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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 아우슈비츠 최후의 날 - 뉴스위크 95년 1월 18일 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종현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4,233회 작성일 02-03-09 04:44

본문

작성일 : 1999/03/08 조회수 : 142

■ 아우슈비츠 최후의 날 - 뉴스위크 95년 1월 18일 자 기사

                                                      옮긴이 : 김종현

1945년 1월 27일 오후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5개월간 포로생활을 해온 네덜란드 유태인 살 데 리에마(30)는 독일인들이 9일 전 수용소에서 철수한 이래 처음으로 막사 밖에 쌓인 눈에 발을 디뎠다. 그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폴란드의 한겨울에 미지의 목적지까지 강제로 행진하는 대신, 뒤에 남아 침대에 누운채 죽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나흘동안 내리 잠을 잤다. 깨어난 후에는 뒤에 남은 다른 포로가 훔친 각설탕 덩어리를 빨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1월 27일이 되자 상태가 좀 나아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사 문을 나온 그는 수용소 정문 밖까지 나가봤다. 그가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눈 속에 있는 털이 많은 누런 개들이었다. 그 개들은 방금 수용소를 해방시켜 준 모피 모자와 흰색 위장복 차림의 러시아 군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구원조차 어처구니 없는 위장을 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 수용소를 포위한 후 해방시킨 적군(赤軍)의 4개 사단 장병들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생존한 지휘관 바실리 페트렌코 퇴역중장은 실로 참혹한 전투를 많이 경험한 노련한 베테랑이었다. "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 걸봤다. 교수형이나 화형을 당한 사람들도 봤다. 그렇지만 아우슈비츠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페트렌코는 말한다. 그를 특히 경악시킨 것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일부는 유아였는데 나치 군인들이 서둘러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의사 요제프 멩겔레가 자행한 의학 실험에서 살아남은, 혹은 그 전해 가을 바르샤바의 불운한 반란뒤에 체포된 폴란드 정치범들의 자녀였다. 나중에서야 페트렌코는 그곳이 아이들을 데려다 죽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체 대규모 전쟁에 휘말려서 세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해방을 특별히 주시하지 않았다. 그때 그곳은 유령의 도시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을 통과해 자신들의 머리카락과 불타는 시신의 냄새만 남기고 간 1백50만 명 중 단지 6만 5천 명이 45년초 당시 아직 그곳에 있었다. 러시아군에 의해 해방된 사람들은 뒤에 남은 7천 명 남짓이었다. 그 중 다수는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해방으로 그들의 죽음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유대인 알베르 그리놀츠는 적군의 몽고병사들이 말을 타고 수용소로 들어오던 장면을 돌이킨다. "그들은 아주 착했다. 돼지를 잡아 씻지도 않고 자른 뒤 군용 솥에다 감자, 양배추와 함께 넣었다. 그리고는 그 요리를 환자들에게 나눠줬다." 아사직전의 사람들에게 그 식사는 나치가 저지른 어느 만행 못지않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통스런 추억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생존자들이 늘어나면서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은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의 저자인 이딸리아 시인 프리모 리비는 1987년 계단에서 굴러 자살했다. "고문을 받은 사람은 나중에도 계속 고통받는다"고 오스트리아 유대인 철학자 얀 아메리는 적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뒤 33년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쩌면 아우슈비츠를 겪으며 사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편이 나았을 것이다. 모든 세대는 제각기 대학살의 피를 흘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와 유태인 대학살은 인류의 대학살 역사 속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르완다人들이 인종 경쟁으로 이웃사람들을 몽둥이로 패죽이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결코 변하지 않을 당혹스러운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매일 수천 명을 뽑아죽이고, 화장(火葬)하는 치밀한 매커니즘은 말하자면 죽음의 공업화인 셈이다. 그때문에 현대기술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본성이 정말로 바뀌었을 무시무시한 가능성이 제기됐다. 20세기는 바로 그날 아우슈비츠에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몸서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우슈비츠는 여섯 개나 되는 나치의 학살 수용소중 가장 큰 것에 불과했을 뿐이고, 사실 그곳이 최악이었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다. 그곳이 유명해진 것은 대규모였다는 이유도 있지만, 유대인과 집시들의 죽음의 수용소(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스실은 근처의 비르케나우 보조수용소에 있었음)이자 유대인, 폴란드정치범, 전쟁포로, 동성연애자, 그리고 보통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여러 강제노동수용소의 본부를 겸했다는 특수역할때문이었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나가는 길은 (죽어서) 굴뚝을 통하는 길 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반드시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 1백여만 명 말고도 수만명이 그곳에 살며 일하고, 사랑에 빠지고, 아기를 낳고, 끊임없이 살아남을 궁리를 했다. 그것에 성공한 사람들은 죽음의 그늘, 냄새, 그리고 먼지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 지를 들려주었다.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을 맞아 뉴스위크의 특파원들은 1944년 봄에 시작된 마지막 대학살 잔치로부터 겨울의 「죽음의 행진」에 이르는 기간을 망라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3개 대륙에 모았다. 그 중에는 전에 알려지지 않은 비화도 있다.

1944년 봄 전황이 독일에 불리하게 기울면서 헝가리출신 유태인들을 태운 열차가 비르케나우에 속속 도착했다. 그때까지만해도 헝가리 유태인 80만명은 억압은 받았을지언정 최악의 나치 만행은 면제받은 상태였고, 그 중 어느 누구도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열차행렬에 17세의 리타 얌베르거(女)와 그녀의 언니 베르타 모르간스턴, 그리고 베르타의 두 자녀가 타고 있었다. 칸마다 80명씩 비지땀을 흘리며 나흘 밤낮을 서 있었다. 양동이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먹는 물이고, 나머지는 변기였다.

얌베르거가 탄 열차는 한밤중 아우슈비츠에 도착해 정차해 있었다. 새벽이 되자 문이 활짝 열리고 앞을 잘 못 보는 어리둥절한 사람들은 줄을 서 선별검사를 받았다. 그들은 5명 단위로 번쩍거리는 군화와 빳빳한 흑색 친위대 복장차림을 한 요제프 맹겔레의 곁을 지나 행진했다. 노인, 환자, 어린이, 애엄마들은 왼쪽에 서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오른쪽에 섰다. 얌베르거의 언니는 자녀를 거느린 엄마들이 한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지만, 물론 그녀가 그 이유를 알 리는 없었다.

얌베르거는 당시를 돌이킨다. "언니는 내가 좀더 나이 들어 보이라고 내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주었고, 나는 조카 손을 잡고 엄마 행세를 했다. 우리는 모두 왼쪽으로 갔다. 흩어지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누가 내 어깨를 만졌다. 바로 멩겔레였다. '자네 몇 살인가'라고 그가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최면에 걸렸다. 조카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만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그는 조카를 밀어버렸다. 걔는 넘어졌고, 나는 오른쪽으로 떠밀렸다. 그 덕분에 시체 소각장행 신세를 면한 것이다."

식구들끼리 흩어지지 않는 가족들도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동부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될 당시 14세였던 글로리아 리온은 12세짜리 여동생 아노슈카가 처음에 노인과 어린이줄에 보내졌는데, 몰래 다른 줄로 들어와 가족들과 재회했다고 돌이킨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누슈카의 그런 행동을 나무랐다. 우리는 노인들이 애들을 보살피고 우리 그룹은 힘든 일을 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라고 리온은 말했다. 부모에 대한 불복종이 그처럼 후한 보답을 받은 적은 없었다. 자매는 모두 전쟁에서 살아남아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때로는 열차에서 내리는 희생자들을 가스실까지 안내하는 동료수용자들이 자기 목숨을 무릅쓰고 젊은 애엄마들에게 아기를 나이든 친척들에게 맡기라고 속삭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말에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에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헬렌 파르카스는 "우리 언니 에텔은 ' 저사람 미쳤어? 내 자식을 노인한테 주라는게 무슨 소리야?'라고 말했다."고 돌이킨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시어머니가 애를 안고 왼쪽 줄로 가버렸다. 애텔이 그 줄에 끼려하자 경비병들이 못 오게 두들겨팼다. 작업조로 뽑힌 자매는 강제로 옷을 벗기고, 머리를 박박 깎였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따. 모두 벌거벗고 머리털이 없어알아볼 수 없었다. 마침내 서로 찾아낸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 너무나 미친듯이 웃다보니 나중에는 울음이 나왔다"고 헬렌은 말한다

이처럼 나치 친위대의 마수가 닿는 곳에서는 어디를 막론하고 무고한 유대인들을 태운 열차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슬로바키아, 그리스, 그리고 헝가리등. 헝가리정부는 두 달도 채안되는 짧은 기간에 유대인 43만 8천명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다음 7월 중순 추방을 중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생자들은 친위대원들의 따가운 감시아래 가스실로 향한 뒤 연기로 변해 하늘을 그을렸다. 그 냄새가 어찌나 독했던지 리온은 그 뒤로 근 50년간 후각을 상실할 정도였다.

작업조로 뽑힌 사람들은 머리를 깎이고, 왼쪽 팔뚝에 죄수번호를 문신했으며, 제복과 밥그릇·스푼을 지급받은 뒤 막사로 내몰렸다. 수백명이 3단 침상에서 잤다. 신입수용자들은 고참 폴란드·체코 유대인들의 놀림을 받았다. "고참들은 우리보고 '너희들이 극장 구경을 할때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고생했다'고 말했다." 5월 헝가리의 한 마을에서 아우슈비츠로 끌려온 유디 페를라키의 말이다.

신입 수용자들은 점호, 구타, 노동, 그리고 전격적으로 벌어지는 가스실行 선별등의 생활을 시작했다. 나치는 열차가 도착하지 않은 날에도 가스실을 놀리지 않았다. 점호는 하루에 두 번씩, 항상 밖에서 이뤄졌다. 수용자들은 점호가 끝날 때까지 차렷자세로 서 있었는데 어떤 때는 몇 시간씩 계속되곤 했다. 수용소에 만연한 이질에 걸리지 않은 사람한테도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폴란드의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면서 서 있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수용자들이 친위대원만큼이나 두려워하는 「카포스(모범수)」들이 수용자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줄이 틀린 사람을 구타하거나 동상 걸린 발을 밟았고 자기 마음대로 아무나 때렸다. 사령관의 변덕에 따라 수용자들로 구성된 오케4스트라가 수용자들이 공장, 고아산, 건설현장으로 행진하는 데 맞춰 음악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그 음악은 허깨비였다. 우리가 행진할 때는 음악이 우리를 따라왔고, 돌아올 때는 음악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래서 이미 저승세계에 사는 것 같았다"고 1944년 폴란드 중부의 한 강제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온 라헬 피우키는 말한다.

수용자들의 아침식사는 대용 커피, 점심은 0.5l쯤 되는 묽은 수프, 그리고 저녁은 200여g정도의 빵이 전부였다. 야외에서 중노동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먹고 버티는 것은 수 주 혹은 몇 달이 고작이엇다. 결국 생존자는 이론상 가외 식량을 구해 먹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많은 생존자들이 신참들의 소지품을 꼼꼼하게 분류해 꼬리표를 달고, 기록하고, 저장하는 곳에 근무하며 바로바로 도둑질을 했다 창고는 모두들 따뜻한 양말을 신고 담배를 피운다는 꿈나라 이름을 본떠 『캐나다』라고 불리웠다.

8월, 1942년부터 아우슈비츠에 수용돼 있던 독일 유대인 지기 빌치크는 수용소에서 모두들 탐내는 자리에 배치됐다. 캐나다 창고를 정돈하는 일이었다. 창고 방 하나는 전체가 화장지를 저장하는 곳이엇다. "높이가 4m 정도 되는 큰 방이 온통 화장지였다. 왜 그렇게 많은 화장지를 쌓아두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두루마리에 모두 딱지를 달고 독일인들이 원하는 대로 차곡차곡 정돈했다. 그러면서 두루마리 통 속에다 반지나 시꼐 등 식량과 교환할 수 있는 작은 귀중품들을 채웠다.

먹을 것이 충분히 보장되는 또 한 가지 일자리는 「존데르코만도」였다. 열차에서 내리는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데려가고 나중에 그들 시신을 시체 소각로 끌고 가는 일을 하는 유대인 수용자들이었다.

1944년 존데르코만도로 일했던 헨리크 만델바움의 증언을 들어본다.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리면 탈의실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샤워하는 줄 알고 온 가족이 함께 들어가곤 했다. 가스실이 절반 이상 찰 때쯤엔 뭔가 이상한 낌채를 채고 동요가 일지만 친위대원들이 몽둥이로 마구 갈겨댔다."

존데르코만도는 중노도을 할 뿐만 아니라 언제 자기 친척이 가스실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부담때문에 더욱 못해먹을 짓이었다. 만델바움은 자기 가족과 함께 자청해서 가스실로 들어간 한 전설적인 존데르코만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엇다. 또 자기 모친을 만나 최후의 순간까지 샤워하는 거라고 안심시킨 사람도 있었다. 그 존데르코만도는 죄의 댓가로 동료들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가스실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체코 국가를 부른 집단도 있었으며, 기도를 올린 사람도 있었다. 유대인은 죽을때 「셰마(신앙고백기도)」를 올려야 한다. 존데르코만도였던 예호슈아 로젠블룸은 덕망있는 랍비를 데리고 가스실로 들어가 벌거벗은 그 노인에게 곧 죽을 거라고 알려줬다.

"나는 그에게 기도를 올리라고 말했다. 「죽기 전에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뭔가(모자) 쓰세요.」 마침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에게 말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생전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아이, 부모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조용히 하게. 우리는 불평해서는 안되네. 이건 다 하느님의 뜻일세. 우리는 그런 의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네.」"

"그는 나에게 「이 사악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로젠블룸은 이렇게 답했다. "랍비, 오늘은 당신이지만 내일은 내 차례요." 존데르코만도 자신들도 결국 언젠가는 화장터의 재가 되고 말리라 예상했다. 그것이 일의 예정된 순서였다. 나치들은 주기적으로 그들을 죽이고 존데르코만도 그룹을 새로 선정함으로써 말이 새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해 여름 가스실 신세를 모면한 유대인 로만 프리스터의 예를 보자. 폴란드의 어느 작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비르케나우로 이송됐을때, 15세의 고아였던 그는 본 적도 없던 선반 운전공으로 자원해 일자리를 얻었다. 살아남는 데에는 희생이 따랐다. 어느 날 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다른 수감자에게 강간을 당했다. 식량을 구할 수 있던 연상의 남자였다. "그는 빵을 든 손을 내 입에 우겨넣었다. 나는 그 빵이 몹시 먹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일을 마치기전에 얼른 먹어치우고 빵을 더 내놓게하려 했다. 그렇게 세 개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가 가버린 얼마 후 내 죄수모가 없어졌다는 것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 점호때 모자가 없는 죄수는 총살을 당했다. 그는 나를 없앨 생각으로 내 모자를 훔친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또 다른 죄수의 모자를 훔쳤다. 그 다음날 아침 나 대신 바로 그 죄수가 살해됐다. 나는 그게 누구였는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수감자가 죽었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해 여름 내내 수많은 사람들이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다. 암스테르담 출신 유대인 막스 가르시아는 충수염 덕택에 목숨을 건졌다. 4일동안 심한 복통을 앓던 그는 수용소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것은 화장터로 가는 직행 티켓이 되는 예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친위대 군의관은 급성 충수염환자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경험삼아 가르시아의 배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아우슈비츠에서 가장 큰 뉴스는 말라 짐메트바움과 에드바르트 갈리니스키의 탈출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들의 탈출에 대해 알고 그 전설적인 마지막을 목격한 수천명의 수감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수백명의 아우슈비츠 탈출자중 가장 유명했다. 1944년 20세에 불과했던 말라 짐메트바움은 아우슈비츠를 거쳐간 비범한 죄수 중 하나였다. 수개 국어에 능통한 그녀에게는 전령 겸 통역사 일이 맡겨졌다. 그녀는 수용소 내 저항운동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충분히 활용한 것 같았다. 심지어 가스실로 가기로 정해진 여자들의 신분증을 이미 사망한 여성들의 것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짐메트바움은 폴란드人 정치수인 에드바르트 갈리니스키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함께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친위대 요원 한 명을 매수해 제복 한 벌을 얻고 짐메트바움이 간수실에서 통행증을 훔쳐냈다. 6월 24일, 갈리니스키는 여죄수 짐메트바움을 끌고 아우슈비츠 정문을 당당히 걸어나갔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죄수들을 그렇게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2주 뒤 폴란드 남부를 벗어나지 못한채 붙잡혀 처형을 위해 수용소로 송환됐다. 교수형 날짜는 9월 15일로 잡혔다. 갈리니스키가 먼저 교수대로 올라갔다. 그는 자기 목에 올가미를 걸고, "폴란드만세!"를 외치며 발판을 걷어찼다. 짐메트바움은 탈출 기도의 결말에 대해 생생한 교육을 받고 있던 여죄수 무리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간수들이 채 그녀의 목을 매달기도 전에 그녀는 면도칼을 꺼내 자신의 손목을 그어 처형집행인들에게 피세례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가 두 연인의 운명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8월 20일, 포자에 있는 미군 공군(당시는 미 육군 항공대임)기지에서 출격한 120대가 넘는 폭격기들이 上실레지엔의 공장들을 폭격하러 가는 길에 아우슈비츠 상공을 날아갔다. 사실상 아우슈비츠의 위성 캠프인 IG파르벤 공장도 목표물 중의 하나였다. '부나'라는 이름의 그 거대한 공장은 석탄을 이용해 합성연료와 고무를 만드는 곳이었다. 부나의 한 창고에서 일하던 막스 산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수용소의 사이렌 소리를 들었지만 숨을 만한 곳이 없4었다. 막사에 머물러 있다가 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비행기로 덮여 있었다." 이틀 후 그가 다시 교대근무하러 나갔을 때는 온통 쑥밭이 돼있었다. 물론 그 폭격의 여파로 산츠 형제는 편한 창고일을 잃고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자리로 옮겨야 했지만 독일군이 폭격당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에 비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나 비르케나우에는 단 한 발의 폭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무렵 아우슈비츠에 대해 익히 알게 된 미국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미국정부에 그 화장터를 폭격해줄 것을 탄원했다. 물론 그와 같은 공습에서 수 백명의 수감자가 죽을 수도 있지만 매일 도착하는 수천 명의 새로운 피해자 중 일부를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수용소의 수감자들도 같은 기대를 안고 있었다. 5월에 헝가리에서 아우슈비츠로 끌려온 셀리아 로젠베르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공습이 시작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폭격을 맞았을 것이다. 두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당시 미국방부는 군사목표와 인도적 목표를 혼동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고수했던 것 같다. 미 육군성의 존 J. 매클로이 차관보는 "그들을 돕는 최상책은 최대한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4년 가을 계속되는 공습과 죄수들에게 전해지는 뉴스는 독일의 패색이 완연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존데르코만도들에게 그것은 행동개시 신호였다. 그들은 군수품공장에서 일하는 죄수들(대부분 여자)의 도움을 얻어 한 번에 몇 g씩 화약을 빼돌렸다. 막연하게나마 가스실을 폭파하고 간수들을 공격하며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에 둘러쳐진 전류가 흐르는 담장을 돌파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나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인 10월 7일 친위대는 3백명의 존데르코만도에 그 뜻이 뻔한 이송을 명령했고, 그들은 싸우다 죽기로 결의했다.

무계획하고 짜임새없고 수적으로 크게 열세에 있던 그들에게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반란이었다. 존데르코만도들은 칼·체인·돌, 그리고 수제 수류탄 몇 개로 잘 무장된 친위대에 맞서 싸웠다. 그래도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카펫 공장으로 보내질 사람의 머리털 꾸러미가 제4화장터의 헛간에 보관돼 있었다. 존데르코만도들은 거기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놓아 그 커다란 건물을 깡그리 태웠다. 친위대 요원 3명도 살해됐다. 그러나 아무도 그 곳을 빠져나가지 못했고 마지막 존데르코만도라 불리게 된 663명중 451명이 친위대에 총살돼 해질 무렵 화장터에 던져졌다.

그리고 그들을 도운 여성중 4명(로사 로보타, 에스터 바히블룸, 알라 게르트너, 레지나 사피르차인)이 체포돼 악명높은 11동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몇 주 동안 고문을 당했지만 끝내 다른 공모자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동생안나에게 몰래 전달된 편지에서 에스터는, "수용소의 귀에 익은 소리들, 카포들의 고함소리, 차·수프·빵을 애걸하는 외침소리, 그 모든 싫은 소리들이 이제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죽게 될 지"에 대해 썼다. "반가운 구조의 손길이 나에게까지는 미치지 않는구나. 나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정말 살고 싶은데......" 에스터는 20세였다. 독일군이 아우슈비츠를 완전히 포기하는 날이 채 2주도 남지않은 1945년 1월 6일 그 4명의 여자는 교수대로 끌려갔다. 그것이 아우슈비츠에서 마지막 공개처형이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소련의 적군이 거리를 좁혀들자 베를린에서 새루운 명령이 떨어졌다. 유대인의 이송이 중단되고 화장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사실상 그 방대한 작전이 반대 방향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제3제국의 가장 찬란한 업적이 됐을 증거를 없애기 시작한 것이다. 굴뚝 청소를 위해 파견됐던 요원들이 약 50cm두께나 되는 사람의 지방 퇴적물을 긁어내야 했다. 그와 같은 사태발전을 지켜보는 죄수들은 희비가 교차했다. 나치가 패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기뻤지만, 모두 독일군이 자기들을 먼저 학살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떨었던 것이다.

1월 12일 上실레지엔에 대한 소련의 공세가 시작되자, 독일군은 금새 무너졌다. 1월 17일, 저녁 일석 점호를 할 때는 赤軍의 포성이 더 가까이서 울려 퍼졌다. 다음날 한 번에 수천 명씩 죄수들의 긴 행렬이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될뻔했던 굴뚝의 잔해를 뒤로 한 채 수용소를 빠져나갔다. 대부분 아사직전의 상태에 있었고, 상당수가 나무신발이나 천조각으로 겨우 발을 감싼 채 얼음장 같은 진흙 위를 걸었다. 독일군 장교들이 강요하는 단 하나의 규칙은 단순했다. 뒤쳐지는 사람은 누구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즉석에서 사살한 것이다. "수용소를 벗어나 담장 없는 곳으로 나왔지만 자유의 몸은 아니었다. 수용소의 생활이 힘들었다지만 죽음의 행진에 비하면 덜한 편이었다."고 지기 빌치크는 말했다.

그 며칠 동안의 혼란 속에서 꽤 많은 죄수들이 탈주에 성공했다. 1941년부터 강제수용소에 갇혀 이던 루이스 차크스는 소련군이 다가올때, 야보르즈노 수용소의 탄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일터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하루 먼저 해방을 선언했다. 보통때였다면 당장 목숨이 날아갈 행동이었다. 다른 수용소인 블레크해머로 이동했을때 달아나 석탄더미 속에 숨었다. 단 몇 시간 뒤 안전하다고 판단한 그가 기지개를 하자 석탄더미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20명이 그 더미 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자유에도 위험이 따랐다. 북쪽 로지를 향해 국도를 걸어가고 있을때 그를 비롯한 탈주자들은 일단의 소련군 병사와 맞닥뜨렸다. "그들은 우리에게 시계를 요구했다. 우리는 시계가 없으며 강제수용소를 빠져나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 유태인이군. 아무도 유태인은 좋아하지 않지. 독일인·폴란드인뿐 아니라 우리도 유태인들을 안좋아해.' 라고 말했다. 그들은 숲속까지 우리를 뒤쫓아 총을 겨눴다." 차크스는 때마침 유태인 한 명을 포함한 러시아 장교 몇 명이 도착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죽음의 장정에서 도망가지 못하거나 죽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독일의 수용소로 향하는 무개열차에 실렸다. 여름에는 꽉꽉 막힌 유개화차에 실려오더니 이제 겨울에는 사방이 트인 열차를 타고 여행하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이점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 여위고 가련해서 민간인들이 때로는 그들에게 빵이나 옷가지를 던져준 것이다. 친위대 경비병들은 민간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면서 그것을 저지했다. 제3제국이 무너져 내리던 마지막 몇 주와 몇 달은 죄수들에게는 가장 힘든 기간이었다. 독일의 라벤스브루크에 억류됐던 린다 브레너는 아우슈비츠에서, 그리고 "눈 속에 시체로 뒤덮인" 길을 따라 죽음의 장정을 한 33개월을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수프로 가득한 솥이 막 분배되려는 순간 뒤집혀 굶주림에 허덕이던 여자들이 눈 위에 남아 있는 음식을 핥던 추억을 더듬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결국 소련군에 의해 풀려난 그녀는 친구 몇몇과 함께 걸어서 슬로바키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마친 뒤, 계속 자신들의 삶을 이어갔다. 수용소 생존자들은 자유로운 남성과 여성으로 일어나 걸어갔고, 정말 기적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지속했다. 그들은 재단사, 또는 보석상 등 하여간 무엇이든지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갔다. 일부는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또 다른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젠 그들의 팔에 새겨진 숫자를 발견하지 않는 한 예루살렘·토론토, 또는 LA의 군중 속에서 그들을 구별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그리고 아우슈비츠를 거쳐간 사람들)은 후에 밝혀진 소련 통계에 따르면 백만벌 이상의 신사복·코트·드레스와 7t의 머리칼, 그리고 그에 맞먹는 수의 신발·안경·식기 등의 물건을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캐나다의 35개 저장실 중 불과 6곳에서 발견된 것을 헤아린 것이다. 다른 곳은 독일군이 모두 불살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번쩍이는 구두를 실은 한 장신 남자가 자신들을 종신형에 처하는 순간, 한 어린 소년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거칠게 나꿔채져 왼쪽으로 밀려나는 것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안고 떠났다. "저 멀리서 나는 그 어린애를 보았다. 그는 엄마를 외치며,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 소년이 엄마를 찾아 함께 죽었기를 바랄 뿐이다."
취재: Andrew Nagorski in Europe


Jeffrey Bartholet in Israel

Martha Brant and Bruce Shenitz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집필: Jerry Ad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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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되고 꾸며낸 이야기 많다. --- 아우슈비츠에 처음 수용된 사람들은 정치범. 사망자도 400만명 아닌 110만∼150만
폴란드의 조용한 시골에서조차 『아우슈비츠』란 이름은 편안치가 않다. 그 이름만 들어도 20세기의 야만적인 범죄행위에 대한 기억이 즉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나치 독일 최재의 집단 수용소에 관한 꾸며낸 이야기와 잘못된 생각들은 숱하게 많다. 옛 소련 조사관들은 지난 1945년 5월 아우슈비츠에서 4백만명이 죽었다고 선언했으며, 폴란드 공산정권은 89년 권력을 잃을 때까지 이 과장된 숫자에 매달려 있었다. 그 후 희생자의 수는 110만∼150만 사이로 수정되었으며 현재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정확한 것으로 믿고 있다. 옛 소련 블럭이 붕괴할때까지 아우슈비츠의 전시장에서는 유대인 희생자들의 수를 줄여서 보여주었다. 이는 희생자 총수에서 차지하는 유대인의 비율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90%보다 적었다고 은근히 시사하는 것이었다. 많은 서방인들은 그 수용소가 유태인을 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아우슈비츠는 1차적으로 폴란드 유태인을 죽이기 위한 장소였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좀더 복잡하다.

독일어로 「아우슈비츠」라고 하는 「오스비침」 마을 근처의 前 군대막사였던 그 수용소에 맨 처음 폴란드인이 수용된 것은 40년 6월. 728명이 그 곳에 끌려왔다. 그들은 대개 레지스탕스운동에 가다했던 정치범들이었다. 유태인추방은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그들은 대부분 카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이 첫번째 수감자들이 도착하자마자, 독일군 당국자는 이 수용소가 장차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를 알리는 연설을 했다. 그 죄수들을 책임지고 있던 나치 독일 친위대(SS)대장 카알 프리츠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대들은 요양소에 들어온 게 아니라 독일 집단 수용소에 들어왔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굴뚝밖에 없다. 그것이 싫은 사람은 철조망에 몸을 내던질수는 있을 것이다. 수송돼 온 사람가운데 유태인이 있으면, 그들은 2주일 이상 살 권리가 없다. 성직자는 1개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3개월이다."

일부 죄수는 총살당했으며, 매일같이 고문이 자행돼 초기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죄수들이 일단 주방과 창고 또는 다른 대피 장소에서 일거리를 붙들게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그 일거리들이 그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 죄수 15만 명 가운데 약 7만 5천 명이 그곳에서 죽었다.

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소련군 포로들도 아우슈비츠에 보내졌다. 엄청난 수의 포로가 올 것으로 예상한 SS사령과 하인리히 히믈러는 아우슈비츠에서 3Km쯤 떨어진 비르케나우에 거대한 제2단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제일 먼저 도착한 포로들은 강인한 폴란드 정치범들조차 공포에 떨게 한 혹독한 조건 아래 새로운시설의 건설작업에 투입됐다. "그들은 너무도 배가 고파 시체실에 있는 시체의 엉덩이 살을 베어 그 고기를 먹었다. 뒤에 우리는 그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시체실 문을 잠갔다."고 포로용 병실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미에치슬라프 자바츠키는 회고했다.

대다수 소련군 포로들이 이내 죽고 대규모의 포로 유입이 더 이상 없게 되자 히믈러 수용소소장 루돌프 헤스는 아우슈비츠가 유럽 유태인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전지역으로부터 유태인들이 실려오는 바람에 아우슈비츠는 가장 국제적인 수용소가 되었다. 비르케나우와 그곳의 가스실이 완전 가동에 들어갈 무렵 대다수 폴란드 유태인들은 이미 트레블링카나 소비보르, 또는벨체크 같은 다른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약 30만 명의 폴란드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된데 이어 44년 여름에는 무려 43만 8천명의 헝가리 유태인들이 실려왔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수용소인 동시에 중노동 수용소였다. 비교적 많은 생존자가 그곳에서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트레블링카나 여타 죽음의 수용소들이 외부에 덜 알려져다면 그것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은 전쟁이 끝나기 훨씬 이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44년 두 권의 중요한 체험수기가 발표됐다. 하나는 예르지 타보라는 폴란드 정치범이 쓴 것으로 그는 다른 수감자와 함께 수용소의 전기철조망을 합선시킨 후 그것을 절단하고 크라코프로 탈출한 사람이다. 그의 수기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 의해 배포됐다. 다른 충격적인 보고서는 두 명의 슬로바키아 유태인들이 쓴 것으로 이를 통해 대량 가스 학살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가 여러 유태인 단체와 서방 각국 정부에 알려지기 되었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도와달라는 그들의 절규가 귀에 쟁쟁하다. 타보는 『한 폴란드 소령의 보고서』라는 기록에서 폴란드 정치범들에 대한 갖은 고문과 병든 죄수들에게 페놀을 주사해서 죽인 일, 그리고 비르케나우에서「유태인 대량학살」에 관한 이야기들을 적었다. 크라코프에서 심장전문의로 일하다가 은퇴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집시 수용소에서는 비탈길과 수송차량이 도착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소각장으로 끌려간지 2∼3시간후 그곳에선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소각장이 빨리 작동하지 못할때는 시체더미가 불에 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80년대 말에는 아우슈비츠에 인접한 카르멜 수도원에 관한 카톨릭 교도와 유태교도 사이의 분쟁으로 격렬한 비난전이 촉발됐다. 아우슈비츠가 상대방에 대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인정하기를 서로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그같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폴란드신정부는 90년 기독교도와 유태교인으로 구성된 수용소 박물과 국제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비판론자들은 그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불만이나 그 이후 아우슈비츠는 놀란 만큼 변했다. 특히 비르케나우 가스실 자리에 있는 안내문은 희생자의 대부분이 유태인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필자: Andrew Nagorski(NewsWeek 모스크바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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