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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몸뚱이, 그리고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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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12-28 18:17 조회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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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뚱아리 말이다.
이거 없을 수 없을까? 가끔씩 귀찮을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야 당근 짤라버리고 싶은 심정도 일어난다만, 그렇게 처음부터 충격적으로 말 꺼낼 필요는 없고, 예를 들어 피곤할 때 종종 그런 귀차니즘이 발생한다. 더군다나 피곤에도 불구 일을 더 하고 싶을 땐 이 놈의 몸뚱이 귀찮아 죽겄다. 아니면 배 고플 때, 꼭 뭔가를 먹고 마셔야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있으니 이 얼마나 귀찮은 잡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정신의 새끼를 까기 위해 하루 한 시간 일분 일초를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이에겐 진짜 욕 튀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에 몸뚱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는가? 시간 없다는 넘이 별 시답지 않은 소리 해싸며 그 귀중한 시간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내팽개쳐 버리고 있냐며 탓하는 소리에 벌써 귀가 무쟈게 간지럽다. 에이 이 화상들아, 내가 걸 왜 몰겄냐, 그리 몸뚱이 가꼬 욕하면 세상 삼척동자도 웃겄다 싶으면 저 사람 근디 알만한 양반이 왜 새삼스럽게 그 소릴 꺼내냐 해야 제대로 된 질타 아니겄냐? 젠장할...

몸뚱이를 가진 존재라 함은 불완전한 존재를 말한다. 당장 우리가 품고 있는 가지 각종의 욕구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예컨대 속에 웅크리고 있는 바를 밖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말이다. 거의 본능적이다. 이에 반해 완전한 절대자인 신은 정녕코 이러한 우리의 욕구를 품고 있지 않으리라. 일단 부럽다는 생각이 퍼뜩 들기는 든다만, 대신 욕구가 없으니 이게 충족되었을 때 우리가 만끽할 수 있는 기쁨의 맛을 신은 모를 게다 싶으니 쌤쌤이다 싶다. 바로 이러한 충족의 기쁨을 우리는 예술을 통해 만끽할 수 있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말이다.

나아가 이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눈에 보이는 겉으로 나타나는 성장 외에 또한 자기 자신에게로 조금씩 조금씩 접근하는,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알게되는, 이와 더불어 자신이 속해 있는 주변 세계에 대한 이해 또한 점차 늘리는 그런 정신적 성장 또한 우리는 겪는다. 바로 몸뚱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예술을 통해서 말이다.

육체성이라는 한계가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자기 성찰은 숙명적으로 불가능하나 그럼에도 불구,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웅큼씩 자기 자신과 이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앎을 넓히고 깊히는 끊임없는 과정으로서의 생을 이끔이 바로 인간적 생이 아닐까? 이러한 육체성이라는 한계의 한 가운데에 우리의 소중한 느낌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불쑥 솟구쳐 끄적거려봤다. 기계나 미디어에 없는 뭐 그런 것 말이다.

나아가 이러한 조금씩 한웅큼씩의 성장에 대한 필요 내지는 욕구와 이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 내지는 만족감에 대해 곱씹어 봄이 또한 느낌의 철학이 다루는 절대절명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숙명적 과제다. 오호라, 이는 어쩌면 신의 선물일지도... 왜냐하면 예컨대 아직 말은 하지 못하나 서서 걸을 수 있는 아이가 처음으로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몸을 요목조목, 뒤로도 옆으로도 지켜 보며 자신의 자그마한 모습을 거울을 통해 조금은 더 많이 보게(알게) 되었을 때 환하게 웃음짓는 그 천진난만함 또한 자기 성장의 기쁨을 만끽하는 한 순수한 형태라는 믿음이 갑자기 엄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몸뚱아리 팔자라고 너무 신세 타령 조상 탓 하지 말그라.

하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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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서동철님의 댓글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사실 이 글이 분류상 쟁토방에 어울릴 듯도 합니다만 바로 밑에 무울의 글에 붙인 쪽글에서 몸뚱이에 대한 말씀을
드렸기에  그냥 이 자게방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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