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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독일통일 전 동서독 교회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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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퍼옴이름으로 검색 조회 2,717회 작성일 02-03-09 11:24

본문

작성일 : 1999/10/13 조회수 : 58 (출처 분실)


■ 독일통일 전 동서독 교회의 역할- 특별한 유대관계를 중심으로
기독교 북한 선교회

     I. 논문의 동기 및 추구


이 논문의 목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입장을 '바라보는 자'의 위치에서 '이루는 자'의 위치로 자리바꿈 하는데 있다. 통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요 아울러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북한 선교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이 교회사 분야의 논문은 무엇보다도 우리 한국교회가 통일을 준비하는 교회였음을 역사 가운데 제시함에 의의가 있다 하겠다. 눈물어린 기도와 더불어 한국교회는 민족의 십자가인 분단의 가시를 품에 안고 몸부림치며 아파했고, 이모저모의 통일작업을 행동으로 구체화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행동을 하기 이전에, 통일을 수동적 내지는 운명적으로 기다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왜 통일을 위해 적극적이며 구체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며,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는 작업에 교회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늦게나마 동참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민족이 하나되는 통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보다 바람직한 자세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이론적 설득작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흑백논리와 사상적 긴장으로 굳어져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서로 부둥켜안고 만나는 통일이 가능하겠는가. 아무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치며 노래부른다 해도, 반세기 전 서로의 가슴에 응어리 진 한을 풀어내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것이 우리 남북한의 현실이며, 특히 우리 남한 교회의 현실이다.
독일교회의 역사를 우리의 교훈으로 가져오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 한국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향한 맑스주의의 본질적 태도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칼 맑스(Karl Marx)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는 자세가 그들에게도 역시 그대로 적용되고 강조되었으며, 여기에 "사회주의 속에 존재했던 교회"(Kirche im Sozialismus)의 아픔과 고뇌가 동일하게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픔 속에서도 동독교회는 어떻게 존재했으며 어떻게 인내와 사랑으로써 그 역사적인 "특별한 유대관계"(Die besondere Gemeinschaft)를 계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들에게도 교회가 무신론주의적 사회주의 국가의 한낱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 많은 유혹과 어려움이 있었으며, 그렇게 힘들지 않은 상황신학을 전개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독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길을 꾸준히 갔다. 동독교회는 교회로서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서독교회는 크나 큰 인내와 관용 그리고 사랑이 전제되는 변함없는 활동을 동독교회를 위해 추진했어야만 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동서독교회는 그러한 '특별한 유대관계'를 계속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자연스레 던질 수 있었으며, 역사적 해답을 나름대로 찾아 갈 수 있었다. 독일교회의 역사를 살피게 될 때, 분명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듣게 되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 확신이란 인간의 역사는 어찌 보면 여러 면에서 상이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본질에 들어가 보면 대동소이하다는 일반론에 근거를 두었다. 특히 20세기의 분단국이었던 두 나라, 독일교회와 한국교회를 비교 연구한다는 점은 동질성을 굳이 찾아볼 때도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 한국 보수교회에 속한 필자가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독일교회의 통일노력을 연구한다는 사실에 기대보다는 회의적 시각이 앞서는 경우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확신에는 더욱 변함이 없었다. 그 회의(Skepsis)적 시각이란 무엇보다도 동독교회의 상황과 북한의 교회상황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더욱 커졌는데, 그럼에도 동서독에서 전개되었던 이데올로기적 냉전상황, 교회의 신앙을 바라보는 맑스-레닌주의적 차가운 시선과 핍박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서독교회의 동독교회를 향한 끊임없는 사랑의 인내, 노력의 몸부림 그리고 엄청난 재정적 지원은 우리 조국의 교회를 생각하기에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동병상련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동서독교회의 "특별한 유대관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반성 아울러 분명한 역사적 교훈을 청취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II. 논문의 종합과 결론

필자는 독일통일 전 동서독 교회의 역할을 "특별한 유대관계"를 중심으로 역사적 고찰을 하였다. 먼저 제 I장에서 문제제기, 논문의 나아가야 할 방향, 논문의 구조, 그리고 논문의 추구를 제시하였다. 그런 후 제 Ⅱ장에서는 이 동서독 교회의 "특별한 유대관계"를 열린 마음으로 우리 한국의 교회가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또 다른 사회주의 속의 헝가리 교회의 감격적인 증언을 제시하였다. 특히 헝가리 교회 감독 칼디 목사의 증언은 기독교적 신앙의 승리가 얼마나 통쾌한지를 실감나게 하였다. 무신론주의적 헝가리 정부가 교회를 인정하며, 열린 마음으로 교회의 역할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승리의 비결은 무신론주의적 사회주의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섬김의 신학"이었다. 함께 고난을 당하는 이웃들을 '보이는 사랑'으로 섬기는 "섬김의 신학"이야말로 닫힌 마음과 닫힌 사회를 열린 마음 그리고 열린 사회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사회주의 속의 교회"의 무신론자들과의 만남은 "실질적 대화"로서만 가능하였다. 그럴 때 상대방은 서로 서로를 향해 이전에 자신들이 가졌던 선입견들을 수정하거나, 아니면 다른 면들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칼디 목사는 분명한 음성으로 말하는데, 그렇다고 맑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바꾸지는 않았다는 경험도 잊지 않았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상대방을 우리 식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리한 시도는 결국은 서로를 향하여 더 나쁜 인상만을 준 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의 인내를 너무 빨리 잊어버린 채, 그 사랑의 열매만을 취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억지를 쓰는 서투른 사랑의 욕심 때문에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헝가리 교회의 증언은 지혜로운 '보여지는 사랑'을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었다. 이 지혜로운 구체적 사랑의 실천만이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그 만남은 서로를 보다 다르게 바라보는 관용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교훈이다. 여기에 복음증거의 가능성은 시작되는 것이리라.

제 Ⅲ장에서는 우리는 "사회주의 속의 교회"라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히 인식하기 위하여, 보다 현실적으로 과연 사회주의 속에 존재하면서 동독교회가 경험하고 괴로워하고 또는 투쟁하기까지 하면서 그 열매로서 나름대로 거둬들였던 동독교회의 모습을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면서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 속에 실지로 살았던 교회의 그 모습을 보면서 생동감 있게 정의해 보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공허한 개념만 어설프게 늘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동독교회의 교회법과 동독정부의 헌법 사이에 있었던 갈등과 투쟁을 중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1949년 동독의 최초의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신앙의 자유와 1968년에 새로 나온 동독 헌법에서 규명하는 신앙의 이해가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졌을 때 과연 이를 바라보는 동독교회는 어떠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양편을 오고 가면서 역사적으로 추적하였다. 그러면서도 필자의 마음은 항상 교회의 입장에 서 있었음을 고백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아팠던 때는 1949년 처음 발표된 동독헌법이 1968년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다른 내용으로 신앙의 자유조항이 바뀌어 급하게 새 동독헌법이 공포되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들이 숨겼던 정체를 드디어 드러내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함께 원망을 하기도 하였다.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동독교회의 핍박의 세월은 마치 손에 잡히는 듯 했다.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그럼 그렇지 북한정권과 다를 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동독교회는 자신들의 과거의 역사적 오류를 기억하는 교회가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순간이었는데, 다름 아닌 히틀러 체제 당시 독일교회가 범한 크나 큰 오류를 다시 되풀이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굳은 각오를 할 때였다. 여기서 독일 교회는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을 다시금 자신들의 어려운 현실에로 가져오는 장쾌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동독 교회가 나치 히틀러의 그 무서운 시절에 몇몇 독일 교회가 순교자적 각오로 외친 「바르멘 신학선언」을 가져왔다는 역사적 사실은 당시 동독 교회가 자신들이 맞이한 상황을 어떻게 간주하였으며, 어떠한 각오로 임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 하겠다. 사실 여기에 동독교회의 신앙의 위대성이 있었다 하겠다. 쉽게 말해서 동독 교회는 1968년 동독 정권이 새 헌법으로 신앙의 자유를 고사시키려 할 때 교회를 지켰던 것이다. 이러한 동독교회를 주시하면서 필자는 "사회주의 속의 교회"인 동독 교회를 세 가지로 정의하였다. 동독 교회가 위치한 현장을 의미하며, 나아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즉, 교회가 무엇을 위해 이 곳에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적극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곧, 어려운 무신론주의적 사회주의 속에서도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속의 교회가 결코 바벨론적 포로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가져오면서 북한의 교회를 생각하며 던진 물음은, '왜 우리의 북한 교회는 이 같은 사회주의 속에 존재할 수 없었던가'였다.
제 Ⅳ장에서는 동서독 교회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유대관계"를 살펴보았다, 본래 이 용어는 「동독 개신교 연맹」이 1969년 출범하게 되었을 때 자신들의 교회법 4조 4항에서 "동독과 서독의 모든 개신교회들이 각자의 기관을 통하여 동반자적 자유를 가지고 함께 만남"을 위하여 이 "특별한 유대관계"를 명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쓰여지게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독특한 독일인들의 순발력 있는 임기응변적 지혜에 감탄을 하게 되었다. 이 "특별한 유대관계"는 사실 신앙의 자유를 압박해 오는 동독 정권을 향한 선언의 성격도 강하였다.
이러한 선언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동서독 교회는 이 "특별한 유대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하여 양편의 멤버들로 구성되는 "자문단"과 "협의단"을 구성하였는데, "자문단"은 교회적인 문제를 위해서, "협의단"은 사회 참여적인 세계 평화와 화해의 문제 등을 의논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이러한 모임은 두 교회의 공식적인 모임을 위한 사전에 모이는 사적 모임의 성격도 강하였는데, 어떤 때는 서로의 일상적인 안부와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고, 분단의 민족의 아쉬운 형제애적 사랑을 나누는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서로간의 사업계획을 의논하고 필요할 때는 은밀한 도움을 요청하는 통로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임 자체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던 것도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끊이지 않고 이 모임은 독일통일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또한 이러한 모임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는 관계로 이끌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서독교회의 동독교회를 돕는 프로그램으로 연결된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형제의 고난과 아픔을 어찌 말로만 듣고 있었겠는가? 사실 동독교회는 신앙적으로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동독정권의 교회가 스스로 자멸되도록 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핍박정책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물질을 끊는 정책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독일교회의 유일한 재정수단이었던 교회세 제도를 법으로 금하였고, 신도들에게는 일반 동독시민들이 누리는 보험제도, 연금제도 등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철저한 불이익을 주었다. 심지어 신앙활동을 범죄활동으로 규명하여 감옥에 가두는 등, 문자 그대로의 공산당식 신앙박해 전략을 교회를 반대하여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동독교회를 서독교회는 순수한 사랑에 의해 물질적으로 도왔는데,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여기엔 몇 가지 원칙들이 있었는데, 언제나 명목 있는 도움으로 도움을 받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켜주었고, 그러면서도 더욱 놀라운 것은 단 한 번도 도와준 돈의 사용처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돈의 사용 용도를 묻게 되면 이러한 재정지원을 계속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들은 어려운 형편에 처한 형제를 그저 그리스도의 성령의 사랑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서독교회의 재정지원은 그 규모가 결코 적지 않았으며, 또한 단회적 이거나 과시적이 아닌, 지속적이고 인격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매년 동독교회를 위한 물질적 지원이 한화로 약 300억 원에서 400억 원에 달하였다. 이러한 도움은 여러 면에서 자상한 지혜를 요구하였는데, 직접적으로 금전을 지불하는 것 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자재로 공급하는 정책을 썼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물론 서독정부의 적극적 도움이 그리고 동독정권의 묵인 내지는 협조가 있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놀라운 것은 서독 정부가 이 교회의 재정적 지원 프로그램을 막후에서 실제적으로 엄청나게 도왔다는 사실이다. 서독교회가 시행한 동독을 위한 재정지원 프로그램은 동독교회를 돕는 A형과 정치범 등의 석방을 위한 B형이 있었는데, A형을 위해서는 반액에 해당하는 재정지원을, B형을 위해서는 전액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생색을 내거나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은 놀라왔다. 이는 단지 서독교회의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이를 위해 서독 정부는 법적으로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서독교회의 재정적 지원은 결국 동독의 교회뿐만 아니라, 동독을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 외화획득 뿐 아니라, 신앙의 박해 가운데 처한 동독교회를 살리고 활성화 시켰다.
물론 이러한 재정지원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동독의 공산정권을 더욱 견고히 유지시키는 꼴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달랐다. 이러한 서독교회의 재정적 지원은 결국 동독교회의 계속적인 복음전파를 가능케 함으로써 동독인들의 삶에 중요한 원리를 제공하여 유물론주의적 사회주의를 대적한 저항토양을 형성시켜 결국은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를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1990년 독일이 통일이 되었을 때 이러한 동서독의 "특별한 유대 관계"는 결국 정치적으로 분단된 동서독을 견고히 묶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감당하였음을 독일교회는 로꿈선언을 통해 재차 확인하였다.
이러한 재정적 지원의 다른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그룹은 다름 아닌 "디아코니 재단"의 활동이었다. 이들이 갖고 있었던 철학은 다름 아닌 그 "섬김의 신학"이었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보건대 앞서 언급한 동서독 교회의 "특별한 유대관계"는 이미 1958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즉, 독일인의 삶 가운데서 '보이는 사랑'의 실천은 이미 생활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실천정신이 위기가 찾아왔을 때 자연스럽게 그 힘을 발휘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확인도 우리는 하였다. 디아코니의 활동은 "항상 살아있는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병원, 양로원, 고아원 등을 위시하여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그 어떠한 기관이라도 주의 사랑으로 찾아가서 그들의 따뜻한 이웃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엄청난 물질적 지원이 뒤따라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디아코니의 활동은 결국 동서독의 인간관계를 "언제나 견고히" 묶어주는 "사랑의 띠"였던 것임을 우리는 확인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서독교회의 사랑이 순풍에 돛단 배 처럼 늘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님도 확인하였다. 오해도 있었고 그리고 도움을 위해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수고가 있어야만 했다. 여기에 분명 성령의 사랑의 능력이 요구되었던 것을 우리는 또한 그들의 고백을 통해서 확인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서독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사랑의 프로들이었다. 이 Ⅳ장은 현실적으로 우리 한국에게 교훈하는 바가 너무도 많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제 V장은 동독교회가 결국은 동독교회사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국제적 행사인 "루터 500주년 기념대회"를 1983년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행사가 개최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약 5년 정도의 준비과정과 많은 외국사절들과 함께 하는 루터 기념대회는 사실 닫혀있던 동독을 열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향력이 위에 언급된 동서독 교회의 "특별한 유대관계"와 함께 1989년 동독정권을 붕괴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무리한 생각이 아님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행사를 동독정부와 동독교회가 함께 준비를 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물론 독일의 튼튼하기 그지없는 신앙의 역사(歷史)임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동독이 아무리 무신론주의적 사회주의 국가였다 할지라도 루터의 그 엄청난 유산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를 위해서 동독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주장하고 가지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루터 이해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놀라운 진전이었다. 다른 말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의 생각이 너무 앞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그렇다고 동독이 완전히 루터를 향해 다른 이해를 하게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루터를 역사적 인물로, 그러면서 동독의 역사적 뿌리 중의 하나로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결코 루터를 신앙의 아버지요, 종교개혁자로서 평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동독은 이러한 루터 기념대회를 통해서 동독교회의 국제적 신앙적 행사를 인정하게 되는 결과와 함께 동독정부와 교회 사이가 서로를 어느 정도는 있는 그 현장에서 인정하게 되는 열린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교회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 행사에 임하였지만 서로를 멀리서 인정하면서 그리고 어떤 땐 도움도 주면서 이 거대한 일을 치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국제대회를 준비하면서 동독정부는 내심 많은 걱정을 하였다. 약 20만에 달하는 자유진영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는 이 국제행사에서 만일에 일어날 수도 있는 불상사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동독교회는 이러한 정부의 걱정을 "사회주의 속의 교회"로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동독정부의 염려를 최소화시키는 데 협조하였던 것을 확인하였다. 즉, 어떤 면에서 불필요한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동독교회는 찾아오는 외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지금까지 잠자던 자신들의 신앙의 유산을 회복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또한 이 대회를 위해 서독교회는 물질적 지원을 구체화했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힘있는 지원을 여러 면에서 하였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루터 기념대회 행사를 위해 마련한 세 가지 지침이었다. 첫째, 사상적, 또는 루터 이해에 있어서 이미 부각된 차이점을 가지고 하는 논쟁을 삼갈 것, 둘째, 루터 기념대회를 절대로 헛되이 놓치지 말 것, 셋째, 서독교회는 행사를 진행시킬 때 절대로 경쟁관계를 보여주지 말 것 등을 결정하였다. 참으로 인격적으로 루터 기념대회에 참여하고 도왔던 서독교회는 우리의 눈에 위대하게 보이기까지 하였다. 한없이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격적이며 자상한 사랑으로 서독 교회는 "특별한 유대관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향한 역사적 평가는 결국 동독으로 하여금 보다 다른 안목으로 교회를 바라다보게 했을 뿐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협력 가운데서 교회와의 계속되는 일도 추진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눌려있던 동독 교회 역시 새로운 자신감과 함께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 "사회주의 속의 교회"가 하여야 할 소명감을 확인하는 축복스러운 기회로 포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오기까지 얼마나 동독교회와 서독교회가 동독정부의 정치적 의도와 목적을 존중했었던 가도 우리는 확인하였다. 사랑은 얼마나 서로를 향해 인격적이며 자상한 사랑을 구체화하여야 하는가를 우리는 역사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호감을 갖게 될 때 대화가 가능하고, 더 나아가 교제를 하며, 또한 만나서 가까워지는 가운데 하나가 되는 통일의 순간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일 학자들은 동독의 붕괴요인들을 일곱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에서 먼저 오는 세 가지는, "1) 동독 시민의 급작스런 심리적 변화와 갈등 2) 1980년대에 들어서 동독의 정통성과 이데올로기의 급격한 영향력 상실 3) 반체제 사회운동의 고양과 역동성"이다. 즉,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당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등이 동독붕괴의 앞선 이유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신적, 사상적 이유가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연 무엇이 동독인의 마음에 정신적, 사상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동서독 교회의 그 "특별한 유대관계"를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 국가로서 독일의 오랜 역사를 기억할 때 더욱 그렇다는 말이다. 더구나 루터의 나라 독일을 생각할 때, 1983년 루터 500주년 기념대회가 성대하게 국제적으로 열렸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 대회가 동독의 시민들에게 미친 거대한 영향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특히 정신적, 사상적 영향력은 그 어떠한 사건보다도 막강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 500주년 기념대회란 막스-레닌주의의 추구와는 전혀 다른 본질적 차이를 가질 뿐 아니라, 여기에 참석한 수많은 외국 기독교인들과 동독교인들이 실질적으로 동독정권이 추구하는 것보다 다른 정신적, 사상적, 신앙적 추구를 선명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실 지금까지의 동독의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새로운 다른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곧, 우리는 동서독 교회의 그러한 활동이 "동독 시민의 급작스런 심리적 변화와 갈등", "1980년대에 들어서 동독 정통성과 이데올로기의 급격한 영향력의 상실" 그리고 "반체제 사회운동의 고양과 역동성"에 충분하게 영향력을 부여하였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겠다. 물론 교회 이외에 다른 요소를 이 점에 있어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통일을 위한 동서독 교회의 역할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엄청나다고까지 할 수 있겠다!

III.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여기서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데, 통일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열심어린 사랑의 실천이 너무나도 중요하게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수동적이고 운명론적이라는 질책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책임회피이며, 역사적 소명을 저버리는 행위이며, 게으르고 악한 죄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약점이나, 허점만을 노려서 지적하고 무시하며 가혹하게까지 비판하는 모습은 성경적이 아니다. 비록 성경을 모르는 상대방이 그러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이 조건부가 될 때, 이미 그 사랑은 성경적인 사랑이 아니다. 거룩한 사랑을 본받는 행위들이 아니다. 그렇게 될 때 결국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은 뻔하며, 또한 서로를 향해 책임을 전가하는 부끄러운 변명을 늘어놔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한국은 독일과는 달라"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독일통일에 있어서 동서독 교회의 훌륭하기까지 한 역할을 기억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찾아서 구체화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닫힌 북한사회가 열린 사회가 되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데 일조를 하여야 하겠다. 이를 위해선 가장 먼저 사랑 그 자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독일교회의 역사에서 배웠다. 사랑이라는 교회의 본질을 잃지 말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사실 작은 일이 어디 있는가? 모든 일이 귀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한국통일을 위해 교회의 할 일을 찾는 데 있어서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북한 관계를 개선하는 데 분명 교회의 할 일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자칫 자신들의 분수와 영역을 벗어나서 영웅주의적으로 행동하고 정치적으로 또는 명예를 추구하는 식의 과시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충분히 독일교회가 보여주었다 하겠다. 물론 교회가 하는 일에 정부가 지원하고, 후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정부도 역시 여기에서 더 나아가거나 나서지 않았다. 생색을 내려고도, 뭔가 권위를 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역할과 과업을 충실하게 존중하여 가능하다면 서로의 일이 더 잘될 수 있도록 숨어서 도와주는 모습이 요구된다 하겠다.
사실 아무리 교회가 북한을 향해 실천적 사랑을 제시하려고 해도 정부가 이를 못하게 할 때가 많았던 과거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럼에도 외국에 거주하는 교민들의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 일을 감당하려고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북미 의료 선교회」가 평양에 병원을 건립한 경우가 바로 그 예이다. 이러한 일에도 정부의 간섭이나 방해가 계속된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정부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독일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확인하였다.
아직도 여러 가지 제약으로 닫혀있는 북한에게 교회를 향한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아픈 경험에 의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거꾸로 그들이 우리를 향해 먼저 고정관념을 바꿀 것을 고집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려운 일이다. 가능성은 우리 교회가 먼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그들을 향한 실천적 사랑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북한이 어려울 때 도와야 한다. 지금 북한은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 "배고픈 자에게 먼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우선적으로 실천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한 쪽이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식의 통일을 향한 태도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교회의 자세이다. 또한 '항복하면 사랑하겠다'는 식의 태도도 전혀 성경과는 상관없는 잔인함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나의 참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다름 아닌 성육신(Incarnation)의 사랑이었다. 전혀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으로 돌아와야만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우리가 그럴 수도 없었으며, 이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습을 입으신 것이다. 교회의 사랑은 이 성육신의 사랑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북한이 무너지고 난 후, 잃어버린 고향교회를 다시 재건축하기 위한 헌금 모금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역시 여러 가지로 쉽지 않으며, 특히 한국에 찾아온 IMF는 이 통일방법이 그렇게 정당한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쉽게 말해서 돈 없으면 못하는 통일방법이요, 어떤 점에서 구좌에 돈을 넣어주면 된다는 정도의 안일한 면이 없지 아니한 통일운동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속의 교회"였던 동독교회의 순교자적 각오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엄격히 볼 때 이 북한 교회 재건운동은 아직 오지 않은 통일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운동이라기보다 통일이 어쩌다 뜻하지 않게 왔을 때에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통일 후 준비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한국교회의 운동을 통일 전 한국교회의 역할로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통일은 그저 하나님의 일로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모아둔 돈을 가지고 북한에 들어가서 행동을 개시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과거에 비해 감사한 점이 없지 않지만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통일도 돈이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하는 물질주의적 발상"이라고 공격한다.
사실 진정 우리가 북한 교회를 물질로 돕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황금보다도 더 귀한 사랑을 인식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정신적 자세가 먼저 전제되어야 하겠다. 이 사랑이 있을 때에만 받는 이로 하여금 감격스런 마음이 일게 할 것이며, 그럴 때만 우리의 물질적 제시는 상대방에게 무례히 행치 않은 진정한 사랑이 되어질 것이다. 사랑은 받는 사람의 인격이 문제가 아니라, 주는 사람의 인격이 무엇보다도 더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우리의 도움을 받을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려는 넉넉한 마음에로의 인식의 전환을 잊지 아니해야 하겠다. 사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필자가 논문의 서두에서 제시한 헝가리 교회의 증언 가운데서 제시되는 "섬김의 신학"을 그리고 서독교회의 진정한 봉사적 "섬김"을 바로 인식하며 확고히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 북한에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하겠다. 그 누구이든 왜 섬길 수 없다는 말인가? 여기에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이 실감나게 두드러져 온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구체적 제안을 하기 전에,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것은 이러한 독일의 역사적 교훈을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려고 할 때 풀어야 할 몇 가지 숙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 교회와 국가 사이의 공조 내지는 이해 관계가 독일과 한국을 비교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상이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둘째, 개신교회가 기독교 국가인 독일에서처럼 과연 모든 종교 내지는 종파를 대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 점에 있어서는 교회에 해당되는 몫을 지혜롭게 배당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셋째, 서독 교회처럼 일치된 상태로 북한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넘어야할 산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즉 서독교회의 「독일교회 연합」(EKD)과 같은 대북창구의 단일화가 어떻게 선결될 수 있을 것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Ⅳ. 구체적 제안들

북한을 위하여 우리 교회가 하여야 할 일들을 제안하기 전에 먼저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바는, 첫째, 수요자 중심의 지원이 이루어져야 하고, 둘째,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성경적 자세가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하며, 셋째, 불필요한 사상적 대립을 지양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자본주의 보다, 사회주의 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위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북한교회와 동포를 돕는 일은 정치와 분리하여 교회가 직접 돕되, 정부의 드러나지 않는 협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정부와 교회간의 신뢰적 대화 위에서, 정부를 무시하거나 법질서를 뛰어넘는 탈법적 자세가 결코 아닌, 정부의 적극적인 정신적, 법적 후원과 협조가 요구된다.
아울러 정부의 적극적 재정 후원이 요구되는데, 드러나지 않는 지혜가 발휘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순전히 교회의 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긴장 가운데 있는 우리 남북한 상황에서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일과 정치적인 일을 나누어서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 하겠다. 교회가 하는 일에 정치가 개입될 경우, 또는 역으로 정치가 하는 일에 교회가 개입될 경우 자칫 각자의 일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실무자들의 자유왕래가 이루어져서 서로가 신뢰하는 가운데 지원사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독일의 교훈을 기억하여 명목 있는 지원을 하되, 그러나 관용적 태도와 너그러움도 잊지 않아야 한다. 만약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항이라면 통일 후까지 비밀로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런 점에서 교회이든 정치이든 멀리 바라보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남북한 교회가 루터 500주년 기념대회와 같은 행사를 함께 추진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주기철 목사 기념대회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신앙의 순교자이면서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앙적인 면을 앞세우지는 않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너무 이 점을 숨긴다거나 의도적으로 모른 채 하는 것도 교회의 본질과는 일치 하지 않은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이다. 여기서 동서독 교회의 자연스러운 자기 표현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지원의 다양화 - 당장 필요한 식량뿐 아니라, 북한이 필요로 하는 의약품, 의료기구, 농업 개발용품을 포함한 기술 지원 등이 여러 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의 이름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어려운 일들을 교회가 필터 역할을 감당하면서 인내하는 가운데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갖는 "섬김의 정신"이 구체화되어야 하겠다.
해외에 있는 한인, 고려인 또는 조선족 디아스포라 교회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정치와 분리된 가운데 일을 추진할 수 있고, 북한 정부에게는 신뢰감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높기 때문이다.
탈북자 지원에 교회가 나서야 하되, 그러나 신중하여 북한을 자극하지 않도록 순수하게 기독교적 사랑의 정신으로 의식주(衣食住)의 문제와 정신적 도움을 위한 상담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자세가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하겠다. 이는 이데올로기를 향한 대립적 자세를 뛰어넘어 기독교 정신의 우월성과  실질적 삶으로 제시하자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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