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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레프 브론슈타인(레오 트로츠키)   

책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

자신을 향한 모든 투쟁은 아름답다.(트로츠키 자서전을 읽고.)
 
72년 전에 나온 책을 신간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분명 재미없는 일이다. 레닌도 스탈린도 가고, 그들을 지탱했던 장미빛 혁명에의 전망도 종말을 고한 지금, 혁명가 트로츠키(1879~1940)의 삶은 이념도 혁명사도 아닌, “자신을 향해 투쟁하는 모든 삶은 ‘아름답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은 아름답다. 미래 세대로 하여금 인생에서 악과 억압과 폭력을 일소하고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맑스는 혁명을 ‘시대의 궁핍(Not der Zeit)에 대한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지금이야말로 과거로 될 수 없는, 그래서 역사도 없는 냉혹한 현실 앞에 류적 존재로서 인류의 삶이 여지없이 휘둘리는 궁핍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때에 ‘과격한 방랑자’ 트로츠키가 우리 앞에 왔다. 72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그와 더불어 이러한 시대의 궁핍에 대한 저항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가르치는 저항은 “강철같이 큰 손으로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는 가시덤불 넘어 철조망을 뚫고, 적의 포화를 헤치고, 굶주린 수백만 노동자 농민에게 찬란한 승리를 안긴다(부하린)”는 강고한 신념으로 무장한 채, 사회주의의 과학적 엄밀성과 그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그려내는 스탈린, 부하린, 데보린 식의 혁명이 아니다. 공공연히 이성 역사의 종언을 거론하고, 신인류의 출현을 예고하는(후쿠야마) ‘불길한 시대적 징후’에 맞서 이성과 휴머니즘의 절대적 가치를 지키라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말한다: “이른바 ‘인격의 절대적 가치’라는 견지에서 보면 혁명 역시 전쟁과 마찬가지로 유죄”라고. 트로츠키는 70년이 지나 이 땅의 위대하고 창조적인 맑시스트들(스탈린주의자)이 자기반성을 통해서건, 아니면 사회주의의 현실 인식에서건 간에, 충분히 냉정을 되찾은 다음에 독자를 찾는 것을 보면, “책은 각자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habent sua fata libelli)!”이 분명한 것 같다.
트로츠키즘을 상징하는 ‘영구혁명론’은 간단히 말하면 러시아는 민주주의 시민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유럽 등 세계각국의 혁명세력과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영구혁명론’이 올바른 혁명노선인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니, 어떤 유형의 사회혁명도 포기하고 개인적, 내면적인 해방으로 치닫는 포스트모던한 세상에 그것은 너무 무겁고 진부하다. 최근 출판가에 유행하는 혁명가의 전기는 대부분 ‘영웅소설’을 목표로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트로츠키를 ‘영웅소설’로 독해하지도 않는다. 그럴 경우 트로츠키와 악셀리로드, 마르토프, 부하린, 스탈린 등과의 관계에 주목하게 될 것이고, 나는 소박한 독자가 아니라, 혁명 사극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나, 사료의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사가(史家)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독자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책은 너무 젊은 나이에, 특별히 불행한 처지에서 너무 많은 의도를 가지고 쓰여졌다는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혁명은 낭만주의자의 것이라고! 실로 혁명이란 침착한 심사숙고의 문제가 아니라, 충동적이며, 이판사판의 상황에서 정념에 따라 운동하는 것이기에 낭만은 혁명가의 필수 요소인지도 모른다. 나는 트로츠키를 통하여 혁명가의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의 삶의 내면으로부터 아름다움, 낭만, 희망, 정념을 읽어내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덮치는 억압, 모순, 갈등에 직면해서 인민의 맨 선두에 서서 폭력에 저항하는 끝없이 치솟아 오르는 폭력적인 정념을 본다.
이번에 나온 <나의 생애(박광순 번역) <상권>은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의 현장기록으로, 러시아 제정 말기의 한 유대인 농가에서 태어난 그의 유년 시절, 성장과정,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가꾸어 가는 과정, 그리고 1917년 1월 미국 망명까지만 서술되고 있다. 10월에 있을 혁명과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 그리고 ‘비자 없는 지구’로 추방된 영원한 방랑자의 심경을 읽으려면 좀 기다려야 한단다(9월쯤에 <하권>이 출간된다고 한다). <하권>에서 우리는 더욱 흥미진진한 정념의 삶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장마와 무더위에 지친 우리의 정신을 일깨울 것이다. 이번 휴가철에 꼭 한번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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