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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퇴폐음악Entartete Mu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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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02-03-10 02:48 조회7,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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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0/11/27 조회수 : 40

■ 엔트아르테테  무직(Entartete Musik)

1997년 7월엔가 독일 헌법 재판소에서는 중요한 판결이 있었다. 통독 전에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던 구동독 시민들을 사살한 구동독 군인과 발포 책임자에 대한 최종 판결이었다. 피고측에서는 그들의 행위가 명령에 의한 것이었으며 구동독의 국익을 위해서는 당시로선 그러한 살상행위가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변호 논리를 폈으나 그들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 요지는 이렇다. '국익이 인권에 우선할 수는 없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터키인들을 비롯한 독일 거주 외국인들 처우 문제가 언제나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독일은 유럽에서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하고 있는 나라이고 그래도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이 비교적 인권 상황이 양호한 나라로 인정하고 있다. (과연 국익보다 인권이 우선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 나라의 위정자 중에는 몇 사람이나 될지 물어볼 일이다.) 그러나 인권과 자유의 문제에 관한 한 그들도 부끄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술의 자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1933년 독일에서 나찌가 집권한 이후로 문화, 예술에 관한 모든 것은 나찌의 강령에 의해 지시를 받아야만 했다. 1937년 7월 18일에는 뮌헨에서 '대독일 미술전'이 열렸는데 여기에는 나찌 어용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같은 도시에서 '퇴폐미술(Entartete Kunst)'전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나찌가 이 전시회를 연 목적은 사람들에게 두 전시회를 비교하게 하고 타락한 예술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려 그런 작품들을 혐오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말하자면 그 전시회에서 전시된 것은 저자거리에 내걸린 죄수들의 목이었던 것이다. 이후 '퇴폐미술전'은 여러 도시를 순회하게 되는데, 1938년 5월 뒤셀도르프에서는 그 전시회가 열리기 앞서서 '퇴폐음악Entartete Musik'이라는 제목을 건 쇼가 열렸다. 그 이후로 '퇴폐 예술'이라는 말은 나찌의 예술관과 부합되지 않아 탄압받은 작품들을 나타내게 되었다.

독일어로 entarten(엔트아르텐)이라는 동사는 '퇴화, 퇴행, 타락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ntartet는 과거 분사 및 형용사로서 '타락한'이라는 뜻이다. 그 단어의 명사형인 Entartung(엔트아르퉁)은 원래 19세기의 의사이자 범죄학자인 체사레 롬브로소가 자연과학적, 심리학적 일탈을 일컫기 위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이 다위니즘적인 단어가 보수주의 문화비평에 원용된 것은 1893년 유태인 시오니스트이자 의사, 문화비평가인 막스 노르다우에 의해서였다. 당시 그가 겨냥한 것은 인상주의 미술이었다. 그는 인상주의를 병적인 것으로 여겨, 퇴폐문화라고 규정했다. 나찌는 그 어법을 이어받아 예술에 대한 국가 사회주의 기준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들을 퇴폐적이라고 낙인찍었다. 결국 생물학적인 '퇴화', '퇴보'를 나타내던 그 단어는 정신적인 '타락', '퇴폐'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 쓰임조차도 타락한 것이다.

'엔트아르테테 무직'은 특정한 음악 사조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범주에 묶인 작품들은 특정 장르의 음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중음악에서 순수예술음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통속적인 유행 오페레타에서 진지한 아방가르드 음악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영화나 무대를 위한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악 활동에 걸쳐 있다. 이러한 분류는 작곡가들의 의도에 의한 것도 아닐 뿐더러 예술 비평가나 예술사가들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이 분류 범주가 지닌 독소는 바로 이 개념과 분류가 예술 외적인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나치는 자신들의 비합리적인 기준에 의해(다름 아닌 그들의 취향이 그 기준일 뿐이었다) 퇴폐음악이라고 규정된 모든 작품에 통제와 검열, 탄압을 가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스스로의 예술적 안목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이 화가가 되려다가 좌절되었던 과거가 있고, 5시간이나 소요되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외울 정도로 바그너 광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참관한 자리에서 그 작품을 지휘했던 젊은 시절의 카라얀은 실수로 두 마디를 빼먹었는데, 히틀러는 이 사실을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심미안은 편협하고 경직된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민족적이어야 했고 '도덕적'이어야 했으며 예술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예술에서의 '현대'라는 개념을 경조부박한 유행이라는 말과 혼동하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안 민족의 영원한 예술'이었다. 그는 '대독일 미술전'의 개막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새로운 제국의 예술은 고대나 현대의 척도에 의해 재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예술로서 우리 역사의 불멸성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나는 혼란한 정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제부터 여기서 독일 내에서의 예술활동의 제국면을 청소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결심이라고 이 자리에서 공언합니다."

이제 청소가 시작된다. 예술에서의 공안정국이다. 나찌의 표적은 우선 작품이 오로지 재산으로서의 가치에 의해서 가치가 매겨지고 거래되는 상업주의적 미술 시장이었다. 모든 군국주의적인 정권은 처음에는 이렇게 엄격한 도덕주의의 칼날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도덕주의는 부패를 일소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면을 관리하려 들고 구성원의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 나찌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도 금지했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도 상연 금지되고 불태워졌다. 그러나 나찌가 염두에 둔 가장 큰 사냥감은 유태인 예술가들이었다. (유태인 문화비평가에 의해 쓰여지기 시작한 개념을 수단으로 유태인을 탄압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태인에 관한 한 퇴폐적이니 급진적이니 하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사회 경제적으로 기득권층에 속했던 유태인의 보수적인 작품들조차도 탄압받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대가(大家)들이 독일 국내에서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작품 활동이 금지되었다. 외국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쇤베르크의 작곡 스승이자 처남인 알렉산더 쩸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 1871-1942)는 베를린에서 활동하다가 나찌가 집권하자 비인으로 돌아갔으나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결국 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독일에서 쫓겨났거나 죽음을 피해 망명했다. 어떤 이는 정착한 나라에서도 작곡이나 지휘 활동을 계속하여 이름을 날렸는가 하면 어떤 이는 대중음악이나 영화음악에 손을 댔다. 쿠르트 바일(Kurt Weill; 1900-19500)은 브로드웨이에서,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는 헐리우드에서, 빌헬름 그로쯔(Wilhelm Grotz;1894-1939)는 영국에서 성공한 경우이다. 그래도 망명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다행이었다. 스트라빈스키와 함께 재즈 어법을 성공적으로 소화한 유럽 작곡가 중 제1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에르빈 슐호프(Erwin Schulhoff; 1894-1942)를 비롯하여 많은 실력 있는 유태인 작곡가들은 독일 점령 지역에 끝까지 남아 있다가 강제 수용소의 개스실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탄압 받은 작품들의 경향을 살펴보면, 우선 미술에서는 20세기초의 유겐트슈틸, 상징주의, 인상주의 등의 사조와 나찌 집권 당시에 활발하던 표현주의, 다다이즘, 추상 미술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오토 딕스, 오스카 코코쉬카를 비롯한 현대 미술의 대표적인 거장들이 거기에 속했다. 음악에서는 무조음악을 비롯한 아방가르드 작품, 유태인의 작품, 재즈를 도입한 작품,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 캬바레 송 등이 표적이었다. 유겐트슈틸, 상징주의, 표현주의, 무조음악과 12음 기법은 혼동되어서도 안되지만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니다. 그 양식들에는 어느 정도 일관된 흐름이 있다. 외면적인 감각 인상을 나타내려는 프랑스적인 경향인 인상주의에 반발해 나타난 표현주의는 덧없는 외면이 아닌 심리적 내면을 표현하려는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 거기에서 나타나는 강렬함은 기법적으로는 유겐트슈틸의 원색적인 색채에서 온 것이다. 대개 미술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그러한 양식들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음악에서 드러난다. 무조음악의 창시자인 쇤베르크는 한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식인들이 많이 오는 베를린의 캬바레 '위버브레틀'에서 그 클럽을 위해 작곡과 피아노 연주 일을 한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몇 곡의 캬바레 송을 작곡했다.(그 노래들은 나중에 묶여서 '브레틀의 노래'라고 불리게 된다.) 쿠르트 바일이나 한스 아이슬러의 노래들, 특히 브레히트와 공동작업하면서 작곡된 연극 음악들은 20세기 전반에 유행했던 캬바레 송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그러한 대중 음악 양식은 가장 진지하고 대중 음악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쉬운 쇤베르크 개인의 음악적 발전에 있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쇤베르크가 칸딘스키와 친했고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음악이 되었건 미술이 되었건 쇤베르크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전을 열 정도였으니 회화에 있어서도 평범한 아마추어 수준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강렬하고 표현주의적이었는데, 역시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의 초기 음악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정화된 밤]은 그의 그림들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이들 화가들은 다시 명성을 되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찌에 의해 '찍혔던' 화가들은 오늘날 미술사의 굵은 줄기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그런 반면 나찌에 부역했던 화가들은 잊혀졌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많은 작곡가들이 파시즘의 손길이 사라진 이후에도 잊혀진 채로 남아있다. 반면 반유태주의적인 작곡가 바그너의 미망인 코지마 폰 뷜로(리스트의 딸)와 히틀러를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했던 그 아들들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 집안은 독일 음악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퇴폐음악' 작곡가들 중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까지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쯔 슈레커(Franz Schreker; 1878-1934)이다. 그는 주로 오페라를 많이 썼다. 대본도 자신이 직접 썼는데, 그 플롯이 철저히 심리학적으로 짜여져 있으며 오페라는 클림트의 그림과 같은 신비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그에게 최초의 성공을 가져다 준 작품은 오페라 [먼데서 나는 소리]였다. 이 작품은 1901년을 전후로 하여 작곡되기 시작했으리라 여겨지지만, 슈레커 자신이 작품에 대해 자신을 가지지 못하여 오랫동안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는 1909년에 있은 그 작품의 3막 간주곡 초연이 성공을 거둔데 용기를 얻고 리햐르트 쉬트라우스의 [살로메] 초연에 자극을 받아 곡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 오페라는 1912년에 독일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되어 굉장한 호평을 받았고, 이 성공으로 인해 그는 진보적인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는 1912년에 비인 음악 아카데미 교수로, 1920년에는 베를린 음대의 학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후속 오페라들이 계속 무대에 올려지기는 했으나 [도깨비 불꽃]의 초연 이후로 공식적인 지지는 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30년대에 들어서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공격받았고 나찌의 추종자들이 공연에서 난동을 부리곤 했다. 그는 1932년에는 두 학교에서의 지위를 모두 박탈당했고, 이듬해에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코른골트, 쩸린스키와 함께 그는 양식적으로 한스 피쯔너, 막스 레거 같은 후기 낭만파 작곡가와 쇤베르크의 제2 비인 악파 중간에 위치한다. 그의 음악은 양식이나 소재 면에 있어서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에는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양식의 새로움은 언제나 중요한 판단기준이기는 하지만, 양식적으로 첨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작품이 뛰어나라는 법은 없다. 그는 양식적인 보수와 진보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여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물찾아 헤매는 사람]같은 작품은 그 둘의 완벽한 균형을 이룬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쇤베르크도 그를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했으며 미국 망명 시절에 대학에서 작곡 수업을 할 때는 슈레커의 작품을 많이 인용하곤 했다. 쇤베르크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도 슈레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슈레커에게서 영향을 받은 작곡가는 베르크 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사로서,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그의 제자라는 것은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작곡가라는 것을 뜻했다. 그의 제자 중 베르톨트 골트슈미트(Bertold Goldschmidt; 1903-1996)는 최근에 특히 망명지인 영국에서 각광받았던 작곡가인데, 정작 자신은 슈레커나 쇤베르크의 영향보다 부조니와 바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그의 첫 오페라 [폭력적인 기둥서방]은 1932년에 초연되어 많은 갈채를 받았으나, 불과 몇 달 뒤에 상연금지되었다. 유태인인 그는 독일을 떠날 것을 강요당하여 1935년 영국으로 이주한다. 거기서 골트슈미트는 작곡가, 지휘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의 초기 작품 중 주목할만한 것은 베를린 음대에서 슈레커 문하에 있을 때 졸업 작품으로 작곡한 [파사칼리아, op.4](1925)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국가에서 수여하는 '멘델스존 상'을 수상했으며 에리히 클라이버에 의해 훌륭하게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거의 70년 동안이나 유실된 것으로 여겨졌다가 1994년에야 오스트리아의 악보 출판사인 우니베르잘 에디찌온(Universal Edition)의 서고에서 발견되었고, 이듬해 사이먼 래틀에 의해 최초로 녹음되었다. 요즘 그에게 쏟아지는 재조명의 불빛을 보면 독일에서 쫒겨난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듯 하다. 골트슈미트는 몇 년 전에 타계했는데, 생전에 자신에 대한 온당한 재평가 작업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다행스런 일이다.

에른스트 크셰녝(Ernst K enek;1900-1991)은 어렸을 때부터 슈레커에게서 배웠으며 슈레커가 베를린으로 옮겼을 때에도 그를 따라갔다. 재미있는 사실은 골트슈미트나 크세녝, 그로쯔, 알로이스 하바(Alois H ba) 등 슈레커의 제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어법을 스승의 영향에 의해서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승의 세기말적 경향이나 후기 낭만주의보다는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 바르톡의 완전히 새로운 음악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인격자였던 슈레커는 자신의 방식을 제자들에게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크셰녝은 1920년대에만 무려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해낸다. 그런데 1번 교향곡은 구조를  파악하기 힘든 철저한 무조음악인데 반해 2번은 그보다는 정합적이고 3번은 더 조성적이다. 2번 교향곡은 말러의 딸이자 크셰녝의 아내인 안나에게 헌정되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오페라 [죠니, 연주하다]에 의해서이다. 이 작품의 음악은 재즈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가 재즈 연주가를 다룬 것이다. 주인공인 '죠니'는 불쾌할 정도로 못생긴 흑인 혼혈아로서 색소폰 연주자이며 연미복 옷깃에 다윗의 별(나찌 치하에서 모든 유태인이 달고 다녀야 했던 표시)을 달고 있다. 이러한 캐릭터는 당연히 나찌의 혐오감을 사서 즉시 공연금지 조치를 당했고, 퇴폐음악의 극치라고 낙인찍혔다. 이후에 크셰녝은 쇤베르크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 오페라는 유럽 전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빅토르 울만(Viktor Ullmann;1898-1944)의 오페라 [아틀란티스의 황제]도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 이 작품은 테레찐 게토에서 작곡되었고 게토 내에서 상연하기 위해 리허설도 했는데, 주인공의 수염이 히틀러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금지당한 것이다.

결국 1944년 8월 16일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후 그를 본 사람은 없었고, 후에 발견된 황제의 마지막 아리아는 아우슈비츠 이송자 명단의 뒷면에 쓰여져 있었다. 이 날은 테레찐 게토에서 연주활동을 했던 많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사라진 날이다. 같은 해에 태어났고 매력적인 현악 4중주를 작곡했던 파벨 하스(Pavel Haas;1899-1944)와 한스 크라자(Hans Kr sa)도 같은 날 아우슈비츠의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많은 작곡가와 연주가, 교사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의 음악계는 중흥을 이루었지만, 특히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가져다 준 공백이 완전히 메워진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에 바탕을 둔 발터 브라운펠스(Walter Braunfels)의 오페라 [새]같은 경우는 브루노 발터에 의해 화려하게 초연되었고, 음악학자 알버트 아인쉬타인에 의해 여태까지의 독일 오페라 중 최고라는 평을 받았으나 전후에는 1970년과 91년에 단 두 번 공연되었을 뿐이다. 유태인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가장 독일적인 작곡가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엔트아르테테 무직'이라는 말로 대신되는 사건은 독일의 과거에 속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현재에 비추어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이 슬픈 역사는 우리에게 지워진 것이기도 하며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예술을 정치적, 인종적인 이유로 탄압하는 것이, 아니 단지 제재나 검열이라도 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문제는 어떤 작품이 실제로 타락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결코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한 판단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한 시대에도 선동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고, 막강한 권력에 의해 그러한 판단이 내려졌을 때는 거부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식의 낙인으로든 예술에 대해 예술 외적인 제재가 가해진다는 대책 없는 사실과, 정치적 영역이 어떠한 다른 영역에도 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니는 폭력성이다. 인류는 이러한 역사를 완전히 잊을 수 있는가? 이 작곡가들과 작품들을 되돌아보는 것은 그들이 단지 역사적인, 음악사적인 의의를 지니기 때문인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작품은 화석화되고 죽은 수집품일 수 밖에 없다. 그 작품들은 지금도 어느 작품들 못지 않게 들을만한 것이며, 그 가치는 음악적으로도 하나의 잣대로 재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수많은 작곡가들의 개성은 그 자체가 생명력이다. 따라서 출판사의 서고를 뒤지고 다 헤진 이면지에 쓰여진 악보를 복원해내려는 노력은 과거를 발굴하고 보존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금'을 살려내려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라는 말로 그 음악 작품들에 대한 조명에 설득력을 실으려 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역시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에 대한 조명은 나찌의 역사까지도 온전히 인간의 과거로서 떠안아야 할 후손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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