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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카프카와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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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6-12-10 19:37 조회3,208

본문

I.

">>어 허 참<<, 쥐는 말했다, >>세상은 매일 좁아지고 있어. 처음엔 넓었는데 말이야, 그래 내 길 잃을까 두려워 했었거든. 난 계속 달렸어 그리고 마침내 멀리 좌우로 담벼락들을 보았을 땐 행복했지, 허나 이 긴 담벼락들이 놀라운 속도로 합쳐지더니 내가 어느새 마지막 방에 있는게야, 그리고 저쪽 한 구석에 덫이 놓여 있어, 내가 달리는 방향에 말이야.<< - >>너는 단지 그 달리는 방향을 바꿔야만 해<<, 고양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 쥐를 잡아 먹었다."

(번역: 서동철)

II.

카프카가 1920년에 끄적거린 글이다.
쥐의 운명은 어찌 보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비극적 종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한 예를, 그것도 삶의 아이러니한 면을 비극적인 색깔로 그렸다고나 할까? 쥐의 죽음을 휘어지기 보다는 딱 하고 뿌러지는 맛을 풍기는 삶의 비극적인 종말이라고 느끼기에는 뭐인가 분명 빠져 있다. 하기사 비극적인 감정을 유발시키기에 이야기의 길이가 너무 짧다. 그리고 하찮은 쥐새끼의 죽음에 비극적이라는 외투를 걸치기가 쪼께 우습기도 하다. 우화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오히려 이는 삶의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계속 달리자니 덫에 걸리고, 방향을 틀자니 고양이한테 잡히니, 쥐는 이래 저래 죽을 운명이었다.

그럼 이는 고종명이 왜 오복 중의 하나인가 제대로 알아라 하는 카프카의 가르침인가? 이와 연관이 전혀 없다 하자니 쪼께 껄끄럽다만, 그렇다고 그렇다 하자니 남세스럽다. 고종명이 오복 중의 하나임은 위에서 카프카가 우리한테 말하고하는 바의 단순 논리적 결과일 뿐 이 양반의 직접적 가르침이 아니라 보이니 말이다. 카프카는 오히려 삶의 불가능성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을까? 단지 이러한 엄청 비극적인 주제를 짧은 우화의 형식을 통해 전달하다 보니 그 비극적 면이 졸지에 아이러니로 포장이 되어 버렸고, 특히 마지막 고양이의 말에 이 우화의 그림에 최고의 획을 그은 듯하다.

"너는 단지 그 달리는 방향을 바꿔야만 해."

그런데 왜 삶이 불가능한가? 이런 질문, 카프카는 이러한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설명조의 글은 그와 거리가 꽤나 멀다. 카프카 언어의 특색은 오히려 펼쳐 보이는, 서술조의 글이다. 그냥 보여준다. 나아가 쥐가 누구이고 고양이가 누구이고 덫이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는 질문보다는 이러한 우화 속의 요소들이 이 우화라는 특정 형식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곰곰 곱씹어 보며 중환자 다루듯 세심한 마음으로 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또 이게 카프카와 사귀는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닌가 싶다.

III.

쥐의 일생을 아주 짤막하게 서술한 이야기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 하다 끝맺는 쥐생이라 뭐 굳이 덧붙일 말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짤막함의 폭력 속에 그래도 한 가닥 쨍하니 비치는 눈부심이 있다면 바로 마지막 문장이다. 위에서 재차 인용한 고양이의 그 말은 이론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는 해결책이나 쥐로서는 실천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 말 뒤에 그려졌듯 고양이가 곧바로 잡아 먹으니 말이다.

어쩌면 쥐는 태어나 겪었던 세상의 넓음에 불안을 느꼈을 수도 있으리라. 다행히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세상은 쥐에게 점차 좁아졌으며 결국 자신의 불안이 사라질 정도로 좁아진 바로 그 순간 쥐는 자기가 피할 수 없는 앞길에 덫이 놓여 있음을 발견하다. 이 상황에서 오로지 남은 대안이라면, 고양이가 말하듯, 가는 방향을 바꾸는 것인데, 이 마저 고양이란 화상이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한 셈이다.

그럼 쥐는 그렇다치고 고양이는 어떠한가? 완전 야비할 정도로 이율배반적 잡것이다. 쥐한테 탈출구에 대한 도움의 말을 줌과 동시에 그대로 잡아 먹는 모습 말이다. 마치 악덕 자본가다운 모습이라 하면 지나친가? 너희들 노동자들아, 굶어 죽기 싫으면 나한테 올 수 밖에 더 있냐 니들 꼬락서니에 하며 결국은 죽도록 착취하는 그런 모습, 지나친 해석은 아닌 듯도 하다.

허나 내게 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으로 닥아오는 점은 삶의 본질이 거개의 합리주의자들이 외치는 그런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삶의 본질 자체가 비합리적일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카프카 나름대로 삶을 바라보는 이러한 안목을 뒷받침하는 증명에서 이 고양이가 차지하는 위치는 거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띈다는 점이다. 어쨌든 고양이가 있기에 우화가 우화다운 냄새를 피운다. 우화의 번뜩이는 칼날이 서 있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바로 고양이가 떠맡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짤막한 글에 대해 이렇게 그 일곱 배 이상의 길이로 횡설수설했으면 실컷 우려먹은 셈이다. 그런데, 해 놓고 보니 카프카 글의 그 짤막함이 흔껏 자아내는 무지막지한 아스라한 힘이 사라진 느낌이 엄습한다. 자고로 어물장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했거늘...

Dazu:

Er
카프카의 "Kleine Fabel"이군요. 원래는 제목이 없지만...
제가 참 좋아하는 단편입니다. 저역시 이거 읽고나서 카프카의 한두페이지짜리 짤막짤막한 단편들이 주는 매력에 푹 파질 수 있었습니다. 카프카가 장자를 참 좋아했다고 하죠?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이야기에는 쥐, 말, 독수리, 벌레, 심지어는 무슨 실패처럼 생겨먹은 해괴망측한 오드라덱에 이르기까지 별의 별 동물들이 다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설명조의 글은 그와 거리가 꽤나 멀다. 카프카 언어의 특색은 오히려 펼쳐 보이는, 서술조의 글이다. 그냥 보여준다."

위에 쓰신 이 말이 참 공감이 많이 갑니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언젠가 말하길, 카프카의 작품이 심오하고 의미심장하게 비춰지는 이유는 그 이면에 어떤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가장 유사한 방식인 '설명이 배제된 그냥 보여주기'로 감상자에게 다가오는 거죠. 이런 면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문학보다도 오히려 영화적 형식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Ich
Kafka를 좋아하시는 듯하니 더 반갑네요.
제가 종종, 아니 거의 언제나 되뇌이는 이 양반의 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술은 어둡고 빈 공간에서 그 어떠한 사전 지식 없이 한 강한 빛줄기를 잡아 낼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주어진 처지에 아랑곳 없이 절대 소진되어 버리지 않는다는 예술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이지요.

예술의 기능성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도 보이고요. 과제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철학이 할 수 없는 그런 일, 즉 카프카가 말하듯 어두운 공간에서 (철학이라는 수단으로는) 인지할 수 없었던 한 빛을 강렬하게 낚아챌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일 말입니다. 예술이 그 빛이다라는 소리가 아니라 예술로써 그 빛을 낚아챌 수 있다는 말, 삶이 곧 예술이다 하는 자의 마음을 엿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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