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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바그너의 “신앙의 주제”에서 들리는 바흐 모티브 귀로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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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딘연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7건 조회 3,584회 작성일 07-02-2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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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열기  목록닫기    목록보기  귀로 생각하기 (47) 
 
 [바그너] “신앙의 주제”에서 들리는 바흐 모티브 귀로 생각하기  2005/11/05 03:51

http://blog.naver.com/waffel/100019136672
 
바그너의 “신앙의 주제”에서 들리는 바흐 모티브 – 종교 음악은 경건하게만 체험되는가?


종교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가 신앙의 경건함을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다소 비판적으로 답해 보려고 한다. 음악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에 있는 그대로 따르는 것보다는 다소 조심스럽게 감각을 따져보자는 것이 주된 핵심이다.

§

19세기 후반에 오스트리아의 음악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릭은 <음악적 아름다움>이라는 책에서, 가사에 의존하여 음악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꼰 적이 있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를 듣다 보면, 이런 가사가 하나 나온다.

J’ai perdu mon Euridice
Rien n’&eacute;gale mon malheur.

이 대목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체를 잃고 나서 내뱉는 탄식이다. 그래서 “나는 에우리디체를 잃었네 / 그 불행 비길 데 있으랴”라는 내용이다. 이 말에서 한슬릭은 다음과 같이 단어 두 개를 슬쩍 바꾼다. 곧 “perdu”를 “trouv&eacute;”로 “malheur”를 “bonheur”로. 번역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이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J’ai trouv&eacute; mon Euridice
Rien n’&eacute;gale mon bonheur.
나는 에우리디체를 찾았네
그 행복 비길 데 있으랴

가사를 이렇게 바꾼다 하더라도 이 부분의 반주는 원가사에서 느끼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복을 찬양하는데 쓰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음악이 감정을 표현한다는 주장에 대한 한슬릭의 날카로운 반박을 엿볼 수 있는 면이다.

§

이러한 주장을 우리가 종교 음악을 들을 때 갖는 숭고한 느낌에 대해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우리의 요청에 적용해 보려고 한다.
그 이유는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서곡에 나오는 “신앙의 주제”를 떠올려 보았기 때문이다. <파르지팔>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했다는 성배가 숨겨져 있는 곳을 향하여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지만 바보로 태어난 파르지팔만이 그 성배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중세 독일의 전설을 따르고 있다. 흔히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하는 이 오페라의 서곡에서 44번째 마디서부터 유명한 “신앙의 주제”라는 모티브가 발견된다. 흥미롭게도 바그너가 숨기고 있지만, 이 모티브가 바흐의 <마태 수난곡>의 코랄과 비슷함을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가 바흐의 코랄은 개신교 찬송가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이다. 여기서 바그너는 우리말 가사로 “오 거룩하신 주님”에 해당하는 부분을 자신의 모티브로 사용했다.
이에는 <파르지팔>의 줄거리에 근거하는 이유가 있다. 파르지팔이 기독교적으로 해석되는 이유는 바보 파르지팔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파르지팔”은 이 주인공이 성배를 얻기 위해 당하는 수난을 다룬다. 그래서 이 오페라는 마치 성금요일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그너도 그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악보를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바그너는 바흐의 코랄에서 두번째 마디를 다르게 변형시켰다. 이러한 변형과 관련해서 종교음악의 역사성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바흐의 두번째 마디에서 일반적으로 곡이 끝났을 때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화음진행(S-D-T)을 따르고 있다. 바그너는 이러한 진행을 따르지 않는다. 46마디에서는 베이스의 es를 바탕으로 끝이 나고 있지만, 바그너는 바흐처럼 이러한 끝을 자연스럽게 내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이른바 “교회 종지”로 알려진 끝맺음(S-T)을 택했다. 이런 식으로 부자연스러운 종지를 만들어낸 것에는 바그너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처리 방식에서 바흐와 바그너 사이의 역사적 거리 뿐 아니라 종교음악이 처한 상황이 보여지게 된다.
바흐에게 신앙이란 전혀 문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신앙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특별히 어려움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키르헤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신앙과 음악을 함께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다. 독실한 개신교도로서 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도 없고 또 그러한 신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할 만한 커다란 사건도 없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신앙의 세속화 과정을 경험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바그너의 경우에는 다르다. 바그너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비록 그가 <탄호이저> 같은 오페라에서 방탕하고 음란한 생활을 회개하고 그에 대한 증거로 순례여행을 하려고 결심하는 탄호이저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탄호이저는 순례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루터는 참회를 위해 로마의 어느 성당까지 가서는 무릎으로 그 계단을 모두 올라갔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순례여행을 고난을 통해서 굴욕과 겸손을 익히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그러한 고난의 여행은 탄호이저를 좋아하는 엘리자베트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탄호이저에게서 면제된다. 탄호이저의 줄거리에서 뿐 아니라 바그너는 일반적으로 이런 식으로 여성을 통한 구원을 많이 상상했다. 바그너에게서 필요한 것은 신앙적인 각성이나 회개 따위가 아니었다.
바그너가 사용한 부자연스러운 종지는 교회 종지를 사용한 결과이다. 그리고 초연 당시에도 바그너가 의도한 바 그대로 사람들은 이 “신앙의 주제”를 들으면서,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교회 종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신앙의 주제”는 교회 종지를 끌어들일 정도로 바그너가 신실한 사람이었는가,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에는 의미가 없다. 개인의 신실함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오히려 신앙을 그 시대에 맞게 진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 바그너 시대에서 찾아지지 않음을 비판해 볼 수 있다. 바흐의 자연스러운 종지는 바그너가 보기에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러한 어울리는 신앙의 음악적 표현을 찾아낼 필요도 그럴 능력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거룩한 분위기를 <파르지팔>에서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음악이 바흐 시대에서처럼 종교에 봉사하는 하녀 노릇을 하던 시대에서 음악이 자율적인 영역으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면으로는 신앙의 세속화 과정과 맞물리는 과정이었다. 교회의 전례는 더 이상 거룩하다는 의미를 잃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거룩함의 외관을 다시 불러 일으키고 싶어하는 모순 속에 바그너는 살게 된 셈이다. 이러한 현상이 담고 있는 문제는 더 이상 교회의 성례를 공유하지 않는 개인들이 모여 앉은 오페라 하우스에서 또 다시 벌어진다. 다시 말해 바흐 시대에 작곡자 바흐나 그것을 듣는 관객들이나 모두 수난의 신비를 전제하면서 들었지만, 바그너 시대에는 그러한 공통되는 전제가 더 이상 마련되지 않는 개인들이 음악회에서 서로 모여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바그너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시대에 울려 퍼지는 “신앙의 주제”는 더 이상 듣는 이들에게 바흐식의 신앙을 떠올리게 하지 않으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들뜬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말하자면 껍데기만 남은 거룩함이다. 그러나 바그너가 의도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면? 예술이 종교에 봉사하지 않고, 대신에 자체로 종교로 등장한다면?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 축제극장을 짓고서는 개막식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했다. 바그너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음악을 통해서 오페라 하우스에 모인 익명의 사람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되라는 계시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그너는 이 교의를 평생 추구했다. 그가 <파르지팔>에서 교회 종지를 만들어낸 것 역시 예술을 종교로 끌어올려 황홀의 경지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은 음악학자 리트뮐러가 말하듯이 “예전에 믿었던 것을 더 이상 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온갖 사용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퇴행에로 치닫는다면? 바그너의 음악이 집단적인 최면제로 사용될 수 있음은 “신앙의 주제”에서 처음에 보이는 es-as로 상승하는 4도 진행이 훗날 나치 시대에 선동용 팡파르 음악에 즐겨 응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바흐의 코랄에서 보이는 e-a의 상승하는 동일한 4도 진행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
이런 식으로 보자면, 음악을 듣는 우리의 귀에 있는 그대로의 소리가 있어서, 그 소리만 들으면 우리가 어떤 내용을 자동적으로 떠올려 보게 된다는 주장은 의문스럽게 여겨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찬송가들의 많은 것들 중에서 역시 베토벤이나 하이든 등의 가사 없는 현악 음악에서 빚지고 있는 것들이 몇 개 있다. 가령 찬송가 245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원래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 “황제”의 제2악장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기독교적 가사를 붙여서 전례용으로 쓰고 있지만, 이것은 독일 국가로도 쓰이고, 예전에는 파시즘적인 가사가 덧붙여져 나치들에게 국수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길러주기도 했다. 이를 떠올려 보면,  하이든의 원곡을 들을 때나, 찬송가를 부르고 들을 때나, 기분이 오싹하지 않을까. 이런 음악적 경험을 나열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음악을 통해서 분위기를 돋군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것이 건강하지 않은 열광이라는 위험한 결과를 빚어낼 수 있음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노래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던 운동이 독일에서 20세기 초반에 한창 유행했었는데, 그것은 대개 나치 시대의 정책으로 흡수되었다. 우리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 모두다 똑같이 경험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음악에서처럼 불투명하고, 더군다나 전달하려는 또는 전달되는 내용도 없다고 간주되는 경우에, 지성을 통한 이해 대신에 감성을 통한 이해가 흔히 작용한다. 항시 논란이 되어 왔던 미적 경험의 이론 “취향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이를 위해 당연하게 끌어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취향도 따지고 보면, 여러 방법을 거쳐  형성된 결과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들을 때 이것은 어떤 느낌 그리고 때로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음악의 기능 중 하나는 그러한 비판적인 듣기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앞에서 모델로 제시했던 한슬릭의 이론을 물려받은 철학자 아도르노는 “귀로 생각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 (2003년에 발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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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wischen님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님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종종 올려 주세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아도르노가 "귀로 생각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mit den Ohren zu denken"이라는 문구를 염두에 두신 것입니까? 물론 "Ueber den Fetischcharakter in der Musik und die Regression des Hoerens"란 논문의 그 주된 내용이 "비판적인 듣기"를 요청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mit den Ohren zu denken"은 그의 "Prismen"이란 책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한 번 나오는 문구로 아는데, 혹시 아도르노가 그 책 말고 다른 어떤 부분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귀로 생각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무딘연필님의 댓글

무딘연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흠... 아도르노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군요? 그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그것이 처음에는 부정적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는데, 되새겨 보면 아도르노가 정작 하고 싶은 말 중 하나죠. 프리즘의 첫 문단에 나오는 말은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에게 거슬리는 단어의 합성에 대한 비판으로 사용하고 있음은 맞는 지적입니다. 아도르노의 귀 모티브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혹시 나중에 쓰여질 글들을 위해 여기서는 보류하도록 하죠.) 니체의 귀 모티브 못지 않은 대목이니까요. 비판적인 듣기라는 말보다는 "구조적 듣기"라는 말이 더 어울리고 정확한 말입니다. "귀로 생각하기"는 아도르노를 가장 특징짓는 말이겠습니다. 그럴 것이 그만큼 귀에 인식적 능력을 부여한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의 저작을 관통하는 중요한 이념 중 하나입니다. 왜 귀에 그렇게 인식적 능력을 부여했느냐라는 물음은 전기적으로 대답하는 것의 의미를 지니며, 그가 생각하는 인식론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토론은 여기서는 너무 장황하기에 멈추도록 하겠고, 좀더 기다란 본격적인 글에서 만나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궁금증을 참으시고 아도르노의 글들에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zwischen님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흥미로운 글들을 올려 주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앞서 님의 본 글에서 어쩌면 부수적인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는데, 그에 대한 님의 답변에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프리즘의 첫 문단은, 정확하게 읽어 보면, 아도르노가 "Kulturkritik"이라는 개념에 내재하는, 여전히 분명하게 해명되지 않은 근본적인 모순을 꼬집기 위해서 말을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아도르노가 그 부분에서 "mit den Ohren zu denken"이라는 문구를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이나, 아니면 "청각의 인식능력"을 염두에 두고 사용했다기 보다는, 그 당시 독일학계 분위기에서 "Kultur"와 "Kritik"이라는 개념이 각각 이미 반성이 다 이루어진, 그런 까닭에 "Kulturkritik"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두 단어의 합성처럼 습관적으로 사용되고 경향에 대한 비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이 옳게 지적하시는 것처럼, 아도르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해 낼 수 있는 청각의 인식능력"을 "미메시스적인 인식태도"와 관련해서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판적인 듣기"라는 말보다는 "구조적으로 듣기"라는 말이 더 어울리고 정확하다는데 저 역시 동의 합니다.

"귀로 생각하기는 아도르노를 가장 특징짓는 말"이고 "그의 저작을 관통하는 중요한 이념 중 하나"라고 님이 말씀하실 때, 어떤 의도인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만일 "귀로 생각하기"라는 말을 아도르노가 직접 한 말이 아니고, 그의 사상 전체로부터 끄집어낸 님의 해석이라면, 그 말은 오해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귀"를 강조해서 귀"로"라고 표현하다보면, 그 말은 귀를 "통해서" 혹은 귀를 "가지고"라는 뉘앙스를 갖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현명하게 그것을 귀와 "함께"라는 변증법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아도르노 사상을 "Aesthetische (+) Theorie"라는 말로 가장 잘 특징지어서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님의 좋은 글들에 감사 드리고, 벌써부터 또 다른 글이 기대됩니다.

무딘연필님의 댓글

무딘연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Mit den Ohren denken이라는 말이 그 문맥에서 가지고 있는 함의는 쓰신 그대로입니다. 다른 맥락에서도 그런 비슷한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Mit den Ohren gedacht라는 말은 아도르노가 쓴 말이고 심지어 아도르노가 프리즘의 제목으로 쓰고 싶어 했을 정도로 아끼는 말입니다. Mit den Ohren gedacht라는 말이 제목이 되지 못했던 것은 아도르노의 뛰어난 출판업자 페터 주어캄프가 반대한 결과입니다. 이는 아도르노 본인이 하는 말이지 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도르노의 20권 저작 중에 분명히 나와 있는 말입니다. 제 생각을 마음대로 남의 말이라고 옮기는 것이 오류임은 문헌학적인 입장에서 볼때 자명한 것입니다. 저는 문헌학을 넘어서는 "철학"은 위험하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귀라는 감각기관과 사고라는 추상의 결합은 아도르노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면 <신음악의 철학>에서도 귀 또는 음악의 영역에 대한 합리화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감상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비판적 논조가 나옵니다.

zwischen님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도르노의 책, "Noten zur Literatur", III 장 "Titel"이라는 글에 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소개되어 있군요. 그 글을 읽어보면, 아도르노는 페터 주어캄프가 "책 제목"을 짓는데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녔다고 말하네요. 아도르노 입장에서는 "Mit den Ohren gedacht"이라는 문구를 "Prismen"이라는 제목과 함께 사용하길 원했지만 주어캄프는 그 문구가 "꼬리를 흔들어 대는 mit dem Schwanz gewackelt" 장면을 연상시킨다 하여 거절했다는군요. 님 덕분에 그런 일화도 알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여전히 남는 문제는 아도르노 글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그 글을 읽는 다른 분들의 오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누군가 신경쇠약증을 무릅쓸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딘연필님의 댓글

무딘연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도르노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시군요~ NL을 그것도 그런 잘 알려지지 않은 에세이를 읽는 사람은 드문데 말이죠. 흥미로운 에세이들이 많습니다. 재미있으셨다니 좋은 일입니다.
"귀" 모티브의 긍정적 성격에 대해 물어오셨는데, 이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아도르노의 음악 저작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1930년대 중반에 쓴 글을 알고 계신 것으로 보이는데, <신음악의 철학>과 그에 이어지는 음악 저작 I-VI에 이르는 여러 글들은 충분한 참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다면 주제넘은 권유였다고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zwischen님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주제넘은 권유라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술이론에 관해서라면, 저에게 언제든지 권유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아는 바가 적지만, 혹시나 알고 있는 것들이라도 "확인"한다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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