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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가브리엘레 뮌터와 칸딘스키

페이지 정보

작성자 narani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5,284회 작성일 02-03-10 07:19

본문

작성일 : 1999/04/13 조회수 : 138



가브리엘레 뮌터와 칸딘스키



한국에서는 칸딘스키의 연인으로 그리고 그 또한 그림을 그렸다고 밖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uenter)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한 건 독일에 와서였다. 뮌터가 없었다면 칸딘스키도 지금의 위대한 화가가 되지 못했을거라고 할만큼 그가 칸딘스키에게 끼친 영향이 큰 것은 물론이고 작품 또한 주목할만 한데도 한국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게 왠지 아쉬워 간단하게나마 글을 써보고자 한다. 물론 내가 어느 작가나 작품에 감동하는가는 상당히 주관적이라는건 미리 인정한다.



Wassily Kandinsky, Bildnis Gabriele Muenter, 1905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뮌헨으로 그림을 배우러 왔던 칸딘스키는 후에 그가 직접 차린 화실에서 학생인 가브리엘레 뮌터를 1902년에 처음 만났다. 당시 뮌터는 25세였고 칸딘스키는 36세였다. 칸딘스키가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비밀스러운 관계로 6년 이상을 보내게 된다. 그후 그들은 뮌헨 근처 무르나우(Murnau)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조금은 외떨어진 그들의 집을 동네 사람들은 '러시아인의 집(Russenhaus)'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당시 결혼한 남자와 함께 사는 미혼의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또한 '창녀의 집(Hurenhaus)'이라고도 불렀다.(오른쪽: 칸딘스키, "뮌터 초상화", 1905)



Gabriele Muenter, Hof mit Waesche, 1909 1908년부터 뮌터는 화려한 색을 가지고 여러 화풍을 시도하기 시작했고(당시에는 검은색 또는 갈색을 위주로 하는 무거운 화풍이 인정받는 시대였다), 그 화풍이 안정된 이후로는 이를 끝까지 유지했다. 하지만 새로운 걸 시도하기를 좋아하던 가브리엘레 뮌터는 '유리 뒤에 그리는 그림(Hinterglasmalerei)'에 몰입하기도 했고, 칸딘스키 뿐만 아니라 프란츠 막(Franz Marc), 아우구스트 막케(August Macke)까지 그 작업에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게 만든다. 그리고 액자에까지 그림을 그리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왼쪽: 가브리엘레 뮌터. 빨래 널린 마당, 1909)



뮌터와 칸딘스키에게는 음악 또한 중요한 요소였으며 프란츠 막을 알게 된 것도 작곡가 아르놀드 쇤베르크를 통해서였다. 그들은 직접 그린 엽서를 주고 받으면서 더욱 친근한 관계를 이루었고 그들 간의 공통점이 청기사파를 탄생시키게 된다. 무르나우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성 게오르그(말을 타고 용을 죽였던 전설의 기사) 그림이나 조각에 칸딘스키는 깊이 감동했으며 그로 인해 기사와 말에 대한 모티브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러시아인의 집' 계단에 그려놓은 기사 그림은 지금까지도 좋은 구경거리다. 칸딘스키가 말에 유난히 애정을 느꼈던 프란츠 막과 만나 자신들의 정기 간행 잡지의 제목을 '청기사(Der blaue Reiter)'라고 한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Gabriele Muenter, Mann am Tisch(Kandinsky), 1911 칸딘스키는 자신이 미술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며 그 후 몇 년 동안 그 방향을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자신의 작품에서 대상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고 대상을 없애기 시작했는데 1910년부터 그 특징이 구체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이미 구상화를 완전히 벗어난 화풍이 나타나게 된다. 그는 '러시아인의 집'에서 추상화를 발전시킴으로써 뮌터와는 완전히 다른 화풍을 지니게 된다. 그들이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였을때 칸딘스키는 뮌터에게 "너에겐 아무 것도 가르쳐줄 수가 없어. 넌 천부적으로 모든 걸 타고 났거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뮌터에게 쓴 마지막 편지 중 하나에서도 "난 처음부터 너의 재능을 사랑했었어.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게 될거야. 아마도 네 재능이 어느정도인지 알아보는 사람은 나뿐인것 같군"이라고 썼다.(오른쪽: 가브리엘레 뮌터, 책상 곁의 남자(칸딘스키), 1911)



1차대전으로 인해 이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칸딘스키는 다시 만나면 결혼할것을 재차 강조하며 러시아로 떠났고 뮌터는 서로 만나고 싶을때 쉽게 만날 수 있도록 스웨덴으로 떠났다. 러시아와 독일이 적대적이던 당시 정세 때문에 칸딘스키가 독일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난 지 몇달 지나지 않아 칸딘스키는 다른 사람과 재혼해 아이까지 가졌고 뮌터는 칸딘스키로부터 연락이 끊겨 아무 것도 모른채 스웨덴에서 걱정스럽게 기다렸다. 칸딘스키가 뮌터에게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칸딘스키는 뮌터의 재능을 사랑했었고 함께 살면서 뮌터로부터 받는 영감을 통해 자신의 그림을 발전시키기는 했지만, 정작 뮌터를 결혼할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4년, 한 친구를 통해 칸딘스키의 소식을 듣게 된 뮌터는 커다란 실망을 안고 '러시아인의 집'으로 돌아온다.



명성과 돈과 가정을 모두 갖춘 칸딘스키의 화려한 말년을 보며 뮌터는 1962년 죽을 때까지 40여년을 그에 대한 애증을 간직한채 혼자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래도 제3제국 때 칸딘스키의 작품을 나치의 몰수로부터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실에 깊이 숨겨놨었다는 걸 보면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사랑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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