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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신문 기고에 관하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3,114회 작성일 14-09-18 02:09

본문

(기존에 올렸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올립니다.)

나는 한병철의 글을 다루면서 내가 배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려 한다. 우선 권력의 성격에 대한 두 가지 구분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권력을 설립하고, 유지시키는 외부적 주체가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를 스스로 분열해야만 하는 세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분열해야만 중핵들이 살아남을 수 있지만, 증식된 세포들에게 영양분을 채워줄 수 없는. 하지만 그 증식된 세포들은 끝없이 증식되도록 유혹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가진 성격을 생각한다면, 한병철이 말하는 die setzende Macht의 억압적 성격은 처음부터 부수적이다. 자본주의의 방식은 처음부터 유혹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는 끝없이 증식해야만 하고, 그 유혹의 범주 내부로 더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혹의 범주 안에 들어온 사람들(내면적 부르주아지)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상황 속에서 그들 대부분은 자기 착취를 해도 더 이상 뽑아낼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소진이라는 현상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자들에게 번 아웃이 발생하든 말든 그것은 중요한 현상이 아니다. 나는 그가 번 아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일종의 자본주의적 유혹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자본주의는 명령한다. “번 아웃을 돌보라!”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한,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욕망의 고갈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몰락하기 시작한 중산층이 “번 아웃”을 걱정해야 할 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잃어버린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한병철은 자기착취라는 관점에서 가난한자와 부자를 동등하게 만들어준다. 마치 자본주의가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자유)을 모두에게 동등하게 준 것처럼, 우리는 번 아웃에 대한 염려를 공평하게 갖게 된다. 따라서 특징적인 것은 번 아웃보다는 번 아웃에 대한 염려이다. ‘너의 번 아웃을 염려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로사회”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번 아웃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의 글에게 내가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외부를 향한 분노가 불가능하다’는 테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억압에 의한 실패가 아닌, 자기 자유의 실패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병철의 주장이고, 흥미로운 주장이다. “Warum heute keine Revolution möglich ist” 제목은 무시하도록 하자. “왜 오늘날 유의미한 정치적 투쟁이 불가능한가?” 정도로 물음을 축소하는 것이 그의 글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2872.html

2012년 5월 한겨레신문에 한병철과 연세대 사회학과 신진욱 교수의 대담이 실린 적이 있다. 대담이라고 하지만, 신진욱이 한병철을 인터뷰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여기서 신진욱은 푸코를 인용하며 자기착취가 사실은 권력에 의한 훈육이라는 것을 논증하려 한다. 그렇지만 신진욱의 출발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한병철의 주장이 갖는 핵심은 ‘사회착취가 아니라 자기착취이다’가 아니라, ‘그들은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게 되었고, 그들은 스스로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것이 자기착취이다’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심리구조에 있다. 비판가로서 한병철이 이런 심리구조의 발생 자체에 어떤 훈육이나 억압도 없었다고 전제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외부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리 구조이지, ‘훈육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주장은 더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러한 심리 구조가 사회적 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한병철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회적 투쟁은 원천적으로 그러한 내적 심리구조에서의 탈출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병철의 문장을 검토해보자.

Auch der Klassenkampf verwandelt sich in einen inneren Kampf mit sich selbst. Wer heute scheitert, beschuldigt sich selbst und schämt sich. Man problematisiert sich selbst statt der Gesellschaft.

한병철은 분노의 문제를 “자기 실패(Wer heute scheitert)”의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부터 한병철이 분노를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실패에 대한 인식은 본래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 혹은 혐오 연민으로 귀결된다. 반면 사회에 대한 분노는 처음부터 정의에 대한 인식, 잘못된 상황을 되돌려야 한다는 의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최근 방영했었던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드라마가 있다. 조인성이 정신분열증 환자로 나오는 드라마이다. 여기서 조인성은 정확히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단적 자기혐오와 연민이라는 정신병적 상태로 빠져들어간 인물을 연기한다. 간단한 줄거리는 그렇다. 어린 시절, 조인성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조인성과 조인성의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다), 형에게 혐의를 씌우게 된다. 그리고 조인성은 형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형은, 포크로 조인성을 찔러 죽이려한다. 그리고 그 순간 조인성의 정신 분열은 시작된다. 조인성의 정신은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모방해서 한 소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조인성은 그 가상의 소년을 끔찍이 아끼고 보호한다. 하지만 조인성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혐오(죄책감) 때문에, 그 가상의 소년은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조인성도 그 소년과 함께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게 그 소년은 조인성이 선택한 어떤 행동에 대한 연민과 혐오의 결정체이다. 이 드라마의 내용은 처음부터 조인성 내부의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조인성의 정신병적 내면의 싸움이 되는 이유는 조인성은 자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형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이 더욱 크다. 이 드라마는 법정 드라마가 아니라, 심리학 드라마이다.

다시 사회 정의의 문제와 분노로 돌아가 보자. 어떤 것을 억압으로 느끼고 분노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의의 문제라는 인식이다. 정의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불공정한 상태를 공정한 상태로 되돌려야만 한다는 당위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따라서 정의의 문제는 실패한 자가 아닌, 부정의를 알게 된 자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 혹은 그것이 실현되는 공간 확보의 문제이다. 네그리의 다중은 그런 점에서 철저하게 공통의 부를 창출하고 지키는 것이 가능한 지점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개념이다. 네그리의 최근 저서 “공동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중이 있다’가 아니라, 다중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이다. 다중이 모일 수 있는 공동의 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혹은 그 공동의 부가 이 시대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따라서 네그리의 다중이 이미 존재하는 혁명적 세력인 것처럼 표현한 한병철의 문장은 매우 부정확하다. 네그리는 실제로 그의 책 안에서 자신의 다중 개념을 비판한 지젝과 대결하며, 다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구성해야할 어떤 것으로 설명하려 한다. 네그리도 어느 정도는 다중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자본의 편일 가능성에 대해 배제하지 않는다.
 
분노는 그것이 불가능해진 지점에서, 아니면 그것을 분노와 정의로 구성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내면의 문제로 변해버린다. “난쏘공”과 같이 모든 상황이 극도로 억압적인 삶 속에서도 이러한 메커니즘은 구성된다. 사회에 대한 배움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 혹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가장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더 좋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유혹과, 자기 자신의 못남에 대한 혐오와 연민이 공존한다. “난쏘공”에 나오는 꼽추의 아내는 그녀가 가진 가장 선량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정신의 속박 속에 있다. 그리고 작품 속 사회적 문제와 싸우는 인물들이 가장 고통을 겪는 지점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실패에 대한 좌절이 아닌, 정의롭지 못한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감이다.   
 
한병철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중요하다. 사람들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고, 따라서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낀다. 그리고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믿지 못한다면, 그의 내면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자살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즉시, 외부를 향한 분노의 불가능으로 바뀌지 않는다. 외부에 부정의가 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면, 내면의 악순환은 사라진다. 그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병철과 신진욱의 대화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신진욱처럼 외부에 억압하는 권력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야 한다. 그리고 네그리처럼 공통의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면의 악순환을 빠져나올 길이 없다. 내면의 악순환에 대한 인식도 당연히 해답은 아니다. 외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내면을 악순환으로 인식할 길이 없다.

비판가로서 한병철의 기고문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가상의 자유가 얼마나 비참한 형태의 모습인지를 묘사하는 것에 있어서 불성실하다. 그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치 있게 묘사하지만(물론 나는 공유경제를 공산주의적 상품으로 설명한 그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혁명이 불가능한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비판가로서의 한병철이 아도르노와 같은 비판가와는 다른 점이다. 가장 암울한 사회의 형상에 대한 묘사는 그것이 구원의 관점에서 발생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글은 기분 상하지 않고 읽힐만하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절망에 직면하여 아직도 유일하게 책임을 질 수 있는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물을 구원의 관점에서 서술하였던 것처럼 관찰하는 시도일 것이다. 인식은 구원에서부터 세계에로 비추어지는 빛 이외에 다른 빛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추후의 구성 속에서만 파헤쳐지며, 단지 하나의 기술로 되어있다. 세계가 서로 유사하게 전이되고, 이화되고, 그 틈과 균열을 드러나게-언젠가 메시아적인 빛 속에서 세계가 궁핍하고도 왜곡된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모습처럼-해주는 관점이 생산되어야 한다. 그 어떤 자의성이나 폭력 없이, 대상과의 접촉에서 그러한 관점을 얻어내는 것, 사유에는 바로 이러한 행위가 중요하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태가 너무나 명백하게 그러한 인식을 부르기 때문이며, 또한 한번 포착된 완전한 부정성은 그 정반대의 왼손 글씨와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그것이 현존의 세력권-그 세력권이 아주 작을지라도-에서 벗어난 관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구속력을 얻기 위해서 모든 인식은 존재하는 것에서 얻어져야만 하며, 바로 그 대문에 인식은 자신이 벗어나고자 했던 궁핍과 왜곡에 의해 패배되기도 한다. 절대적인 것을 위해 사유가 자신의 제한성에 더욱 강렬하게 대항할수록, 사유는 더욱 무의식적으로, 더욱 불행하게 세계에 귀속되고 만다. 가능성을 위해 사유는 자신의 불가능성까지도 파악해야만 한다. 사유에 가해진 요청이 중요한 것이지, 구원의 실제성과 비실제성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T. W. 아도르노 지음, 최문규 옮김, 『한줌의 도덕-상처입은 삶에서 나온 성찰』, 솔, 1995.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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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가아닌양님의 댓글의 댓글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ㅎㅎ 다시 글을 내릴 수 없을 때에는 다른 분들이 글을 많이 올려서 제 글이 아래로 쭉쭉 내려가길 기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는 겨울이 오기 전 날씨와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즐기는 것도 방법 이리라 생각합니다. 베를린은 날씨가 화창했었다니 부럽군요. 저는 오늘 날씨가 화창했는지 기억도 안나네요~

anpigone님의 댓글

anpigo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반면에 구속력을 얻기 위해서 모든 인식은 존재하는 것에서 얻어져야만 하며, 바로 그 때문에 인식은 자신이 벗어나고자 했던 궁핍과 왜곡에 의해 패배되기도 한다. -

이게 무슨 뜻인가요?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안되네요............ ;;
성가시지 않으시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고맙습니다. 오래간만에 공부하는 느낌으로 몇 번씩 정독했네요. 마지막에 소개해주신 아도르노는 정말 어려워요. 번역문이라 그런가, 독일어로 읽으면 오히려 이해가 쉬울라나?

질문 한 가지: die setzende Macht가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어요. 한병철 교수의 글에서도 확실하게 이해 못했거든요. 철학용어인가?

좋은 글 읽고 불꽃 취는 토론이 이어지면 좋겠구만 유치한 질문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gomdanji님의 댓글

gomdanji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가아닌양 님, 수정보완해 주셔서 더 이해가 잘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님의 관점과 입장에 저는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처음 한병철 씨의 글을 읽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에게는 많은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의 시점이 세월호 참사 직후였는데 당시 제 생각이 대한민국 제 1 공무원이 만약 이 글을 읽고 이해했다면 상당히 기뻐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지 이 분과 여기서 같이 토론할 수 없으니 좀 답답하긴 하지만요.

저는 철학도가 아니라서 그런 식의 글을 만들어 낼 능력은 없고 ㅎ 지난 번에 fatamorgana 님이 번역하신 곳에 제 댓글을 달았었는데 여기 다시 한 번 올립니다.

저는 매번 이 분 글을 읽을 때마다 이 세상의 주체가 체제로 귀결되는 것이 저에게는 문제라고 보입니다. 이 세상의 주체는 결국은 인간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체제는 그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인간들이 만들고 구축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인간들이 변화시키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체제 하에 많은 인간들이 종속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는 현 한국의 정치, 사회 병리학적인 현상을 '일반화'시켜 여기서도 신자유주의 현상을 주체화 시키고 이걸로 귀결점을 만들어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시점에 완벽해진다." -한국에서 북한을 정치에 이용하는 방법처럼- 무슨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그리고 '이렇게 된다'라고 하니 그건  '철학적인 관점'에서도 좀 그렇습니다. 철학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체제 하의 과정에서 이런 현상을 보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상이지 귀결점은 아니라고 봅니다. 함부로 일반화 시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병리학적인 것이지 이를 바라보고 인간들이 바꾸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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