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성경 그리고 바벨탑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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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유로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2,796회 작성일 02-03-15 23:18본문
■성경 그리고 바벨탑의 언어
Ferdinand Schmatz는 성경을 보다 유연하게 해석한다. 성경의 전승에 있어 바벨탑을 건설했을 때 벌어진 상황이 다시금 재현되고 있다. 언어가 다양해지면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성경은 너무나 다양한 번역이 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연 그것이 소위 한때 원래 고지된 진실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나는 성경의 시편을 뒤적여 본다.그러면서 생각한다. 이 시편은 원래 히브리어나 아라메아어로 쓰여졌다고. 나는 그것을 라틴어번역, 루터번역, 마틴 부버번역으로 읽는다. 혹은 이제 페르디난트 슈마츠에 의해 새롭게 개작된 시편을 읽는다.
그러면서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무슨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함 감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러한 한 슈마츠는 원래 역사적으로 성경에서 말해진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밝음보다는 어두움에 빠져 버린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적인 의미의 한 측면은 각 번역을 통해 보다 분명해지지만 그러나 모든 측면은 보다 수수께끼처럼 된다. 루터를 예로 들지면 남는 것은 독일문학이며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다.
언어반성적인 시인인 슈마츠는 성경의 발생기원의 대부분, 몇몇 시편과 요한묵시록을 사물화를 지양하며,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것의 토대를 흔드는 방식, 그리고 그 실체성을 탈각시키는 방식으로 다룬다.(Entsubstantiierung, auch Entsubstanzialisierung)
보통 성경구절은 기념비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의 달달 외우는 수준이 되었다. 그것들은 자체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더이상 그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친숙한 그것들에는 위험이 함께한다. 우리는 그것을 질문이나 도전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하나의 시문학으로 즐기고 도취되는 것이다.
슈마츠는 단지 이러한 구미에 맞는 안온함을 흔들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큰 개념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비껴가면서 에둘러서 말하며 " 특히 선입관적인 정리된 인식을 보장해 주는 이름들은 언급을 회피한다. 슈마츠는 이름에 동반되는 의미연상작용을 방지하고자 한다.
슈마츠의 음영이 풍부한 문장들은 그 원구절들이 우리에게 친숙한 만큼 도발적이며 생산적이다. 그는 확고한 구절들을 펼쳐보이면서 두줄문장에서 네줄을 만들고, 네줄문장에서 여덟줄을 만들며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텍스트를 풀어 헤치면서 바벨의 언어를 야기하며 자극을 가한다.
성경을 우리는 루터나 Klaus Berger,d Christiane Nord가 신약을 번역한 방식으로 접해왔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뭔가 맞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의 텍스트가 다시금 비밀스러움에 가득차고 어두우며 그로서 다시금 혼란스런 낯설음을 생산해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낯설음이 2,3천년동안 전승된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에서 이 "어두운" 번역은 모든 것을 오늘날의 것으로 "번역"하고 자명한 것으로 만들며, 그럼으로써 위조를 가하는 번역보다도 더 리얼리스틱하다.
(번역글인데 유감스럽게 출처분실)
- 자유로니 베를린천사 2000년 5월호◀
Ferdinand Schmatz는 성경을 보다 유연하게 해석한다. 성경의 전승에 있어 바벨탑을 건설했을 때 벌어진 상황이 다시금 재현되고 있다. 언어가 다양해지면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성경은 너무나 다양한 번역이 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연 그것이 소위 한때 원래 고지된 진실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나는 성경의 시편을 뒤적여 본다.그러면서 생각한다. 이 시편은 원래 히브리어나 아라메아어로 쓰여졌다고. 나는 그것을 라틴어번역, 루터번역, 마틴 부버번역으로 읽는다. 혹은 이제 페르디난트 슈마츠에 의해 새롭게 개작된 시편을 읽는다.
그러면서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무슨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함 감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러한 한 슈마츠는 원래 역사적으로 성경에서 말해진 것을 분명히 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밝음보다는 어두움에 빠져 버린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적인 의미의 한 측면은 각 번역을 통해 보다 분명해지지만 그러나 모든 측면은 보다 수수께끼처럼 된다. 루터를 예로 들지면 남는 것은 독일문학이며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다.
언어반성적인 시인인 슈마츠는 성경의 발생기원의 대부분, 몇몇 시편과 요한묵시록을 사물화를 지양하며,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것의 토대를 흔드는 방식, 그리고 그 실체성을 탈각시키는 방식으로 다룬다.(Entsubstantiierung, auch Entsubstanzialisierung)
보통 성경구절은 기념비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의 달달 외우는 수준이 되었다. 그것들은 자체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더이상 그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친숙한 그것들에는 위험이 함께한다. 우리는 그것을 질문이나 도전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하나의 시문학으로 즐기고 도취되는 것이다.
슈마츠는 단지 이러한 구미에 맞는 안온함을 흔들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큰 개념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비껴가면서 에둘러서 말하며 " 특히 선입관적인 정리된 인식을 보장해 주는 이름들은 언급을 회피한다. 슈마츠는 이름에 동반되는 의미연상작용을 방지하고자 한다.
슈마츠의 음영이 풍부한 문장들은 그 원구절들이 우리에게 친숙한 만큼 도발적이며 생산적이다. 그는 확고한 구절들을 펼쳐보이면서 두줄문장에서 네줄을 만들고, 네줄문장에서 여덟줄을 만들며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텍스트를 풀어 헤치면서 바벨의 언어를 야기하며 자극을 가한다.
성경을 우리는 루터나 Klaus Berger,d Christiane Nord가 신약을 번역한 방식으로 접해왔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뭔가 맞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의 텍스트가 다시금 비밀스러움에 가득차고 어두우며 그로서 다시금 혼란스런 낯설음을 생산해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낯설음이 2,3천년동안 전승된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에서 이 "어두운" 번역은 모든 것을 오늘날의 것으로 "번역"하고 자명한 것으로 만들며, 그럼으로써 위조를 가하는 번역보다도 더 리얼리스틱하다.
(번역글인데 유감스럽게 출처분실)
- 자유로니 베를린천사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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