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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Rudolf Augstein의 장례식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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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Nura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5,409회 작성일 02-11-27 08:53

본문

0,1020,225262,00.jpg그저께 이곳 함부르크의 Michaelis교회에서는 Spiegel지의 창립인이자 발행인이었던 Rudolf Augstein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Augstein의 가족, 대통령 Johannes Rau, 연방의회의장 Wolfgang Thierse, 현직수상 Gerhard Schröder, 전직수상 Helmut Schmidt 등 수천명의 조의객들이 참석한 이 장례식에서 대통령 Johannes Rau는 Augstein을 "빛나고 독립적이고 지조있는 분석가(brillanten, unabhängigen und unbestechlichen Analytiker)"이며 "연방공화국 자유언론의 마지막 창업대부(letzten Gründungsvater des freien Journalismus in der Bundesrepublik)"라 칭하면서, "그가 그 어떤 권위 앞에서도 경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Seine Respektlosigkeit gegenüber jeglicher Autorität)"은 "오히려 그가 민주주의에 대해 경의를 갖고 있었음(seinem Respekt gegenüber der Demokratie)을 보여준 것"이라 회고하고, "그는 과거 독일이 갖고 있던 관료주의적 답답함에 대항하여 싸웠다(Er kämpfte gegen den Mief alter Obrigkeit)"는 내용의 추도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Johannes Rau의 추도사는 Rudolf Augstein의 전생애에 걸친 소신과 그의 뛰어난 역량이 이루어낸 업적을 그다지 제대로 표현한 것 같지는 않다. Rudolf Augstein 그는 단순한 반항적 언론인이 아니라 20세기 독일언론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해도 무방할 만큼 독일언론사에 우뚝 솟은 거목이었기 때문이다.

0,1020,221913,00.jpg그는 언론인으로서 몹시도 총명하고 유식하면서도 글재주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매우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면서도 통합의 능력을 갖춘 인물(ein Mann von einer Integrität)이었으며, 뚝심과 리더십에 경영능력은 물론이요 양심과 원칙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이런 모든 면에서 그와 비교할 만한 인물은 독일내에서 Sebastian Haffner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유럽 전체를 뒤져본다고 하더라도 프랑스 "Nouvel Observateur"의 Jean Daniel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Rudolf Augstein은 그다지 뛰어난 학벌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가 기자로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남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서른살 나이때부터였다. Sebastian Haffner 같은 거물도 언론인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그의 정치관을 고쳐야 했었지만, Rudolf Augstein은 1947년에 썼던 그의 첫번째 논설로부터 시작해서 2002년에 쓴 그의 마지막 논설까지 그 기나긴 55년동안 조금도 그의 논조나 정치관을 바꾸지 않았다. 거기다 그의 기사와 논설은 문체상으로 화려하면서도 장황하지 않고 간결했으며, 문장 하나하나가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의 정치성향은 모두가 알다시피 sozial-liberal이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중간쯤에 서있었으니, 이념의 좌우를 굳이 가르자면 중도좌파, 정당에 비유하자면 1982년 이전의 자민당좌파, 지금의 사민당우파 정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좌파에 가까운 사람이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독일의 국익이나 독일민족의 이익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던 사람이었다. 1950년대 Adenauer의 친서방정책에 그가 온몸으로 저항했던 이유 역시도 어떻게 보면 그가 좌파였기 때문이 아니라 Adenauer의 친미, 친서방정책이 독일민족의 통일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그의 소신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심지어 그는 1989년 Helmut Kohl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정책에 대해서도 당시 Spiegel편집장이었던 Böhme와 싸워가면서까지 Kohl의 정책에 옹호의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당시 Spiegel지가 수많은 정통좌파, 사민주의자들에게 인기를 잃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는 조금도 독일민족의 통일에 대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를 전후한 그의 논설을 주욱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온갖 치밀한 분석 속에서 프랑스, 영국, 미국의 헤게모니에 독일이 절대 밀리지 않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물론 독일민족이 스스로의 자부심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설 가능성을 끊임없이 경고하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독일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 같은 게 살아숨쉬고 있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있었고 사민당의 화해협력정책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였으면서도, 소련이나 동독식의 공산주의에는 철저히 반대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옛날 Spiegel지의 기사를 보면 동독의 인권탄압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기사들이 많이 발견되곤 하는데, 그런 기사들을 보면 이게 과연 Spiegel인지 FAZ인지 구분이 잘 안될 정도이다. 그런 그가 이념을 초월한 동서독의 화해협력을 그토록 흔들림 없이 지지했던 것은 그가 지닌 현실주의적, 애국주의적, 평화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남북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겠다.

흔히 Spiegel지는 유럽의 대표적인 좌파지로 알려지고 있지만, 역대 Spiegel지 편집장의 면모를 찬찬히 살펴보면 좌파 사회주의보다는 중도자유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심지어 Spiegel지의 초창기 편집진을 보면 Leo Brawandt, Hans Dieter Jaene, Dr. Horst Mahnke, Georg Wolff와 같이 보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 후 Spiegel지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Becker, Jacobi, Engel 등은 정통좌파라기 보다는 중도파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고, 지금의 Spiegel기자들도 정통좌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리버럴한 사람들이 많다. 68혁명이 일어난 후 한때 Spiegel지는 Hermann L. Gremliza, Dr. Bodo Zeuner, Dr. Alexander Hoffmann와 같은 정통좌파 빨갱이 편집장들이 차례로 맹활약을 하면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정통좌파지로 자리매김되기도 했지만, 그러한 '붉은 슈피겔'의 시대는 70년대 중반 극좌폭력주의자들인 적군파가 설쳐대기 시작하면서 거의 막을 내려야만 했다.

실제로 Rudolf Augstein이 1950년대말과 1960년대초에 국방장관 Strauß와 그토록 갈등했던 이유도 사회적 분배 및 반전평화주의라는 시대적 사명에 충실해서였다기 보다 법치주의적, 자유민주주의적 인식때문에 그랬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투철했던 Rudolf Augstein은 Bayern주의 제왕총리인 Strauß가 예측불가능한 권력지향적 야심가라고 생각했고, 그런 Strauß가 민주적 법치국가의 원리를 공공연히 위반함으로써 언젠가 독일의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한 Rudolf Augstein의 확신은 그가 사사건건 Strauß를 물고늘어지고 그의 뒤를 캐대다가 결국 국가기밀누설죄로 구속되어, 1962년 전독일의 지식인과 좌파가 Rudolf Augstein의 석방을 요구하며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그 유명한 슈피겔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누구나 인정하듯 Rudolf Augstein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엄청나게 유식하다는 데 놀라게 된다. 비단 정치나 역사 뿐만이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에 대한 조예도 매우 깊어서 이렇게 박학다식한 인물이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나 감탄하게 된다. 그는 기자가 되기 이전에 열렬한 문학청년이었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스스로 시를 쓰고 희곡을 집필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유식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의 막대한 지식량 역시도 이러한 어릴 적부터의 문학적 흥미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글은 대체로 지독한 회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무언가를 낯뜨겁게 찬양하기 위한 글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설령 그런 의도로 씌어진 글이라고 하더라도 형식적으로는 그에 반대되는 무언가를 철저하게 비판하는, 매우 쓰라린 독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우직하고 매정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상으로부터 철저히 거리 두는 글쓰기를 하는 그의 문장을 보면 거의 항상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문장은 따뜻한 감정을 배제한 차갑고 딱딱한 글쓰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진지하고 정직하고 위선을 싫어하는 담백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권력에 그토록 저항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Spiegel사 내부에서 자기 개인적 권력에는 무척이나 집착했다는 점이다. 그가 Spiegel사에 대해 갖고 있던 애정과 집착은 워낙 큰 것이어서, 자기와 Spiegel지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맹렬한 거부반응을 보였고, 그 결과 Dr. Werner Funk 같은 유능한 편집장이 그의 권력을 제한하려 했을 때, Augstein은 그러한 결정이 Spiegel사 기자들의 사기를 심각하게 죽일 것을 알면서도 곧바로 편집장을 해고해버리는 초강수를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Spiegel사건때 금방 감옥에 갇히게 될 처지이면서도 감옥에 끌려가기 직전까지 자기가 자리를 비우고 있을 동안의 회사운영방침을 소상하게 기록해 남겼을 만큼 (어떤 일이 터질 것인가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해서 그때의 대응전략까지 모두 다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모든 일을 아랫사람에게 맡기기보다 자기가 직접 챙기려는 의욕을 보였다. 워낙에 정의감과 전투욕이 왕성했던 그는 Spiegel사를 발판으로 수많은 정치인, 경제인과 대결했고 대부분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그때에도 그는 모든 싸움을 자신이 직접 치밀하게 기획하고 지휘하는대로 이끌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투쟁심과 전투욕, 증오심과 고집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지식인이 자기 자존심과 아집 없이는 절대로 못사는 성격인 반면에, 그는 전혀 한 사람을 오래 미워하고 자기 생각만 계속 주장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자기를 반역자, 매국노로 몰아 죽이려 했고 Spiegel지까지도 완전히 박살내버리려 했던 Strauß와도 화해했다. 자기를 빨갱이, 소련첩자로 의심했던 Adenauer와도 화해했는데, 활짝 웃는 얼굴의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는 장면의 사진은 지금도 이곳저곳의 언론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다. 물론 뚱뚱보 Helmut Kohl과는 화해하는데 실패했지만(덩치 크고 뚱뚱한 사람일수록 속이 좁다는 옛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무려 십여년 가까이 씹어대고 물고 늘어졌던 Kohl에 대해서도 나중에 독일통일의 공적을 Kohl에게 돌리는 논설을 씀으로써 나름대로의 화해를 시도했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저질렀던 가장 큰 실수는 뭐니뭐니해도 한때 그가 잠시나마 정계에 입문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도 SPD도 아니고 FDP에 입당했다가 금방 정계를 물러났는데, 그토록 삐딱한 회의주의자였던 그도 정계에 잠깐 발을 딛기 전까지는 정치인들의 도덕성이나 인간성, 지성에 대해 자신이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Rudolf Augstein이 한때 SPD 의원이 아니라 FDP의 의원이었다고 하면 깜짝 놀라지만, 당시의 FDP는 지금의 FDP와는 좀 달랐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지금의 FDP를 평가하자면, 정통자유주의자는 모두 다 빠져나가고 기회주의자들만 남아 연명하고 있는 박쥐정당이라고도 할 수 있다 -_-;;). 그리고 그때 이전이건 그때 이후이건 Rudolf Augstein의 Spiegel이 FDP를 특별히 옹호했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Spiegel은 일반적으로 SPD-freundlich한 편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그밖에도 Rudolf Augstein에 대해서는 비난의 소리를 아주 무수하게 들을 수 있다. 언론인의 특성상 남의 성질을 강하게 돋구는 글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는 적도 아주 많아서, 지금도 여러 사람들은 그에 대해 대부분 그의 사적인 인간성 같은 부분을 가지고 험담하는 소리들을 많이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차갑고 예리한 시각을 지녔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과대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maßlose Selbstüberschätzung)고 하며, 평소 행동거지가 매우 불손했다(überheblich)고도 한다.

더군다나 그는 그토록 유식하고 총명했으면서도 외국어를 단 하나도 할 줄 몰랐다! 아직도 함부르크 시내에서는 그가 게이였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가 특히 열여섯살 짜리 미소년들을 식도락하듯 즐겼다(vernaschen)는 얘기는 확인할 길 없지만 거의 사실인 것처럼 떠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수많은 함부르크대학교의 좌파 학생들은 "Endlich hat der eingebildete, besserwisserische, aufgeblasene, überhebliche Wicht Rudolf einen kalten Arsch bekommen!"이라고 즐거워했고, 수많은 우파 학생들은 "Der schwule, drogensüchtige Augstein sei abgenibbelt!"라고 환호해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독일의 언론계에 남긴 긍정적인 영향은 크다. 그는 비록 Spiegel내에서의 자기 권력에는 상당히 집착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자기 제국의 절반을 자기 동료기자들에게 바쳤고, 그가 단지 한표만을 갖고 참가했던 Spiegel지의 편집회의는 절대로 그 자신의 마음대로 좌지우지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 어느 누구도 Spiegel지가 Rudolf Augstein의 전횡에 휘둘렸다고는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Spiegel지 편집회의에서 그는 수시로 소수의견으로 몰려서 곤욕을 치르곤 했다고도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1950~1960년대 수많은 독일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대다수 독일청소년들은 오히려 Adenauer나 Strauß같은 보수적 우파정치인을 동경하면서 권위에 맹종하는 착실한 소시민으로 성장해가던 그 시점에 자기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정권에 용감하게 맞선 언론인이었다. 그로써 그는 독일사회에 치열한 토론의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독일역사에 좌우교체의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더군다나 그의 저항은 단지 일회성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무려 50여년에 걸쳐 Spiegel이라는 튼튼한 언론시스템을 통하여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그가 가진 sozial-liberal한 정치성향과 불굴의 원칙주의는 지금 독일지성인들의 절반 가까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요소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저께 그의 장례식이 거행된 성미햐엘교회는 필자의 집에서 2~3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도 먼발치에서나마 그의 장례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많은 평가가 엇갈리곤 하지만, 일단은 "De mortuis nihil nisi bene(죽은 자에 대해서는 좋은 말만 해야 한다)"라는 말로 내 의견을 마감하면서 다시 한번 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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