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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제도 7인의 역대 총리와 독일외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9,377회 작성일 06-03-08 09:03

본문

2차대전을 전후한 연합국의 대독일정책은 1941년부터 1947년간 수차례의 회담을 통하여 형성되었으며, 독일제국의 "완전분해"(Totale Zerstuecklung)를 목적으로 공동보조를 취함.

이러한 연합국의 공동보조는 Marshall plan 협상 실패(1947,파리), 트루만 독트린(1947.3), 모스크바 외상회담 좌초 및 동구에서의 소련의 팽창 등으로 노정된 '양극화'의 결과로 균열이 초래되고, 미.영.불 점령지역에서의 통화개혁(1948.6.21)은 소련의 제1차베를린봉쇄(1948.6.24-49.5.1)를 유발시켜 두 개의 독일탄생의 전조를 보였으며, 1949년 서독 및 동독정부를 탄생시킴.

1. 아데나워 시대(1949.9-1963.10)

Konrad Adenauer(기민당, 49-63년 수상재임)
- 1876년 쾰른 출생
- 1917-33년 쾰른 시장
- 1953년 최초의 미국방문
- 1955년 나토가입
- 1963년 수상퇴임
- 1967년 Roendorf에서 사망


제1차 아데나워 내각의 대외적 행위는 전승국에 의해 작성된 점령규칙(Besatzungsstaut)에 의하여 제한되었으며, 정당간의 입장차이나 정당내부의 갈등으로 통일된 외교노선의 설정이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음. 이러한 상황하에서 아데나워내각은 패전 독일의 경제재건과 주권회복을 위하여 친서방정책을 취했으며, 1950년 구주이사회가입, 1954.10월 파리조약 가입으로 서방권 귀속등의 절차를 거쳐 1955.5월 주권을 회복, 나토에 가입하였음.
또한 동독의 존재 및 "Oder-Neisse"국경성을 부인하고, 할슈타인(Halstein)원칙을 제창하였으며, 유고와 동독 수교(1953년)시 최초로 이 원칙을 적용, 유고와 단교함. 그러나 소련과는 독일문제에 책임을 진 4대국의 일원이라는 명분으로 1955년 국교를 수립함. 또한 친불정책을 추구하여 작은 유럽의 통합을 구상했으며 1957년 구구경제공동체(EEC)창설에 산파역할을 함.
내정면에서는 Ludwig Erhard를 재무장관으로 기용, 자유무역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함으로써 변동환율제 채택, 국가간 자유무역, 관세철폐, 사업주 우대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음. 이 경제정책은 미국의 경제원조와 피난민 등으로 인한 막대한 숙련노동력의 유입 및 50중반까지 군사비 지출부담이 없어 성공적으로 추진되었음.
서독의 첫번째 수상은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돼버린 Konrad Adenauer 이다. 기민당당수 아데나우어가 49년 9월 15일 수상으로 취임할 때 슈뢰더는 겨우 5살이었다. 아데나우어는 1876년 1월 5일 태어났다. 그가 기민당에 입당할 때는 이미 상당한 정치경력을 쌓은 뒤였다. 그는 1917년 부터 1933년까지 쾰른시장을 지냈고 동시에 프로이센 국가위원회의장 이었다. 나찌는 그를 관직에서 쫓아냈고 1944년엔 종전때까지 4개월동안 게슈타포감방생활을 시켰다.

그는 서독을 경제적으로 지금의 유럽공동체에 통합시켰다. 프랑스의 대통령 드골과 함께 이 백발의 독일인은 천적을 운명공동체로 탈바꿈 시켰다. 특히 그는 미국지향적이었다. 전승국 미국이 시키는대로 민주주의를 건설하면서 명성이 팍 뛰었다. 그는 민주주의는 그 보답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53년 반란을 분쇄한 동독이 서독과 정통성 경쟁을 시도했을 때 적대적인 무시로 맞받았다. 그에겐 분단조국의 통일은 금새 말로만 외치는 것이 되었다.

그가 명백한 서구지향으로 전후시대를 각인했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전의 전통의 잔재는 미국식의 생활방식과 혼융되기 시작했다. 반공주의, 그리고 경제기적에 대한 열광은 서독인에게 격렬하고도 완고한 공동체의식을 형성시켰다. 그의 슬로건 "실험은 없다"(Keine Experimente!)는 이런 여론감정에 부합되었다.

독일이 월드컵우승을 했을 때 슈뢰더는 한 지역축구팀의 미드필드 공격수였다. 당시는 전무후무하게 계층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의사소통은 억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형식적 시민적인 자유에 불과했을지라도 민주주의는 아데나우어정권이 내세우는 국가적인 최고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아데나우어가 성장했던 빌헬름황제제국의 절도와 강한 성과지향, 소박함의 분위기는 반군주적, 반프로이센적이며 반군사주의적인 성격과 혼합되었다. 그의 국가의 권위에 대한 내면화된 의식은 잠재된 채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를 비판하는 측은 그가 자기의 정적들을 극악시했다고 말한다. 가령 빌리 브란트에게 했던 것은 끔찍했다. 그는 인신모독을 서슴치 않을 정도로 전의에 가득차 있었다.

경제기적과 반공주의는 나찌잔재청산이라는 과제를 슬쩍 넘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반히틀러적 입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뉘른베르크의 인종법의 상담역이었던 Hans Glocke를 정부요직에 등용하고 심지어 전나찌주의자인 Theodor Oberlaender를 장관으로 앉히면서도 그는 하등의 거리낌과 가책이 없었다. "그는 자기 시대를 반성성찰해 보는데는 어떤 통로도 발견할 수 없었던 꽉 막힌 사람이었다" 고 그의 전기작가 Werner Weidenfeld는 말한다.

그는 61년 4번째로 수상이 되었지만 절대과반수는 잃어버렸다. 그는 오랫동안 수상직에 있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사회와의 접점을 잃어갔다.



2. 에르하르트 시대(1963.10-1966.10)

Ludwig Erhard(기민당, 63-66년 수상재임)
- 1897년 Fuerth출생
- 1948 통화개혁
- 1949-1963년 아데나우어내각의 경제부장관
- 1963년 수상취임
- 1965년 이스라엘과 국교정상화
- 1966년 수상퇴임
- 1977년 Bonn에서 사망


미.소의 해빙무드, 구주 긴장완화 및 동독과 제3세계와의 국교수립의 증가추이에 따라, 서독은 Schroeder 외무장관의 소위 "역동적 외교정책"(Politik der Bewegung)으로 나토와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대동구권 관계개선을 시도함으로써 "할슈타인"원칙과 힘의 정책에 입각했던 아데나워 정책에 수정을 가함.
1963년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동구제국과 통상협정을 체결하고, 1966.3월 Erhard의 평화교서를 통하여 소련에 무력사용포기선언 교환을 제의함.
아데나우어의 뒤를 이은 Ludwig Erhard(63-66년 수상재임)는 수상이 되기 전에 이미 "경제기적의 아버지"로서 최고의 성가를 누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자기의 주요임무를 경제건설로 보았다. 하모니를 추구하는 민주주의관을 가진 그는 타고난 아데나우어의 후계자였다. 그는 정치를 비생산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국민을 국가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오직 경제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경제학자였지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의 기회는 48년 통화개혁과 함께 찾아왔다. 미국의 장군 Lucius D.Clay는 프랑크푸크트 경제국장인 그에게 이 통화개혁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에르하르트는 화가 나서 마치 자기가 내린 결정인 것처럼 헤센 라디오방송을 통해 독일 마르크의 탄생을 공포해버렸다.

그로부터 15년후 그가 수상이 되었을 때는 불행하게도 그에겐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그칠줄 모르고 성장하던 경제가 일시적으로 종말을 맞았고 아우슈비츠재판과 함께 과거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절제절도의 설교자인 그는 당시 젊은이들의 비틀즈 헤어스타일에 청바지와 미니스커트를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동서대립형국도 사정이 변했다. 베를린 장벽건설, 쿠바위기를 겪은 후에 미소양국은 긴장완화를 추구했다. 외부간섭이 갑자기 심해졌다. 그는 미국의 존슨대통령과 프랑스의 드골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단력이 약하고 걸핏하면 눈물을 잘 흘리는 도덕주의자인 그는 65년 과반수에서 불과 6석이 모자라 잔인하게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3. 키징거 시대(1966.10-1969.10)

Kurt Georg Kiesinger(기민당, 66-69년 수상재임)

- 1904년 Ebingen 출생
- 1940-45년 제국외부무 근무
- 1958-66년 Baden-Wuertemberg 주수상
- 1966년 대연정의 수상취임
- 1969년 수상퇴임
- 1988년 Tuebingen에서 사망


1966년말 재정정책을 맡은 자민당 각료의 퇴진으로 대연정이 구성되고 기민당의 Kiesinger총리, 사민당의 브란트가 외무장관을 맡음. 브란트는 친서방 기본노선이외에 "접근을 통한 관계개선"(Wandel durch Annaehrung) 및 "인간적 고통완화"(Menschliche Erleichterung) 등을 표방, 대동구 및 대동독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신축성있는 변화를 보임. 이에 따라 67.1.31 루마니아와 국교를 수립하고, 68년에는 단절되었던 유고와의 국교를 재개함.
여론으로부터 진짜 몰매를 맞은 사람은 세번째 수상 Kurt Georg Kiesinger였다. 수상이 된 2년후였다. 베른린에서 열린 기민당 당대회때 갑자가 한 젊은 여자가 수상 뒤통수에 대고 "키신저, 나찌!"라고 외쳤다. 수상이 돌아보자 그녀는 볼 것도 없이 빰따구를 갈겨 버렸다.

이 여인 Beate Klasfeld의 아버지는 아유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녀는 키싱어가 수상이 된 이래 나찌 외무성에서 라디오방송선전선동가였던 그가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도록 할 기회를 기다려왔다. 히틀러제국이 끝난지 채 25년도 되지 않아 한때의 나찌추종자인 그가 자신의 내각의 나찌피박해자들와 함께 정부를 이끌도록 허락되었다는 것은 아데나우어 시절의 침묵관행이 얼만큼 성공적이었던가를 웅변해 준다.

그의 전기작가 Gerhard Ziegler는 그가 역대수상중 "가장 독일적인 수상"(der deutscheste Kanzler)이었다고 판정한다. 전쟁당시 그는 외무성에서 유태인학살보도를 말도안되는 끔직한 프로파간다로 분류했었다. 그는 이 과거를 계속해서 추호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기민기사당연합과 사민당간의 대연정의 수상이 되었을 때 그의 강점은 아무런 추종자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빌리 브란트와 프란쯔 요젭 슈트라우스 양자사이를 "왔다리 갔다리 하는 중재위원회"의 역할을 맡았다. 그 자신 고유의 컨셉트는 없었다.

당시 괴팅엔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22살의 슈뢰더는 이 "과도기의 인물 키싱어"에 대해 거의 기억하는 것이 없다. "참 그 사람 손녀가 하나 있었죠. 나한텐 그 손녀가 더 기억에 남네요."

Walter Scheel과 빌리 브란트가 자유주의-사민주의 동맹을 맺었을 순간에도 그가 연방하원의원선거를 놓고 승리자로 자축하는데 열중했다는 것은 그의 허영심과 정치적 능력의 결여를 명백히 보여 준다.

아데나우어이래 동독을 국가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외교정책의 기본이었지만 민족주의적 보수주의자인 그는 외무장관 빌리 브란트의 단초적인 동방적책을 막을 힘이 없었다. Hallstein-Doktrin은 흔들렸다.



4. 브란트 시대(1969.10-1974.5)

Willy Brandt(사민당, 69-74년 수상재임)
- 1913년 뤼벡 출생
- 1933 망명
- 1957-66년 베를린의 시장
- 1966-69 외무부장관
- 1969 수상취임
- 1970-73 동방계약
- 1974년 수상퇴임
- 1992년 Unkel에서 사망


1969.10월 전후 20년만에 기민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한 사민당의 Brandt총리는 독일의 분단이 가까운 장래에 해결될 전망이 없다는 인식하에 유럽의 현상을 인정하고 긴장완화를 추구하기 위한 대동구 관계개선정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음.
브란트는 제1차 양독정상회담(70.3.19 Erfurt) 및 제2차 양독정상회담(70.5.21)을 개최, 양독간 관계개선을 통한 기본입장을 밝히는 한편, 70.8.12 유럽의 현 국경선 인정 및 무력사용포기에 관한 독.솨조약에 서명하고 70.12월에는 "Oder-Neisse" 국경선 인정 및 무력사용 포기에 관한 독.폴랜드 조약을 체결하였음.
71.9월에는 베를린에 관한 4대국협정이 조인되었으며, 72.12월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은 서독의 대동구 관계개선과 구주 긴장완화, 동.서간 해빙무드 조성에 크게 기여하였음.
또한 72.10월 Scheel외무장관이 중공을 방문,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음. 72.9.14에는 폴란드와 국교를 재개하였고, 73.12.12 헝가리 및 불가리아와 수교하였으며, 73.12.11 체코와 복교함으로써 대부분의 동구권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음.
한 노동자의 불명예스런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나찌를 피해 망명생활을 했고 외국인여성 Rut Brandt와 결혼했다. 1969년 10월 21일 빌리 브란트는 1930년에 수상 헤르만 뮐러가 쫓겨난 이후 사회민주주의자론 처음으로 수상에 당선됐다. 정당하게도 그는 이제 히틀러가 마침내 전쟁에 패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첫 정부발표를 통해 55세의 이 사민당 당수는 승리감을 만끽하며 말했다:

"이제 진짜 제대로 시작하는 겁니다."(Wir fangen erst richtig an)

새 출발을 다짐하는 그의 집권은 사회분위기에 부합됐다. 1968년에 시작된 학생폭동(Studendenrevolte)은 이미 오래전에 문화혁명적인 사회변혁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사민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간의 연정으로 간신히 과반수 의석를 넘긴 그가 집권 5년동안 그토록 많은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데나우어시대에 대해 일종의 시계추의 균형을 잡는 상보적 역할을 해냈다. 동방정책은 서구편향을 보충했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라"(Mehr Demokratie wagen)는 구호는 "어떤 실험도 없다"(Keine Experimente)는 구호를 보충했다.

브란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데나우어처럼 그도 유럽한복판에 위치한 독일의 미래적 역할에 대한 명징한 표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많은 위기와 장애를 뚫고 끝끝내 자신의 정책을 관철해내고야 마는 추진력을 갖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빠져든 무거운 자기침잠의 시기에 그는 흡사 권력을 위해선 무엇도 불사하는 인간(Machtmensch)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 누구도 브란트처럼 수상집무실에서의 고독을 그토록 상징적으로 구체화해 주지 못한다. 그가 훗날 이 시절을 회고할 때야 비로소 그가 얼마나 조심스러워 했던가, 그러나 또한 그 얼마나 냉철하게, 때때론 무자비하게 자신의 권력을 사용할 줄 알았던가가 밝혀진다. 그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고 언론에 대해 그것을 관리할 줄 알았다. 그는 어려울 때 측근을 희생양으로 삼을 줄도 알았다. 그럴 땐 얼음처럼 차가운 아우라가 흡사 거대한 종처럼 그의 주위를 감싸고 도는 것이었다.

브란트가 그의 동방정책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아버지세대가 저지른 죄과에 짓눌려 있던 많은 전후세대에게 그것은 엄청난 한숨 돌리기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가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그 제스츄어는 세계에 독일의 평화의지를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지만 정작 독일에선 너무나 많은 독일인들이 그것을 오해했다. 그들은 이것을 독일통일의 궁극적인 포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브란트는 결코 계속 그런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으로 자신의 제스츄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독일의 통일을 원했던 그의 좌파애국주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서 이런 그의 속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그의 당내에서조차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인기는 갑자기 급격히 하락했고 결국 불명예스런 퇴진으로 이어졌다. 이점에서도 그는 모범인걸까? 슈뢰더는 이런 그를 모범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숭배해야 될 영웅의 모습으로 받아들였다. 아데나우어처럼 브란트도 그의 생애 말기에 이미 하나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5. 슈미트 시대(1974.5.17-1982.10)

Helmut Schmidt(사민당, 74-82년 수상재임)
1918년 함부르크 출생
1941-1965년 함부르크의 내무상원의원
1969년 국방장관
1972년 재무장관
1974년 수상취임
1977년 Schleyer 살해사건
1982년 수상퇴임


브란트총리의 동방정책은 총리보좌관 Gunter Guillaume의 간첩사건으로 사임할 시기에는 이미 서독의 기본외교정책의 하나로 정착되기에 이르렀음.
Schmidt 총리 집권시대에 있어서 서독의 동방정책은 아프가니스탄 사태, 소련의 과도한 군비증강, 폴란드사태 등으로 표면적으로는 다소 퇴조한 감이 있으나 이미 형성된 대동구 실질관계는 감소되지 않았음. 미국의 대소련불만을 고조시킨 폴란드사태 등의 시기에 있어서 기존 대동구 실질관계를 축소하지 않으려는 서독의 소련 및 동구권에 대한 미온적 태도는 미국과 미묘한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였음.
슈미트총리 집권시기에 있어서 서독의 대외정책은 미국과의 기존 우호관계를 저해하지 않으면서, 대동구 관계증진을 추구하고 상호대립하는 미국과 소련사이에서 조정자적 역할을 담당하려는 태도로 특징지워짐.
브란트를 뒤이은 제 5대수상은 자기의 주변인물들과 보다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국민의 수상"(Volkskanzler)이었고 또 계속 그렇게 머물렀다. 그 스타일과 내용에서 슈뢰더는 다른 그 어떤 전임자보다도 슈미트에게 친화력를 느꼈다. "그에 대해선 나는 항상 존경심을 가져 왔어요. 이제 그런 감정이 더 절실해집니다."

그만큼 준비된 수상도 없었다. 한때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던 한때의 장교는 국가경제학과 국민경제학을 공부했다. 1953년 그는 연방하원의원이 되었고 원자력무기를 반대하는 전문가로서 금새 이름을 날리게 됐다. 1962년 2월 세기적인 홍수가 터졌을 때 그는 함부르크의 내무상원의원이었다. 그는 그 기회에 자신의 통솔력을 인상적으로 십분과시했다.

1966년 그는 핵심적인 직책인 대연정의 원내의장(하원대표)이 되었다. 1969년 권력이양시 그는 처음엔 브란트내각의 국방부장관으로 다음엔 재무장관, 경제담당관을 거쳤다. 항상 그는 브란트의 잠재적인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정치적인 상황은 수상으로 취임한 그가 방어자세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브란트의 낙관주의는 지나갔다. 짧았던 변혁의 시기는 종결되었다. 당시 로마클럽이 지적했듯이 "성장의 한계"도 분명해졌다. 1973/74년 석유 파동에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긴장완화정책도 위험한 것으로 판명됐다. 군축협상은 단지 무기를 양적인 차원에서 질적인 차원으로 바꾸어 놓았을 따름이다. "이루어 놓은 성과는 지켜라"(Das Erreichte sichern)라는 겸손한 요구가 슈미트 수상정부의 것이 되었다.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은 기성체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당시 "거리의 투사"였고 이제 외무장관이 된 요쉬카 피셔는 그 적군파의 공격을 " 한 특수한 독일적 비극"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는 1977년 슐레어 살해사건이 터진다. Hans Martin Schleyer 전경련회장의 유괴와 살해, 테러리스트에게 점령된 루프트한자의 "Landshut"와 다행히도 모다비슈에서의 성공적인 탈환작전, Stammheim에서의 적군파포로의 자결은 온나라가 숨을 죽이게 만들기에 족했다.

이 당시 슈미트는 적군파의 요구에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탈환 작정이 실패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주머니에 항상 추도연설문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나머지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국내채무와 실업율의 증가, 기업파산, 여기 저기 돈쓸일들 뿐인 이 와중에서 정치는 장부를 맞추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 일이었다.

중용의 길. 이미 오래전부터 슈미트는 환경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과 같은 기성제도를 넘어선 문화적 사회적 변혁에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금 슈미트에 감탄하는 만큼이나 슈뢰더는 당시 수상의 질서수호의지 보다는 분란조성자들에게 더 매혹되어 있었다. "물론 당연히 나와 그와의 관계는 양가적인 것입니다." 라고 슈뢰더는 말한다. 그는 변호사로 활약했으며 사람들을 자극시켰다. 그는 호모 목사, 원자력 반대자, 취직을 금지당한 신체장애자들을 변호했다.

다 좋다. "직업이 직업 아닙니까"라고 슈뢰더가 오늘날 말하듯이. 그러나 종국엔 미사일 추가배치문제를 두고 그도 함께 슈미트에게 반대하는 측에 가담하지 않았던가.

6. 콜 시대 (1982-통일전)

Helmut Kohl(기민당, 82-98년 수상재임)
1930년 Ludwighafen 출생
1969-1976년 라인란트 팔쯔 주수상
1982년 수상취임
1989 독일 통일 10대강령
1993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1998년 수상퇴임


Kohl 정권의 중도우파적 성격에 비추어 구정부에 비하여 대미 및 서방 우호관계를 중시하고 동구권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소원케하는 정책을 추구할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실질적 면에서는 역대정부의 외교정책에 비하여 큰 차이가 없었음.
다만 외교정책수행 접근방법에서 차이를 보여 미국과는 노골적으로 대립하기 보다는 온건하고 협조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미국의 협조와 양보를 구하고 있으며, 소련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사태, 폴란드사태, 소련의 과중한 군비 등 독.소관계발전에 있어서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사안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데탕트를 추구해 왔음.
89.109 동독사태로 인해 11.9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자 콜 행정부는 통일을 위한 10개 조항을 발표하는 등 통일을 위한 대내외적 노력을 경주해 왔음. 즉 90.3.18 동독 자유총선시에는 동독지역내 기민당 및 DSU(독일사회연합). DA 등 3개 자매당과 Allianz를 구성하여 적극적으로 지원, 집권을 가능케 함으로써 통일을 향한 대내협력을 가속화시킴.
통일에 대해 가장 큰 대외적인 장애가 된 통일독일의 나토잔류문제는 소련이 통일독일의 나토잔류를 양해함으로써 해결되었고, 폴란드와의 국경문제는 현 오데르 나이세강을 양독간 국경으로 하는 것을 확정하여 궁극적으로 전승4대국과 양독이 참석한 "2+4회담(4차례 개최)에서 관계국의 양해를 얻음으로써 독일의 완전한 주권회복 및 통일을 위한 외교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함.
전승4개국중 특히 소련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콜 정부는 과감한 대소경제지원정책을 추진, 94년말까지 완료하게 될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위한 주택건설 등을 지원키로 하였으며, 걸프전쟁시에는 연합국측에 재정지원을 제공하는 등, 국력에 상응하는 대외적 책임완수에 주력하고 있음.
독일통일을 달성함에 있어 Kohl 총리 Genscher 외상 등은 독일의 통일을 가능케 한 미.소.영.불 등 전승4개국에 사의를 표하는 한편, 통일독일의 앞으로의 외교정책방향에 대한 주변제국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외교정책방향을 밝히는 연설을 행함(콜 총리, 10.4 베를린의회의사당, 겐셔외상, 9.26 유엔총회연설). 콜통리는 통일독일은 금세기 독일인이 자행한 범죄행위(특히 유태인학살행위)를 결코 잊지 않음으로써 독일역사의 어두운 면을 길이 기억, 이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과 독일의 국력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을 완수할 것을 다짐.
독일은 통일후 제고된 국제위상에 상응하는 국제책임 이행이라는 목표하에 구주통합의 실현에 주력하고, 주요국제분쟁시 독일군이 유엔의 평화유지군의 일부로서 나토영역 이외지역에서 평화유지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헌법상의 기반마련을 위해 노력.
콜은 항상 자신이 사민당의원들이 자신의 당수를 배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던 저 모든 나토 추가무장결의를 의회에서 통과시켰다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소련의 해체와 독일통일의 길을 닦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선거전에서 그는 분노에 차서 묻는다:

"그때 슈뢰더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소?"

슈뢰도는 당시 젊은사회주의자연방의장(Juso)이었고 연방하원의원 이었다. 그는 수상슈미트가 콜에 의해 교체되던 날을 잊지 못한다. 처음엔 그 "시커먼 거한"은 오래 못 갈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대신 콜이 역사책에 오르게 된 것을 슈뢰더는 베를린 장벽붕괴의 행운 탓으로 돌린다.


8. 슈뢰더 시대

Gerhard Schroeder(사민당, 98년이래 현수상)
1944년 Mossenberg 출생
1978-1980년 젊은 사회주의자 연방의장
1990-1998년 니더작센 주수상
1993년 사민당당수 선거전 패배
1998년 니더작센주 압도적 승리
1998 수상취임

통일의 수상으로서 그리고 확신에 찬 유럽인으로서의 콜은 반복해서 슈뢰더의 존경을 획득했다. 이점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슈뢰더는 말한다.

전임자의 자리를 이어받았던 3명의 전대수상과는 달리 그는 전임자를 꺼꾸러뜨리고 수상에 올랐다. 지금 역대수상중 그에게 유일한 모범으로 떠오르는 이는 헬무트 슈미트이다. 그것은 슈미트가 자신처럼 실용주의적이거나 사민당노선에 회의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특히 자신의 집권초기상황이 슈미트때와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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