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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베를린 미테/統獨 예술의 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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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이름으로 검색 02-03-10 10:17 조회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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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문화리포트]베를린 미테/統獨 예술의 메카
동아 2000/02/28(월) 23:10

《올해 통일 10돌을 맞은 독일, 지난해 독일의 수도가 된 베를린. 통일은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의 문화 예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세계 최후의 분단국인 한국의 입장에선 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통일 이후 10년간 베를린이 겪어온 문화적 발전양상, 문화재 복원 현황 등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독일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슈프레강 북쪽의 ‘베를린 미테’(이하 미테) 지역은 묘한 분위기로 낯선 방문객들을 사로잡는다. 17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시커먼 더께를 이고 금방 내려앉을 듯 서 있는 길의 모퉁이를 돌아가면 외벽을 유리로 마감한 세련된 화랑이 발길을 맞는다. 미테의 공기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버려진 듯한 황폐함과 곳곳의 신축 건물들이 풍기는 진취적인 기운이 뒤섞여 있다.


통일전 동베를린에 속했던 미테는 ‘중앙(Mitte)’이라는 말 그대로 베를린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구(區)이자 현대미술과 공연예술의 메카. 통일후 예술가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10년의 세월을 지나 이제는 수도 베를린의 문화 중심지가 됐다.


미테의 문화적 성지는 단연 현대미술가들의 집결지인 ‘타켈레스’와 문화복합센터 ‘하케센 회페’. 둘 다 거의 1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폐허가 된 곳. 그러나 이듬해 젊은 예술가들이 ‘빈 집 무단점거 운동’을 벌여 자신들의 예술적 영토로 삼았다. 장벽으로 동, 서가 나뉜 채 수 십 년 간 ‘버려진 도시’였던 베를린의 상처가 문화적 성장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안마당을 사면의 건물이 에워싼 형태의 ‘하케센 회페’에는 공연장인 ‘카멜레온 바리에테’와 건축미술 전문화랑 ‘아에데스’를 비롯한 화랑들, 예술도서 전문서점, 영화관 등이 있다. 곧 판토마임 전용 극장과 유대인 음악 전문 공연장도 들어설 예정.


‘하케센 회페’가 있는 로젠탈러 거리와 ‘타켈레스’가 있는 오라니엔부르크 거리를 잇는 아우구스트 거리 주변에는 40여개의 화랑이 밀집해 있다. 한때 ‘가난한 거리’로 불린 이곳은 저소득층의 주거지였지만 지금은 서울 인사동과 청담동 화랑골목을 합쳐놓은 듯한 분위기의 화랑가로 변모했다.


알베르히트 거리에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설립한 ‘베를리너 앙상블’과 운터 덴 린덴 거리 부근의 ‘막심 고리키 극장’도 보수 후 재개관돼 공연의 중심지가 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확정된 슈프레 강의 ‘박물관의 섬’도 미테 안에 있다. 구 서베를린 지역에 있는 세계적 명성의 베를린 필하모니와 함께 미테는 19세기 ‘슈프레 강가의 아테네’로 불릴만큼 이름난 문화도시였던 베를린의 옛 명성을 복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이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낡은 건물이 많은 미테가 통일 후 문화 중심지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싼 임대료. 통일 직후 미테의 건물 임대료는 1㎡당 5마르크(원화 약 3000원)에 불과했다. 이는 미테의 버려진 듯한 분위기에 매료된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다양한 장르의 하위문화를 발달시키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미테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2, 3년 전부터 서독 출신의 부유한 투자가들이 몰려오고 쾰른의 고급 화랑들이 속속 옮겨오면서 미테는 고급의 엘리트 문화지구로 변모하는 중. 격주간지 ‘샤이니쉬 라그’ 편집장 울리케 스테그리히는 “거칠지만 창의성이 번뜩이던 예술가들 중 일부는 “더 이상 미테는 없다”며 떠나고 저소득층의 주거지였던 거리에 고급 화랑, 상가가 들어서면서 원주민도 밀려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독 출신의 부유한 여피들이 풍요한 문화를 향유하는 고급 화랑 뒤편의 비좁은 골목에는 치솟는 집세 때문에 밤잠을 못이루는 동독 출신의 가난한 이웃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미테의 풍경이 되었다. 늦은 밤, 인적이 드문 미테의 오라니엔부르크 거리에는 영하를 밑도는 날씨에도 금발의 창녀들이 지나가는 자동차에 손짓을 하며 서 있었다. 이 또한 통일이후 베를린의 문화적 얼굴이 된 미테의 그늘진 표정 가운데 하나가 아닐는지.


▼베를린 미테의 '타켈레스'는▼


‘베를린 미테’의 오라니엔부르크 거리에 있는 ‘타켈레스’는 건물 뒷면 벽이 부서지고 빈민굴처럼 흉한 몰골을 한 5층 높이의 거대한 장방형 건물. 그러나 이 폐허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통일된 베를린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원래 ‘타켈레스’는 1909년에 지어진 대형 백화점. 동베를린 시절,백화점 기능을 상실한 뒤 폐허로 방치됐으나 통일 이후 서독에서 몰려온 미술작가들이 무단 점거해 작업 공간으로 삼으면서 아방가르드 미술의 근거지가 됐다.


‘타켈레스’가 유명해진 것은 1996년 이 건물을 산 스웨덴 회사가 재개발을 시도하면서부터. ‘타켈레스’의 예술가들은 2년간 건물 철거에 맞서 싸웠고 결국 1998년 ‘문화공간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독일 연방정부의 중재를 이끌어내며 승리했다. 그 해 11월부터 ‘타켈레스’의 예술인들은 스웨덴 회사에 임대료를 내고 있지만 1인당 임대료는 월 1마르크(원화 약 600원)에 불과하다. 현재 ‘타켈레스’에는 27개의 아틀리에와 영화관 1개, 공연장 1개, 극장식 카페 ‘자파타’, 금속공예 작업장 2개가 있고 90여명의 예술인이 입주해 있다. 3,4층에서는 공동전시회가 열리고 극장식 카페 ‘자파타’에서는 테크노 음악, 록,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매일 밤 열린다. 금속공예 작업장 ‘갤러리 오프넷’에서 일하던 한 공예가는 “누구든 ‘타켈레스’에 오고 싶으면 작품을 보여주고 신청만 하면 된다. 유럽인 뿐 아니라 중국 일본 아프리카에서 온 화가들도 있다”고 말했다. 입주자 선발에 특정한 기준도 없고, 작품활동에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이 곳의 특징.


그러나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타켈레스’도 점차 변하고 있다. 이 곳에 사는 헤닝 그루너는 “초기 ‘타켈레스’의 예술인들에게는 반(反)자본주의, 반(反)독일연방같은 정치예술적 성향이 강했지만 98년 안정을 찾은 이후 달라졌다. 또 무명의 젊은 예술가들보다 성공한 엘리트 예술가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성공한 예술가 그룹을 중심으로 세계에 ‘타켈레스’ 그룹을 만들기 위해 파리에 부지를 물색 중인 것도 중대한 변화 가운데 하나다.


▼인터뷰/문화전문지 '샤인쉬 라그' 편집장 스테그리히▼


“통일은 문화발전을 위해 잘된 일이긴 하나 다른 유럽 대도시와 달리 베를린의 고유한 문화적 개성이 사라지는 것같아 안타깝다.”


통일되던 해인 1990년 창간된 베를린미테의 격주간 문화지 ‘샤인쉬 라그’의 편집장 울리케 스테그리히는 “통일이 베를린의 문화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베를린에는 전환기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지만 통일 이후 거대 메트로폴리스를 지향하며 그런 개성을 거의 잃었다”고 답했다.


“유럽의 중앙에 있는 베를린은 동,서유럽 문화가 만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지만 이젠 그런 기회도 사라졌다. 동,서 유럽 영화의 가교 역할을 해 왔지만 이제 할리우드 영화의 파티장이 된 베를린 영화제를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동베를린 출신으로 베를린 미테에 오래 살아온 그는 “뉴욕의 소호처럼 고급스럽게 변해가는 미테에 기존 주민들이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40년 이상 모든 게 다르게 살아왔는데 문화적인 이질감이 전혀 없을 수 있겠는가. 동,서독 간 책전시회와 콘서트 교류는 통일 직전에야 시작됐는데 문화적 공감의 폭을 넓히기 위한 노력이 좀 더 일찍 시작됐어야 했다.”


<베를린=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 [베를린 문화리포트]문화유산 복원/연방정부 복구 주도
2000/02/29(화) 19:10

독일 베를린 슈프레강 한 가운데 있는 ‘박물관의 섬’.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키로 한 이 작은 섬에는 4개의 박물관과 1개의 국립미술관 등 문화명소들이 몰려 있다. 그러나 통일 전 동베를린 지역이었던 이 섬에서는 ‘공사 중’ 표지판이 붙지 않은 건물을 찾기가 어렵다.

▼'박물관의 섬' 대대적 공사▼


물에서 솟아오른 선두(船頭)처럼, 섬의 뾰족한 앞 부분에 자리잡은 보데박물관은 3만점에 이르는 파피루스 컬렉션을 비롯해 이집트 미술품 소장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공사를 하느라 일부 구역이 폐쇄돼 있었다. 박물관 앞에는 ‘보수공사 후 2001년부터 18세기 기독교 시대의 예술품 전시가 예정돼 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또 이 섬의 신박물관은 아예 문을 닫고 보수공사 중.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북서쪽 코너가 부서져나간 건물이 수 십 년 동안 그대로 방치돼 있다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야 복구 공사가 시작됐다.


‘박물관의 섬’에서 슈로스 다리를 건너 운터 덴 린덴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독일 역사박물관 역시 ‘공사 중’. 통일된 지 10년째인데도 왜 이렇게 공사 중인 박물관들이 많을까. 방문객에겐 의아한 일이지만 독일 연방정부 총리실 산하 문화언론국의 만프레드 아커만 국장은 당연하다는 듯 “박물관들의 완전 복구는 20년쯤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정적 어려움도 있겠지만, 구 동독 지역에서 최상급 문화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화유적들이 거의 방치돼 있던 상태라 복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놓는다.


박물관의 보수와 복원 비용은 연방정부와 베를린 주 정부가 절반씩 부담한다. 연방정부가 ‘박물관의 섬’ 뿐 아니라 구 동베를린 지역 문화재와 기념물들의 보수, 복원을 위해 통일 초기인 91∼93년 지출한 돈은 2억1400만 마르크(약1252억원). 96∼99년에도 6000만 마르크(351억원)를 추가 지원했다.


독일의 문화정책은 각 지방 정부의 몫이지만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사업만큼은 연방정부가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어 직접 시행해왔다. 연방정부가 91∼93년 3년 동안 구 동독 지역 전체의 문화재 보수와 기념물 보존, 교회 건축 후원 등에 들인 돈은 30억 마르크(1조7550억원). 지난해에도 같은 사업에 17억 마르크(9945억원)를 지출했다.


▼'바이마르 부활' 성공사례▼


지난해 유럽연합이 ‘유럽의 문화도시’로 선정했던 바이마르의 부활은 가장 성공적인 문화유산 복원사례다. 91년 공익재단인 ‘바이마르 클래식재단’이 창설됐고, 연방 정부가 이 재단이 지출하는 비용의 50%를 부담하면서 국립 괴테 박물관과 실러 박물관, 대공비 안나-아말리아 도서관, 괴테 문서보관소, 실러 문서보관소 등을 복원했다. 바이마르는 독일의 각 주가운데 연방정부가 집중적으로 후원하는 ‘영구 지원’ 대상.


그러나 문화유산 복원의 가장 큰 문제는 형평성. 구 서독지역의 경우 문화관련 지출액 가운데 50%는 시, 40%는 주, 10%는 연방정부에서 부담하는 반면 구 동독지역의 경우 재정이 어려운 주가 많아 평균 30∼40%를 시 정부에서 부담하고 60∼70%를 연방정부에서 부담하고 있다.


아커만 국장은 “날이 갈수록 문화관련 예산이 줄어드는 추세인 것이 문제”라면서도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관객의 무관심”이라고 지적했다. 동독 주민들,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문화재 복원에 대한 무관심이 엷어지는 것이 복원 그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지역적 소재를 떠나 독일 전체의 문화재와 오랜 전통을 지닌 문화유산은 독일의 것일 뿐만 아니라 유럽의 것”이라고 말했다.


▼프라우엔교회 재건운동▼


독일 전역의 문화재 복원 사업 가운데 드레스덴의 프라우엔 교회 재건은 독일에서 통일과 재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과업이다.


구 동독 지역의 문화재 보수와 복원은 모두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지만, 이 교회의 재건은 예외적으로 민간 단체가 모금운동을 통해 주도하고 있다. 전체 2억5000만 마르크(1463억원)의 복원 비용 중 절반은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나머지 절반은 민간단체의 모금으로 충당된다.


프라우엔 교회는 2차 세계대전 이전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시가지였던 노이마르크트 광장에 들어선, 직경 23.5m의 큰 돔을 지녔던 교회. 건축하는데 6118일(16년9개월)이나 걸렸다는 역사적인 건물이지만 2차 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하룻밤만에 파괴됐다. 독일이 동, 서독으로 분단된 이후 동독 지역에 속해있던 이 교회는 정부의 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으로 건축인가가 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건축 자재와 인부 동원조차 금지돼 폐허로 방치돼 왔다.


그러나 독일 통일 이후인 95년 드레스드너 방크 (은행)과 ZDF (방송)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신문)이 공동으로 복원운동을 시작했다. 교회 건물은 2003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원형 지붕 공사는 올해 안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최근 2차대전 당시 연합군에 가담한 국가들 사이에서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도 아닌 드레스덴에 대해 연합군이 심하게 폭격했다’는 자성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영국의 민간단체들은 조각상을 만들어 기부하는 형식으로 교회의 재건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베를린〓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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