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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괴테

페이지 정보

작성자 freiheit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2,885회 작성일 02-03-09 12:54

본문

작성일 : 1999/09/12 조회수 : 347

■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hte, 1749-1832)

-지난 8월 28일로 탄생 250주년을 맞은 괴테는 질풍노도운동의 중심인물이었으나 이 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드디어는 그것을 극복, 성장하여 세계문학사상에서 희유의 대천재로 군림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정오 마인 강변에 있는 프랑크푸르트시에서 출생했다. 그당시 프릉크푸르트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독일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번영된 제국직속의 자유시였다.

아버지는 북독의 재봉사아들로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궁정고문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일정하게 정해진 직업은 없었다. 아버지보다 21세연하인 어머니는 프랑크푸르트시장의 딸이며 그녀의 일족은 대대로 법학자와 시참사위원을 배출한 남독일의 명문이었다.

그녀는 매우 쾌활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술적 재능을 지닌 사교적인 여성이었으며, 여섯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어릴 때 죽어버리고 성신이 된 사람은 괴테와 그의 누이동생 둘뿐이었다. 그의 누이도 결혼후 첫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렸다.

아버지에게서는 성실한 기질을, 어머니에게서는 예술적 재증을 물려 받은 괴테는 부유한 상류가정의 외아들로서 많은 교양을 쌓으면서 행복하게 소년시절을 보냈다.

16세때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로 갔다. 그곳에서 배운 적이 있었던 아버지가 당시의 작은 파리로 불리워지던 우아한 도시를 아들의 면학장소로 선택해 주었던 것이다. 괴테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엄격한 감시를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는 법률보다 문학과 미술에 열중하였고 3년연상인 케트헨(Käthchen)과의 연애에서 그 감미로움과 괴로움을 실컷 만끽했다. 케트헨과의 연애는 그가 리이프치히에 온지 반년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괴테가 점심식사를 하던 주방의 딸이었는데, 괴테가 좋아하는 여성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듯이 선량하고 우아하고 명랑한 성격을 지닌 수동적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정이 너무나 강했고 그 커브가 너무나 극단적이었다. 이러한 정열적인 인간앞에서 소박한 소녀가 배겨날 리 없다. 괴테는 이 연애에 의한 내면적 폭발로 소년기의 교육으로 덮어져 있던 일종의 외피가 벗겨진 셈이다.

이 무렵부터 그는 서정시와 희곡 "사랑의 변덕 Die Laune des Verliebten", "공범 Die Mitschuldigen" 등을 썼으나 모두 아나크레온풍을 벗어나지 못한 습작물에 불과하다. 케트헨의 연애파탄과 지나친 방종생활이 드디어는 객혈(喀血)을 초래하게 하였다.

라이프치히에 온지 3년만에 병을 얻어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 병은 괴테의 생명의 위기였음과 동시에 그의 심적 생활에 있어서는 천부의 시련이기도 했다. 괴테는 이 병으로 인해 전혀 다른 인간이 된 것이다. 즉 병상에 있는 동안 스스로 종교감정을 체득하게 되었고, 경건주의자인 클레텐베르크(Susanna von Klettenberg)양과 사귀면서 신비화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비록 2년남짓한 시기였지만 라이프치히 시대에 밖으로만 확산되었던 생활을 내적으로 응집시켜 다음시대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이렇다할 작품활동은 없었다.

1770년 건강을 회복한 21세의 괴테에게는 그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극히 중대한 두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헤르더(Herder)를 만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브리온(Friedrike Brion)과의 연애사건이다.

괴테는 마침 눈병치료차 그곳에 체재하고 있던 5세 위인 신진평론가 헤르더를 만나 그로부터 민요의 아름다움과 자연과 감정의 숭고함과 호머와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고 크게 감동했다. 말하자면 헤르더는 괴테의 천재에 점화를 시킨 셈이 되며, 이 두사람의 해후가 바로 폭풍노도운동 전개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 무렵에 쓰여진 그의 서정시는 젊은 마음의 고동과 입김이 그대로 리듬이 되어 생동하고 있다. 그 풍부한 울림과 더불어 명확한 형상을 갖춘 그 표현은 괴테 자신에게는 물론 독일문학에서도 공전의 사실(事實)이었고, 그 이후 독일서정시의 새로운 시범이 되었다.

작성일 : 1999/09/12 [Time: 14:14] IP from z40246.tabu.uni-bonn.de  
▣ 작성자 : freiheit (freiheit@berlinreport.com)  조회수 : 258 , 줄수 : 26  
괴테 2  
그 많은 시들중에서 "환영과 이별 Willkommen und Abschied", "5월의노래 Mailied"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이와 같이 프리데리케와의 사랑은 괴테의 시적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지만, 그 외에 그녀를 버린 죄책감 때문에 일생을 통하여 참회의 생각을 잊지 못하고 그 의식이 후일의 그의 작품에 여러가지 형태로 투영되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젊은 괴테는 나눌 수 없이 넘쳐 흐르는 힘과 그칠 줄 모르는 생장의욕 때문에 이 목가적인 사랑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가련한 소녀를 약 1년후에 그만 버리고 만다. 이것은 천재의 행로에 있어서는 불가피한 희생이고 당사자들끼리의 정신용량의 불균형 때문에 야기된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너무나 순진한 소녀였기에 그것에 대한 괴테의 죄책감은 그만큼 더 컸었다. 민요조의 "들장미 Heidenr&ouuml;slein"를 비롯해서 "괴츠 Götz", "파우스트 Faust" 등 순진한 처녀를 버려놓은 죄값을 다룬 부분들은 이러한 참회의 결과이다.

그리고 보다 승화된 프리데리케의 모습으로서 파우스트 마지막 부분에서 애인 파우스트를 기다리는 그레트헨과 같은 순진한 소녀의 상은 체험없니는 얻기가 어렵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연애의 중요성이 더욱 실감이 난다.

1771년 8월 변호사 자격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온 괴테는 이 해에 폭풍노도의 대표적 희곡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 Götz von Berlichingen"의 초고를 6주만에 다 써 버렸다.

1772년 5월에 괴테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법률 견습을 하기 위해 베츨라르로 갔다. 거기서 친구의 약혼녀인 샤를 로테(Charlotte Buff)를 알게 되어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3개월 후 고향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 체험을 두세게의 외부적 사건과 연관시켜 쓴 서간체 소설이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괴로움에 못이겨 자살을 하였지만 작가는 자기체험을 작품화시켜 보다 깊이 체험함으로써 현실의 괴뇌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괴테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 작품은 공전후무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뒤에 그는 "클라비고 Clavigo, 1774"와 "슈텔라 Stehlla, 1775"라는 두 희곡을 썼으나, 이것은 폭풍노도운동상으로 보나, 괴테의 전체작품상으로 볼 때 문제성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은 후년의 대작 "파우스트 Faust"의 원형인 :초고 파우스트 Urfaust"이다. 이것은 1773-177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바그너(Heinrich Leopold Wagner0의 "유아살인녀 Kindermörderin"와 같은 테마를 다루고 있다.

베츨라르에서 돌아온 후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딸인 쇠네만(Eilisabeth Schönemann)과 한때 약혼한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릴리(Lili)라고 불리워지는 이 소녀는 당시 16세로서 재능과 미모를 겸비하여 괴테의 애인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괴테는 만년에 "그녀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한 여성이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열애를 하였으나, 프리테리케의 경우처럼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의 특수한 성향때문에 약혼을 취소하고 말았다.

이 연애도 괴테의 시정을 북돋우어 "새로운 사랑, 새로운 생 Neue Liebe, neues Leben", "릴리의 정원 Lilies Park", "벨린덴에게 An Belinden", "산상에서 Vom Berge' 등 좋은 시를 많이 남겼다. 1`776년 괴테는 바이마르 궁정의 초대를 받고 그곳으로 떠났다. 이로써 그는 사실상 폭풍노도운동과는 결별을 하는 셈이 된다.

이 해는 또 클링어(Klinger)의 "쌍생아 Die Ziwillinge", "폭풍노도 Sturm und Drang", 렌츠(Lenz)의 '병사들 Die Soldaten", 바그너(Wagner)의 " 유아살인녀" 등 폭풍노도의 전성기가 지나고 최후의 담당자인 젊은 실러(Schiller)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괴테의 작품은 한편의 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체험의 고백이며,  참회이며, 추억이요, 자기비판이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은 바로 생활이 예술이요, 예술이 생활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생활의 고뇌를 예술화함으로서, 그것을 극복하고 보다 높은 세계로 도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괴테에게는 예술이 단순한 유희가 아니고 운명이었으며, 자기존재에 대한 필연적인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런 뜻에서 보면 작품에 자기의그림자를 전혀 남기지 않았던 셰익스피어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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