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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에 대해서 알리려면 가장 공신력 있는 1차사료를 읽어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 : [전문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
부제목 : 당시 일본군 위안부들 중 일군(一群)의 모습을 드러내는 미군의 일본군 포로 심문 보고서 자료들

    미디어워치 편집부
    등록 2016.09.30 10:55:19



※ 이 글은 김동호 작가님이 과거에 개인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을 김 작가님의 허락을 얻어 미디어워치가 새로이 재정리해 공개하는 것입니다.


이전 기사 : 한국인 위안부 관련 미군 포로 심문 보고서 내용을 왜곡한 뉴시스

앞서 민간통신사인 뉴시스가 한국인 위안부 관련 미군 포로 심문 보고서 내용을 어떻게 왜곡하였는지는 해설한 바 있다.

아래는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의 내용을 전부 번역한 것이다.

신경써서 번역했지만, 물론 오류가 있을 수는 있으니 원문과 함께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괄호 안의 글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보충한 것이다. 원문은 위키소스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49?

번역문, 원문 이미지, 그리고 앞서 지적한 바 있는 왜곡 및 누락 번역 뉴시스 기사 캡춰를 모두 공개하니 셋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다.

원문 이미지 중 가장 나중의 것에는 한국인 위안부 20명과 일본인 위안소 업자 2명의 이름과 나이도 기재되어 있다. 기재를 담당한 미군이 한국식 이름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지, 원래 한국 이름이 무엇인지 잘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 ■ ■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

1 Oct 1944
1944년 10월 1일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인디아-버마 전역에 부속된

미합중국
전쟁 정보국
심리전팀?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Place interrogated: Ledo Stockade
Date Interrogated: Aug. 20 - Sept. 10, 1944 
심문 일자 : 1944년 8월 20일 - 9월 10일

Date of Report: October 1, 1944
보고 일자 : 1944년 10월 1일

By: T/3 Alex Yorichi
심문 주체 : 알렉스 요리치

Prisoners: 20 Korean Comfort Girls
포로 : 2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

Date of Capture: August 10, 1944
생포 일자 : 1944년 8월 10일

Date of Arrival: August 15, 1944
도착 일자 1944년 8월 15일
at Stockade 




PREFACE
서문

This report is based on the information obtained from the interrogation of twenty Korean "comfort girls" and two Japanese civilians captured around the tenth of August, 1944 in the mopping up operations after the fall of Myitkyina in Burma.

이 보고서는 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 소탕 작전 중 8월 10일에 포로가 된 2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과 2명의 일본인 민간인에 대한 심문으로부터 기초한 것이다.

The report shows how the Japanese recruited these Korean "comfort girls",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lived and worked, their relations with and reaction to the Japanese soldier, and their understanding of the military situation.

이 보고서는 일본인들이 이 한국인 "위안부들"을 어떻게 모집했으며, 그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일했으며, 그들의 일본 군인과의 관계와 군대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comfort girl" is nothing more than a prostitute or "professional camp follower" attached to the Japanese Army for the benefit of the soldiers. The word "comfort girl" is peculiar to the Japanese. Other reports show the "comfort girls" have been found wherever it was necessary for the Japanese Army to fight. This report however deals only with the Korean "comfort girls" recruited by the Japanese and attached to their Army in Burma. The Japanese are reported to have shipped some 703 of these girls to Burma in 1942.

"위안부"는 병사들을 위해 일본군에 붙여진 창녀 혹은 "직업적인 종군 민간인"에 다름 아니다. "위안부 comfort girl'이란 용어는 일본인들 특유의 표현이다. 다른 보고서들도 이 "위안부들"이 전투하는 일본군들을 위해 필요한 어느 곳이든 발견됨을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그러나 일본인에 의해 모집되어 버마의 그들 군대에 붙여진 한국인 "위안부"들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다. 일본인들은 1942년에 버마로 이러한 위안부들을 703명 가량 데려왔다고 보고된다.


RECRUITING
모집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The nature of this "service" was not specified but it was assumed to be work connected with visiting the wounded in hospitals, rolling bandages, and generally making the soldiers happy.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1942년 5월초, 일본인 업자들은 새로 정복된 동남아시아의 일본 영토로 갈 "위안 서비스"을 위한 한국인 여자들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 "서비스"의 성격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붕대를 감아주고, 일반적으로 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 설명되었다.이 업자들의 권유는 풍성한 돈, 가족의 빚을 청산할 기회, 쉬운 일, 새로운 땅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장밋빛 전망 등이었다. 이러한 거짓된 설명 하에 많은 여자들이 해외에서의 일을 위해 모집되었고 선금으로 몇 백원의 보상을 받았다. 

The majority of the girls were ignorant and uneducated, although a few had been connected with "oldest profession on earth" before. The contract they signed bound them to Army regulations and to war for the "house master" for a period of from six months to a year depending on the family debt for which they were advanced.

여자들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무학이었는데, 개중 몇몇은 모집 이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다. 그녀들이 서명한 계약은 미리 선금으로 지급된 가족 연대채무의 액수에 따라 6개월에서 1년까지의 기간 동안 그녀들을 위안소 업자와 군의 통제하에 놓이게 하였다.

Approximately 800 of these girls were recruited in this manner and they landed with their Japanese "house master" at Rangoon around August 20th, 1942. They came in groups of from eight to twenty-two. From here they were distributed to various parts of Burma, usually to fair sized towns near Japanese Army camps.

대략 800여명의 이 여자들은 위의 방법으로 모집되었으며 그들은 8월 20일 즈음에 랭군에 일본인 '위안소 업자 house master'들과 함께 상륙하였다. 그들은 8명에서 22명 사이 그룹으로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버마의 여러 곳으로 배치되었는데 주로 일본군 병영 근방의 규모있는 도시에 배치되었다.

Eventually four of these units reached the Myitkyina. They were, Kyoei, Kinsui, Bakushinro, and Momoya. The Kyoei house was called the "Maruyama Club", but was changed when the girls reached Myitkyina as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objected to the similarity to his name.

이들 그룹 중 네 그룹은 미트키나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게 될 위안소들의 이름은) 쿄에이, 킨스이, 바쿠신로, 모모야였다. 쿄에이 위안소는 원래 "마루야마 클럽"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미트키나 수비대 사령관 마루야마가 해당 위안소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같은 것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여 이 여성들이 도착하기 전에 개칭되었다.

PERSONALITY
인성

The interrogations show the average Korean "comfort girl" to be about twenty-five years old, uneducated, childish, and selfish. She is not pretty either by Japanese of Caucasian standards. She is inclined to be egotistical and likes to talk about herself. Her attitude in front of strangers is quiet and demure, but she "knows the wiles of a woman." She claims to dislike her "profession" and would rather not talk either about it or her family. Because of the kind treatment she received as a prisoner from American soldiers at Myitkyina and Ledo, she feels that they are more emotional than Japanese soldiers. She is afraid of Chinese and Indian troops.

심문은 평균적인 한국인 "위안부"가 대략 25세 내외이며, 무학이며, 유치하며, 이기적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일본인 혹은 코카시안의 기준으로도 예쁘지 않다. 그녀는 자기중심적이며 그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낯선 자들 앞에서의 그녀의 태도는 조용하며 점잖빼는 모습이지만, "여자의 속임수를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며 그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미트키나와 레도에서 미군으로부터 포로로서 받은 친절한 대접 때문에, 그녀는 미군이 일본군에 비해 보다 정에 무르다고 느낀다. 그녀는 중국군과 인도군을 두려워한다.

LIVING AND WORKING CONDITIONS
생활과 업무 조건

In Myitkyina the girls were usually quartered in a large two story house (usually a school building) with a separate room for each girl. There each girl lived, slept, and transacted business. In Myitkina their food was prepared by and purchased from the "house master" as they received no regular ration from the Japanese Army. They lived in near-luxury in Burma in comparison to other places. This was especially true of their second year in Burma. They lived well because their food and material was not heavily rationed and they had plenty of money with which to purchase desired articles. They were able to buy cloth, shoes, cigarettes, and cosmetics to supplement the many gifts given to them by soldiers who had received "comfort bags" from home.

미트키나에서 여성들은 대개 큰 2층 가옥(주로 학교 건물이었던)에서 생활했으며 각 여성마다 하나의 독립된 방을 제공받았다. 그 방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생활하고, 자고, 비즈니스를 행하였다. 미트키나에서 그들의 음식은 위안소 업자를 통해 제공받아 구매하였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지는 않았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버마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 이는 버마에서의 2년째 생활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은 (병사들과 달리) 음식과 물품이 심하게 통제되어 배급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구매할 많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잘 살았다. 그들은 옷, 신발, 담배, 화장품을 살 수 있었으며 집으로부터 "위안 가방"을 우송받은 병사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While in Burma they amused themselves by participating in sports events with both officers and men, and attended picnics, entertainments, and social dinners. They had a phonograph and in the towns they were allowed to go shopping.

버마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장교들과 다른 남자들과의 운동 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소풍과 각종 오락, 사교적 저녁 식사 등에 참가하며 스스로를 즐겁게 하였다. 그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PRIOR SYSTEM
(이용의) 우선순위 시스템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transacted business were regulated by the Army, and in congested areas regulations were strictly enforced. The Army found it necessary in congested areas to install a system of prices, priorities, and schedules for the various units operating in a particular areas. According to interrogations the average system was as follows:

그들이 일하는 조건은 군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위안소 이용이 많아) 붐비는 지역에서는 규칙이 엄격히 적용되었다. 군은 이용이 붐비는 지역에서 (직위에 따른) 차등 가격, (직위에 따른 위안소 이용의) 우선 순위, 특정 지역에서 작전하는 다양한 부대의 스케쥴 등을 고려한 위안소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1. Soldiers

10 AM to 5 PM

1.50 yen

20 to 30 minutes
2. NCOs

5 PM to 9 PM

3.00 yen

30 to 40 minutes
3. Officers

9 PM to 12 PM

5.00 yen

30 to 40 minutes


1. 사병 :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 1회 이용 시간 20분에서 30분. 요금 1.5엔

2. 하사관 : 오후 5시에서 오후 9시. 1회 이용 시간 30분에서 40분. 요금 3엔

3. 장교 : 오후 9시에서 자정. 1회 이용 시간 30분에서 40분. 요금 5엔


These were average prices in Central Burma. Officers were allowed to stay overnight for twenty yen. In Myitkyina Col. Maruyama slashed the prices to almost one-half of the average price.
위의 요금은 중부 버마에서 평균 가격들이었다. 장교들은 20엔을 내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미트키나에서 마루야마 사령관은 위안소의 요금을 평균 가격의 거의 절반으로 깎아버렷다.

SCHEDULES
일정

The soldiers often complained about congestion in the houses. In many situations they were not served and had to leave as the army was very strict about overstaying. In order to overcome this problem the Army set aside certain days for certain units. Usually two men from the unit for the day were stationed at the house to identify soldiers. A roving MP was also on hand to keep order. Following is the schedule used by the "Kyoei" house for the various units of the 18th Division while at Naymyo.

병사들은 종종 위안소가 붐비는 것에 대해 불평하였다.  많은 상황에서 그들은 이용을 하지 못하였으며, 군은 이용 시간 초과에 대해 매우 엄격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은 특정 부대에 대해 특정 이용 일자를 지정하였다. 대개 부대에서 2명이 차출되어 위안소에 상주하며 병사들의 신원을 (위안소의 중복 이용를 하지 못하도록) 확인하였다. 위안소의 질서 유지를 위해 헌병 또한 순찰하였다. 아래는 나이묘의 제 18사단의 여러 부대에 대해 쿄에이 위안소에서 사용된 일정이다.

Sunday

18th Div. Hdqs. Staff
Monday

Cavalry
Tuesday

Engineers
Wednesday

Day off and weekly physical exam.
Thursday

Medics
Friday

Mountain artillery
Saturday

Transport


일요일 : 제 18사단 사령부

월요일 : 기병대

화요일 : 공병대

수요일 : 휴일 겸 주간 신체 검사

목요일 : 의무병대

금요일 : 산악 포병대

토요일 : 수송부대


Officers were allowed to come seven nights a week. The girls complained that even with the schedule congestion was so great that they could not care for all guests, thus causing ill feeling among many of the soldiers.

장교들은 일주일 중 아무 날이나 이용이 가능하엿다. 여성들은 이러한 (지정일이 있는) 스케쥴에도 불구하고 붐빔이 너무 심하여 모든 손님을 다 받을 수가 없어서 이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기분이 나쁘게 되었다고 불평하였다.

Soldiers would come to the house, pay the price and get tickets of cardboard about two inches square with the prior on the left side and the name of the house on the other side. Each soldier's identity or rank was then established after which he "took his turn in line". The girls were allowed the prerogative of refusing a customer. This was often done if the person were too drunk.

군인들은 위안소에 와서 돈을 지불하고 표를 샀는데, 표는 2인치 정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왼쪽에는 직급이 찍혀 있고 오른 쪽에는 위안소 명칭이 적혀 있었다. 각 군인의 직급은 그가 어느 줄에 설 지 결정한 다음 확인되었다. 위안부들은 고객을 거절하는 특권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종종 고객이 너무 취했을 때 발생하였다.

PAY AND LIVING CONDITIONS
급여와 거주 조건

The "house master" received fifty to sixty per cent of the girls' gross earnings depending on how much of a debt each girl had incurred when she signed her contract. This meant that in an average month a girl would gross about fifteen hundred yen. She turned over seven hundred and fifty to the "master". Many "masters" made life very difficult for the girls by charging them high prices for food and other articles.

위안부 업자는 여성들이 처음 계약시 받은 돈(선대금)이 얼마냐에 따라 위안부들의 총수입의 50에서 6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였다. 이는 평균적인 한 달 동안 한 위안부가 1500엔 가량의 수입을 올리며 이 중 750엔을 업자에게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업자들은 식료품이나 기타 물품을 위안부들에게 고액을 받고 팔아 이 여성들을 힘들게 하였다.

In the latter part of 1943 the Army issued orders that certain girls who had paid their debt could return home. Some of the girls were thus allowed to return to Korea.

1943년 후반에 군은 (위안소 업자에게) 빚을 다 갚은 여성들은 귀국할 수 있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위안부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허락받았다.

The interrogations further show that the health of these girls was good. They were well supplied with all types of contraceptives, and often soldiers would bring their own which had been supplied by the army. They were well trained in looking after both themselves and customers in the matter of hygiene. A regular Japanese Army doctor visited the houses once a week and any girl found diseased was given treatment, secluded, and eventually sent to a hospital. This same procedure was carried on within the ranks of the Army itself, bu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a soldier did not lose pay during the period he was confined.

추가적인 심문은 이 여성들의 건강이 매우 좋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피임 기구들을 잘 공급받았으며, 종종 병사들이 군에서 지급받은 피임도구들을 지참하고 왔다. 위안부들은 자기 자신들과 고객들을 위생이란 측면에서 세심하게 보살피도록 교육받았다. 일본군 군의관이 주 1회 정기적으로 위안소를 방문하였고 병에 걸린 여성이 발견되면 누구든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와 동일한 과정은 군대 자체에도 적용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군인은 병원에서 치료받은 기간에도 (위안부와 달리) 월급을 지급받았다는 점이다.

REACTIONS TO JAPANESE SOLDIERS
일본 군인들에 대한 반응

In their relations with the Japanese officers and men only two names of any consequence came out of interrogations. They were those of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and Maj. Gen. Mizukami, who brought in reinforcements. The two were exact opposites. The former was hard, selfish and repulsive with no consideration for his men; the latter a good, kind man and a fine soldier, with the utmost consideration for those who worked under him. The Colonel was a constant habitu? of the houses while the General was never known to have visited them. With the fall of Myitkyina, Col. Maruyama supposedly deserted while Gen. Mizukami committed suicide because he could not evacuate the men.

일본군 장교들과의 관계에 대한 심문에서는 단지 2명의 의미있는 이름만이 등장하엿다. 그들은 미트키나 수비대 사령관 마루야마 대좌과 증원부대로 온 미즈아키 소장이었다. 이 둘에 대한 (위안부들의) 평판은 정반대였다. 마루야마 대령은 완고하고, 이기적이며, 혐오스러웠으며 부하들에 대해 배려가 전혀 없었다. 미즈아키 소장은 선하고 친절하며 훌륭한 군인으로 자기 밑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였다.

마루야마 대좌는 (앞에서 말했듯이 위안소 요금을 절반으로 낮추어 업자와 위안부들의 원성을 샀을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위안소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나, 미즈아키 소장은 한 번도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없었다.

(위안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트키나 함락 때 마루마야 대좌는 아마도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즈아키 소장은 부하들을 탈출시키지 못한 책임감으로 자살하였다.

SOLDIERS REACTIONS
군인들의 반응

The average Japanese soldier is embarrassed about being seen in a "comfort house" according to one of the girls who said, "when the place is packed he is apt to be ashamed if he has to wait in line for his turn". However there were numerous instances of proposals of marriage and in certain cases marriages actually took place.

평균적인 일본군은 '위안소'에 나타나는 것을 당황스러워하였다. 한 위안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위안소가 붐빌 때 (군인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에 수치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나 (군인들이 위안부와 사랑에 빠져) 청혼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위안부와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All the girls agreed that the worst officers and men who came to see them were those who were drunk and leaving for the front the following day. But all likewise agreed that even though very drunk the Japanese soldier never discussed military matters or secrets with them. Though the girls might start the conversation about some military matter the officer or enlisted man would not talk, but would in fact "scold us for discussing such un-lady like subjects. Even Col. Maruyama when drunk would never discuss such matters."

모든 위안부들은 가장 최악의 고객은 만취한 자들과 다음날 전선으로 떠날 사람들이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하였다. 그러나 비록 술에 취했을 경우에도 일본군은 그 누구도 결코 군 내부의 문제나 기밀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위안부들이 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하려고 해도 장교들은 그에 응하지않았고 때로는 "여성 답지 못한 문제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꾸짖었다 한다. 마루야마 대좌조차도 취했을 때에도 그러한 문제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The soldiers would often express how much they enjoyed receiving magazines, letters and newspapers from home. They also mentioned the receipt of "comfort bags" filled with canned goods, magazines, soap, handkerchiefs, toothbrush, miniature doll, lipstick, and wooden clothes. The lipstick and cloths were feminine and the girls couldn't understand why the people at home were sending such articles. They speculated that the sender could only have had themselves or the "native girls".

군인들은 종종 고향으로부터 편지, 잡지, 신문을 받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위안부들에게 이야기했다.그들은 또한 통조림, 잡지, 비누, 손수건, 치솔, 인형, 립스틱, 옷감 등이 들어있는 "위문 가방"을 받았다고 위안부들에게 말하였다. 립스틱와 옷감은 여성용이라서 위안부들은 왜 고향 사람들이 이러한 물건을 군인들에게 보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해당 물건을 보낸 발송인이 아마도 군인들의 애인일 것이라서 (사용하던 물건을 보낸 것이라) 추측하였다.


MILITARY SITUATION
군의 상황

"In the initial attack on Myitkyina and the airstrip about two hundred Japanese died in battle, leaving about two hundred to defend the town. Ammunition was very low.

미트키나와 활주로에 대한 첫번째 공격에서 2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하였고 그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2백명을 남겨두고 퇴각하였다. (일본군의) 탄약은 매우 부족하였다.

"Col. Maruyama dispersed his men. During the following days the enemy were shooting haphazardly everywhere. It was a waste since they didn't seem to aim at any particular thing. The Japanese soldiers on the other hand had orders to fire one shot at a time and only when they were sure of a hit."

마루야마 대좌는 부하들을 넓게 산개시켰다. 다음 날 적군(미군)은 모든 곳에서 위험스러운 총격을 가했으나 특정한 목표를 겨눈 것이 아니라서 (탄약의) 낭비였다. 반면에 일본군은 적을 명중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할 때만 (연사하지 않고) 1회씩 발사하도록 명령받았다.

Before the enemy attacked on the west airstrip, soldiers stationed around Myitkyina were dispatched elsewhere, to storm the Allied attack in the North and West. About four hundred men were left behind, largely from the 114th Regiment. Evidently Col. Maruyama did not expect the town to be attacked. Later Maj. Gen. Mizukami of the 56th Division brought in reinforcements of more than two regiments but these were unable to hold the town.

적이 서쪽 활주로를 공격하기 전에, 미트키나 주둔 병사들은 북부와 서부 쪽의 연합군에게 강습을 가하기 위해 어딘가로 파송되고 있었다. 대략 400명의 병사가 남겨졌는데 주로 제 114연대였다. 마루야마 대좌는 분명 그 도시가 공격받을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제 56 사단의 미즈아키 소장이 2개 연대 이상의 증원군을 제리고 왔으나 그들로서도 도시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It was the consensus among the girls that Allied bombings were intense and frightening and because of them they spent most of their last days in foxholes. One or two even carried on work there. The comfort houses were bombed and several of the girls were wounded and killed.

연합군의 폭격이 맹렬하고 위협적이었다는 것이 위안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마지막 날들을 대부분 방공호에서 보냈다. 한 두 명은 그 와중에도 일을 수행하였다. 위안소도 폭격을 받았으며 위안부 중 몇몇이 부상당하고 사망하였다.

RETREAT AND CAPTURE
퇴각과 생포

The story of the retreat and final capture of the "comfort girls" is somewhat vague and confused in their own minds. From various reports it appears that the following occurred: on the night of July 31st a party of sixty three people including the "comfort girls" of three houses (Bakushinro was merged with Kinsui), families, and helpers, started across the Irrawaddy River in small boats. They eventually landed somewhere near Waingmaw, They stayed there until August 4th, but never entered Waingmaw. From there they followed in the path of a group of soldiers until August 7th when there was a skirmish with the enemy and the party split up. The girls were ordered to follow the soldiers after three-hour interval. They did this only to find themselves on the bank of a river with no sign of the soldiers or any means of crossing. They remained in a nearby house until August 10th when they were captured by Kaahin soldiers led by an English officer. They were taken to Myitkyina and then to the Ledo stockade where the interrogation which form the basis of this report took place.

퇴각과 최종적으로 사로잡히게 된 과정을 이야기할 때 위안부들은 다소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워보였다. 여러 이야기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 같다.

: 7월 31일 밤에 세 위안소(이때 바쿠신로 위안소는 킨스이 위안소와 통합된 상태였다)의 위안부들, 여러 가족들, 보조자들이 포함된 63명의 일행이, 작은 보트에 나누어타고 이라와디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내 와잉마우(Waingmaw) 근처의 어딘가에 상륙하였는데, 그곳에서 8월 4일까지 머물렀는데, 와잉마우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 부대를 따라갔는데 8월 7일에 소규모 접접이 일어나면서 일행이 쪼개지게 되었다. 위안부들은 3시간 간격을 두고 군인들을 따르라고 명령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명령을 따랐으나 마침내 어느 강둑에서 병사들을 놓치고 강을 건널 수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근처의 가옥에서 8월 10일까지 머무르다가 영국 장교가 인솔하는 카힌 부대(인도인 현지 부대인 듯 하다)에 의해 생포되었다. 그들은 미트키나로 이송된 후 다시 레도 진지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이 보고서의 기반이 되는 심문이 진행되었다.

 
REQUESTS
요청들

None of the girls appeared to have heard the loudspeaker used at Myitkyina but very did overhear the soldiers mention a "radio broadcast."

여성들 중 누구도 미트키나에서 사용된 확성기 방송을 듣지 못했으나 군인들이 "라디오 방송"을 언급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은 있었다(미군의 심리전 방송을 말하는 듯).

They asked that leaflets telling of the capture of the "comfort girls" should not be used for it would endanger the lives of other girls if the Army knew of their capture. They did think it would be a good idea to utilize the fact of their capture in any droppings planned for Korea.

그들은 "위안부들"을 생포했다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일본군에게) 뿌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는데, 만약 일본군 측이 그들의 생포를 알게 되면 (부대에 있는) 다른 위안부들의 생활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포 사실이 한국에 살포하기로 계획된 전단지에 활용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였다.


http://www.exordio.com/1939-1945/codex/Documentos/report-49-USA-orig.html

원문은 해당 링크에 있으며 미군이 1944년에 작성한 공문서이므로 신뢰성은 아주 높은 편입니다.
 
 
하늘빛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09 (화) 21:59 14일전 추천추천 5 반대 0
피가 거꾸고 솓는다는 느낌이 이런거군요. 어디서 허접한 쓰레기 미디어워치와 듣보잡 Exordio.com 자료로 그 아프디 아픈 역사를 왜곡하려는지...영어로 쓴글이면 아 네~그렇군요라고 할줄 아셨나요?  하다하다 별 x파리들까지.. 요즘 베리가 왜 이런겁니까? 정신건강을 위해 안오는데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늘빛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09 (화) 21:59 14일전
베플로 선택된 게시물입니다.
피가 거꾸고 솓는다는 느낌이 이런거군요. 어디서 허접한 쓰레기 미디어워치와 듣보잡 Exordio.com 자료로 그 아프디 아픈 역사를 왜곡하려는지...영어로 쓴글이면 아 네~그렇군요라고 할줄 아셨나요?  하다하다 별 x파리들까지.. 요즘 베리가 왜 이런겁니까? 정신건강을 위해 안오는데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kasse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09 (화) 22:44 14일전
'가장 공신력있는'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증인인 할머님들(남한 뿐 아니라 북한 중국 미얀마의 생존자)께서 서로 만난적 없이도 그때의 상황 환경등을 비슷하게 이야기 하십니다.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이죠. 이 글의 진위여부는 알수 없으나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보편적인 경우 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어느 한 지역 우대가 좋았던 곳도 있을 수 있었겠죠. 일본 장교중 그 당시 자신 부대에 위안부 설치를 허용하지 않은 양심적인 분도 계셨습니다.넓은 아시아중 어느지역이었는지 전쟁시작때와 후 그리고 위험지역등 지역과 장소에 따라 상황도 달랐습니다.)

당시 모든 일본군인이 위안부를 강간한 강간마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이나 양심이 있는 자는 가담하지 않았겠지요.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위안부에 대한 내용은 부각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들이 수백번 수천번 강간당한 것,폭행당한 것 인권을 유린 당한 것 은 사실이구요.  공신력있는 글을 운운하며 할머니들을 빚져서 와서 돈벌고 쇼핑도 하고 맘에 안드는 손님은 거절할수 있는 고급창녀로 표현하셨네요.

5.18민주화당시 가장 공신력 있는 언론 뉴스 신문들은 폭도라는 말로 무고한 희생을 모욕했습니다. 가장 공신력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09:48 14일전
1944년 미국과 일본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 호의적으로 서술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독재 정권의 입김이 반영된 언론과 비교할 수 없는 신뢰성입니다.

해당 시대에 중립적 제 3자가 직접 심문을 하였고 정부에 의해 작성된 공문서이므로 신뢰성은 높습니다. 단순 증언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09:58 14일전
참고로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에도 무례한 손님을 거절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심지어 술에 취해서 협박하는 손님을 싸우는 도중에 우발적으로 살해했는데, 정당방위 판결을 받고 문옥주 할머니가 무죄가 된 사례도 나옵니다.

http://m.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blio.bid=1630020

해당 책 제목은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입니다.
               
               
 
 
호모ㄴr세상에게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7:56 13일전
저자가 일본인........ 이네요... 꽤 객관적이고 신빙싱이 있겠네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08:49 14일전
해당 자료는 미국 공문서관에 있는 엄선된 자료입니다.
     
     
 
 
호프만복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2:34 13일전
엄선되어 보관되는 보고자료라고 진실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보고서 하나만 가지고 진실이라고 믿고 그걸로 모든 진위를 밝힐 수 있다면 많은 역사적인 사실이 논란이 없었겠지요.

이런 자료가 있다고 알리는것은 좀더 역사적인 시각을 다루는데 흥미로운 일일지 모르나,
이것만 가지고 상반된 증언들을 거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논리적이지 않은것 같네요.
보고자료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당연히 모든 위안부들이 보고서에 나온 버마에서와 같은 환경에 있었다고 할 수 없는것도 한 이유입니다.

또한 Exordio는 1차 출처가 아니라 2차출처입니다.
1차출처를 밝히려면 미국 공문서관의 사이트에서 어디서 이런 자료를 볼 수 있는지 밝혔어야 하겠죠.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5:45 13일전
http://texas-daddy.com/comfortwomen.htm
해당 링크에서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문서를 수령하려면 미국에 메일을 보내서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인터넷 링크를 올린 것입니다.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5:48 13일전
내셔널 아카이브 측의 싸인이 담긴 편지에서 해당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해당 문서가 공문서라는 것은 충분히 밝혀졌다고 봅니다. 더 이상의 증거를 요구하려면 직접 메일을 보내보시면 됩니다.
               
               
 
 
호프만복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2 (금) 13:04 12일전
그럼 미국 공문서관의 사이트에서는 열람할 수 없는 건가요?
     
     
 
 
kasse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7:34 13일전
'미 연방정부 기록보존소(NARA)'에서 발견된 '강압(compulsion), 그리고 사기(misrepresentation)에 의해 성노예'라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구 일본군 위안부(일명 '정신대')가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혹은 취업사기에 속아서 끌려갔음을 입증하는 문서가 미국서 발견돼 이 분야 연구와 배상문제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중략)
정 교수팀이 '미 연방정부 기록보존소'에서 발굴한 파일명 'Kunming-REG-OP-3'에 따르면, 구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정부가 강압적 또는 사기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황남석 부인을 제외한 나머지 22명의 한국인 여성들은 모두 성노예(위안부)였다. 그들은 강압(compulsion), 그리고 사기(misrepresentation)에 의해 성노예가 되었다. 1943년 7월 한국을 출발한 15명의 여성들은 싱가포르에 있는 일본 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한국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왔다. 약 300여 명의 여성들이 비슷한 사기로 성노예로 모집되어 왔다."
(중략)

장태한, 정진성 교수팀이 '미 연방정부 기록보존소(NARA)'에서 일본군 성 노예 강제 동원을 입증할 자료와 일본기업의 '기업위안소' 운영을 확인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IWG(Interagency Working Group)의 역할이 컸다.
IWG는 나치 및 그 동맹국들의 전범 기록 조사를 위해 미국 정부가 1999년 발족시킨 연방정부 합동조사단을 말한다.
IWG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국무부, 국방부, 법무부,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국립문서보관소 등의 100여명의 정부 관료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IWG의 단장은 NARA의 3인자인 부부소장이 맡는다.

(전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01297)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9:42 12일전
https://www.archives.gov/files/iwg/japanese-war-crimes/introductory-essays.pdf

https://www.loc.gov/rr/frd/Military_Law/pdf/NaziWarCrimes_Japanese-Records.pdf

iwg 보고서의 전문입니다. 해당 자료에서 위안부 강제납치를 증명하는 대목은 없습니다만? 있다면 찾아서 인용해주시길 바랍니다.
               
               
 
 
kasse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2 (금) 15:24 12일전
첫번째 링크만 봤는데 덕분에 공부가 되고 있네요.


12페이지 'coercing'이 강제란 말인건 아시죠?
The controversy over the Japanese Army’s system of coercing young women to
work as prostitutes in army field brothels, the so-called “comfort women” issue,
같은 페이지 'Enforced' 
The Comfort Women: Japan’s Brutal Regime of Enforced Prostitution in the Second World War

같은페이지 저자는 These issues led concerned parties to investigate Japanese wartime records among the holdings at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in College Park, Maryland, and at other U.S. government agencies. Thorough documentation of
Japanese war crimes and criminal activities among these holdings seemed unavailable,leading to speculation of an official cover-up. Suspicions that the U.S. government was deliberately concealing dark secrets were fueled when, instead of finding the records they sought, researchers encountered a card stating the records had been “withdrawn for security reasons,” as well as when they received a notice that requested information couldnot be located.라고도 하네요.

47페이지부터 위안부 관련텍스트 있구요,일본군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점령후 네덜란드여성포함 'Forced'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
Again, this practice was known to the Allies but no criminal charges were filed at the
trials. There was one exception. After Japan occupied the Dutch East Indies (present-day
Indonesia), the Japanese military forced many young women—including Dutch as well
as Eurasian—into providing sexual service to the Japanese. Those Japanese responsible
were punished by the Dutch authorities after the war on account of the abuse of the
Dutch women.
In the 1970s, a few writers in Japan began treating the subject as a crime committed
by the Imperial Japanese Army.98 It was not until the early 1990s that the case of the
military “comfort women” (ianfu) began to attract wide attention, following the first
public testimony of a Korean woman who had been forced into military prostitution for
the Japanese. Her account galvanized activists around the “comfort women” issue. Most
publications on the subject initially appeared in Korean and Japanese. Numerous works
have been also published in English.99 Gathering extensive oral histories, Su Zhiliang, a
historian from Shanghai, published the most comprehensive work on this topic in China
and set up a Center for the Study of Chinese Comfort Women at his university.100 In
terms of scope and impact, perhaps no other Japanese war crime has reached the level
of international publicity since the 1990s as that of the military “comfort women,” a
phenomenon helped by new interest in human rights and standards regarding sexual
violence toward women.(중략)

일본학자가 자료찾은 거 일본정부가 분실 혹은 기밀처리한거
Yoshimi Yoshiaki, a leading Japanese scholar on Japanese war crimes, made headlines
by discovering documents in the Japanese Self-Defense Agency’s library that suggested
direct military involvement. He went on to publish them in a collection of primary
documents, which included numerous ATIS reports from NARA.102 Under public
pressure, the Japanese government admitted its complicity and set up the Asian Women’s
Fund (AWF) to compensate former “comfort women” from private sources. AWF
established a History Committee in 1996 to gather and examine relevant documents
in archives in Japan, the United States, Holland, and Taiwan. Historians hired by the
AWF also interviewed former “comfort women” in Indonesia and the Philippines.
Their work resulted in a multi-volume collection of documents and a comprehensive
bibliography on the subject.

23페이지
For example, while the “comfort women” issue is of great current importance, the U.S. government did not systematically collect or create records related to the topic during or after the war.18 As a consequence,
there are very few documents pertaining to the topic in the archives. The same is true for records related to the Rape of Nanking

(더불어 여기 난징대학살도 증거부족으로 없었다고 하셔도 될 글도 가져왔어요. the official
U.S. documentation was scant. As a result, with the exception of the records produced during the postwar Class A war crimes trial of the commanding general of Japanese forces deemed responsible for the Rape of Nanking, there are few materials on this subject at the National Archives.)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08:56 14일전
미디어워치 링크 들어가면 1944년에 작성된 원문 사진이 나옵니다
 
 
MSCB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11:56 14일전
8814님 계속 이런 "소중한" 글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긴 글 싫어하시는 분들 위해서 간단히 요약해볼께요.

"위안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모집되었고,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했으며 비록 근로환경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돈벌이가 되긴 했다"

가장 공신력 있는 1차 사료인데 왜 자료원은 미디어워치? exordio? 같은 듣보잡에서나 인용할까요?

무술년 개의 해에 걸맞는 글들 계속 부탁드립니다.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13:50 14일전
exordio에 들어가서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해당 자료는 미국 공문서관 내셔널 아카데미 소장 자료입니다. 미디어워치 들어가면 원문 사진이 나옵니다.
          
          
 
 
MSCB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14:22 14일전
훌륭한 발견 하셨네요. 국내 언론사에 제보하시면 좋겠네요. 이런 유익한 정보를 다들 왜 모르고 있었을까요? ㅋㅋㅋ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14:31 14일전
위안부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입니다.
                    
                    
 
 
MSCB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16:56 14일전
네 계속 수고하세요
 
 
ANell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18:41 13일전
미디어워치=변희재... 어이없네요. 공신력이라... 지금 이 문서 자체가 한쪽 일방의 주장을 서술한거죠. 미군정에선 다각도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 중 일부분만 발췌해서 이렇게 주장하는것은... 마치 이런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A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나(A)는 그녀(B)와 성관계를 할때 그녀(B)가 나(A)를 전부터 원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A)는 그것을 실현시켜주었을 뿐이다."라고요. 그때 B는 이렇게 얘기합니다."나(B)는 A를 알지도 못했으며 같은 회사의 동료이기에 인사만 했을뿐 정확히 누군지도 몰랐다. 백번 양보해도 내(B) 인사가 그(A)에게 성관계를 원한다는 신호는 아니지 않습니까?"라고요. 그때 기자는 이 둘의 주장에서 한쪽만 뽑아서 이야기합니다. "B가 원해서 A가 성관계를 했을뿐이다. B는 그 전부터 A에게 인사를 하면서 꼬리를 쳤다."라고요. 어때요? 이 댓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B라면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들까요?

이건 간단히 제가 만들어 쓴거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자료들 속에서 저렇게 자기들에게 유리한 혹은 입맛에 맞는것만 뽑아 쓰는겁니다. 이런 쓰레기 기사를 기사랍시고 올리고 챙피한줄 모르고 출처까지 올리시는 이 분....나이를 떠나서 배움이 짧은 분입니다. 그렇기에 본인 입맛에 맞는 기사만 보시고는 그 기사가 마치 사실인양 혹은 진실인양 믿고 사시는 분들이죠. 이런 분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하고 굳이 대화해서 설득하려거나 혹은 반론을 펼치는 건 무의미합니다. 죽었다 깨도 1+1은 2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대꾸해줄수록 자신들이 뭐라도 되는줄 알고 계속해서 똥싸지릅니다. 무시해주세요 부탁합니다. 굳이 시간이 남아서 댓글을 다시련다면... 추천합니다. 평소 자신이 알고 지내던 마음에 들었던 여자친구나 남자친구에게 문자를 한번 보는게 어떨까요? 차라리 생산적입니다. 까이더라도 내가 별로였구나 정도는 알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나이들수록 느끼지만 정말 용기있는 이가 미인을 얻더군요. 힘내시길 바랍니다!
p.s: 그리고..기사는 모두 다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그게 여러분의 무식을 뽐내는 일입니다. 타인의 기사를 바탕으로 글을 쓰지 마시고, 본인이 스스로 팩트를 찾아서 글을 쓰십시오.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는 법이지요?ㅎㅎㅎ

사족을 하나 더 달자면 그 번역이랍시고 자꾸 그렇게 해놓는데.. 그러면 뭔가 더 있어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전체적인 글이 산만해질 뿐입니다. 차라리 링크를 해두세요. 그게 더 공신력이 있겠죠. 그냥 자기 주장만 하세요. 어차피 사람들 그 번역 안읽습니다.


사족을 두 개나 달게 되네요. ㅋㅋㅋ 그리고 제목보니깐 뭐? 1차사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사를 배우면서 제일 먼저 가져야할 태도는 교차검증입니다. 1차사료따윈 중요하지 않아요. 교차검증해서 그게 진실이냐 아니냐로 나왔을때 실제로 신뢰를 얻는겁니다. 누가 먼저 글을 끄적였든간에 그게 거짓말이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아주 기초적인 상식도 없이 1차사료랍시고... 정말 같잖네요. 진짜 너무 후집니다.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19:57 13일전
그러면 제가 제시한 증거보다 명확하고 단단한 증거들을 가지고 와서 반박하면 됩니다. 한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토론에서 상대방을 언급하며 깎아내리는 행동은 정말 못배운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역사학을 공부하기 전에 기초적인 상식부터 배우길 권합니다.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20:02 13일전
그리고 저 미디어워치 기사에 변희재의 어떤 사견이 들어가 있습니까? 그냥 미디어워치 사이트에 올라온 글일 뿐 변희재나 미디어워치의 의견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공문서의 번역문만 있을 뿐이죠. 변희재가 1+1=2라고 하면 변희재가 말했기 때문에 틀린 것이 됩니까? 다시 말하지만 교차검증을 통해서 제 의견이 틀렸음을 증명해보세요. 위안부의 증언들이야말로 교차검증을 하면 죄다 틀렸던데요? 무슨 1938년에 네덜란드령이던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하질 않나...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0 (수) 20:06 13일전
http://tv.naver.com/v/249002

시공간을 이동하시는 정서운 할머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을 교차검증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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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의 증언에 따르면, 정서운은 1924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하였고, 집안이 유복하여 어렸을 때에는 큰 고생을 하지 않고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본인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파출소에서 와서 놋그릇을 공출하려는 요구를 거절하고, 놋그릇을 모두 폐기해버린다. 그래서 아버지는 구속되고, 정서운은 아버지의 면회를 가게 된다. 그 후 정서운은 이장에 의해 센닌바리를 만드는 공장에 가서 2년내지 2년 반 동안 일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면 아버지가 풀려난다는 이유로 설득한다. 그래서 정서운은 자원하여 공장에 가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풀려나지 못하고 정서운은 인도네시아 수마라이로 가게 된다. 그리고 수마라이에 갔을 때 자신의 나이가 15세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진술에서 정서운의 진술은 모순이 엄청나게 많아지게 된다. 정서운은 1924년생이므로, 15세가 되는 해는 1938년 또는 1939년이다. 그런데 마을 단위 놋그릇 공출은 1941년 「유기 제작 및 판매 금지령」이후이므로 아버지가 놋그릇 공출 요구를 거부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것은 1942년이다. 위안부 정서운의 출생 연도를 검토해 볼 때 15세가 되는 나이는 1938년이거나 1939년이다. 1938년 또는 1939년에는 인도네이시아는 네덜란드의 영토였으므로, 그 곳에 일본군 위안부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센닌바리를 만드는 공장」이라는 구절도 신뢰할 수 없다. 센닌바리는 천인침(天人針)이라는 것으로, 흰색 헝겊에 붉은색의 실로 1천 명의 여자가 돌아가며 군인의 복대를 바느질하는 것으로, 일종의 행운의 부적 같은 것이다. 오직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만드는 공장이라는 것은 없다.
          
          
 
 
세르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1:00 12일전
당시 사람들의 진술이라는 게 꼭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 큰 일 겪고 나서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어요. 그럼에도 그 안에 진실의 편린들은 숨어있겠지요. 사람들의 증언은 그 안에 모순이 있다고 해서 그냥 폐기하는 게 아니라, 사료로써 수집하고, 여러 증언들, 문서로 된 사료들 등등을 풍부하게 모아서 서로 비교도 하고 보완도 해 가면서 당시의 상황이 정말로 어떠했는지 종합적인 그림을 그려 나가야 겠지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1:23 12일전
정신이 혼란스러운 사람의 증언을 어떻게 신뢰합니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법정에서 모순되는 증언을 증거로 채택합니까?
                    
                    
 
 
세르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2:31 12일전
??? 왜 갑자기 법정 얘기가 나와요? 너무 혼란스럽네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2 (금) 09:36 12일전
법정에서 모순되는 증언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듯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냥이사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00:50 13일전
http://naver.me/FNbNpVEB
뭐 독일에서도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부인하는 사람들의 근거를 듣고있노라면 아주 그럴듯합니다.
한국도 사람사는 곳인데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게마련이겠지만, 사회적 반응은 좀 다른것 같네요. 이러니 한국보수가 친일보수 소리를 듣는거지요. 독립운동하던 임시정부의 정통이 대한민국에 그대로 이어져왔다면 박씨일가가 존재했었을까... 뭐 지나간 일에 가정법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새해에도 위안부 할머니 한분이 돌아가셨다는데.. 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Archistik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00:55 13일전
애초에 독일,프랑스 처럼 전후 국가재건이 되었어야 했죠.
 
 
kasse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7:51 13일전
10년전인 유럽 '위안부' 결의안을 올려드립니다. 유럽의회의 결의안 통과는 2007년 7월 미 하원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하원, 캐나다 연방하원에 이어 4번째였죠. 미국,네덜란드,케나다 연방의원들은 1차사료를 못 보고 할머니 말만 듣는 감정적인 분들인가봐요.

그 공신력쩌는 1차 사료 베리에서만 보기엔 아깝네요.


유럽의회 '위안부' 결의안 (2007. 12. 12)
유럽의회는,
-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유의하며,
- 일본이 조인한 여성과 어린이 인신매매 금지조약(1921)에 유의하며,
- 1930년 일본이 비준한 ILO 강제노동금지조약 29호에 유의하며,
- 여성, 평화, 안전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1325호 결의안에 유의하며,
- 전시 하 조직적 강간 및 성노예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 게이 맥두걸(Gay McDougall)의 보고서(1998.06.22.)에 유의하며,
- 2007년 5월 9일에서 10일까지 진행된 유엔고문방지위원회의 38차 회의 권고안에 유의하며,
- 일본 점령기 동인도제도에서의 네덜란드 여성에 대한 강제 매춘에 관한 네덜란드 정부 문서 발표에 유의하며,
- 2007년 7월 30일 미국의회와 11월 29일 캐나다 의회에서 채택되니 결의안에 유의하며,
- 절차규칙 115호에 유의하며,

A. 일본 정부는 1930년대부터 세계 2차 대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태평양지역 점령과 전쟁기간동안 '위안부'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에 대한 성적 노예의 목적으로 동원했다.

B. 역사학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노예화된 여성들은 십만 명 이상일 것으로 헤아려진다.

C. '위안부'제도는 집단 강간, 강제 유산, 수치, 그리고 신체절단과 사망 및 결과적으로 자살에 이르게 하는 성폭행을 포함하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 사례 중 하나다.

D. 수십 개의 '위안부'소송이 있었지만 일본 법원은 군부의 직, 간접적인 관여와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배상 요구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렸다.
E. '위안부'제도의 피해자들 대부분은 사망했고 남은 생존자들도 80세 이상이다.

F. 지난 수년간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공직자들이 '위안부'제도에 대한 사과 발언을 했지만 최근 몇 명의 관료가 그 같은 발언을 철회하거나 희석시키려는 유감스러운 뜻을 나타냈다.

G. 일본 정부는 성노예제도에 대한 전체 규모를 밝히지 않았고 '위안부'문제와 2차 대전 당시의 일본의 전쟁범죄를 교과서에서 최소화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

H. 일본 정부가 민간 기금형식으로 '위안부'피해에 대한 보상을 목적으로 만든 아시아국민기금은 2007년 3월 31일 완료되었다.

1. 민주주의와 법치, 인권존중 가치의 상호 공유에 근거한 유럽연합과 일본 간의 우호적 관계를 존중한다.

2. 2차 대전 당시 '위안부'제도의 피해자였다 여성들에게 연대를 표한다.

3. 1993년 고노 요헤이 담화와 1994년 무라야마 수상의 담화 그리고 '위안부'피해자들을 포함한 전쟁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를 표한 1995년과 2005년 일본의회의 결의안을 치하한다.

4. 지금은 해제된 1995년 일본 정부가 시도했던 정부출연 민간기금인 아시아여성기금은 몇 백 명의 '위안부'들에 대해 일부 '위로금'을 지불했으나, 이러한 인도적인 시도로 게이 맥두걸(Gay McDougall) 여성폭력에 관한 특별보고관의 보고서에서 언급된 국제법에 따르면, 법적 인정과 배상이라는 부분에서 피해자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5. 일본 정부는 세계에 '위안부'로 알려진,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한 젊은 여성들의 강제 성노예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하여 명확한 방법으로 역사적으로 법적인 책임을 받아들여야한다.

6. 일본 정부는 실질적인 행정적 제도로 모든 '위안부'생존자들과 유족들에게 배상해야한다.

7. 일본 국회는 법원의 배상 판결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조치를 강구해야한다. 특히 정부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개인들의 권리가 국내법에서 명확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국제법에서의 범죄처럼 생존자들의 연령을 고려하여 성노예 생존자들을 위한 배상 소송이 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한다.

8.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노예화가 없었다는 어떠한 주장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9. 일본 정부는 일본국민과 정부가 국가의 완전한 역사를 인식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위안부'문제를 포함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있었던 일본의 행동을 인식하도록 가르쳐야하며 따라서 현재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교육해야한다.

10. 이 결의안이 일본 정부와 의화, 유엔인권위원회, ASEAN 국가, 북한, 한국, 중국, 대만, 티모르 그리고 각 의회 및 협의회와 회원국들에게 전달되도록 지시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8769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256928.html#csidx83a01fd47e9972ea74fea6354bdd859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9:40 12일전
그렇다면 일본의 학자들은 죄다 바보라서 위안부 강제납치가 없었다고 합니까? 누가 이랬다더라 하는 자료 말고 명확하고 단단한 증거를 가져오세요.
          
          
 
 
세르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1:02 12일전
유럽의회의 결의안 정도면 신뢰할만 한 판단을 내리는 기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8814님이 가져오신 문서를 포함해서 여러가지 사료를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것 같은데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1:18 12일전
그렇다면 일본 정부와 학계는 신뢰할 만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기관입니까?
                    
                    
 
 
세르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2:30 12일전
?????  일본 정부와 학계가 어떤 얘기들을 했고 그 중에 어떤 얘기를 논제로 삼으셨었죠? 당혹스럽네요. 본문에 올려두신 건 미국 (작성한 것도 미국사람인진 모를 일이겠습니다만) 문서 뿐인데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2 (금) 09:34 12일전
현재 한국에서는 위안부의 강제연행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지않는 일본의 사죄가 불분명하다고 주장하는건데요? 그럼 당신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위안부는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로 납치'되었다. 예 아니오로 답변해보세요
                         
                         
 
 
세르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2 (금) 15:06 12일전
"강제" 에 대해 답은 에 입니다. "납치" 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입니다.

취업 사기도 결국은 강제입니다. 공장에 일하러 가는 거라고 말해서 데려간 뒤 "강제로" 위안소로 보낸 거니까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19:48 12일전
만약에 '당대에 공적 기관에 의해 작성되고', '일본 정부에 의해 수행되거나 명령되고', '불특정 여성에 대해서 강제 납치를 지시하는' 문서를 가지고 오면 제가 인용한 해당 문서를 모두 반박할 수 있습니다. 제시 부탁합니다.
          
          
 
 
세르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1:04 12일전
윗분이 댓글로 인용한 내용에 "일본 정부에 의해 명령된 불특정 여성에 대한 납치" 를 언급하는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1:20 12일전
지금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이 인정하지 않고 있는 부분, 그래서 한국이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부분은 '강제 납치'입니다. 위안부 증언 대다수도 강제 납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안부의 주장이 저 문서보다 더 신뢰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제가 말한 대로 증명해야죠. 단순 증언이 공문서와 대등하다면 UFO 목격설도 전부 재검토해야 할 겁니다.
                    
                    
 
 
세르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2:31 12일전
한국이 강제납치라는 지엽말단만 콕 찝어서 사죄를 요구하나요? 금시초문이네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2 (금) 09:35 12일전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의 쟁점이 그것입니다.
                    
                    
 
 
kasse1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2 (금) 15:43 12일전
강제납치부분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조직하고 관여한 책임을 묻는 겁니다.
 
 
세르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0:57 12일전
문서의 '공신력' 에 대해서 저는 할 수 있는 얘기가 별로 없습니다만, 일단 그 문제를 무시하기로 한다면, 문서 안의 내용 중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감정적으로 격한 반응들이 나오는 건지 궁금해 집니다.

해당 문서의 내용 때문에 아니라, 이 게시글을 작성한 8814님의 숨은 의도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가정은 아마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의도가 그릇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거려나요
     
     
 
 
881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1 (목) 21:25 12일전
제 의도가 아니꼽다면 확실한 반증을 하면 됩니다. 이 곳이 싸움을 하는 곳이 아닌 사실관계를 토론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요.
 
 
Archistik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2 (금) 00:22 12일전
이 글도 어느 한 개인이 쓴건데 철썩같이 믿어야 할 이유라도 있을까요?

차라리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찾아가서 물어보는게 훨씬 좋다는 생각입니다.
 
 
불노불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8-01-17 (수) 15:57 7일전
에이... 미디어워치잔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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