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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종교개혁적 가르침의 핵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송다니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922회 작성일 17-06-10 18:38

본문

올해 루터 탄생 500주년을 맞이해서 독일에서 1년간 큰 행사를 하고 있다. 유럽에 사는 교포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유럽을 바꾼 루터 가르침을 교양으로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루터의 칭의론을 올린다. 너무 길어서 많이 생략했음에도 본문이 중간에 잘릴 것 같은데, 필요한 분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시면, 원 자료를 메일로 보내드린다. 알트하우스의 "Die Theologie Martin Luthers"를 많이 참조했음을 밝힌다.


칭의론 – 루터 신학의 핵심

종교개혁은 루터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번민에 찬 질문에 대해 성경에서 그 답을 찾으면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루터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수년간 피눈물나는 투쟁을 했어야만 했다. 이것은 자기의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칭의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기본적이면서도 중심이 되는 가르침이며, „기독교 가르침의 총화(Summe)“로서 교회의 전체 가르침은 이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비추는 태양“이다. 이것이 기독교만의 고유한 것이며, „우리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하는 것이다.“ 교회를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것은 이 가르침밖에 없다. 이것을 잃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잃으며, 기독교 가르침에는 남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어떻게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우리 양심을 하나님 앞에서 세울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죄인은 칭의가 되지 않으면, 잠시라도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으며, 기도도 헛되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칭의론의 부재와 오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37년에 루터는 학생들의 수업 논쟁(Disput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가르침에 대해 아무리 많이 묵상해도 부족하고, 아무리 열심히 연구하고 강조해도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성과 사탄을 이처럼 대적하는 것은 이 가르침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칭의의 두 가지 의미: 의롭게 여김과 실제적 의로움

루터는 칭의를 일반적으로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판결(법정적 의미)을 의미한다(의롭게 여긴다: iustum reputare, computare). 그런데 그는 이것을 인간이 본질적으로 의롭게 되는 사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의롭게 여기는 것과 진짜 의롭다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진짜 의롭다는 의미로 사용할 때에는,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의롭지 않으며(iusficatio nostra nondum est completa), 최후의 심판 시에 이것이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의는 부활 후에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실재(eschatologische Wirklichkeit)이다. 즉, 진짜 의롭다고 할지라도 완전히 의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말론적 실재라는 말은, 의가 종말에 완전히 이루어지는데, 지금은 완전하지 않지만 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님(not yet)의 긴장의 요소가 나타난다. 벌써 여기에서 칭의라는 말이 신비한 말이며, 합리적인 설명으로는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트하우스는, 내적으로 서로 잘 연결되면서도, 외적으로는 서로 독립되고 모순적으로 들리는 루터의 칭의론은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I.  다른 의(iustitia aliena)

루터의 칭의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다른 의“이다. 그리스도인의 실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의가 대동한다. 그는 결코 의를 소유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의 때문에 의롭고, 또한 본질적으로는 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나서 아무리 선한 삶을 살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의롭다 여김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114에서 정확하게 다루었다:
제114문: 그런데 회심한 사람은 이 모든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한) 가장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단지 순종의 몇 발만 디딜 뿐입니다.

1. 칭의

1) 칭의란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 그리스도 때문에(의의 전가)

루터는 그의 칭의론을 사도 바울로부터 이끌어냈다. 롬 4:1 이하에서 그는 칭의를 거의 „여긴다“, „돌린다“로 이해한다 :

하나님께서 불의한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칭의이며,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여기에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다.

그는 이 의를 만들어낼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때문에 선물로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완전히 수동적으므로 여기에 어떠한 것도 기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죄인의 의는 „적극적인(aktiv)“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을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passiv)“ 의이다. 이 모든 것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Christus in Person) 죄인의 의가 되신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롬 8:34), 자신을 죄인과 하나 되게 하셨으므로, 인간에게는 „외부의 의“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비록 그리스도의 것이지만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든다.
또한 인간의 의가 조금씩 커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의는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포에만 기인한다(법정적 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거룩함에 있어서 진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루터는 성장(열매)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만큼 충분한 것이 아니다.

2) 의의 전가는 매일 일어나는 사죄를 통해 일어난다
 우리는 본질적으로 의인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매일 회개해야 한다

인간은 이러한 „외부의“, „수동적인“ 의 때문에 일생 하나님 앞에서 산다. 즉, 세례를 받을 때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할 때뿐만이 아니다. 또한 이 수동적 의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점차로 능동적인 의로, 혹은 자신의 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죄인이며, 외부의 의, 즉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으며, 그분 앞에 설 수도 없다. 이 의의 전가는 매일 일어나는 사죄를 통하여 일어난다 („우리의 주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심은 신자의 생활 전체가 회개임을 의미한 것이다“: 95개조의 제1항). 그러므로 수시로 회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회개란 우리가 우리 죄를 매일 그리스도께 전가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분의 의를 전가받는 것이다.


3) 칭의의 은혜는 파라독스로서 우리가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 시험의 원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의(unsere Gerechtigkeit in Christus), 혹은 그리스도께서 전가하신 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온 것이다 . 이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며 자기 마음의 상태(Qualität)가 아니다. 자신의 공적으로(opera propria)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것, 즉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받아주시는 것에 „그분의 능력과 긍휼의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함“이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여겨주심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보다 큰 것이고 모든 거룩한 천사보다 크다“. 불경한 자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은 인간의 개념과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러한 판결은 인간의 판단과 그리고 인간의 자기 판단과는 모순된다: 그분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리고 자기가 보기에도 부끄럽게 보이는 자신을 의롭다고 하신다. 이렇게 인간에게 하신 하나님의 일은 기이한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이 이렇게 파라독스라는 것을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2. 칭의와 믿음과의 관계

성경에서는 믿음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칭의에 관해서는 믿음의 두 가지 의미가 중요하다. 하나는, 하나님의 의롭다는 선언을 꼭 붙든다는 의지적이고 감성적인 전인격적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칭의가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이 도구인 믿음을 우리에게 선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온전히 은혜로 구원받는다. 루터는 이곳에서 믿음을 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1) 칭의는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 지성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

그러면 칭의는 어떻게 받는 것인가? 죄인은 단지 믿음으로만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 행하신 구속사역,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붙드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은혜로운 판결(대속을 통한 무죄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사람으로서만, 살기를 감행한다(wagen). 비록 그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므로,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처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은 단지 구원 역사가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 이상이다. 이것을 나에게 적용하여 구원 역사의 사실이 „나를 위하여“, „나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나를 위하여(pro me)“는 칭의 받는 믿음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이 믿음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구분되는 것이며, 특히 단순한 „역사적인 믿음“과 다른 것이다 . 루터는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을 칭의를 얻는 믿음의 본질로 보았다. 즉, „꼭 붙드는(ergreifendes)“, 자기 것으로 하는 믿음(fides apprehensiva )을 말한다 .

그러므로 믿음은 지적인 행동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감성적인(affektiv),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신뢰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믿음의 감성적인 측면은 루터정통주의에서 억눌려 있다가 쉬페너의 경건주의를 통해 다시 살아났다. 영국의 청교도는 처음부터 이러한 감성적인 측면을 올바로 강조했다. 믿음은 전인격적인 것이므로, 반드시 감성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반드시 Pathos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루터의 삶에서, 그리고 그의 글에서(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마찬가지) 그의 감정이 얼마나 풍부하게 드러났는지를 보고서 감동을 받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2) 선물로서의 믿음 – 믿음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런데 믿음이 칭의를 영접한다든지, 인간이 칭의를 믿음 안에서 영접한다 , 혹은 간단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루터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칭의는 믿음으로, 즉 믿음이라는 형태로 영접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사역이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믿음을 선물하시면서 그를 의롭다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의가 되시고 그러므로 이 의는 우리 밖에서(extra nos) 온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이라는 방편(도구) 을 통해 내 안에 거하신다 –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의가 되신다는 말은, 그분께서 나에게는 단지 주어진 분으로서, 그리고 내가 받아들인 분으로서 나의 의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다 (믿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의 의가 되게 하시는 방편에 불과하다). 단지 믿음 안에서 내 소유가 된 그리스도만이 나의 의가 되시며, 이 분은 믿음을 통해 내 마음에 거하신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살아계신다 (Im Glauben ist Christus gegenwärtig).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곁에, 그리고 인간 안에 현존하시는(gegenwärtig)  방편(Weise)이다 . 이것이 칭의의 핵심적인 의미이다. 믿는 마음은 보석인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는 반지(테두리)와 같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분을 가질 수 있다. 단지 믿음 안에서만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한 자로서 서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물건처럼 내 안에 소유하는 것이 아니므로, 믿음이 없어지면 그리스도도 떠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경우 나와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끈이 끊어지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완전히 떠나신 것이 아니다. 이 관계를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믿음은 또한 성령님의 역사를 받아 마음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루터는 또한 믿음을 성령님의 역사를 입은 인간의 태도(자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혼동이 와서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그분께 내보일만한 것이 하나도 없이 자신을 온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하고 맡겨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온전히 영접할 자세가 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써 제 일 계명을 성취하게 되며,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여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창조주로서의 모든 명예를 드리는 것이다. 믿음은 죄인의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 믿음은 마음의 정결 그 자체이다. 단지 믿음 안에서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 이것이 율법의 의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이다. 믿음은 이미 모든 율법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II. 칭의와 새로운 존재

앞에서 루터는 죄인이 믿음으로 받는 의를 가르쳤다. 이 의는 나의 의가 아니라 나에게 전가된 의다. 그리고 나는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신비주의: unio mystica).
그런데 루터는 이곳에서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자에게는 의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 즉, 죄인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한다고 한다. 이것은 새롭게 탄생한 생명이 된 그리스도인이 죄의 세력을 벗어나는 것(벗어났다가 아님)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계명에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실제로 중생한 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1) 믿음과 함께 존재적 의가 탄생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칭의를 받는 데에 믿음이 공적(Werk=행위)이 될 수 없지만, 믿음은 이제 선한 행위(gute Werke)의 근원이요, 새롭게 탄생한 존재적 의 의 출발점이 된다(der Anfang einer neuen seinshaften Gerechtigkeit). 칭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일이 실현된다: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여겨진다. 즉 믿음이 그리스도를 마음속으로 모셔오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믿음이 성령님에 의해 역사되어 이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게 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그리스도와 연합!).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그분의 거룩하고 고결한 신적인 존재가, 믿음 안에서 우리 마음과 하나로 묶이고, 그 마음을 감동시켜 마음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의롭게 되는데, 그리스도 의의 공로로 그렇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사랑과 새로운 순종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께서 마음속으로 부어지게 됨으로써 존재 자체가 의롭게 된다 .
이러한 루터의 가르침은 성경 가르침과 잘 맞는다. 예를 들어 고전 6:11은 중생과 거룩함(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칭의를 다음과 같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너희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 너희는 죄 씻음으로 중생했고, 거룩해졌으므로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었고, 동시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2) 믿음과 선행 – 새로운 존재는 쉬지 않고 선한 일을 한다

믿음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와, 우리 외부에 있는 그분의 의를 바라보게 한다(믿음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맺어주는 끈과 같으므로). 바로 이러한 이유로 믿음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능력이다(Der Glaube blickt ganz und gar auf den Christus für uns, auf seine Gerechtigkeit außer uns und ist doch eben damit die Gegenwart und Mächtigkeit Christi in uns). 이 믿음은 죄를 사해주시고 죄에 대한 승리를 허용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같다(39I,83,39).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인간은 새롭게 된다. 칭의의 믿음은 믿는 자가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탄생한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신 은혜를 확신하게 되어 내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기뻐하게 되며, 율법을 노예처럼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에 대해 새롭게, 자유롭게, 기쁘게 순종하며, 옛사람의 죄에 대해 싸우게 되고, 남을 사랑으로 섬기려는 자세를 갖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므로“, 고난을 받을 준비자세가 된다. 루터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윤리적인 열매에 대해 항상 넘치는 기쁨으로 가르쳤다. 특히 로마서 서문에서(DB 7,10,6)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이란 우리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사역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하는 사역이다(요1장). 그리고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새로운 마음과 용기, 생각과 능력을 갖게 하며 성령님께서 임하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살아있고, 일하고, 활동적인 능력이 있어서 그것이 쉬지 않고 선한 일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인간 안에서 능력있게 역사하시고, 성령님께서 그분 안에 거주하시고 그를 능력있게 만드시는 것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설명했다. 루터는 이렇게 선행(개혁주의에서의 성화)을 극도로 강조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양심의 가책 없이 자의적으로 거짓을 행하고 악행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3) 칭의는 존재적 의를 포함한다 – 칭의는 죄인이 종말에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결과로 일어나는 두 가지 작용, 즉 죄 사함을 받고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이로써 믿음이 존재적인 의(seinshafte Gerechtigkeit)라는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begruenden) 것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에 속한다. 루터가 믿음이 주는 의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본다: 즉, 그리스도 때문에 인정받은 의와 새로운 순종에로의 변화는 한 가지이다. 인간은 믿음을 통해 죄가 없어지고 하나님 계명에 대한 기쁨이 생긴다(DB 7,11,28).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칭의가 완전한 의미가 된다. 그런데, 첫째 것, 즉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서게되는 것이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며, 두 번째 것, 즉 새로운 존재적 의는 단지 첫째 것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통해 새로운 인간 존재와 새로운 순종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첫째 것과 동일하게 중요한 관건이다. 후자, 즉 옛사람이 죽는 것 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복음과 믿음과 그 모든 것이 헛되다“(8,26,12).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셨다면, 그리고 이 의롭게 하는 선물을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결코 의롭다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를 단지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것으로만 정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죄인에 대해 의롭다고 하시는 판결을 종말론과 관련짓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것을 통해 그가 진짜 새롭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듯이, 그분을 믿는 사람도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신자는 그가 더이상 죄와 관계가 없으므로 죄 사함 속에서 안전하게 쉬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매일 죄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39I, 353,33). 이것은 성도가 죄의 공격과 고난을 견디고 인내하여 성화를 이루어 결국 영화에 이른다는 개혁주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또한 이것으로써 루터가 말하는 존재적 의는 가톨릭의 주입 은혜와 완전히 구별된다. 루터가 말하는 의는 가톨릭의 의 개념과 같이 하비투스(자기에게 붙어있는 습관 개념과 비슷한 것)가 아니라, 거듭남과 함께 탄생하여 종말의 완성을 바라고 있는 종말론적 개념이다.


4) 의의 현재성과 미래성(종말론적인 완성) – 현재적 의의 시작과 종말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현재적이면서도 동시에 미래에서 완성되는 미래적인 것이다(이미와 아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때문에 인정하시는 의, 그리고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일어나는 존재적 의의 시작(Anbruch)은 현재적이며,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갖는 의는 미래적이다. 현재적 의는 미래적 의를 바라며, 약속하고 기다린다. 현재적 의는 전체적이면서도 부분적인데(sowohl total wie partiell), 관점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다는 점에서(Annahme durch Gott) 전체적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전체적이며, 새로운 존재요 새로운 순종의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부분적이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것은 시제로 보아 현재 완료형이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우리는 의롭다. 그러므로 존재적 의는 시작하는 의로서 현재적이며, 완전한 의로서는 미래적이다: 우리는 의롭게 된다(미래).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의를 기다린다. 루터는 이곳에서도 롬 8:24와 갈 5:5에서의 사도 바울과 일치한다. 그는 1530 이후로 갈 5:5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그러나 우리는 영에서 믿음으로 우리가 희망해야 할 의를 기다린다.“ 그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우리는 아직 의롭게 되지 못했다 – 그럼에도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으로 의롭게 되었다. 갈라디아서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신자의 의의 실제는 아직 소유한 것이 아니라 희망에 있다(nicht in re, sondern in spe). (이곳에서 우리는 오스카 쿨만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이미와 아직“의 모델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이미 의인이면서 아직 의인이 아니다)

7) 그러나 존재적 의는 파편과 같다. 그러므로 항상 죄 사함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죄 사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의는 단지 시작이며 파편과 같이 단편적이기 때문이다(erst nur ein Anfang und Bruchstueck).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완전한(eindeutig)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아직도 „육“으로 되어 있는 옛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 하나님 앞에 새로운 존재로서는 설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옛사람을 지니고 있으므로(hat neben sich),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죄인으로 남아 있고, 그가 새롭게 순종하게 되었을지라도 저주받은 죄인이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이제 성화를 시작하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사해주시고 의롭다하셨기 때문에(39 I, 228,7), 그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고, 죄 사함과 칭의는 항상 그리스도 때문에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의 완전한 의로서 그들의 불완전하고 조각난 의를 덮으시고 완전하게 보이도록(aufgewertet),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대리하셔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는 인간의 존재적 의를 가르치고, 이곳에서 다시 „그리스도 때문에“를 가르치는 루터의 변증법적 방법을 잘 볼 수 있다.


III. 의인이면서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

우리는 I.항 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외부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으나, II.항에서는 실제로 인간이 (부분적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 대해 다루었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모순적이고 긴장된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실존적 삶을 통합적으로 다룬다. 루터가 서로 반대되는 명제(의인 – 죄인)를 그대로 인정한 것을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의인이면서 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판결에 따라 완전한 의인이면서도 동시에 그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경우에는 완전한 죄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생 완전한 죄인으로 살면서,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아 완전한 의인으로 산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분리된 두 자아로 사는 것이 아니다. 즉, 나는 어차피 육신으로는 죄인이므로 육신이 죄를 짓도록 방치하지 않는다(영지주의). 이와는 반대로 완전한 의인과 완전한 죄인은 서로 상극이 되어 내 안에서 싸운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 대신 싸우신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부분적으로 의인이며(죄를 짓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죄인이다(죄와 싸우기 때문에). 싸우는 나는 상처투성이가 되고 때로는 피를 흘리고 넘어진다. 이것은 내가 아직도 죽어야 할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매일 내 육신을 내어주어 심판을 받게 하고 새롭게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점차 죄에 대해 자유롭게 되며, 죽고 부활하여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

1) 완전한 의인(하나님의 판결) – 완전한 죄인(존재 자체)

그러므로 루터의 유명한 공식인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도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죄 사함을 통해 의인이며, 그리스도 때문에 그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판결에 따라 의인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 존재 자체로는 죄인이다. „의인이면서 죄인이다“는 말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통용된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엄격한 얼굴의 관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큰 긍휼의 관점에서, 혹은 그리스도께서 없는 나 자신의 관점에서, 반대로 나를 대신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없는 나 자신으로는 죄인이지만, 나를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인이 아니다 “. 이러한 이중성이 그리스도인 삶 전체를 동행한다 .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엄청난 파라독스라는 것을 보여주며, 어떠한 이성도 어떠한 율법적 생각도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다: 같은 한 사람에게 의인이며 죄인이라는 것이 동시에 유효하다는 것과, 이 양자가 부분적이 아니라 완전하다는 것, 즉 부분적으로 의롭고 부분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죄인이고 완전한 의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이렇게 놀라운 은혜로 대하신다.

2) 부분적 의인 – 부분적 죄인: 서로 싸우는 긴장이 가득 찬 공존

의롭다는 것과 죄인이라는 것의 이러한 모순적인 동시성(Zugleich)은, 그것이 이생에서는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만, 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극이 되어 싸우는 완전히 역동적인 관계이다(Verhältnis voller Bewegung des Widereinander).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죄 사함을 통해 우리가 받은 믿음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셨고, 그분께서 우리 옛사람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의인이면서 죄인“이라는 말은 첫째 의미(완전한 의인 – 완전한 죄인)를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주로 하나님의 판결이라는 관점에서 완전한 의인이며, 인간 존재의 관점에서 완전한 죄인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인간이 비록 죄인이지만 성령님을 덧입고 옛사람과 싸운다는 점에서 의롭다고 한다:


IV. 믿음과 열매(fides und fructus) – 칭의의 필연적 열매

루터는 행위를 매우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의학에서도 성화의 표식으로서 행위(선행, 열매)를 중요하게 여긴다. 실천적인 청교도들은 행위를 더욱 강조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신앙과 정서“에서 루터에 버금가는 날카로움과 정렬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변화된 정서가 무엇이지를 설파했다. 행위란 외적인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칭의로 말미암은 내적인 변화까지도 포함한다. 즉 칭의의 내적, 외적 열매를 의미한다. 에드워즈는 칭의의 열매로써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감정을 9개로 정리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소망, 사랑과 (죄에 대한) 미움, 거룩, 기쁨, 슬픔, 감사, 긍휼, 사랑. 아더 핑크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원받는 믿음은 오직 경험적인 경건과 개인적인 경건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

루터가 행위를 강조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루터의 제자들 중에서도 그의 칭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열매 없는 거짓 믿음을 참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생겼기 때문이다(반율법주의자). 그뿐 아니라 행위는 칭의의 결과이므로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위가 구원을 일으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는 행위를 율법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알려둔다. 이것은 다음 주제인 율법과 복음에서 다룬다.
그러면, 루터가 „외적인 의“라고까지 하면서 강조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3)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내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표적과 인장“이다
–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증거이다

루터는 이 모든 것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주기도문의 다섯째 청원과 이것을 보충한 마 6:14-15 를 들었다. 그는 이것이 가장 명확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그의 이러한 생각을 특별히 강력하게 표현했다. 그는 이곳에서 이중의 죄 사함에 대해 말한다: 내적인 죄 사함은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접함으로써 일어나고, 외적인 죄 사함은 „행위“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영접함으로써 일어나는데, 이것은 내 이웃을 용서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는 이 둘째 것을 „표적과 인장“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성례와 비슷한 수준으로 간주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이중으로 증거하시는데, 이것은 내적으로,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는 행위를 통해(durch die Werke, die er in uns wirkt) 외적으로 증거하신다(40 I,577,7,20).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순종을 통해서도 와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인간을 새롭게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4) 사람에게 실행하는 사랑이 외적인 의를 증명한다

루터가 두 가지의 죄 사함을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루터가 큰 죄를 지은 여자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눅 7:47 ), 그리스도인의 이중의 의 에 대해 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통해 받는, 하나님 앞에서의 내적 의와 사람 앞에서 보이는 외적 의를 구분하는데, 칭의를 통해 내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랑이 이웃에게 표현되는 것으로서 이 외적인 의가 증명된다. 전자는 „영의 감추인 것으로“, 후자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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