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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마르틴 루터의 삶과 종교개혁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홍완식이름으로 검색 조회 3,757회 작성일 02-03-09 10:57

본문

작성일 : 1999/05/01 조회수 : 134

■  마르틴 루터의 삶과 종교개혁
                                                    -홍완식

▶ 1. 머리말

  몇년전 우연한 기회에 루터의 흔적을 따라서 여행을 하는 기회가 주어져서 일상을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3박4일의 영행을 한적이 있다. 학교에서 저렴한 비용에 제공하는 여행이라 아내에게 가정으로부터의 휴가(?)를 허락받아 튜링엔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들판과 한때 찬란했던 튜링엔발트를 중심으로 한 중부독일의 중세 및 근대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종교개혁의 중심지를 보는 기회가 여행일정으로 잡혀있기에 감히 아내에게 철부지 진호를 맡기고 혼자서 여행을 결행하는 간큰 남편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역사를 보건대 무식하고(!) 자연숭배의 차원을 멀리 벗어나지 못 하였던 게르만족이, 로마의 문화와,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로마의 국교로 되어진 기독교를, 민족이동기 이후에 접한 이후의 로마카톨릭과 독일과의 야합과 갈등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독일역사를 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라한 로마카톨릭과의 관련은 프랑켄왕국시대 및 신성로마제국시대를 포함하여 계속 되어졌고 결국에슨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개혁을 야기하고 기존의 로마카톨릭을 구교(물몬 이는 동양적 표현이지만)라 칭하게 하고 새로운 종교개혁의 방향을 신교라 칭하게 된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대단한 흥미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옆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 할아버지의 유품과 유고를 보게된 격이지만, 그 할아버지가 나의 할머니의 친구였다면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나도 예수쟁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입에서 살살 녹는 튜링겐의 명물 Mohn-Kuchen이 휴에도 생각나기도 하여, 결국은 여행을 보내준 아내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하여 아내와 진호를 데리고 눈 덮인 들판을 따라 96년 겨울에 다시금 아이제나흐(Eisenach)를 찾았다. 물론 음악을 전공하는 아내에게 바하의 생가(umstritten!)를 안보고 독일을 떠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꼬드기기는 하였다.

  여행일정에서 빠졌던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비텐베르크(Wittenberg)는 그후에 베를린에 가는 길에 들릴 기회를 가졌고 그리하여 보름스(Borms)를 제외하고는 루터와 관련된 굵직한 곳을 볼 기회를 가졌고, 감회가 깊었기에 루터의 생애와 그의 종교개혁정신을 소개하려 한다. 종교개혁가로서의 루터의 생애는 독일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관심을 가져볼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 2. 마르틴 루터의 출생과 젊은 시절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에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아버지는 한스(Hans)와 어머니 마가레트(Magarethe)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일어 표기법이 통일되지 못한지라 아버지는 Luther가 아닌 Luder라고 이름을 표기하고 있었다. 당시의 관습대로 태어난 지 하루가 지난 11월 11일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날이 마침 성 마틴(St. Martin)을 기념하는 날이라 루터는 마틴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짓던루터의 가족은 농사를 그만두고 1484년(한살)에 모두 아이스레벤 근처의 만스펠트(Mansfeld)로 이사를 하여 루터의 아버지는 동을 캐는 광산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루터는 1488년(5세)부터 시립라틴어학교를 다니게 된다. 1497년(14세)에 막데부르크(Magdeburg)에서 유명한 성당부설학교(Domschule)에서 잠시 공부한 후에 1498년(15세)에는 루터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던 아이제나흐로 옮겨와서 성 게오르그(St. Georg)학교를 단니면서, 코타(Cotta)라는 과부집에 머물게 된다. 당시에 코타여사는 몇명의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서 키우면서 공부도 가르치고는 하였다. 루터를 포함한 학생들은 당시의 풍습대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합창을 하여서 받는 돈으로 생활을 하였다. 1501년(18세)에 그는 에어푸르트(Erfurt)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1503년(20세)에 철학분야에서 학사(Baccalaureus)학위를, 1505년(22세)에는 석사(Magister)학위를 취득한다.

그 후에 루터는 아들의 세속적인 출세를 원하는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법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루터는 1505년 7월 2일에 에어푸르트 근처에 위치한 스토터른하임(Stotternheim)에서 천둥과 번개를 만나 두려움에서 당시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자라고 믿고 있었던 성 안나(St.Anna)에게 수도승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루터는 이 맹세를 지켜서 그해 7월 17일에 역시 에어푸르트에 위치한 아우구스틴수도원(Augustiner-Eremiten)으로 들어간다.

▶ 3. 수도승 시절과 사제서품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이 요구하는 삶의 완전성을 이루고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서는 수도승생활이 유일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틴수도원은 엄격한 계율을 지닌 곳으로 유명한 수도원이었다. 1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서 서원(Geluebde)를 하고 정식으로 수도승이 되어 기도, 금식, 묵상과 참회(Beichte)를 날마다 실천하는 생활을 하였다. 루터의 그림들은 아직까지 많이 보존되어지고 있는데 어느 그림이 루터가 수도생활을 할 때의 것인지는 쉽게 구별이 갈 정도로 바싹 바르기까지 수도에 열중하였다.

  또한 학구적이고 명석한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온 후에 바로 그가 장래에 사제가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고 전하여진다. 1507년(24세) 4월 3일에 그는 에어푸르트의 돔성당에서 사제로서 서품을 받고, 그 다음 달인 5월 2일에 첫번째 미사를 집전하게 된다. 당시에는 사제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기에 사제로서의 서품 후에야 1508년(25세)에 그는 아우구스틴 수도원에서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옮겨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비텐베르크대학의 신학교수이자 아우구스틴 수도원장인 슈타우피쯔(Staupitz)의 눈에 띈 루터는 그로부터 많은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다. 후에 루터는 그를 루터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태어나게 한 복음교육의 아버지라고 회고하고 있다.

▶ 4. 비텐베르크에서의 95개조 반박문 및 보름스 제국의회에서의 항변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기차로 1시간 남짓 소요되는 조그마한 도시인 비텐베르트는 루터가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연구하고 또한 종교개혁사상을 실행에 옮긴 도시이다. 그가 태어나고 죽은 아이스레벤도 루터슈타트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그가 38년동안이나 활동한 비텐베르크도 루터슈타트라는 이름에 적합한 도시인 것이다.

  루터는 아우구스틴 수도원장인 슈타우피쯔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직을 맡고, 이어서 1509년(26세)에 신학박사 학위과정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신학강의도 맡게 된다.

  1510-11년(27-28세)에는 로마를 여행하였는데 그곳에서 로마카톨릭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상을 받고 에어푸르트로 다시 돌아왔다. 1512년(29세) 10월에 그는 비텐베르트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아우구스틴 수도원장의 권유로 동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어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강의를 맡게 된다. 그와 동시에  1514년(31세)부터 그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시교회(Stadtkirche)에서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는 동시대의 유명한 미술가인 크라나크(Cranach)의 성화가 교회정면에 걸려 있는 곳으로 유명한 교회이다.

  루터가 신학교수로 재직하던 중 1517년(34세)에 면죄부판매에 대항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대학부속의 슐로스(SchloB)교회의 정문에 게시한다. 이 사건으로 독일에서의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시작되는데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한 10월 31일을 현재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일로 기념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1520년(37세)에 교황은 루터에게 경고장을 발송하였는데, 루터는 이를 12월 10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텐베르크의 Elstertor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린다. 루커의 용기는 내면적인 것이겠으나 당시 독일의 로마교황청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와 루터개인의 명성으로 인한 시민들의 그에 대한 존경 및 동정심이 경고장소각이라는 사건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루터는 당시 독일국민의 스타였던 것이다!

  1521년(38세) 1월 3일에 재차 교황의 경고가 이어지고, 새로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된 칼5세는 루터에 대한 교황의 재차 경고를 받아들여서, 루터에게 Worms에서 열리게 될 제국의회에 출석하여 95개조 반박문에 관한 그의 의견을 말해 줄 것을 요구한다. 비텐베르크 대학이 돈을 내어 세낸 마차를 타고 루터는 4월 2일에 이미 여행을 시작하였는데, 보름스에 가고 오는 길에 많은 설교를 할 기회를 가졌고 그가 보름스에 도착하였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하여 거리를 메운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4월 17일과 18일에 제국의회가 열리고 루터는 의회에 출석하였으나 그의 입장을 취소할 것을 루터는 거부한다. 그때 루터가 말했다고 전하여지는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보다 실제로 루터는 좀더 길게 말하였다. "나는 잘못되고 모순된 교황과 공회를 전적으로 믿지 않으며 또한 성경말씀과 염백한 이성에 비추어 볼 때 나의 견해를 부인할 수가 없고, 다만 성경이 나에게 이르는 대로 할 뿐이오. 내가 주의 말씀안에서와 나의 신앙적인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취소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양심을 거슬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며 주의 축복을 위협하는 것이외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말이 그말이니까 가능한 짧고 명백하게 그의 태도를 전하기 위하여 축약한 어구가 더욱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 5. 바르트부르크성에서의 성경번역과 이후

  비텐베르크로의 귀로에 작센의 제후이며 루터를 옹호하는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Be)에 의하여 루터는 아이제나크의 산봉우리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로 가게 된다. 이때의 상황을 전해주는 문헌은 없지만 단지 많은 문헌에서 이 사건을 납치(Entfuehrung)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찬송가를 짓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 내 주는 강한 성이요"도 여기서 지어졌다고 한다. 후에 그의 성경번역은 1522년(39세)에, 그가 작시 작곡하고 수집한 찬송집이 1524년(41세)에 출판된다.

  성경의 독일어번역을 루터가 최초로 한 것은 아니고 이전에도 번역본이 있었는데 그의 명성과 어우러져서 루터번역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개혁사상은 구텐베르크에 의한 활판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출판을 통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종교개혁운동의 결과로 수도승들과 수녀들이 수도원을 떠나게 되어 로마카톨릭을 뒷받침하여 오던 수도원 및 교회의 조직은 대변혁을 맞게 되는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수도원을 떠난 수녀인 카타리나 보라(Katharina von Bora)와 만나 1525년(42세)에 늦결혼을 하게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카톨릭교회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던 제후와 도시교회에 의하여 환영을 받았고 특히 봉건적 신분의 억압과 교회의 무거운 조세에 시달리던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토마스 뮌쳐(Thomas Muentzer)는 농노제와 교회세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농민전쟁(1524-1525)을 일으켰으나 루터는 로마서 13장 1절에서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성경구절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권력에 대한 복족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주장하여 농민전쟁에 반대하고 제후들을 지지하였다. 또한 극한적인 경우에도 세속적 권위의 횡포에 대하여 불복종은 인정되어지지만 그 방법은 무력이어서는 안된다는 수동적 저항권을 표명하였다. 농민전쟁은 제후들에 의햐여 진압되어지고 루터의 종교개혁은 농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발전방향을 통해 보면, 종교개혁이 일반민중이 아닌 제후와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여 추진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터의 개혁사상자체에도 한계가 있어서 정치에 있어서 나라의 국민은 지배자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고 있다. 그후 신교가 지배적인 신성로마제국의 연방국가에 있어서는, 세속적 군주가 교회의 수장이 되는 국가교회제(Staatskirchentum)가 확립되어지며 이 국가교회는 1918년 바이마르공화국에 들어서서야 헌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폐지되어 바야흐로 정교분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1529년(46세)에 루터는 쯔빙글러와 마르부르크에서 만나(Marburger Religioinsgesspraech) 찬식의 의미에 관한 논쟁을 하게 되는데 둘의 이견을 조정하려는 헤센의 제후 필립의 의도와는 어긋나게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그후에 루터는 그의 종교개혁사상을 실천하는 활동을 한 후에 1546년(63세)에 아이스레벤의 그가 태어난 생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생을 마친다. 죽은 후에는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임으로서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긴 슈로스교회에, 역시 비텐베르크대학의 동료로서 그리스어교수였고 1519년 이후에는 종교개혁운동을 같이 주도해 온, 1560년에 죽은 멜랑크톤과 함께 묻혔고 교회의 좌우양바닥에는 두사람의 비석이, 좌우양벽에는 두사람의 전신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6. 맺음말

구동독지역은 루터가 흔적을 남기지 않은 도시가 없을 정도로 루터의 영향력이 강했었다. 루터슈타트(Lutherstadt)라는 이름도 루터가 신학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와 루터가 태어나고 죽은 아이스레벤의 공식명칭으로 공히 사용하고 있으려니와, 루터하우스(Lutherhaus)도 역시 비텐베르크에 하나가 있고,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바르트부르크성이 있는 도시 아이제나크에도 하나가 있다.

  아이제나크의 루터하우스는 루터를 기념하기 위한 재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그림과 번역성경, 루터가 사용하였던 악기 등을 볼 수 있고 또한 영화로 제작된 루터의 일대기를 시청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한 것에 전시관의 특색이 있다. 비텐베르트의 루터하우스는 약간의 루터의 기념물과 함께 각종 학술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루터의 생애와 그의 개혁사상을 알 수 있도록 전시한 곳으로서 전시자료를 다 보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하루만 지내면 독일의 종교개혁전반과 루터의 모든 것(?)울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생가(生家)와 사가(死家)는 루터가 진짜로 사용한 가구 등은 별로 없고 단지 동시대의 유사품만이 그득한 곳이기는 하지만 루터의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을 상상할 수는 있도록 하여 놓았다. 루터의 생가에 들어가면 처음에 백조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현재 체코 프라하의 광장에 동상으로 변하여 서있는, 루터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의 선배가 되는, 휘스가 콘스탄쯔공의회에서 불에 타 죽기 전에 했다는 말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한마리의 백조로 태어날 것이다"라는 말을 받아서 루터의 "종교개혁정신의 끈"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가는 그가 진짜로 거기서 죽었다고 하는 침대이외에는 정말로 볼 것이 없다.

  루터가 수도승으로 있었던 아우구스티너수도원에도 그가 희랍어를 공부하고 수도에 매진하였다고 하는 그의 방 이외에는 별로 볼 것이 없지만, 루터를 기념하고 종교개혁의 역사를 음미하기 위하여서 한번쯤은 돌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입장료가 공짜인 곳은 하나도 없지만 학생에게는 할인이 되니 어느때고 분위기를 한껏 잡으며 바람을 쏘이기에는 아주 적합한 여행코스로 추천할 만 하다. 조금 더 여유가 있다면 괴테와 쉴러의 숨결이 묻은 도시 바이마르와 드레스덴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맥주라도 한잔하며 국경의 밤을 지내고, 도나우강이 넘실대는 프라하까지 진출하여 얀 휘스의 동상 앞에 선다면 유럽의 역사의 한줄기를 음미한 기쁨에 취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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