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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색의 광신자 '세잔'(1839-1906)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예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5,894회 작성일 02-03-10 07:59

본문

작성일 : 2000/03/11조회수 : 171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은 폴 세잔(Paul Cezanne)의 수수께끼 같은 후기작품을 만나게 된다.동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조롱했던 이 천재적인 화가는 놀랍게도 많은 미완성 작품을 남겼다.


1899년 폴 세잔이 화랑주인 Ambroise Vollard를 그린 한 초상화는 이렇게 고집스럽게 중지되었다. 세잔은 이 초상의 모델을 노란색과 갈색의 유화반점으로 마치 서있는 기념비 같이 그리고,그 우아한(?)모습에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얼룩을 가득 찍었다.더군다나 신기한건,화랑주인 Vollard는 이렇게 그려진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했다.이런 칭찬은 당시 60세이던 세잔이 자주 듣는 그런게 아니었다.단지 이 화랑주인은 한가지 작은 불만이 있었는데,그건"그림의 위쪽에 아주 작은 두개의 점(캔버스의 색이 칠해지지 않은 부분을 말함)이 있어 그 틈사이로 약하게 빛이 새어든다." 는
것이었다.

그 그림은 사실 세잔에겐 흠잡을데 없는 완벽한 것이었으나,그는 화랑주인에게 그 부분에 맞는 적당한 색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 조금 기다려 달라고 달랠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후 세잔은 그 초상화를 무언가 적절하지 않은것으로 괜히 손을 대서 볼품없게 만들수도 있으니,새로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말했다.

세잔 역시 누구못지 않은 완벽주의자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많은 작품들이 예를들면 위와 같은 이유로 미완성으로 남았다.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지금까지 이래저래 많은 추측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 프랑스의 천재화가는 자신의 그림들을 끝까지 완성하고 싶지 않았던걸까? 아니면 완성할수 없었던걸까?

지금 빈의 전시회가 관심을 가지는 하나의 불가사의,그것도 아주 거창한 표현으로 "세잔:완성-미완성" 대체로 화가의 후기작품인 80점의 유화와 30점의 수채화. 이 작품들은 약 1,050,000,000,000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보험에 들어있다. 이 예술가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슈퍼스타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최대의 방문자 기록을 낼 것을 전시회 개최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최소 300,000명에 달하는 팬들이 성지순례를 하듯 빈으로 몰려가게 되는 것이다.오스트리아의 방송.언론들은 기대되고 있는"세잔에게로 수많은 사람들의 쇄도"를 위해 벌써 몇주 전부터 축제가 벌어졌다.

지금날 이토록 대중의 사랑을 듬뿍받고 있는 이 화가는, 살아생전에는 한마디로 미운오리새끼 신세였다.1839년 프로방스에서 태어난 그는 대부분의 생애 동안 사람들로 부터 조롱을 받았다.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마치 미치광이 처럼 비쳤던 그는 일관성있게 모든 전통과 케케묵은 독단에 대항해 그림을 그려 나갔다.

예를 들면,색깔은 엷고 은은해야 하고,부드러운 붓의 선과선 사이의 연결은 어느 정도 볼 수 없는듯 해야하며,그리고 피부 부분은 항상 파리한 듯한 살색으로 그려야 한다 등등과 같은 기존의 고정관념 ..

그러나,세잔은 색의 열광자이자,신비주의자였다. 그의 신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우리 모두는 태양의 추억이며, 세상의 뇌막에서 타오르는 듯한 소량의 형광체이다." 그리고 그는 색은 뇌와 우주가 함께 만나는 바로 그 곳에 있다고 믿었다.

단지 그 만이 `확실한 빨간색으로 그림을 그릴수 있는?정열을 가졌다고 자신의 색에 대한 감각을 그는 자랑스러워 했다.그의 그림이 풍경을 나타내든 인물을 나타내든,무엇보다 충분한 숙고를 거쳐 만들어낸 순수한 색의 폭발.그의 그림들은 바로 그랬다.

이 영원한 반란자는 그림을 바라보는 기존의 모든 관례를 뒤죽박죽 만들어 버렸다. 그의 그림속 공간들은 한번도 깊은적이 없으며,원근법에 굳이 따르지 않고 작품을 만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들은 놀랍도록 입체적인 인상을 준다. 세잔은 이 세상을 그대로 그리는게 아니라,하나의 감동적인 새로운 현실을 설계하는 듯이 보였다. 거기에 그는 헝클어진 듯한 분위기를 불어 넣었다.다채롭고 때로는 그늘없는 우수...

그와 친분을 가졌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짧은 순간의 일시적인 감동을 추구했던 반면, 세잔은 매순간들의 힘겨운 지속을 영원화시키길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훌륭하게 해냈다. 은행업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차라리 자신의 금융기관에 고용시킬 수도 있었다.세잔 또한 법학도로서의 생활을 중지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까지 몇 년 간 그것을 망설였다.

그는 화가로서 성실하게 성장해 나갔다. 파리의 그림수업을 받고, 르브르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화가들에 대해 공부했다.그리고는 실패만 거듭한 채 그는 있었다. 예술학교는 그를 쫓아냈고,20년 동안이나 전시실에 일자리를 구하려고 애를 썼다. 한번은 명성있는 미술진흥 판매쇼의 한 회원이 세잔을 자신의 학생이라 칭하고는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해서 오직 한번 그는 자신의 몇가지 작품을 팔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단지 그의 이름이 나오자 마자, 그 곳의 평론가들은 비방해대기 시작했고, 세잔이 등에 자신의 그림들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것 같다"고 조소했다.

그는 그들에게 병든 눈과 신경과민적 지각능력을 가진 괴짜로 여겨졌다. 그들은 그의 그림에 대해
"너무 잘 그리려고 노력한 나머지,지나치게 노랗다."고 비방했다.그렇게 비예술적으로 여겨졌던 그의 그림을 당연히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은 그의 애인과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을 먹여 살리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세잔은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그의 가족에게 돈이 부족하고, 자신이 가정을 꾸린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의 소년시절 부터의 친구인 작가 에밀 졸라는 세잔에게 번번히 돈을 슬쩍 찔러넣어 주어야만 했다.그러나 그 사심없는 행동은 나중에 그들의 우정을 깨뜨리고 말았다. 졸라는 그의 작가로서의 성공에 비례해 편협하고 고루한 속물로 변했다고 세잔은 생각했다.그러나 졸라는 인생의 낙오자인 화가, 더군다나 그림에 미쳐서 오직 그것에만 매달리면서도 한번도 자신의 그림 위에 훌륭한 피날레를 장식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그에 대해 화가 났다.

1886년 세잔이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고 재정적으로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그는 이 친구를 결정적으로 멀리하게 되었다.그 얼마 전엔 졸라의 문학적인 측면공격이 책으로 출간되었다.그 소설은 자신의 실패를 인식한 어느 화가의 비극과 결국 나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세잔은 몹시 격노했다.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 만들어진 인물이라 여겼다.세잔 또한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자신의 미술과 불명예스운 예술가 생활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그렇다고 결코 세상에 이별을 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졸라는 세잔의 재능을 전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목을 끄는 미술이 선호되고 있고, 그에 반해 세잔은 혁명적인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세잔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멍청이들의 경탄을 받기 위해 작품을 완성하고 싶지는 않다."고 썼다.그리고 그는,그런 그림들은 기계적인 능력의 결과로 생기고, 그것은 또 개개의 작품을 흔해 빠진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했다. 다시말해 그는 더 거대한 완성을 위해 노력했고,자신이 진정한 자기자신으로서 설 때,그림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의 관심사는 아무래도   `무엇을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하는가?에 있는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수년에 걸쳐 그 한가지 `그림의 표면을 평평하게' 묘사하는 모티브를 여러가지로 변형시켰다.한번은 목욕하는 사람이 있는 풍경, 또 한번은 목욕하는 사람이 없는 풍경 그리고 정물화... 그러나 그것의 대담한 효과는 그 당시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었다.

그는 매번 사랑하지도 않는 그의 오랜 애인을 그렸다.그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은채 17동안을 함께 산 후에야 결혼을 하게 됐다.그는 가능한한 그녀로 부터 몇킬로는 떨어진 곳에 살기 원했고,그의 부인은 단지 그에게 모델의 자격으로만 환영받았다.그녀는 힘겹게 오랜시간 앉아있어야 하는 고달픔을 잘 견뎌냈고,항상 천천히 작업을 하는 남편의 뜻을 받아들였다.

미술 자체가 이 주관이 뚜렷한 괴짜에게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하나의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그림을 그릴때 그는 마치 열반에 이른듯 빠져 들었다.그는 생동하고,그림과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일종의 종잡을수 없는 혼돈이다."

분명히 그가 그림을 그릴때는 유쾌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왜 그는 번번히 그림그리기를 예정보다 빠르게 단념했던걸까? 1895년에 그린 정물화에는 마치 커텐같기도 하고,색을 마저 다 칠하지 않은것 같기도한  부분이 남아있다. 그러한 미처 다 그리지 못한 듯한 그림들을 그는 마치 그것들이 가치높은 완벽한 작품이 되기위한 준비단계에 있는 것처럼,혹은 모든 미술작품 중의 진수였던 것처럼 보관해 두었다.

폴 세잔은 애당초 완성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었다: 캔버스가 1밀리미터의 빈틈도 없이 꼼꼼하게 색칠되어졌을때를 `완성?이라 그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색칠되어지지 않은 부분도 그림의 한 존속부분으로 여겼다. 그는 비쳐 보이는 듯한 수채화에 매혹되었고,유화그림에도 수채화처럼 밝게 초벌칠을 해서 붓칠사이의 틈이 비쳐 보이게 했다.

판에 박힌 그림그리기에 대한 저항,그리고 피카소를 비롯한 많은 현대 화가들이 경탄해 마지 않는 그의 색에 대한 정열은,훗날 많은 예술가들의 실험정신을 고취시켰다.

미완성(?)작품의 대가 세잔은 그렇게 20세기초 미술의 커다란 근본적인 변혁들을 시작했다.그 당시 늙은 야만인으로 여겨지던 이 예술가는 사실은 최초의 전위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잔이 죽기 11년전인 1895년에 한 미술평론가가 "완성한"이라는 이 위선적인 수식어구는 단지 돈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기 원하는 장사꾼과 투기꾼들의 탐욕과 유사어 일 뿐이다."라고 세잔의 작품을 인정했다.



김예일 yeilki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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