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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통일 총리 헬무트 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4,027회 작성일 02-03-08 02:51

본문

einheit-kohl.jpg



△ 1990.10.3일 독일통일의 날 행사에서의 감격에 찬, 숙연한 모습(앞줄 왼쪽부터 블륌 노동장관, 라폰텐 사민당수, 브란트 전 총리, 겐셔 외무, 콜 총리 부부, 바이츠제커 대통령 부부. 바이겔 재무)



◆ 영원한 통일 총리 헬무트 콜



빌 클린턴이 TV로 스모 경기를  보다가 문득 떠올렸다는 인물, 헬무트 콜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다. 콜에게도 백범 김구 선생처럼 평생에 세 가지 소원이 있었으니, 그중의 하나가 맘껏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전후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 소시지와 케이크를 공짜로 준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열심히 성당을 다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소실 적 버릇을 못 버리고 가끔씩 연방의회의 비좁은 의석에 앉아 몰래 초콜렛을 꺼내 먹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곤 하던 콜의 말년의 몸무게는 약 160킬로로 천 오백만 명의 비만증 독일인 중에서도 단연 선두를 달린다.



그러나 그의 무게는 몸무게만은 아니다. 물론 콜의 나머지 두가지의 평생 소원은 그의 자꾸만 늘어가는 몸무게와 닮은 점이 있기는 하다. 즉  독일통일, 그리고 내친 김에 더 나아가 유럽통합이 그것이다. 그의 세가지 소원의 공통점은 그것이 실현되는 만큼 개인이든 국가든 자꾸 덩치가 커진다는 점이다.



einheit-kohl2.jpg사실 속내에 이런 야심을 가진 그는 일개 국가 독일의 통일총리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로마 이래 약 2천년만에 유럽통합의 최대사건이라는 유러 통화의 출범도 그와 미테랑이 손잡고 이뤄낸 작품이 아니던가.



▶ 갑자기 찾아온 통일의 기회



89.11.9 폴란드 총리와 44년만의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도착한 콜은 호네커가 불과 몇 달전까지도 자본주의의 불합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백년은 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베를린장벽의 개방소식을 전해 듣고 비상각료회의 소집을 명령한 뒤 모든 일정을 땡땡이치고 급거 귀국한다.



어느덧 성숙해버린 어릴 적 첫사랑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듯 그렇게 갑자기 몰아닥친 '통일의 기회'였다. 기회가 그렇게 우연히 찾아오리라고 전혀 생각도 못했던 서독은 첫날밤의 숫기없는 새 신랑처럼 당황했다. 통일의 옷고름을 어떻게 풀겠다는 변변한 각본 하나 없었다. 베를린은 예나 지금이나 전승 4개국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가. 동베를린 부근에 소련군 3만5천명과 동독 전지역에 35만명 바르샤바 조약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은가. 정상적인 정신이라면 도무지 엄두가 안나는 상황이다.



콜의 첫 일성. 그는 재빨리 바르샤바를 떠나면서 "독일인의 생존에 대한 전승국의 어떠한 형태의 간섭도 거부한다"는 불간섭 원칙을 천명한다. 덩치다운 배포다.



바로 다음날 열린 비상각료회의는 아니나 다를까 중구난방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참모들은 소요기간이 5년,10년씩 걸리는 장황한 통일절차를 주절이 주절이 늘어놓는다. 대동독 긴급조치→조약공동체→국가연합→연방 대충 이런 식이다.



이때 남부럽지 않은 무게를 가진 콜이 큰 사람의 진가를 발휘한다. 그는 참모들에게 "통일이란 열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강조하면서 미련없이 검토안을 팽개친다. 약간은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혹은 좋게 말해서 천부적인 낙천성에 추진력과 결단력을 겸비한 큰 인물 콜은 "생각은 나중에 하고 우선 행동을 하자"며 통일열차를 잡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그리곤 베를린으로 날아가  "우리는 한민족"(Wir sind ein Volk)이라고 선언한다.



▶ 사면초가 - 주변국 설득



당시 국내외 통일환경은 결코 좋은 편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에곤 크렌츠 동독서기장은 "통일은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라면서 미리 쐐기를 박고 나섰다. 고르비도 "두개의 독일은 현실이며 역사의 결정"이라고 바람을 뺐다. 그 쪽은 원래 그렇다고 치고 다른 서방국가들은 어떤가. 그들도 하나같이 독일의 재부상을 우려했다. 미테랑, 대처 하나같이 독일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독한 인물들이었다. 마치 삼국지에서 처럼 도처에 쟁쟁한 적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동지는 없다. 적 뿐인 상황. 사면초가인 것이다.



콜은 제일 먼저 독일 통일에 가장 호의적이었던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을 구워 삶아 긍정적 확약을 받고 장벽 붕괴 20일만에 통일조약 10개항의 발표를 강행했다. 이것의 의미는 세계의 이목이 베를린에 몰려 있는 터에 독일의 총리가 완곡어법에도 불구하고 감히 독일통일을 태연히 언급했다는 점이다. 통일의 또 한명의 주역인 제갈공명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도 약간 덜 떨어진(?) 유비 콜(가령 그는 워낙 큰 인물이라 국내내치에는 한번도 진지하게 신경을 쓴 적이 없다. 세부에 들어가서는 의외로 황당하고 투박한, 그래서 또한 큰 인물이다)을 도와 바지런히 주변국 설득에 나섰다. 이 환상의 콤비 두사람은 "독일은 통일돼도 유럽공동체와 나토 안에 존재할 것"이라며 프랑스와 영국을 설득했다. 폴란드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통일 후에도 준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콜은 3차례나 모스크바를 방문, 고르바초프와 담판을 벌인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담판을 통해 고르비로부터 "독일통일은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는 답변을 얻어냈을 뿐 아니라, 마침내 2+4 회담의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통일 독일의 나토잔류에 대한 허락을 얻어 내고 만다. 그 대가로 독일은 소련군 철군을 비롯한 각종 경제지원 명목으로 무려 150억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통일을 돈으로 샀다는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고르비에게는 그것이 권좌에서 물러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91년 소련군부의 쿠테타, 그리고 소련의 해체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소련군부가 독일통일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던가, 그리고 그 통일의 기회란 것이 얼마나 일시적인 것이었던가가 분명해진다.



▶ 경제통합 -일정한도까지 1대1 화폐교환



내적 통일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경제통합의 방법론이다. 상이한 체제의 두 국가가 평화적으로 합쳐지는 유례없는 대역사 창조에 있어 참고할 만한 사례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어쨌든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었다. "독일 마르크가 안오면 우리가 간다"며 매일 평균 2천여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몰려들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콜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에르하르트 총리의 "통일의 첫 단계는 마르크의 동독 유입"이라는 가르침에 내심 동의하고 있었다.  그는 의회에서 통일 비용 운운하는 의원들에 대고 "돈 때문에 통일을 피하는 것은 역사를 퇴행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통화권을 쥔 연방은행 총재조차 따돌린 채(열 받은 연방은행 총재는 나중에 사임함) 군사작전을 펴듯 화폐통합을 단행한다. 이로써 순식간에 450억 마르크가 동독인민군의 호송 하에 엘베강을 건넌다. 말이 450억 마르크이지 이것은 약 280억 마르크에 해당하는 총 600톤의 은행권과 500톤의 동전들을 실은 화물 운송 행렬이 줄에 줄을 이은, 인류사에 유례없는 보기 드문 장관이 연출됐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동독경찰과 인민군이 헬기까지 동원해 에스코트했으니.



einheit-vaterland.jpg이 넘어간 돈이 7.1일을 기해 일제히 1대1로 교환됨으로써 내적 통일을 위한 경제적 기초도 다져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공부문.민간부문을 합쳐 약 2조마르크가 넘는 통일비용이 동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그 첫 시발점으로써 가히 '게르만 화폐의 대이동'이라고나 할 이 전무후무한 대역사는 순전히 콜이라는 한 인물의 결단으로서만 가능했던 일이다. 이로써 마침내 그 해 11.3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통일 행사가 이루어졌고 독일인들은 만천하에 "우리는 한 민족"라고 목메어, 그러나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다.



이렇게 사고를 친 콜 정부는 사실 1982년 집권이래 어느 정권보다도 통일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곤 했다. 브란트-슈미트 등 이전의 사민당 정권은 통일보다는 '공존'을 추구했고, 통일의 기회가 찾아온 당시에도 상당수 지도급인물들은 동서독의 기형적 통합을 우려하면서 통일보다는 국가연합을 지지했다. 콜은 90.2월 1차로 고르비를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조속한 화폐통합과 조기통일을 주도함으로써 다른 정파와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콜은 독일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 등 관련 주변국의 동의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철저히 현실적이었다. 독일 통일이 유럽통합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단계라고 강조하는 한편, 통일 독일이 나토에 남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통일된 독일을 우려하는 유럽 국가를 안심시켰다. 이러한 설득과정에 있어 독일정부가 그동안 평소 쌓아 올린 신뢰를 바탕으로 한 독일 외교의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은 국제사회에서 독일 통일을 기정사실화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콜은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을 잘 활용하여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국제사회에서 독일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어내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부시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고르바초프까지 설득해내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그는 이루어 냈다.



▶ 회고록 - '나는 조국통일을 원했다'



einheit-kohl4.jpg결코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 요리책에 더 관심을 보이기도 했던 콜은 그러나 훗날 마침내 "나는 조국통일을 원했다"라는 회고록을 통해 강대국들의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벌여야 했던 길고도 지리한 물밑작업들, 주변국가들과의 국경문제를 둘러싼 갈등, 서독내부의 의견대립 등 통일과정의 전말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회고록에서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사실은 통일은 최소한 삼사 년 후에나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고 비로소 털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해 12월 동독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쇄도한 군중들이 서독 국기를 흔들면서 "우리는 한 민족"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서야, 그 큰 덩치 뒤에 감춰진 콜의 또 다른 자화상, 초콜렛을 무지 좋아하는 소년 헬무트는 "통일이 다가왔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고 함박웃음을 피웠다는 얘기다.



베를린천사2호 9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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