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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유럽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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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1-18 11:53 조회3,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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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코로나 사태를 방어하는 데 실패해 병상이 동나가는 상황이라, 몇몇 환자들이 계속 그나마 병상이 남은 독일로 이송되고 있습니다.

국가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잠재적인 독일인 환자를 위해 남의 나라 환자가 급해도 외면하고 빈 병상을 남겨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할 겁니다.

하지만 이는 우선 서유럽의 평균적인 인도주의적 시선에서 보았을 때 수용하기 어려운 입장입니다. 각 국가간 국민들 상호의 거리감이 훨씬 큰 한중일 사이에서는 꽤나 고려해 볼만한 입장이고, 대중 사이에서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 더 우세하겠지요. 예를들어 중국이나 일본에서 감염병 환자가 창궐해 병상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해도, 한국인 대부분은 "쯧쯧" 정도의 반응을 보일 뿐, 그 환자들을 한국에 데려와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일부만 그런 생각을 할 거고, 정부 차원에서 그런 활동을 추진한다고 하면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정도까지는 안 가더라도 싫어하는 여론이 강할 거고요. 하지만 서유럽 주요 국가들 국민들 사이의 통상적인 윤리적 감각으로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 겁니다.

물론 유럽인들이라고 도덕성이 엄청난 성인군자들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독일인들이 보기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의 이웃나라들이 대처를 잘 못해서 환자가 폭발적으로 나오는 마당에 왜 뒷처리는 우리가 도와야 하냐, 애초에 재들도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열심히 대응했으면 이렇게 안 됐을텐데,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윤리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돕긴 하지만, 속터지는 노릇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윤리적 차원을 제끼더라도, 실용적, 정치적인 차원에서 수용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럽연합 국가들, 회원국 전부가 아니라면 적어도 중추적인 국가들 사이에서는 서로 열심히 돕는다는 모양새가 유지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잖아도 애초에 국가 수준의 결속에 비하면 헐겁기 짝이없는 연합이고, 독일의 남는 병상에 이웃나라 환자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연합 내의 분위기는 더 격하게 썰렁해 질 겁니다.

연합의 결속을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독일은 회원국을 돕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계속 보이면 독일인들 중에서도 특히 더 국가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발감이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여론은 정확히 AFD에 가는 표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고요. AFD 의 성장을 방치할 수는 없는 독일 주류 정파의 입장에서는 이런 흐름을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현재까지 (다행히) 주류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정파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는 겁니다.

이 딜레마는 또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데, 폴란드를 위시한 동쪽 회원국들 중에는 요 근래 보수 우파 정권이 지지를 얻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동성애 탄압, 낙태 불법화 등의 조치가 돌출하고 있는데, 이는 서유럽 자유주의 기조와는 충돌하는 것입니다.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프랑스, 독일 등의 나라에서는 이런 흐름을 막고 싶어 하겠지만, 폴란드 등에서는 이러한 방향의 개입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유럽연합 측에서 이들을 간단히 퇴출시켜버릴 수는 없는데, 그랬다가 이들이 러시아에 힘을 보태게 되면 유럽연합에 안 좋은 영향을 주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단순히 독일 정부에서 요령을 잘 쓰면 타개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조건이 아니라, 근대 국가라는 강고한 상징적 틀이 현존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곤경입니다. 여러가지 일들이 대체로 잘 돌아가고, 다들 살림살이가 그럭저럭 괜찮았을 때에는 마치 정말로 사실상 국경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위기가 닥쳐오면 사실 국가라는 경계가 여전히 가장 강력한 틀임이 드러나는 거지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뮌스터에 병상이 부족해 환자를 브레멘으로 이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프랑스에 병상이 부족해 환자를 독일로 이송하는 것은 그것만큼 당연해지지 못했다는 겁니다.

히틀러는 "나는 부자가 빈자를 돕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독일인이 독일인을 돕길 원한다" 는 말로 계급갈등을 무력화 하고 국가주의적 틀로 사람들을 묶었습니다. 과연 이런 흐름을 유럽 연합에서도 일궈낼 수 있을까요? "나는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돕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유럽인이 유럽인을 돕길 원한다" 로 이행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나는 부유한 한국/중국/일본이 가난한 라오스/방글라데시를 돕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시아인이 아시아인을 돕길 원란다" 로, "나는 부국이 빈국을 돕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지구인이 지구인을 돕길 원한다" 로 확장될 수 있을까요?)

아시아에서는 그런 것을 일궈내는 게 과거 일본 제국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도 일본은 스스로 '일본' 을 버리지 못했고, 실패했죠. 과거 중국땅에서 그랬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도 그러했듯, 처참한 살육과 식량난 등을 동반하는 피튀기는 충돌을 거친 이후, 그러고도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한 나라라는 상징적 경계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고, 무력을 동반한 그런 통일이 아니라면 (그게 아니면 전국시대에 드물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한 나라가 스스로 통치권을 단념하고 다른 나라에 흡수되는 방식으로)  통일은 있을 수 없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국가들을 여전히 유지한 채로 통합을 한대 봐야, 예컨대 폴란드 정부가 "우린 동성애 탄압하고 낙태권 박탈할건데?" 라고 나올 때 연합이 "그러지 마라" 라고 해도 폴란드 사람들이 "왜 우리의 주권을 탄압하려고 하냐? 수용 못해!" 라고 나오면 이걸 꺾으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폴란드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를 폴란드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폴란드 정부에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면서 전쟁터에 나서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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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ssom님의 댓글

Blossom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코로나 병상 문제로 폴란드와 한중일까지 언급하시면서 엄청 길게 쓰셨는데
지금 상황은 심플하게 응급상황이죠.
EU solidarity를 위해서 여유가 있는 곳은 독일이든 어디든 서로 원조해야하는 상황입니다. EU stimulus package를 €2 trillion으로 협의하는 중인데 지금 병상이 문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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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thmines님의 댓글

Rathmine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굳이 한국중국일본을 비교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말그대로 유럽연합인 EU와 동북아시아 3국은 엄청나게 다른 상황인걸 아실테죠 독일이 더 윤리적으로 뛰어나서 받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Schmidt님의 댓글

Schmid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비상상황일 수록 서로 이해관계가 더욱 또렷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을 잘 반영한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 추천 1

덕이아빠님의 댓글

덕이아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꽤 오랜만에 세르나씨의 글을 읽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 먼저 앞섭니다. ㅎ
그렇지요, 하기싫은 데 해야 하고, 하자니 밟히는 게 많고, 길게 가면 밑장을 보여줄 수 밖에 없는데 신축년 초반에 상황 정리만 된다면 모두가 해피한 상황이겠죠. 그나저나 감염되어 건강이 위태로운 분들만 제외하면...어떤이에게는 이 상황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점에 있어서 뭔가 큰 폭의 변화를 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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