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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한반도, 분단 50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346회 작성일 02-03-08 02:08

본문

작성일 : 1999/03/27   조회수 : 183

■ 한반도, 분단 50년

      (Das Ostpreu enblatt紙 95.8.12자, 3면 전면특집,      
             Friedrich-Wilhelm Schlomann 기고)
  
   동·서 냉전시대가 종언을 고했을때 이제 지구상에서 치열
한 갈등과 분쟁은 사라진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칸반도
에서의 민족간 갈등과 비극은 새로운 차원의 분쟁요소가 상
존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또한 저멀리 떨어진 한반도에서
는 이 시간도 분단된 남·북한의 군대가 전투태세를 완비하
고 마주본체 통일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1943년 말 카이로회담에서 연합군들은 1910년 일본에게 합
병당한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축하하고 있을때 소련군
이 북한지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9월초에는 미군이 한국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UN은 몇년동안 남·북한 동시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고자 노력했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비
호안에 탄생된 공산정권 - 북한에 탄생된 공산정권의 수괴는
김일성으로 그의 본명은 김성주였으나 전설적인 항일투사 김
일성 장군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알려짐 - 의 방해에 부딪
쳐 UN의 통일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8년
북한은 한국과의 교통편을 단절했고 곧 이어 한국과의 서신
왕래도 금지되었다. 같은해 말 소련군이 북한땅을 떠났고
1949년 여름 미군도 한국에서 철수 했다. 후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쵸프가 그의 회고록에 기록한바에 따르면 미군
이 한반도를 떠난후 김일성은 당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에
게 남한땅에는 공산혁명을 원하는 인민들이 많기 때문에 북
한 인민군이 침략시 아무 저항과 어려움 없이 남한땅을 점령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또한 전
략적으로 중요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련도 북한의 계획에 동의, 북한군의 전력 증강을 도와주기
에 이르렀고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시 미군이 개입하리라고
는 생각지 않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윽고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 북한은 현대식 중화기
로 무장한 10개 사단을 동원, 사전 선전포고없이 38선을 넘
어 한국을 침범했다. 이때 한국군은 단지 경화기로 무장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 소련의 예상과는 달리 이날
미국 뉴욕에서는 유엔의 전쟁개입을 결정하기 위해 유엔안전
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이때 소련측이 동 이사회 소집을
보이코트했고 비토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UN은 17개
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을 결성하고 수세에 몰린 한국을 돕기
위해 파견할 수 있었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세의 역전을
마련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이내 38선을 돌파, 압록강까지 쫒
기는 공산군을 추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 가을, 이번에는 유엔군의 개입으로 수세에
몰린 북한을 돕기위해 약 25만명의 중공군 - 소위 의용군 -
이 한국전에 개입했다. 당시 중공군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한
이유를 놓고 중공의 군사력 약화와 중공내 영향력 확대를 노
린 소련의 간계가 뒤에 숨어 있었다는 설과 실제로 중공이
한국과 유엔군의 진격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개입했다는
설이 갈리고 있다. 어쨌든 이후 양측은 밀고당기는 접전과
223회에 걸친 협상끝에 1953년 7월말 판문점을 기점으로 하
는 경계선을 설정하고 휴전을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이 휴전협상이 한반도에 통일과 평화정착, 어느것도 보
장해 주지 못한다며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휴전협정과 실질적인 분단에도 불구하고 이후 남·북한은  
5000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공통분모로 하는 단일 민족
임을 줄곳 강조해왔다. 1970년대 초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
령이 중공을 방문, 미국의 새로운 대 아시아·태평양 정책이
시작되자 남·북한에서는 이러한 국제적인 화해무드에서 소
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어났다. 때문에 남·북한
양국은 대화의 테이블을 마련, 상호접근에 나섰으며 양국관
계에 많은 희망을 안겨줄 것 처럼 보였던 "공동성명"을 발표
하기까지 이르렀으나 이 공동성명상의 합의는 이내 북한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깨지고 말았다. 이후에도 남·북한 양국간
에 여러차례에 걸친 협상이 있었으나 양국 이산가족들이 서
로를 방문, 그리운 친지들을 해후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적은 몇번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통일을 향한 염원은 오늘날까지 남·북한 양국에
서 강하게 남아있다. 물론 통일을 추진하는 방식에 있어서
양국간 계획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한국은 평화로운 자유
선거를 통해 통일을 이루기를 원하나 북한측은 통일을 위해
서는 무력사용도 불사한다는 기본입장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으며 한국에서 곧 인민혁명이 일어날 것 처럼 선전하고 있
다. 또한 북한은 한국내의 정정불안과 혁명기운을 조장하기
위해 불온내용을 담은 수백만장의 삐라를 풍선을 통해 한국
에 유포하고 있으며 마치 한국땅에 위치하고 있는 것 처럼
위장하고 있는 북한내 비밀라디오방송을 통해 대남흑색선전
을 계속하고 있다.

   1974년 이후 휴전선 근처에서 북한이 판 몇개의 땅굴이 발
견되었다. 한국군의 제 1 방어선 바로 뒤까지 들어와 있는
이 땅굴들은 유사시 시간당 3만명의 병력을 침투시킬 수 있
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북한 귀순용사들의 증언을 종합,
이러한 땅굴들이 아직 7개 더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아직 그 위치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 최소한 숫자적으로 볼때
- 북한측의 군사력의 우세는 지속되고 있다 : 총 106만의 병
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북한은 세계에서도 6번째로 큰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65만 5천명의 군병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포, 탱크, 비행기, 군함 등에 있어서도 양국은
병력수의 차이와 비슷한 우열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주목
할만한 점은 북한이 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포, 탱크,
기타 장비 등 군전력 증강에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북한은 국방예산을 3배로 늘리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한국도 올해 국방예산을 9.9% 늘렸고 내년에도
국방예산을 12.5% 증가시킬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북한측의 무력침공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다. 이는 북한이 전체 군병력의 60%, 84000문의 포와 2400
문의 박격포를 휴전선 근처에 집중 배치시켜 놓고 있으며 특
히 1,100만의 인구를 가진 한국의 수도 서울이 38선에서 불
과 38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비상시 시민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할수 있는 시간이 24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국인들이 갖는 우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비상시 주한 미군이 한미 방위조약에 따라 즉각 전쟁에 개
입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하등의 의심도 존재하지 않
는다. 현재 한국에는 37,000명의 미군이 상주하고 있으며 병
력의 일부는 휴전선 근처에 배치되어 있다.

   한편 북한도 1961년 구소련과 상호방위원조조약을 체결한
바 있는데 동 조약에 따르면 유사시 소련군도 즉각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동 조약의 당사국인
구소련이 몰락한 지금 러시아가 1996년으로 유효기간이 마감
되는 동 조약의 재연장에 서명할지는 매우 불확실한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앞으로도 북한측에 방어용
무기를 계속 판매할 것은 확실시 되고 있다. 한편 북한은 중
국과도 비슷한 내용의 방위조약을 체결해 놓고 있는데 최근
중국은 동 조약이 유효함을 확인한바 있고 중국도 북한에게
계속적으로 탱크와 로케트를 공급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측이 비밀리에 진행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핵개
발문제는 아직도 명확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이미 알려진바와 같이 미국이 인공위성을 통해 북한내 핵재
처리물의 존재를 확인한후 국제원자력 기구에서 영변 핵시설
의 사찰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
국은 국제핵확산금지 조약의 연장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북
한내 핵개발을 동결시키기 위한 협정을 작년 10월 북한과 체
결했다. 이 협정에서 북한은 2기의 현대식 경수로를 공급받
는 대신 자체 핵개발 프로그램을 동결하기로 약속했었다. 그
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북·미 핵협정은 북한의 핵개발을 둘
러싼 의혹을 완전하게 해명해 주고 있지 못하다. 북·미 핵
협정은 북한내 경수로 건설공정의 75%가 완성되었을때라야
만 북한 연변 핵시설의 사찰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앞으로 약 5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사
이에 북한이 무엇을 개발할런지 누가 알겠는가?

   아직까지 확고한 권력기반을 다지지 못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북한의 지도부도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을때 이미 북한에서는 오래전부터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
후 1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김정일은 아직 공식적으로 노동
당 총서기직이나 국가주석직을 승계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 인민군 창설 46년주년, 올해 2월의 김정일 생일(그의 생
일날은 북한의 공식 국경일임), 그리고 지난 7월의 김일성 사
후 1주기 등 김정일의 공식적 권력승계를 위한 吉日이 없었
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북한 노동당 전당대회도 지난 1980
년의 마지막 대회를 끝으로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나아가
지난해말 열릴 것으로 기대되었던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모임이나 보통 매년 12월에 개최되는 최고인민회의도 소집되
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
다는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 동지
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북한내 구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에는 이러한 구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정일이 대
중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우연
한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신
이 최고 사령관으로 있는 북한 인민군 창설 기념식때와 지난
4.15 죽은 김일성의 생일 축하행사때도 김정일은 모습을 드
러내지 않았다. 또한 북한에서 국제 스포츠행사 또는 문화행
사가 열릴때마다 김정일은 동 행사에 참가할 것이라고 대대
적으로 선전은 되었지만 실제로 나타나지는 않았었다.

   북한의 경제는 지난 5년동안 계속 하향곡선을 그어 현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94년 북한 주민들의 주식인 쌀 생
산이 필요량의 40%에 불과한 150만톤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
금까지 북한에 양식을 공급해 오던 러시아와 중국이 이제는
외환결재를 요구하며 식량공급을 중단하자 북한은 올해 초
태국으로 부터 비밀리에 질이 떨어지는 약 30만톤의 쌀을 수
입했고 급기야 지난 5월에는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
르렀다. 일본은 북한에게 1백만톤의 쌀을 원조해 주기로 약
속했으나 북한측이 먼저 한국측의 인도적 차원의 쌀원조제의
를 받아들일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에따라 북한은 한국
으로 부터도 쌀원조를 받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은 북한
에 15만톤의 쌀을 지원키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때문에 북한정권이 약화되었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난 6월말 북한은 미국에 대해 지금까
지의 정전협정을 미국과의 단독 평화조약으로 바꾸자고 요구
하고 나섰다. 북한이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미군의 철수를
이끌어 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은 1953년 휴전협정의 성립과 함께 판문점
에 상주하던 중립국 감시위원회를 사실상 일방적으로 해체시
켰다: 1993년 북한은 체코 감시위원들을 추방한데 이어 지난
2월 부터는 폴랜드 감시위원들에 대한 수도, 전기 공급을 차
단해 버렸다. 그리고 지난 5월에는 스위스, 스웨덴 감시위원
들에게 차후로는 허락을 받고서만 북한측 영토를 드나들 수
있다고 통보했다. 중립국 감시위원들을 둘러싸고 앞으로 사
태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는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

   최근 주한 미군 사령관도 말했듯이 분단 50년, 광복 50년
을 맞는 한반도의 상황은 아직도 극도로 긴장된채 남아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에서의 진정한 해빙은 우선 양국
간 서신왕래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이산가족들이 그리운 친
지들을 찾아 휴전선의 철조망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을 때
에만 시작될 것이다. 언젠가는 한반도에도 통일의 날이 오겠
지만 온 한국민들이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는 "진정한 광복
절"이 오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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