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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파스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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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퍼옴이름으로 검색 조회 2,703회 작성일 02-03-09 23:49

본문

새롭고 진지한 독일영화의 황금기

68-1.jpg뉴 저먼 시네마의 뿌리는 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더 클루게 가 주축이 된 젊은 영화인들이 62년 오버하우젠에 모여 새로운 독일영화 의 이상을 표명한 ‘오버하우젠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그저 선언정 도로 그쳐버릴 것 같았지만 클루게를 축으로 한 젊은 영화인들의 ‘운동 ’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타내는 정책을 청원하 여 이뤄냈고 공영방송국에서 제작지원을 받는 새로운 제작 시스템이 마련 됐다. 그러자 새로우면서도 진지한 독일영화의 황금기가 열렸다. 클루게 를 축으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조그, 에드가 라이츠, 빔 벤더스, 폴커 슐뢴도르프, 장 마리 슈트라우프, 한스 위르겐 지베르베르 크 등의 감독이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 독일영화의 황금 시대를 이 끌었다. 전세계 평단은 이를 ‘뉴 저먼 시네마’라 칭했다. 뉴 저먼 시네 마의 수준은 독보적인 것이었지만 지나치게 지적이고 무거워서 정부 보조 금에 의존하는 정책이 빚어낸 폐단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 뉴 저먼 시네마가 한창 발흥할 때도 이 영화인들은 지나치게 비상업적이라는 안팎 의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82년 파스빈더의 죽음을 계기로 뉴 저먼 시 네마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다음은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에 실린 오버하우젠선언과 뉴 저먼 시네마 의 대표적인 감독들인 에드가 라이츠와 알렉산더 클루게의 말을 채록한 것이다.

‘오버하우젠 선언’

전통 독일영화의 붕괴는 우리가 거부하는 정신세계가 갖고 있는 경제적 타당성마저 마침내 몰수해 버렸다. 그 결과 새로운 영화가 도래할 기회가 왔다. 젊은 작가, 감독, 제작자들이 만든 독일 단편영화들은 지난 몇 해 동안 국제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고, 또한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았 다. 이런 작품들과 그들의 성공은 독일영화의 장래가 새 영화언어를 구사 하여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 른 나라에서도 그렇듯이 독일의 단편영화는 미래영화를 향한 산실이고 실 험실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독일 장편영화를 창조하려는 우리의 주장 을 밝힌다. 이 영화는 새로운 자유를 요구한다. 기존 산업에 만연된 관습 으로부터의 자유, 상업적 배려에서 나온 구속적 영향으로부터의 자유, 여 타 개입된 관심사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새로운 독일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내용과 형식과 경제적 구조에 대하여 구체적 논리를 갖고 있다. 우리 모 두는 경제적 난관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낡은 영화는 죽었다. 우리 는 새것을 신봉한다.” (1962년 2월28일)

나는 처음부터 참여한 오버하우젠 26명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감독이라고 불렀다. 비록 시작 당시에 영화를 단 한 편도 해보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또한 그중엔 자신의 영화를 직접 만들려 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1명은 작곡가였고, 2명은 촬영기사였고, 또 배 우도 끼어 있었다. 나는 이들을 6개월쯤 전 뮌헨에서 알게 되었고, 그때 까지 나는 단편영화를 만들었지만, 다른 여타 감독들과는 접촉이 없었다. 나는 다른 이들을 알지 못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직업적으로 맺어 진 관계는 없었다.

우리는 프랑스영화의 선례에서 많은 감응을 받았다. 즉 누벨 바그와 ‘아 버지 영화는 죽었다’가 바로 그것이었다. ‘남부 독일 신문사’에서 일 하는 영화평론가 친구를 통해 나는 다른 이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P apa’s Kino ist tot’라고 씌어진 녹색 스티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것을 우리의 편지봉투에 붙이고, 또한 다방에도 화장실에 도 붙이곤 했다. 그것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우리를 사로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나무에도 붙이고, 길바닥에도 붙였 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영화가 독일내에서는 제작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오는 영화들은 우릴 감동시켰다. 초창기 프 랑수아 트뤼포, 루이 말, 장 뤼크 고다르의 영화들이 그것이었다. 그 스 티커들은 프랑스영화에 대한 일종의 경의의 표시였고, 한편으론 곧 단편 영화 작가들이 함께 모여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정도였을 것이다. 우리가 감히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제작하고픈 소망을 밝힐 수 있 었던 것은 바로 이런 대화를 통해서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꿈을 감 히 입 밖으로 꺼낼 정도도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영화산업은 폐쇄된 산 업구조였고 황량한 시대였다. 그런 때 갑자기 뮌헨의 한 중국요리집에 20 ∼30명이 모여 앉게 되었다. 아마도 열번쯤 모였을 것이다. 이 모임을 통 하여 우리 모두는 운명의 결단을 감히 생각하게 되었다.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언명을 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 그 무언가를 알게 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즉 우리의 단편영화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 이에 벌써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단계에 올라섰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무 심코 국제 영화제에서 타낸 상들의 목록을 작성해 보았다. 그리고 그 모 든 기존 장편영화들보다 우리의 단편들이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을 얻어 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 이것이 우리가 집단적 체험을 통해 얻 어낸 가장 큰 발견이었을 것이다.

오버하우젠에서 일으킨 자극은 우리 자신에게도 또한 영향을 끼쳤다. 그 뒤 몇해 동안 진행된 영화정책에 대한 토론의 결과로, 우리는 계속 모여 서 우리의 생각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정책적으 로 대처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 어떤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우린 잡다한 개인들의 집합이었고, 개인의 자기연민과 자신의 감수성에 시달리는 인간들이었기에 결국 영화정책에 대한 구성원 공동의 개념을 정립할 수 없었다. 개발된 논리는 작가영화의 논리였다. 이런 시절에 가장 큰 구실을 한 사람은 알렉산더 클루게였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회고

새 세대는 새로운 관계를 필요로 하고 스승과 학생의 도식적 관계는 없어 져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었다. 우리는 모두가 우리의 학교 에서 학생이었다. 정부 보조금도 없이 어떠한 형태의 전문적 도움도 없이 학교를 세웠다는 것은 정말이지 예외적이었다.

오버하우젠 이후로 대중은 3년 동안 첫 장편영화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 다. 언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었고, 첫 작품이 나왔을 때 지 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이 들끓었다. <어제와의 고별>이 나 <식사시간>은 백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시켰다. 그러나 그런 일은 더이 상 일어나지 않고 있다.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의 <카타리나 블룸> 같은 최근 대히트작도 그 정도의 관객을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 상할 정도의 바람직한 시작이었다. 그러나 18개월이 지나자 그것도 끝나 버렸다. 내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식사시간>으로 상을 받을 때 무대에 루 이 브뉘엘과 함께 나란히 서게 되었는데 정말이지 굉장히 뿌듯했다. 그는 자신의 최후작품으로 상을 받았고, 나는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그때 기분으로는 바야흐로 지금부터 모든 것이 바뀔 것 같았다. 내가 그 축제 에서 돌아왔을 때, 국내 배급업자가 내 영화의 상영을 중단시켰다. 베니 스의 수상 결과가 언론의 표지에 오를 정도로 큰 관심거리인데 왜 이 영 화가 더이상 아무 곳에서도 상영되지 않는지 궁금하였다. 내가 이 질문을 던지자 배급업자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상이라는 것이 관객을 쫓 아낸다.” 물론 그것이 진정한 이유는 아니었다. 바로 그 이듬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상업영화계의 모든 큰 손들이 본 시내에 운집하여 로비활동 을 시작했다. 그들은 모여서 작전을 세울 사무실이 있었고, 직원들이 있 었고, 또한 그 어떤 것도 제작하고 있지 않았기에 영화정책 결정에 영향 력을 발휘하기에는 당연히 우리들보다 훨씬 유리하였다. 우리는 영화를 제작하느라 서로 모일 수 없었다. 날치기로 통과된 엄한 보조금 정책이 정당들에 의해 이미 심의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역시 빨리 조직체를 만들어 새 법안에 영향을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신독일장편영화 제작공동체’가 상업영화의 로비 활동에 역습을 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화진흥법’이 67년 말에 결 국 마무리되었으니 우리의 첫 장편영화들이 성공을 거둔 지 불과 1년 뒤 의 변화들이었다.


Copyright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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