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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아욱스부르크 종교 평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시습이름으로 검색 조회 2,409회 작성일 02-03-09 11:27

본문

작성일 : 2000/03/10 조회수 : 55

◆ 아욱스부르크 종교 평화

금세기 마지막 '종교개혁의 날(Reformationstag)'이던 지난 10월 31일에 바티칸 교황청과 루터교파 세계연맹(Lutherischer Weltbund)은 교리상의  '화해'를 이루는 서류에 서명했다.

이 서명이 이루어진 남독일의 아욱스부르크는 1530년 멜랑히톤이 정리한 루터 교단의 교리가 연방의회에 제시된 장소이다. 물론 이 아욱스부르크 신조(Confessio Augustana)는 로마 카톨릭과 루터 교단의 분쟁을 막지는 못했다. 또한 아욱스부르크는 독일 제국의 종교가 각 지역 지배자들의 교파에 따라 분열되어 있던 1555년 아욱스부르크 종교 평화회의(Augsburger Religionsfrieden)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제 1999년의 아욱스부르크, 이번 협의에 대한 반응은 두갈래로 갈린다.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대체 첫눈에 복잡하게만 보이는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날 회의에서는 바로 이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만 합의가 추구되었는데, 이 문제는 모든 신학에 있어 폭발성을 가지는 부분이다. 또한 이번 합의 문서가 대체 어떤 위치와 가치를 가지는가,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이 달라지는가 등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테마: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Rechtfertigung(변명, 변호, 정당화)이란 말이 가지는 법률적 윤리적 의미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현재의 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 신학(Fundamentaltheologie)을 피해갈 수는 없는데, 칭의론은 신학에서 인간 존재 전체를 해석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보면 카톨릭과 루터교단의 차이는 신-인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관계가 깨끗하면(intakt) 인간은 신 앞에서 '의롭다 칭할 수 있다'(gerechtfertigt). 만일 이 관계가 오염되어 있으면(konstatiert) 이는 죄의 상태이다.

이제 문제는 신구교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부터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신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루터교단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계는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신의 은총에 의한 선물이다. 인간에게는 오직 수동적 선택, 즉 긍정만이 남는다. 즉 신과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한 감사하는 수용이라는 의미에서의 믿음만이 가능할 뿐이다. 루터교단은 바울을 들어 말한다. 오직 믿음 속에서의 은총으로.

카톨릭과 루터교단의 차이는 '은총만으로(sola gratia)'라는 지점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서로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차이는 루터의 물음에서부터 생겨난다. "어떻게 내가 은총의 신을 받을 수 있을까(Wie bekomme ich einen gnadigen Gott?). 다시말해 어떻게 내가 은총을 보유할 수 있게 될까(Wie bringe ich mich in den Besitz der Gnade?)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자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선물로 주어진 것은 능동적으로 얻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카톨릭에서는 트리엔트 반종교개혁 회의에 따라, 한번 주어진 은총의 유지와 성장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는 그 유명한 "선행(gute Werke)"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교회는 비록 아욱스부르크 이후 더욱 분명하게 "인간의 종교적 행위인 선행은 은총의 전제일 수도 없고 은총에의 권리를 만들어내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톨릭 신학은 여기다가 "선행은 영혼의 구원에 추가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루터 교단은 급진적이다. "아니, 이는 불가능하다. 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단지 완전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어, 어떠한 업적도 이루려 할 필요도 없고 이룰 수도 없다.(ohne Leistungsdruck, ohne Leistungsvermoegen.)"고 말한다.

이제 이 질문이 현대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살펴보자. 루터 교단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 없이 신과의 깨끗한 관계를 가지는 경우에도 인간은 죄인으로  머문다. 이는 전문용어로 "의롭다고 칭할 수 있으나 죄인이다(simul iustus et peccator; gerechtfertigt und doch ein Suender)"라고 한다. 이 파라독스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는 신의 무한한 주권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Unverfuegbarkeit)을 나타낸다. 이 파라독스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고 이해할 수도 없고 때로는 부정의로 보이는 일도 전능한 신은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부정의한 것을 정의롭다고 말한다(Er spricht Ungerechte gerecht).

반면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은총에 의해 의롭다 칭할 수 있는 자(der aus Gnaden Gerechtfertigte)는 영원히 구원된다. 그에게는 단지 아직 실족에의 경향(Konkupiszenz; die Neigung zu Fehltritten)만이 남아있는데, 이는 교회의 도움을 통해 회개하고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여담: 이 문제에 있어 칼뱅 교단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개신교의 모든 교단이 이 문제에 있어 루터교와 같은 입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칼뱅 교단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뱅의 이론에 따라 단순화된 예정설을 따른다. 이에 따르면 개개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은 신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무엇보다도 예정설이 인간이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얻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손에 있지 않다는 교리의 다른 형태라는 점이다.

칼뱅이 아니라 그 다음 세기에 경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칼뱅주의자들이 신이 정한 바를 변경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열쇠구멍으로 들여다 볼 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미리 예정된 개개인의 운명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경제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이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이는 신학이기보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진다.

요점(In summa): 종교개혁 이론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더 '변증법적'으로 바라본다. 둘 간의 관계는 극단적으로 단순화 되어 극단적으로 일방적인 방향으로 다리가 놓아졌다. 카톨릭 교리는 이 관계를 더 '협력적'으로 바라본다. 카톨릭 교리는 이 관계가 비록 처음은 아니지만 추가적으로 협력 관계일 수 있다고 본다.

이론이냐 실제냐

실제로는 이는 공허한 교리상의 논쟁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관계하는 결정이다. 이는 대체 신이 존재하느냐는 질문 다음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만일 신이 있다면 즉시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는 결론은 현대인의 정서에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교회 조직의 의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일상생활에서의 구체적인 차이들은 이런 것들이다. 인간은 언제나 고용자, 반려자, 국가, 여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와 자신의 도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할 필요를 가진다. 이는 현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포스트모던적인 인간에게라도 장기적으로는 대체 자신이 무엇이고 무엇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자신에 대한 입법자, 재판관, 사형집행인이고자 하는가?(아니면 본래적인 니힐리스트, 즉 입법과 재판 없는 사형집행인이고자 하는가?)

이 모든 '변호'의 필요성에다가 또다른 변호의 필요성이 나타난다. 즉 자신의 행위로서 신과 자신과의 깨끗한 관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추가적인 '은총에 대한 인간과 신의 공동 영향'이라는 최소한의 요건조차 그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지 않는가? 아니면 이러한 행위도 필요없는 깨끗한 관계, 즉 모든 '변호'와 '인정'의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관계란 모든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변호에의 압력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가?

두번째 여담: 이러한 물음들은 개인적 신학과 심리학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조직에도 관계된다. 신학사는 언제나 교회사였다. 프로테스탄트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신과의 깨끗한 관계를 위해 이를 중개하는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카톨릭에 따르면 교회는 결정적인 중개자로서 인간의 결점을 메꿀 수 있다. 신학 교리상의 결정은 그러니까 교회 조직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인간이 카톨릭 교회가 루터교단의 칭의론을 완전히 수용하기를 요구한다면 이는 성직과 성사, 그리고 교황까지도 역사의 박물관으로 던져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조직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다.

논쟁과 합의: 어떻게 칭의론과 교회론에 있어 이러한 불일치에 다리가 놓아질 수 있는가? 엄격하게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전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든 합의는 실질적으로도 불가능한가? 이는 우리가 '실질적 합의'와 '교회 간의 관계'라는 말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미 2년 전에 바티칸과 루터 교단간의 합의 노력이 '공동 성명'으로 나타났을 때 논란이 일어났다. 이 논란은 두가지 이유에서 생겨났다. 첫번째로 이 '성명'은 그 의미에서 과도하게 이해되고 있었다. 즉 이 부분에서 마치 일치점이 생겨난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이 성명은 그 신학적 성질에 있어 너무 적게 이해되었다. 다시 말해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루터 교단의 입장들이 불충분하게 강조되었다. 이런 결과는 정당한 비판과 정당하지 않은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왜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추가적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는가? 10.31 서명된 소위 '공동성명'에 대한 '공동의 공식 결정(Gemeinsame offizielle Feststellung)"은 특히 도대체 이 문제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역설적으로 어떤 것이 아닌가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가 카톨릭 교회와 루터교단의 관계에 있어 '완전한 합의'를 바란다면 이는 논리적이고 신학적 근거에서부터 실패하고 만다. 이는 우리가 종교개혁 이전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하나의 카톨릭 교회를 조직하려고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욱스부르크에서 서명된 문서는 이러한 목표가 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여기서는 이 논쟁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공존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서로 간의 합의와 차이를 정식화하는 것이 문제였다. 사상 최초로 바티칸은 "차이 속에서의 화해(versohnte Verschiedenheit)"를 목표로 한다는 문서에 서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통일되어 있지 않은 개신교 교단들이 26년전 '로이엔베르거 합의(Leuenberger Konkordie)"에서 그들간의 복잡한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이다.

만일 아욱스부르크 문서가 진전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이 진전이겠는가? 더구나 이 문서에서는 루터교의 파라독스적 표현인 "simul iustus et peccator"가 명시적으로 수용되었다. 또한 소위 '민주적 결정 과정'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가 인정되었다. 무엇보다도 16세기에 이루어진 날카롭고 '치명적인' 교리 심판이, 칭의론에 관한 한 철회되었다.

물론 차이점들은 상존한다. 이 합의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한편이 다른편에 굴복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일을 피하게 하는 것이다.

영향: 이 문서의 영향은 양측이 이러한 긴장이 완화된 공존, '화해를 이룬 차이'를 실천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이를 위한 전제는 개신교 신학의 일부가 자신의 전체 비판은 아니더라도 깊이 자리잡고 있는 불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 신학의 일부에서는 모든 '애큐메니칼 운동'이 카톨릭측에서 무조건적으로 루터교단의 교리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보고 있고, 또한 루터 이전에는 진지한 신학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는 또한 최근 카톨릭 교회 내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움직임들이 극복될 수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즉 일반 신도를 하위로 놓는 것, 성직자 독신의 강화, 여성 성직 불허 등이다. 또한 로마 교황청이 낙태 상담 등에 있어 보이는 권위주의적 태도는 카톨릭 신도만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교파가 다른 사람간의 결혼에서도 최소한 손님으로나마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많은 문제들 대문에, 특히 성직과 성찬에 대한 이해 때문에 우리는 회의적이 될 수도 있다. 최근 밀라노의 추기경 카를로-마리오 마르티니는 새로운 평의회를 설치해서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특정한 '교리적이고 규율적인 문제'들을 해소해 보려고 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아욱스부르크 이후에도 이러한 주장은 잘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좋지는 않겠지만 몇가지는 나아졌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 시습(sisp@berlin1004.de); 이 글을 감수해 주신 천병석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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