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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 5000 마르크의 가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람이름으로 검색 조회 8,392회 작성일 02-08-14 06:50

본문

기사입력시간 : 2002-07-17 20:04:05
Hit: 207 Vote: 1
바람

아래의 내용은 Berliner Zeitung (베르린 신문)에 2001년 7월 2일에 실린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들이 체코를 장악했던 당시 강제노동자로 끌려가서 고생했던 카렐 호라크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써  우리 한국인에게도 시사하는것이 참 많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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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liner Zeitung
7월 2일 기사
제목: 5000마르크의 가치  ( Maxim Leo 씀)  

아마도 카렐 호라크를 행운아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젊었을 당시"행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는 전혀 다른 것을 상상했을 테니까…

차라리 카렐 호라크는 인생을 살면서 어떤 상황에 처했더라도 항상 최선을 다해온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철도청 사무원의 아들로 메헤렌 고장인  질라바(Jihlava)에서 태어난  카렐 호라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도 희망을 잃지 않는, 그리고 해결책을 찾아내고야마는 인간형 인 듯 하다.

1942년 11월 11일 체코의 메헤렌에,  당시 주둔하고 있던 독일총독사령부(Protektoratsverwaltung)는 그에게 강제노동자로 독일로 연행될 것이니 24시간 내에 준비하라는 명령을 했고, 이에 카렐 호라크는 크게 절망하였다.

"나는 당시 독일로 가면 무슨 일이 나에게 벌어질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게되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었다"고 그는 오늘날 회상한다.

호라크는 지금 프라하의 크랄로브카 루키 거리에 위치한 조그맣고 어두운 "체코 강제노동자 연합"사무실에 앉아있다. 그의 등뒤에는 서류뭉치들이 탁자 위와 바닥까지 잔뜩 쌓여있다.

이 사무실엔 68,000명의 강제노동자의 이름들이 기록되어있고, 그 서류 뭉치속 어딘가에는 이제는 완료되었으므로 정리해도 될, 그의 이름이 적힌 서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흘 전 이제 80세의 노인인 그가 첫 수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해보상이라는 명목으로 독일에서 부쳐온 돈이었다.

카렐 호라크는 2년 반이라는 그의 인생의 한 부분을 겨우 5000마르크라는 액수로 보상받았다. 그러나 그는 보상금의 액수보다도 그것이 지닌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이 나에게 보상금을 줌으로써 과거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속죄의 뜻을 전달하는 것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 보상금은 카렐 호라크가 프라하에서 독일 행 기차 속에 강제로 내던져진지  50년 이상이 지난 오늘에서야 지불 된 것이다.

당시 21세의 경리사원 이었던 그가 독일 행 기차를 타기 전 알았던 독일인들은 그의 고향을 3년 전부터 점령하고 있었던 독일 군인들과 그가 다니던 학교의 독어 선생이 전부였다.  그 독어 선생은 키가 크고 금발의 머리를 뒤로 쪽진 여인이였는데, 카렐 호라크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의 맘에 들고 싶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독어의 문법과 문학을공부하였다 한다.

여선생은 독일로 귀국하기 전, 그에게 "독일의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절대 위대한 독일문화를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고, 그는 그것을 그녀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짝사랑했던 여선생이 떠난 후,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었던 독일의 야만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의 좋은 면을 찾아내려 애썼으나 그것이 쉽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프라하에서 기차를 탄 그는 폭트란드 고장에 있는 팔켄슈타인으로 보내졌다. 그곳엔 "메늘형제"라는 섬유공장이 있었는데 이 회사는 당시 강제노동 인력 가운데 경리사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팔켄슈타인엔 강제노동자의 숫자가 크지 않았으므로 호라크는 곧바로 경리 부서장( Hauptbuchhalterin)곁으로 보내질 수 있었다.

당시 대부분 그랬듯이 강제노동자들 대부분이 인간이하의 조건으로 수용되곤 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호라크는 강제노동자가 별로 없는 지역으로 배치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수용소 기거를 피해갈 수 있었고 다른 체코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개인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독일에 도착한 첫날 밤, 그는 "까페 린제"에 갔다.
돌이켜보면 이 첫 날 밤이 그의 인생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낯선 방문객인 그가  들어서자 이 카페에 놀러왔던 젊은 독일여자들이 매우 반기고 기뻐하며 그를 에워쌌다.

그가 체코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이 여자손님들은 음악을 연주해 달라고 졸랐다.(보헤미안 기질 때문인지 많은 체코 인들이 악기와 음악에 노련하다) 호라크는 당시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았는데 그 젊은 여인들이 어디서 빌려왔는지 금새 가져온 바이올린으로 그는 저녁 내내 그들을 위해 연주해 주었다.

그를 반겨주었던 그 여인들 중 호라크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던 여인의 이름은 베라였다. "그 후로 2년이 지나 베라에게 첫 키스를 했고 얼마 후 나는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호라크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나치 비밀경찰(Gestapo)은 밀고자로부터 그가 독일 여자들과 음악연주를 하며 몇 시간을 보낸 사실을 알게되었고, 며칠 후 그를 체포하여 플라우엔(도시이름)으로 보냈고, 그는 그 곳에서 뮐러 (Mueller,사람이름)라는 대위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이 대위는 그에게"수치스런 인종"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이런 열등한 슬라브 인종과 함께 독일 계집들이 놀아났다는 것에 대해 격분하여 호라크를 KZ( 유태인을 강제노동시킨후가스로 죽인 수용소)로 보내라고  명령을 했다.

그러나 호라크는 그가 일하고 있었던 섬유공장 사장의 도움으로 KZ를  면하게 되었다.
당시 섬유공장 사장은 무임금의 강제노동자 한 명을 얻은지 며칠 되지 않아 또다시 데려 간다는 것에 큰 불만을 표시했고 이에 대해 나치비밀경찰도 할 수 없이 그를 다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풀려나기 전 그는 "열등인종"으로서 앞으로 모든 독일여인들과의 접촉을 금한다는 문서에 사인을 해야했다.

그때서야 호라크는 자신이 정말 독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섬유공장의 일은 매우 고단했다. 오전엔 경리부서장의 일을 도와야 했고, 오후부터 밤까지는 기계 앞에서 시다로, 또는 모든 무거운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인력으로 일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곧 공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당시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었던 섬유종류나  기계부품들을 그는 발이 닳도록 수소문하여 반드시 구해 주곤 했다.

그리고 틈틈이 카페 린제에서 알게 된 베라를 몰래 만나곤 했다. 베라의 아파트에서 그는 라디오 런던을 몰래 들을 수 있었는데 당시 팔켄슈타인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오로지 그뿐이었기 때문에 많은 독일서민들이 그에게 전쟁의 진상을 알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결국은 이 사실도 누군가로부터 고발되어 나치비밀경찰의 귀에  전달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플라우엔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구타를 당했다. 이번에도 KZ로 보내질 상황이였는데 섬유공장의 사장이 그를 또 다시 보호해 주어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겉으로는 항상 "쾌활한 호라크"로 불리며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있었지만 속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아귀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그 시간들. 정말 악몽 같은 나날들이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나의 생사가 오로지 그들 손에 달려있으며, 나의 삶이 그들로 하여금 자유자재로 주물려진  당시의 나는 그들의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였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는 당시 내가 지금 병이라도 들어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상상해보곤 했다한다.

"그럴 경우엔 나의 사장은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값어치 없는  나를 나치비밀경찰에게 넘겼을 것이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그 조차도 놀란 것은 독일인들 또한 독재체제 아래 심하게 고통을 받고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열등인종으로 끌려온 이 독일이라는 나라는 매일 테러가  비일비재하였고, 모든 문화가 파괴되었으며, 좋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가치관이 뒤집혀져 있었다. 혹 의심받을까 봐, 혹 끌려갈까 봐 다들 입을 다물었고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였다. 난 공포에 질려 떨고있는 이 '우월 인종'들이 너무도 불쌍했다."  

전쟁의 종말이 다가오면서 팔켄슈타인의 삶은 더욱 각박해졌다. 식량배급도 줄어들었다.

열등인종인 호라크는 이제 독일노동자가 받는 음식의 삼분의 일만  배급받았으나 그의 애인인 베라가 남몰래 그에게 밥을 더 먹여주었다.

1945년 5월 3일, 이날 드디어 호라크는 미군의 진주로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고 1달이 지난 6월 2일, 그는 그동안 서로 사랑했던 베라와 결혼을 하였고 6월 11일 독일신부와 함께 그의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체코로 돌아온 그는 대학에 입학하여 기계공학을 전공하였고, 나중엔  국가기업에서 설계최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어느덧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제 호라크는 드디어 평온을 찾은 듯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내야했던 독일에서의 몇 년이 그의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졌던 부당한 처사들을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이며 삭일 수가 없었다.

오늘까지도 그것을 잊을 수 없어 그는 온갖 서류뭉치와 기록문서집 속에 앉아 있는 것이다.

"어떤 형식이든 좋으니 독일이 나에게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아무리 자그마하더라도 어떤 사과의 표시를 해 주기를 바랬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공산주의국가였인 체코슬로바키아는 강제노동자들의 정의를 향한 외침을 외면했었다.  

"공산주의가 정치범이나 강제수용소(KZ)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배려해 주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강제노동자들은 그들이 작성한 공식적 피해자 명단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라고  그는 회고한다.

전환이후 그는 곧바로 몇 명의 다른 강제노동자들과 더불어 체코 강제노동자 연합 SNN을 창립하였다. 신문에 겨우 자그마한 광고 하나를 실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창립 개막식에 자그마치1000여명이나 참석했다고 호라크는 덧붙인다.

그는 연합의 부의장이 되었다.  "자진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어 그냥 내가 맡기로 했다"는게 그의 말이다.

호라크는 후원금을 모아 지부들을 설립했으며, 강제노동자 연합은 점차 대규모의 조직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음에도, 호라크는 강제노동자에 대한 기록집을 꾸준히 작성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독일을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하기 전에, 일단 강제노동자로 끌려갔던 500,000명 중 도대체 몇 명이 아직 생존하고 있는지나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말한다.

드디어 국제적으로 피해보상협상이 시작되자 호라크는 마치 체코 강제노동자 연합의 "외무장관"처럼 모든 협상에 참여하였다.  이 협상은  워싱턴, 바르샤바, 베를린 및 본에서 열렸다.

10일 전 체코가 전세계에서 최초의 피해보상국이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호라크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할 수 있다.

호라크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레게로바 24번지에서 자신의 투쟁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매일 확인하곤 한다.

피해보상 신청을 위임접수하는 "독일 - 체코 미래펀드" 사무실에는 문을 두드리는 노인들이 날마다 눈에 뜨이고,  때로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  

호라크의 피해보상건이 완료된 지금에서야 당시의 강제노동자들이 피해보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으며 신청서를 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우편으로 보내도 상관은 없는데 많은 노인들이 직접 와서 제출하고 간다.

밤 열차로 프리드란드에서 온 요세프 아우브레히트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라고 강조한다.

올해 81세로 장님인 그는 갈고리 십자가 문양(나치들의 휘장)이 찍혀있는 자신의 노동기록서를 증빙서류로 가져왔다. 그 노동기록서에는 그가 1939년 10월 28일 비텐베르게 (Wittenberge)에 있는 인조섬유공장에 끌려와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 동안 강제노동을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아우브레히트는 독일의 그 공장에서 산성 증기로 인해 장님이 된 이야기, 독일에서 그의 동생이 티푸스로 죽은 이야기, 독일에 끌려갔다 온 이후로 그의 삶이 고통 그 자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몇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었다.  아우브레히트는 그의  증빙서류를 제출하면서 방금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준 뒤 언제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묻는다.  
완료될 때 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담당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문을 향해 걸어간다.

그가 나가자 담당자는 그의 서류를 제일 위로 올려놓는다.  80세 이상인 신청자들은 언제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므로 우선권이 있다고 덛붙이며.

체코에서는 매달 850명의 보상 대상자가 세상을 떠나고 있다.

오늘까지 펀드에는 8만 5천건의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레고라 사무실에서 일하는 46명의 담당자들이 아무리 서둘러도 완료까지는 대부분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보상을 받기까지 절차가 아주 까다로운 이유는 독일측이 모든 사례가 정확히 조사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체코의 강제노동자 중 많은 사람들이 당시 부당하게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우브레히트처럼  보여줄 수 있는 정확한 증빙서류는 가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사실상 말이 쉽지, 그 수 많은 강제노동자들이 전쟁중 피신을 했거나  갑자기 내?긴 상황에서 어떻게 서류를  챙길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강제노동자들 중 많은 수가 1999년 4월 15일 이전에 죽었다.
이 날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독일재단은 이 날짜 이후로 죽은  이들의 가정에만 보상을 해주겠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렐 호라크는 이 규정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화가 치민다고 한다.  
"독일 산업은 50여년이라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무 보상도 하지 않은 채 외면하더니만 이제는 일찍 죽었다는 이유로 보상을 회피하려 한다.  참으로 비열하기 짝이 없다!"라고 호라크는 분노한다.

그러나 옛 독일 여선생이 그에게 한 말을  또 상기하는 것인지 다시금  부드러워진 그는,
"물론 독일인에게도 장점은 있다.  독일의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의  아버지들보다는 더 지혜롭다" 고 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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