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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넋두리)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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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12-28 16:51 조회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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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뵌 적이 없고 그저 넷 상으로 뵙는 지도 고작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침 저녁으로 걷는 산책길에서 님들 생각을 자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많은 물리적 양의 축적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물리법칙이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유일한 예외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단박에 변해 버리거든요.

마음이 ‘정신적 상태의 총체’ 이라면 누군가가 그 어원이 ‘진정한 씨앗’ 고 귀띔해
준 것이 틀리지 않는 것 같군요.
그 씨앗을 뿌리고 또 거둘 것에 대한 기대감과
마침내 거두어 들이는 것을 보는 것,
그 전 과정을 지키는 일… 그 것을 빼앗기지 않은 일…
평생을 두고 지켜내야 하는 과제로 보입니다.

오늘은 ‘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비 오는 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뮨스터에 와서 부터 비가 싫어지기 시작했지만…)
하늘에서 무엇인가 내리기만 하면 싱숭생숭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제 한 친구는
비만 오면 불러 내어 술 먹자 조릅니다. 그 친구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지만
저는 그저 눈을 감고 혹 기댈 곳이라도 있으면 주저 앉아 얼핏 졸음이 겨울 무렵까지만
기다리면 그만입니다.
그리곤 동시에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웃집 누런 황소 말입니다.
우리 집 낮은 담 너머 이웃집에서는 딱 한 마리 황소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선 아버지가 새벽 5시에 교회 새벽 종을 치러 나오고
그 집에선 나 보다 한 살 더 먹은 사내아이가 자기 보다 몇 배나 큰
누렁이 황소를 끌고 나옵니다.
아버지가 종탑 한가운데 달려 있는 종 줄을 당기기 시작하면
나는 그 길다랗고 튼튼한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딸려 올라갔다 다시 내려 오는 그 놀이를 하기 위해 새벽 같이 일어 나는데
그 아인 황소 꼴을 먹이러 새벽 같이 일어납니다.
종치는 일은 겨우 오분남짓에 끝나지만 그 아인 학교 가기 전까지 소를 데리고
꼴을 먹이러 다니니까 상당히 긴 시간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와 꼼지락 거리며 그 아일 생각합니다.
어느 날부터 인지 나는 새벽 종치기가 끝나면 방으로 들어가는 척 하면서
아버지 모르게 그 아이를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조금 더 커서 생각해 보니
순수함에서 비롯된 동정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새벽잠이 없었던 나는 소 꼴 먹이러 따라 다니는 일이 참 신나는 일이었고
새벽잠이 많던 그 아이는 죽기보다도 싫은 것처럼 이를 바득바득 가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었습니다.
새벽, 찬 이슬 속에 발을 적시며 코뚜레를 꿰어 들로 산으로 그 홀쭉해진 누렁이 배가
빵빵하게 불러 오를 때까지 돌아다녀야만 했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만은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늦게 까지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스레트 지붕을 시원스럽게도 내려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도 늦잠을 잘 수도 있었고 무쇠 솥에서 퍼져 나오는 아침 밥 내음도
실컷 맡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제가 오늘 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던 생각이 떠오른 것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집 안방 창문 앞, 하이쭝 위에 일년 전부터 선물로 받아 키우고 있던 이름도 모르는
작은 식물이 있었습니다. 일년 동안 그럭저럭 잘 크는 구나 싶었는데
한달 전쯤부터 보기 흉하게 바싹 말라버려서 미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밖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라고 창틀 앞에 내 놓았던 식물이니
이제 보일 이유가 없게 되어 곧장 쓰레기통에 버릴까 하다
며칠 전 현관 문 열자 마자 화단이 있는 곳에 던져 두듯 내어 놓았드랬습니다.

그런데 어제 밖에서 들어오면서 언뜻 본 그 작은 화분에서
‘세상에나’……
연두 빛 잎사귀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나’……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그 새순을, 그리고 물 먹어 막 되살아나고 있는
줄기와 잎들을 보았습니다.

‘한 번의 비’가 이렇게 그 생명을 지켜내고 그 본질로 되돌아가게 하다니…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조심스레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생각은 가지를 쳐나갔습니다.
언젠가 생태학 잡지에서 읽었던가 싶은데 식물은 심하게 가뭄이 들면 그것의
모든 기관을 잔뜩 움츠리고 최소한의 생명작용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성장활동을
멈춰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엔 그것이 마치 시들어 죽어버린 것처럼
보여지고요. 식물의 지혜를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시 비가 내려 뿌리를 적시면 식물들은, 나무들은 당장에 그들이 본성을
회복하는 숨막히는 생명활동을 재개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서야 한 가지 話頭가 술술 풀려나갔습니다.
‘삶이란 살아내기야… 요즘은 증말 살아내고 있는 것 같아…’  하던 친구의 글귀가
내내 머리를 짓눌렀었는데 단 한번의 비로 저렇게 나무 스스로의 모습을 되찾는 것을
보고 비로소 홀가분하게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식물 스스로는 비에 의해서 그 본 모습을 되찾긴 했지만 식물의 그 지혜로움은
소극성이라는 의혹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돌파구조차 보이지 않는 문제투성이,
풀 수 없는 문제들,
대책 없는 의제들,
답이 없는 고민들을 요즘 많이 ‘話頭’ 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화두는 논리적으로 연역적으로 귀납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틀고 앉아서 참구하여서 그 문제들을 직접 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문득 깨달은 나로 바뀌게 하여 그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문득 우리가 바뀌어야 풀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화두입니다.

顿悟(돈오)를 바라고  漸修(점수)하며, 논리보다 직관으로,
추리력보다 상상력으로 접근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화두를 잡는 이는 ‘(점수하여) 나를 들여다보려는 (상상력의) 예술가’
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나무의 지혜로움을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 보면서


새해엔 그 화두를 잡아내는 예술가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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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님의 댓글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전 서울서 태어나 서울서 자라 그런가 님과 같은 어린 시절 얘기 들으면, 뭐라 그럴까, 동화책에 나오는 한 폭의 그림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아름다운 말씀 고맙게 들었습니다.

단지 님의 뜻과는 조금은 다른 맥락에서 그래도 고개를 쭈뼛해보면,
전 깨달음의 한 방법으로서 돈오보다는 점수를 선호합니다. 아니 선호한다기 보다는 돈오 자체가 우리 현세의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우리는 먹고 마심을 벗어날 수 없는 한 몸뚱이에 묶인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이에 이 몸뚱이에 대한 보다 더 철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돈오는 이러한 묶임에서 풀렸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깨달음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다시 말씀 드리면 점수를 통한 깨달음으로써 몸뚱이에 묶여 있음에서 점차로 풀려 난 후에야 돈오를 부를 수 있다는 어줍잖은 제 생각입니다. 그래 흔히들 얘기하는 '구년면벽'이니 '단박에 깨침'이니 하는 소릴 들을 때마다 전 애써 무시하려 합니다.

몸뚱이에 대한 글 바로 위에 따로 올리렵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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