드레스덴에서 본기자와
같이 살았던 오토 라는 넘은 자동차 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졸업하고 얼마간 집에서 놀았다.


서독에 가면 전공을
살려 자동차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을텐데, 이넘은 죽어도 서독은
가기 싫어했다. 거기가면 무시당하며 살텐데 뭐하러 가느냐는
거였다. 근데 당시 드레스덴에는 자동차 회사가 없었으니, 당근
백수가 될 밖에..

그래도 당분간
시골집에가서 농사나 거들며 백수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결국
이넘은 상당기간 놀다가 자동차 관련회사에 취직을 하기는 했는데,
끝내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동독인들은
서독과는 다른 자신들의 특별한 자의식(Sonderbewusstsein)을 가질려고
하며,
이런 방식으로 동독인들은 점점더 스스로가 분리 된다.


1990년에 61%의 동독인들이
독일인 이라기 보다는 동독인으로 느꼈고, 1994년에도 약 60%는
여전히 자신들은 동독인이라 생각한다. 3분의 2이상의 동독인들이
머리
속에 점점 더 벽이 쌓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일사회에 냉소적인 뇬넘들은 이런 모습이 더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로 무관심해 지면 싸울
일이 없어지니까..


동독인들의 이런
특별한 자의식의 제거는 물질적인 면에서만의 동등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의 삶의 관계들이 같아질 때만 가능하다.
만약 지금 현재 독일의 경제성장이 위기에 직면하고,(울나라 암에푸
처럼..) 더이상 동독에 대한 원조나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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