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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종교간 대화의 주창자 한스 큉 교수 인터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스라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3,468회 작성일 02-03-09 10:59

본문

작성일 : 1999/05/01 조회수 : 66

그는 문명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사무엘 헌팅턴의 테제에 반대한다. Hans Kueng(71세)는 카톨릭 신학자이며 종교 간 대화의 선구자이다. 그는 디벨트와의 인터뷰(1999.3.22자)에서 자신의 "세계윤리 프로젝트(Projekt Weltethos)"와 교회의 "개혁 정체(Reformstau)"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스 큉 교수 약력: 1928년 3월 19일 스위스 Sursee 출생. 1060-80간 튀빙엔 대학 기초신학(Fundamentaltheologie)와 교의학(Dogmatik) 교수를 역임했다. 1979년 바티칸은 그가 교황 무오류성(die Unfehlbarkeit des Papstes)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종교 교수직(die kirchliche Lehrerlaubnis)을 박탈했다. 공회의(公會議. Konzil)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저서가 20여개 국어로 번역되기도 한 큉 교수는 1996년 정년 퇴임까지 튀빙엔 대학에서 신구교 통합신학(Oekumenische Theologie)을 가르쳤다. "통합교회 선동자(der oekumenische Unruhestifter)"로 불리는 그는 현재 "세계윤리(Weltethos)" 재단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각국 대통령과 정부수반들이 그의 자문을 구하고 있다.


디벨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1992년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고 4년 후 사무엘 헌팅턴은 '문화의 충돌'을 예견했다. 당신은 이러한 묵시론적으로 선포되는 "일반론적 전언(universelle Botschaften)"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스 큉: 나에게 이런 질문들은 현대라는 세계 시대가 새로운 시대로 대체된다는 배경 하에서 제기된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선사할 것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생각이다. 그 반대로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현대라는 시대가 내내 부분적으로는 무시해 왔고 부분적으로는 심지어 격렬하게 반대해 왔던 종교라는 영역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이 나타날 것이다.

무엇보다 로마 카톨릭 교회,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역시 현대라는 기획(Entwuerfe der Moderne)에 반대해 왔으며 현대 민주주의의 요청들에 대해서도 반대해 왔다. 그러나 종교가 새롭게 떠오를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면 물론 종교가 전면에 나타나는 현상이 가지는 이중성이 놀라운 점이 될 것인데, 종교는 한편 건설적이고 조력적인 힘으로 등장하지만 다른 한편 분열시키고 파괴적인 힘으로 나타날 것이다.


디벨트: 헌팅턴의 테제는 본질적으로 이 두 번째 요소에 기대고 있다.

한스 큉: 우선 나는 헌팅턴처럼 탁월한 정치학자가 인간 존재와 사회의 종교적 측면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을 환영한다. 헌팅턴은 모든 종교와 경제적 투쟁들은, 만일 종교라는 인간의 사회성의 깊은 층위가 파헤쳐진다면, 매우 빠르게 피비린내 나는 분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했다. 이는 이란, 이스라엘, 발칸 지역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헌팅턴과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은 이러한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그의 명제이다. 그는 문화들이 서로 겹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고립'되어 있거나 '단일(monolithisch)'하지 않으며 이들 문화 간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유대인, 기독교인, 회교인들이 공존하고 있고 있는 충분한 실례가 있다. 중세의 스페인이나 사라예보를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도시와 지역공동체에도 이러한 공존을 볼 수 있다.

헌팅턴은 그의 책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세계문화들 간의 협력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론에 반대되는 이러한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있는 수많은 문헌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이미 1984년에 세계 평화는 종교의 평화(Religionsfrieden)이 없다면 있을 수 없으며, 종교의 평화는 종교 간의 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종교 간의 대화는 대화 상대자의 종교에 대한 상호 이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치학자 헌팅턴은 이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디벨트: '문명의 충돌'을 피할 뿐 아니라 이런 충돌의 위험을 내포하는 상황을 처음부터 피하기 위해 종교의 건설적이고 조력적인 힘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한스 큉: 이는 종교가 스스로를 휴머니즘적이고 평화적이라고 정의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모든 종교는 그 전통 중에 부정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이는 기독교 내의 비관용적 측면에도 해당되는데, 이런 측면은 이미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이는 유대교나 회교에도 해당된다. 이는 인도와 주변 지역의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 힌두교가 회교, 시크교, 기독교와 겪고 있는 심각한 갈등을 지켜보고 난 최근에야 우리는 "유대교, 기독교, 회교는 공격적인 예언종교이고 인도 종교들은 평화적이다"라는 상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평화를 위한 희구가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DDR(구 동독)와 폴란드에서 종교적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1989-1991년 사이의 근본적인 정치적 격변이 그렇게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해당되는데 거기서는 종교회의와 범종교적 그룹들이 아파르트하이트 정권을 피를 흘리지 않고 몰아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아니면 필리핀이나 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생각해 보라. 거기서는 종교가 갈등 상황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디벨트: 발칸 지역 분쟁에서는 이에 반해서 종교들이 오히려 전쟁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동하지 않았는가?

한스 큉: 여기서는 분명히 많은 일들을 게을리했다.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주교들이나 세르비아의 정교 주교들은 40년에 걸친 티토 시대에 유일한 권위로서 과거 양측이 범한 잔인한 범죄에 대해 이야기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그런 일을 위한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피우스 12세부터 시작해 교황들도 침묵했다. 교황은 자기비판적으로 스스로의 입장과 카톨릭측의 입장을 문제시하고 양측에 진실을 말할 때에만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 이는 북아일랜드에서나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필요한 것이다. 2차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정권 하에서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도들이 세르비아 정교도 수천명을 학살한데 대해 교황이 유감을 표명했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적절한 시기에 이러한 화해의 신호를 보냈다면 유고슬라비아의 분열도 아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디벨트: 기독교-회교 간의 건설적 대화도 없는 형편이다.

한스 큉: 카톨릭 교회는 이슬람교와 비슷한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카톨릭 교회는 반종교개혁에서 강화되어 현대에 다시 극에 달했던 중세적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Konzil이 이끌어온대로 앞을 향해서 '큰 발걸음'을 내디딜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슬람교는 중세에 위대한 시대를 맞이했으며 이슬람교의 계몽은 중세 초기에 기독교에 크게 앞서 있었다. 중세 후반기에 들어서야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을 추월할 수 있었다. 이슬람은 이제 중세적 패러다음으로 회귀할 것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이란이계몽 이전(voraufklaererisch) 구조를 실험하고 있는데 이는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 카톨릭 교회와 이슬람이 변화하는 것은 결국 시간 문제인데, 과거로의 회귀는 그 종교를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계몽된 이란 대통령 카타미가 교황을 방문한 것은 희망의 상징이다.

회교를 평가하는데 있어, 세계지도에서 서쪽의 모로코에서부터 동쪽의 인도네시아까지, 중앙아시아에서 다레스잘람(Daressalam)까지 초록색으로 칠해진 부분을 보게 되는 것은 악영향을 미친다. 헌팅턴과 Peter Scholl-Latour나 Gerhard Konzelmann 같은 몇몇 독일의 소위 '이슬람 전문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말한다. 이를 통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중부유럽이 발칸을 거쳐 동방으로부터, 또 스페인을 거쳐 서방으로부터 '이슬람의 협공' 안에 놓여있는 것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회교도가 비인의 성문 앞에 다시 서게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 국가들이 각각 서로 매우 상이한 이해 관계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밖에도 회교도의 대부분은 유럽인 대부분처럼 평화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 손을 들어올리고 무기를 흔드는 이슬람인에 대한 표상은 현실과 완전히 다른 이미지이다. 광신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들의 존재가 미국 상원 결정처럼 막대한 돈을 들인 국방력 증강의 정당화에 악용되어서는 안된다. 이 결정은 전 세계의 비참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스캔들이다.


디벨트: 그러나 유럽의 회교도 증가가 불안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긴 안목으로 보아 "유럽 이슬람"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가? 이들은 서로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는가?

한스 큉: 물론이다. 불교를 생각해 보라. 달라이 라마 같은 사람이 불교도이면서도 동시에 서방 세계에도 익숙하게 적응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서방에서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큰 기여를 했다. 자신의 서구 경험의 기반 위에서 달라이 라마는 이제 구시대 티벳의 위계질서적이고 봉건적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른 불교상을 전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럽 이슬람"이 관용을 추구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존중한다면 이슬람교도가 아닌 주변에서도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한편 "유럽 이슬람"은 5백년 전부터 보스니아에 있어왔다. 보스니아의 이슬람은 오늘날까지 유럽의 이슬람이자 현대 유럽에의 가교로서 정체성을 가져왔다.


디벨트: 당신은 서로 다른 종교의 근본에 대한 상호 이해가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도조차 자신의 근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데 얼마나 성공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한스 큉: 원칙적으로 나는 시대정신에 대한 타협이라는 값을 치른다면 피상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언제나처럼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나자렛 예수의 길은 체험이 가능할 뿐 아니라 미래를 가지고 있다. 나는 기독교가 우리들에게 가장 훌륭한 종교적, 윤리적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 내부의 딱지 덮힌(Verkrustung) 구조가 교회가 자신을 개방하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인간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교회는 새로 깨어난 종교적 의식에 공간을 제공하는데 실패했다. 이 원인은 무엇보다 카톨릭 교회가 이미 낡아버린 기독교 도그마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에서의 신앙고백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었고 개인적 영역에서는 신앙의 확신을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카톨릭 교회는 그 "무오류성"과 중세적인 성 도덕 때문에 대부분의 젊은이에게 "머무를 수 있는 장소(Ort des Bleibens)"가 아닌 것처럼 보여졌다. 또한 젊은이들은 종종 개신교회의 경건주의적 틀 때문에 혹은 그 반대로 종교적 요소의 약함 때문에 그리로 이끌려 갔고 거기서 고향처럼 느끼게 되었다.


디벨트: 다시 한번 교회의 분열이 올 것으로 보는가.

한스 큉: 그렇지 않다. 교황 교회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지는 않을 것이며 대신 단지 이러한 교회에서 벗어나서 종종 다른 종교를 향해 볼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에 상관 없이 오늘날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시장이 나타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종교를 '조립'할 수 있다. 이것은 부정적 측면도 가진다. 종종 사람들은 편안한 정신적 혼합물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에는 지적인 도전이나 도덕적 노력이 결핍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좋은 종교성을 가지는 편이, 그 종교성이 어디에서 나왔던지 간에, 삶에서 의지할 곳과 의미가 전혀 없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디벨트: 이는 종교의 다양화(Vielgestaltigkeit)를 의미하는데.

한스 큉: 다양화... 그렇다, 그리고 물론 이는 경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교회가 정치와의 연합 덕분에 다른 종교 공동체가 전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이러한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이는 더이상 불가능하다.


디벨트: 이런 배경에서 당신의 "세계윤리 프로젝트"는 기득권을 가진 교회에 하나의 새로운 종교적 구상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는가?

한스 큉: 절대 그렇지 않다. 만일 토라, 산상수훈, 코란, 공자 어록, 부처의 설법 등을 새로운 윤리(Ethos)를 통해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주제 넘고 어이없는 일이 될 것이다. '세계윤리'가 포함하는 것은 오히려 각 개별 종교와 철학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윤리적 근본, 즉 보편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는 기초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공동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 기준, 태도의 최소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이는 '서구적 구상'을 전 세계에 소위 '슈퍼 구조'로서 덮어씌우려는 것이 아니다. 1993년 세계종교 의회(Weltparlament der Religionen)에서는 스리랑카에서 온 한 유명한 승려가 '세계윤리'에서 부처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 이는 내게는 당연히 나사렛 예수의 목소리이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출신에 맞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윤리적 스탠다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디벨트: 당신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가?

한스 큉: 우리는 스스로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첫번째 세대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공동의 윤리적 규칙의 최소치에 합의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생존에는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세계윤리 프로젝트"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와 철학은 자신이 가진 특수한 사상을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교도는 기독교인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명에 대한 외경을 가지고 있는데, 기독교가 주로 인간을 중심에 놓는데 비해 불교는 생명체 전체를 종교의 중심에 둔다. 또한 이슬람 교인이 기독교인에게 선과 악의 구별에 대해 질문한다면 그 기독교인은 커다란 도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디벨트: 그렇지만 인권과 같은 매우 본질적인 부분에서 서로간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가.

한스 큉: 인권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실지로 자주 반대에 부딪히는데 주로 아시아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권리와 의무와 결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1789년 프랑스혁명시 혁명 의회에서도 거의 절반이 (인권 선언과 동시에) 인간의무 선언도 공표하려고 했다. 나 역시 교회에서 인권을 옹호하는 자로서 점점 더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지게 된다. 즉 우리가 사회 안에서 권리만을 추구한다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권리 외에도 책임이나 의무가 있는데, 이런 말들은 독일에서는 거의 사용해서는 안될만큼이나 악용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인권선언 29조에 책임과 도덕성이 명시되었다. 나는 이러한 인간 의무의 강조가 인권을 억압하려는 시도라고 보지 않는다. 바로 인간 의무를 인식하는 것이 인권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도덕적 동기와 에너지가 없다면 인권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디벨트: 카톨릭 교회도 오랫동안 인권 이념에 대해 거부하는 자세를 보여왔다. 요한 바오로 2세 임기 중 이러한 문제에 있어 결정적 변화가 있는가.

한스 큉: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 이제 교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인권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교황과 주교들이 인권, 정의, 자유, 공정, 연대(Schwesterlichkeit und Bruederlichkeit)에 있어 설교하는 것과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그로테스크한 모순이 있다. 이들은 인위적인 피임도구를 쓰지 않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낙태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를 취하며 동성애에 대한 몰이해한 태도도 문제이다. 안락사 문제에 대해서도 이들의 태도는 그리 기독교적이지 않다.

내 생각에 요한 바오로 2세 임기 초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로마의 '섹스론'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 기독교의 진정한 위험은 젊은 세대를 교회로 이끌어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내적인 개혁이 크게 지체되어서 성직자 대리인(Vikar)이나 청소년 전도 부사제(Jugendkaplan)이 크게 줄었다. 이러한 직책은 젊은층과 예비 성직자들의 종교적 발전에 주임신부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 나는 얼마 전에 7개 교구를 담당하고 있는 한 주임신부를 만났는데 그는 중세의 '미사 승려(MeBpfaffe)'처럼 여기저기서 재빠르게 미사만 집전하고 곧바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신자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두려움과 비겁함 때문에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는데 우리의 주교들은 침묵만 지키고 있다.


디벨트: 그렇다면 새로운 교황이 교회의 노선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한스 큉: 다음 교황 선거 후에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교회를 통해서, 헤어초크 대통령의 표현을 빌자면, 언젠가 '갑작스런 변화(Ruck)'가 있게 되고 이를 통해서 지금 도입된 개혁들이 완성될 것을 기대한다. 교회가 우리 세계의 패러다임과 모든 상황이 변화했음을 깨닫고 인정하고 이에 상응한 지향을 찾을 때에만 교회는 생동하는 미래를 가지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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