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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 최후의 나치, 알로이스 브루너를 찾아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림이름으로 검색 조회 7,837회 작성일 02-03-09 05:44

본문

◆ 최후의 나치, 알로이스 브루너를 찾아서



지난 40년 간 시리아에 숨어 살고 있는 최후의 나치, 알로이스 브루너(Alois Brunner)를 찾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의 행적은 묘연하기만 하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유럽과 미국의 정치가들이 시리아 대통령 하피스 알-아사드에게 연명으로 청원서를 보냈으나, 시리아는 그를 찾는데 협조하지 않고 있다.



▶ 브루너는 누구인가



nazi1.jpg

(1985년의 브루너)



1920년 생의 브루너는 170cm의 키로 왼쪽 눈이 없다. 왼쪽 손은 폭탄 테러를 받은 이후 장애가 되었다. 그는 콜라, 슈말딘스트, 피셔 등 여러가지 가명을 쓰고 있다.



히틀러 정권에서 수백만 명을 살해한 유명한 나치 아돌프 아이히만의 측근이었던 브룬너는 비인, 살로니키, 프레스부르크, 파리, 니스, 베를린에서 12만 8,500명 이상의 유태인을 체포, 가스실이 기다리고 있는 강제수용소로 압송했다. 그의 마지막 계급은 나치친위대 돌격대장(SS Hauptstrumfuehrer)이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1933년부터 브루너의 범죄 행각은 시작되었다. 당시 26세의 농부의 아들이던 그는 SS에 가입, 아이히만이 이끄는 비인의 "유태인 추방 본부'에서 일했다.



비인에서의 이들의 활약은 나치들 사이에서도 '비인 모델'로 칭송받았는데, 아이히만은 매우 효율적인 방식으로 유태인을 추적하고 찾아내 이 곳이 나치들의 교육장소가 될 정도였다. 브루너는 여기서 유태인 체포 전문가로 성장했다.



nazi2.jpg



여기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브루너는 후에 아이히만이 제국정보부장으로 승진해 베를린으로 가자 비인에서 그의 임무를 승계받게 되었다. 후에 브루너는 프랑스에서도 길거리를 순찰하면서 유태인의 얼굴 생김새를 가진 사람들을 체포해고 이들을 통해 더 많은 유태인들을 잡아내기 위해 고문했다.(▷ 1940년경 브룬너(왼편)와 아이히만)



▶ 2차대전 후의 행각



45년 4월초 그는 비인에서 마지막으로 출현했다. 그후 그는 위조서류를 이용해 도망쳤는데, SS 단원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피의 단체' 문신이 그에게는 없는 것이 도주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알로이스 슈말딘스트라는 가명으로 에센에서 노동을 했는데, 1954년 노조 위원으로 추대되자 전력이 들통나는 것이 두려워 이집트를 거쳐 시리아로 도망쳤다.



이때 그는 동료 나치였던 게오르그 피셔 박사의 이름으로 가명 여권을 사용했다. 피셔라는 이름으로 그는 시리아에서도 경력을 쌓았다. 겉으로는 도르트문트 맥주와 베를린 독주를 거래하고 주택을 매매하는 평범한 사업가로 행세했지만, 사실은 시리아 정보원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시리아 비밀정보부 정보원으로 일했다.



반유태주의 국가인 시리아에서는 유태인을 탄압했던 사람을 존경하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편 미국의 한 저술가는 CIA 문서를 인용, 독일정보부(BND)도 그를 정보원으로 활용했고 그의 다마스커스 집은 BND 요원들의 거처가 되었다고 폭로했는데, 이에 대해 BND측은 반응하지 않고 있다.



브루너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부인과 딸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부쳐주는 등 계속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는 다마스커스를 방문한 독일 사업가들에게 자신이 들키지 않고 비인을 방문해 가족을 만났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70년대에 독일 정부에 거래를 제안했다. 그는 정부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독일에 와서 유태인 탄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면서, 만일 정부가 약속을 어기고 그를 체포할 것을 대비해 정부가 자신의 딸에게 4만 마르크의 보증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KGB 문서에 따르면 그의 딸은 그를 방문하기 위해 종종 시리아로 여행을 했다고 하는데, 그녀는 이를 부인한다.



▶ 브루너 체포를 위한 노력



유럽 각국 경찰국의 컴퓨터에는 그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고,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에서는 그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 있다. 그의 알려진 마지막 주소는 피셔라는 이름으로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의 게오르게스 하다드 거리 7번지였다.



그러나 수십년 전부터 시리아는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강력히 반발해 왔다. 시리아 외무부는 이러한 주장이 '시리아에 타격을 주기 위한 시오니즘의 책략'이라고 역공해 왔다.



금년 2월 피셔 독일 외무장관이 시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독일이 14년 전부터 브루너에 대한 인도 요청을 하고 있음을 상기시켰으나 시리아는 다시 한번 그가 시리아에 체류하고 있지 않다고 잡아 떼었다.



nazi3.jpg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브루너를 수사하고 있는 파리의 헤르베 슈테판 판사는 132 면에 이르는 고소장을 작성했는데, 이 판사는 브루너가 아직도 시리아에 살고 있다는데 100% 자신한다고 밝혔다. 최근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다마스커스의 호텔 메리디엔에 시리아 대통령 측근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호텔 메리디엔)



지난 수 년간 브루너의 행적을 조사해온 슈테판 판사는 내년 초 파리 배심재판소에서 그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려 한다. 법원은 공고를 통해 브룬너의 출두를 명령했다. 이러한 노력은 사실상 국제사회 앞에서 나치와 관련된 과거를 청산하려는 진지한 법률적 역사적 노력이다. 독일 나치범죄 수사본부 검사장 빌리 드레센은 "브루너가 역사 속으로 이대로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는 그의 피해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노인이 되어 버린 브루너를 실지로 처벌하느냐 못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이다.



▶ 수사의 진행 과정



그러나 브루너에 대한 수사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 3년 전에야 쾰른과 프랑크푸르트의 검찰청은 브룬너 체포에 50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최근에 와서야 독일 검찰은 오스트리아에 살고 잇는 브루너의 딸 이레네 R.(법률가)의 집에 대해 수 주간 감청을 실시하는 등 제대로 된 수사를 시작했다. 이레네 R.의 편지와 그녀가 1992년 이후의 해외에서 사용한 신용카드 내역도 조사되었다.



오랫동안 독일에서는 그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스라엘 정보부가 행한 것으로 알려진 브루너에 대한 두 번의 폭탄 테러 이후인 80년대 중반에야 그가 여론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85년 독일의 잡지 Bunte의 한 기자는 다마스커스의 그를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이 무렵 브루너는 미국 언론인과 전화로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은 일을 다시 할 것이다"라면서 "모든 유태인은 악마의 대행자이고 인간의 쓰레기이므로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 이 시점에 구서독 정부가 시리아에 브루너의 인도를 요청했고, 구동독 정부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브루너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끌러가 죽음을 당한 파리의 변호사 세르지 클라스펠드는 동독 정부에 모험적 방법을 제안했는데, 이에 따르면 시리아의 묵인하에 브루너를 다마스커스에서 납치, 동독 비행기로 송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nazi4.jpg

(1942년 프랑스 거리에서 체포된 유태인들)



시리아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들을 모두 부인한다. 외교 전문가들은 "아무리 부담스럽더라도 우리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을 넘겨줄 수 없다"는 시리아인들의 '명예심'이 그를 넘겨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시리아 정부는 단지 그가 빨리 자연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93년 초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았고, 그 후에도 그의 생존 여부와 다마스커스 거주 여부에 대해서는 수많은 소문들이 있었다.



▶ 나치 육군소장의 증언



프랑스 수사당국은 오토 에른스트 레머라는 나치 육군소장의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레머는 44년 7월 히틀러에 대한 반란 진압에 참여했고 전후에는 네오나치의 숭배의 인물이 된 사람이다.



레머는 브루너와 함께 다마스커스에서 오리엔트 트레이딩 캄퍼니(Otraco)를 설립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는 무역회사이지만 실은 네오나치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레머는 프랑스 수사관들에게 브루너가 피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1980년 브루너에 대한 두 번째 폭탄테러후 그는 시리아 경찰이 경호하는 병원으로 그를 방문했다고 한다.



97년 10월 죽기 직전 레머는 다시 한번 심문을 받으면서 "만일 브루너가 죽었다면 내가 시리아와 독일의 정보망을 통해 이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로서 나치들의 정보망이 훌륭하게 구축되어 있음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레머는 전후에 스페인으로 넘어가 네오나치 그룹 Cedade(스페인에 있는 유럽의 친구)를 결성했다. Cedade의 구성원이며 극우신문 편집자인 게르트 혼식은 다마스커스에서 레머를 알게 되었고, 브루너의 딸이 자주 스페인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종합해, 수사당국은 브루너가 스페인에서 극우파들의 보호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독일수사당국은 이미 브루노 추적의 실마리를 놓쳐 버렸지만 프랑스 법원은 확고하게 수사를 진행시키고 있다. 프랑스 검찰은 내년에 궐석재판에서라도 브루노가 무기징역을 받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 김림 베를린천사3월호 9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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