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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하나님을 보는 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땡중이름으로 검색 댓글 1건 조회 2,371회 작성일 02-03-09 11:43

본문

작성일 : 1999/06/25 조회수 : 190

■ 하나님을 보는 길  
                                  법과 사랑

-사랑: 초월: 타인 속으로의 초월: 타인의 상황 속으로의 초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사 42, 1-3).
-법: 법은 절대적인 복종을 전제함. 법의 기능은 판단함이다. 법은 죄 (잘못)을 알려주는 기능을 함. 법의 적용은 사랑의 배제를 전제함. 법 앞에서 사랑은 불가능함.
-사랑은 자유이며 법은 구속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노예로서 평등하다.
-눅 10, 25: 마 22, 33-40 (새롭고 큰 계명).
-법과 사랑: 막 3,1-6; 막 2, 23-; 마 12장; 15장; 마 23장;


                                하나님을 보는 길

"본래 (이전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 18).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가? 만일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보지않고 믿을 수 있는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 이것은 "보지않고 믿는자는 복이 있다" 는 예수의 말과 모순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보지않고 보는 자는 복이있다" 는 말로 바꾸고 싶다. 도마에게 있어서 "보는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이었다. 예수에게 있어서 "보는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의 말은 "육안으로 보지않고 보는 자는 복이 있다" 는 의미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는 예수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보지않고 믿는 자에 속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않고 보는 것이다. 보지않고 아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 " (롬 1, 18-20).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을까? 순수한 상태에서 그것은 가능하다. 심리학자 K. Jung은 심리치료자로서도 유명한데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환자의 마음을 보고 그에 따라 대처했다고 한다.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다른 것도 섞여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가? 어떤 다른 것도 섞여있지 않기 때문에 이미 다른 것이 그 속에 섞여있는 것이다. 그럼 다른 것이 섞여 있는데 어떻게 깨끗할 수 있는가? 다른 것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수는 '마음의 가난함'에서 보여준다. 누가복음에서는 '마음의 가난함' 대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고 말한다. (복음서의 두 자료설에 관한 설명; Q자료와 마가의 자료). 원래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언급을 마태는 '마음의 가난' 이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그럼 누가 가난한 사람인가? '가난'이란 통상적으로 가치가 부여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 가진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얼마나 가진 사람을 부자라 하고 얼마나 덜 가진 자를 가난하다고 하는가? 가치의 판단에는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가치는 효용가치를 말한다. 그리고 효용가치와 욕망은 반비례한다.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 욕망이 점점 줄어들면 그만큼 그것이 가진 가치는 증대한다 그러나 욕망이 0이되면 그 가치도 0 이된다. 반대의 경우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 그 욕망이 점점 증대하면 그것의 가치는 점점 감소한다. 그러나 욕망이 무한대가 되면 역시 그 가치는 0이된다. 그 가치는 욕망을 전혀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어떤 대상은 '무'화된다. 효용가치 0 이된다. 이때 인간은 절대적인 무를 경험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허무주의자가 된다. 그의 마음이 가난하게 된다. 객관적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다. 마음 속에 다른 어떤 것이 섞여 있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때 우리는 그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가난하다는 것과 자유인이라는 것은 동일한 의미라 볼 수 있다. 자유인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진리를 아는 것과 자유로와진 것을 동시적인 사건이라 봐야 한다. 따라서 "자유로와지라. 구러면 진리를 볼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유로와져서 진리를 본 사람은 하나님에게로 초월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볼 수있게 되는 것이다. 자유는 이와같이 양면성을 가진다.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하게 되어 하나님에게로 초월하는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쉽다 (어렵다).

어떻게 자유인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그 순수한 (깨끗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은 알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기'는 알지 못했다. 즉 그에게는 아직 자아가 의식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게는 하나님과 자기가 구분되지 않고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태에서 타락했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후 그는 비로소 자기를 보게 되었다. 자아가 형성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상태에서 떠나 하나님과 자기의 다름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비로소 모든 구별과 차별이 등장하게 되었다. 선과 악의 구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후 세상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대립되면서 끝없는 다툼이 생겼다. 바로 이 중심에는 모든 차별의 기준이되는 '자기'가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 (잊어) 버렸다. 어떻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가? 구별적인 지식, 즉 선과 악에 대한 구별적인 판단 자체를 놓아야 한다.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 자기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모든 자유는 이러한 자기로부터 떠나 참된 자기 즉 하니님과 합일된 자기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내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r-innern) (플라톤의 영혼 상기설에 관한 설명).

내면세계로 여행을 떠날 때 사람은 세상을 등진다.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기 위해 길 (도) 를 방해하는 비본질적인 것을 모두 버린다.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무거운 짐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가볍게 한다 마음을 비운다. 여행자는 이 세상을 뒤로 한다. 이 세상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모두 버린다.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 육욕, 질투, 경쟁심 등으로 꽉 차 있는 것이 바로 세상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기의 모습을 다시 찾는 과정이 유감스럽게도 성경에서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단지 탕자의 비유에서 암시적으로 간단히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비유설명; 참 자기를 발견하는 탕자. 법화경에 나타나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와 비교). 선불교에서 이것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이것이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지 십우도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십우도는 소를 찾아가는 10개의 단계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소는 잃어버린 '참자기'이다. 원래는 10우도가 아닌 8우도였다. 그것은 불교에서 기원된 것이 아니고 도가의 것이었다. 12세기에 와서 중국의 선승인 곽암선사가 소 8마리에 두 마리를 더하여 10우도가 되었다.

1. 소를 찾아간다.

이 세상의 초원에서 소를 찾아
끝없이 우거진 숲을 헤친다.
무명의 강을 따르다
저멀리 첩첩 산골짜기의 오솔길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힘을 다하여 걸을 기운조차 없다.궈나 찾는 소는 보이지 않고 들리는 것은
다만 어두운 밤 숲 속에서 우는 매미 소리뿐.
(감각이 혼란한 가운데 나는 소의 발자취마저 잏ㄹ어버렸다. 집은 멀고 나는 수많은 갈림길 앞에 서 있으나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알 수 없다. 욕망과 공포, 선과 악이 나를 휘감고 있다.

2. 소의 발자욱을 보았다.
    
강둑의 나무 아래서
나는 소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향기로운 풀밭에도 소 발자욱이 있다.
마을에서 먼 깊은 산 속에도
소 발자욱이 있다.
이 발자취는 그 어디에도 숨어있지 않았다.

3. 소를 보았다.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부드러운데
강변 수양버들의 푸르름 속에서
나는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는 소의 머리가 감취어질 수 없다.
(자연과의 이러한 일체감 속에서 소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4.소를 잡았다.

격열한 추적 끝에
간신히 소를 잡았다.
그의 굳센 의지와 힘은
무진장하다.
높은 고원으로 돌진하여
도저히 서있을 수 없는
가파른 골짜기 위에
그는 서 있었다.

5. 소를 풀 먹이다.

채찍과 고삐는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진흙탕 속에
빠질지도 모른다.
길을 잘 들이면
그도 자연히 젊잖아지리라.
그때에는
고삐를 풀어줘도
주인을 잘 따르리라.

6.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소를 타고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온다.
나의 피리 소리가
저녁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손으로 퉁기면
울려퍼지는 화음,
나는 이 무한한 화음을 지휘한다.
누구라도 이 피리 소리를 듣는다면, 노랫가락 속으로
뛰어들어올 것이다.

7. 소를 잊어버린다.

소 등에 걸터앉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요하다.
소 또한 편히 누워 있다.
지복의 잠 속에서
새벽이 왔다.
나는 채찍과 고삐를 내버리고
초가집에서 살아간다.

8. 소와 나를 잊어버린다.

채찍, 고삐, 사람 그리고 소 ...
모든 것이 무 속으로 사라진다.
이 하늘은
너무도 광대하여
어떤 메시지도 닿을 수 없다.
어떻게 눈송이가 불 속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9. 근원으로 돌아가다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참된 지에 살게 되면
그 무옷도 꺼릴 것이 없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빨갛게 피어있다.
(고요한 평정 속에서 나는 형성되고 붕괴되는 형상들을 본다. 어떤 형상, 색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10. 세상에서

맨발에 가슴은 벌거숭이,
나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
옷은 누더기, 때가 찌들대로 찌들어도
나는 언제나 지복으로 넘쳐 흐른다.
나는 마술같은 것을 부려 삶을
연장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나무들이
싱싱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인간은 이제 대자유인이 되었다. 참자기를 본다. 하나님을 보게 된다. 라즈니쉬는 말한다:

처음부터 (처음의 상태에는) 진리는 맑디 맑다. 처음부터 진리는 숨어있지 않다. 처음부터 진리는 그대 앞에 있었다. 처음부터 진리 이외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만이 거짓 속에 살면서 이상하게 돌아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 묻는다. '신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아라'. 신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 모든 곳에서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었을 뿐이다. 그는 온갖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흐루는 강 속에서는 그는 흐름이다. 빨간 꽃 속에서 그는 빨강이다.

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눈이 멀었든가 아니면 그대 자신이 눈가리개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눈에서 떨어진 비늘 처럼). 그대의 종교, 그대의 문화, 그대의 사회, 그대의 환경, 그대의 문명 이런 모든 무의미한 것들이 바로 그대의 눈을 가리고 있다.

처음부터 진리는 맑디맑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 것일까?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되어 보려고, 어떤 이상을 쫓으려고, 미래를 향해 달리면서 어떤 특출한 사람이 되어보려고 하는 그 에고의 덫이 그대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것만은 버릴 수 없다' 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놓아야 한다. 그래서 유명한 선승인 임제는 말했다: "그대가 만약 길에서 달마를 만나면 그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이제 성서에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예를 보자. 아브라함 (A-Brahman);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때 즉 철저한 무를 경험했을 때 그에게 만나진 하나님이다. 이삭의 하나님경험; 이삭을 포기함과 하나님의 출현은 동시적인 사건임. 야곱; 가족을 떠남과 꿈에 하나님을 봄. 모세의 하나님 경험; 호렙산 불타는 떨기나무 밑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봄; 그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였다. 즉 스스로 있는 자 (Ich bin ich)였다. 스스로 있는 자 즉 신 앞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서 모세는 자기 앞에 있는 단독자로서의 하나님을 만났다. 왕하 17- 에 나타나는 사르밧 과부; 마지막 남은 한줌의 가루 (그녀가 포기할 수없다고 생각했던 최후의 것) - 이제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음 (철저한 무의 경험).

그러면 철저한 대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설적으로 몇가지 살펴보자.

구제하지 마라 (도마복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무주상보시 - 구제를 하기는 하되 구제하는 사람의 상 (모습) 은 빠져야 한다. 구제하는 '나'에게 매이지 마라.

남의 지도자가 되려하지 마라: 남을 가르칠 수 있지만 그 가르치는 '나'에게 매이지 마라. 예수: "너희는 남의 선생이 되지 마라".

무엇인가 남기려 하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님. 단지 그 무엇인가 큰 일을 한 것이 '나' 라고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헌금을 하지 마라:
주일을 지키지 마라:

계명을 지키지 마라: 예수는 새 계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 계명은 계명이 아니라 자유의 원리이다.

기도하지 마라: 기도하는 것이 내가 내새울 수 있는 덕은 아니다.
성경에 매이지 마라: 성경은 사다리이다. 오르고 난 후에는 사다리를 치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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