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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시소설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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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freiheit이름으로 검색 조회 4,614회 작성일 02-01-16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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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비행기는 굉음을 토해내면서 활주로를 박차고 마침내 하늘에 올랐다.
김옥순 (여) 행방불명.
최태식 (남) 행발불명.
멜라니는 알랙스의 옷장 구석에서 발견한 한장의 낡은 서류와 그가 전에 건네주었던 콘크리이트 조각만을 가지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프랑크푸르트의 밤이 창밖으로 크게 솟았다가 다시 천천히 사라졌다. 그가 불행을 안고 성장한 도시의 마지막 불빛이 가물가물 사라지고 활주로를 박찬 굉음이 도시들의 모습처럼 귓전에서 아득해 질 즈음 기장은 자기 소개를 하면서 안전한 여행을 다짐했다. 금연 표시등이 꺼지자 기내에는 군데군데 담배 냄새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스튜어디스의 음료수 나르는 소리가 짜랑짜랑 났다. 멜라니는 오렌지 쥬스를 한잔 들고, 주위에 서성이는 사람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즐거운 모습으로 유럽 여행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알랙스와 닮아보이는 젊은 여행객들은 창 밖의 하늘 만큼이나 검은 머리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유행들을 온 몸에 걸치고 있었다. 멜라니는 남은 잔을 마져 비우고 이미 이륙할 때부터 눈을 감고 있는 옆 사람처럼 의자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마감시간에 맞춰 언제 끝날지 모를 보스니아전의 마지막 원고를 겨우 넘기고 출발시간에 늦지않게 공항에 나오느라 그녀는 한국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아무런 설레임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벼르던 날이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출국을 기다리고 한동안 나름대로의 한국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휴전의 국면에 들어섰던 보스니아 전이 극에서 극으로 달음질하는 갈등으로 인해 당분간은 머물며 지켜봐아 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녀는 90년 이후 전쟁이 있는 곳은 어디는 날아갔다. 컴퓨터 게임을 방불케 한 생방송의 코멘트 섞인 걸프전과 보스니아전, 그리고 르완다의 민족전에서 그녀는 5년 동안 전쟁에 대한 기사와 싸움을 해야 했다. 전쟁이 지나간 낯모르는 거리에서 그녀는 언젠가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대한 기록영화를 통해 본 적 있는, 길가에 쓰러진 부모의 시체 위에서 울고 있던 한 가난한 얼굴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린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흑백사진에 그 아이의 모습들은 과거의 것으로 박혀 나왔고 혹, 그것은 아이의 살아있는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전쟁은 그녀의 눈 앞에서 그렇게 잔인했다. 4년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전쟁은 그녀에게 지금까지 충분한 기사를 제공해 주었으며 그 덕분에 처음 한동안 그녀의 기사는 많은 이들에게 강한 설득력을 전해 주기도 했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리는 전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쟁을 전하고 싶어했다. 종교든 이데올로기이든 어떠한 이유에서건 시작되는 전쟁의 끔찍한 희생들을 알리는 것이 그녀가 원했던 일이었다. 종교와 인종과 영역에 따른 극심한 복수전의 양상으로 표현되었던 그녀의 초기 보스니아전은 독일의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들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게르만 민족에 속하던 크로아티아계가 2차 세계대전동안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계를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처참히 학살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에 복수라도 하듯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 대해 50년이 지난 지금, 인종청소라는 깃발아래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씻지 못할 과거와 마치 이에 앙갚음이라도 하는 듯 가해자와 피해자가 반전되는 사이에서 미묘한 관계를 어떻게던 풀어내 보고 싶었지만 이제 그녀는 벽에 부딪혀 새로운 기사를 써야했다. 아프리카 몇몇 나라들의 민족분쟁이나 보스니아의 비릿한 기사보다는 뭔가 다른 기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전쟁의 잔임함을 알리고 싶었지만 읽는 이들의 마음은 점차 냉정해갔으며 그녀가 말하려는 잔인함을 받아들이기에 그들은 이미 무감각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몇년동안 전쟁칼럼만을 고집하는 것은 실제로 승산없는 싸움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그 벽을 혼자 거칠게 더듬느니 차라리 다른 기사를 쓰던가 잠시 쉬고 싶었다. 사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발발한 걸프전을 시작으로 몇몇 군데에서 시작된 후원도 시작될 때 만큼이나 서서히 줄어 들다가 이제는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가 방향을 전환하려는 것에는 알랙스의 실종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알랙스가 사라진 것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실종 이후, 좀처럼 평소의 일에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랙스의 성장을 지켜 본 멜라니는 친부모이상으로 알랙스를 걱정해 주던 자신의 부모이자 알랙스의 대부뫄 대모 이상으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알랙스가 종렬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독일에서 태어난 것은 그의 부모가 독일에 온 지 5년 뒤였다. 광산 노동자로 독일 땅을 밟은 그의 아버지는 간호사였던 그의 어머니와 한국에서의 빈곤을 독일에서 만회하려 생활했고 그것은 어느 정도 그들의 계획대로 이루어 질 수도 있었다. 평소 직장에서 휴가를 얻으면 그들은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사고 팔았다. 독일에서는 동양의 낯선 문화에 대한 인식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서양 물건의 고급성에 대한 무지의 인식들이 그들에게 한국서 맛 볼 수 없던 생활의 풍족함을 경험케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풍족함과 가정을 동시에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모두 배우지 못했다. 종렬이 태어난 이듬해 모험을 건 새로운 사업의 실패로 인해 빚을 갚을 수가 없자 그 직접적인 피해는 곧바로 종렬에게로 돌아왔다. 독일 주정부로부터 아이의 부양무능과 학대의 혐의를 산 부모는 종렬을 보호기관에 맡겨야 했고 그후 그들은 한국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한국에서 새롭게 시작해 자리가 되는대로 종렬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지만 끝내 그들은 독일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 종렬은 알랙스라는 이름의 독일인으로 그의 세례 당시 대부와 대모였던 독일인에게로 입양되었다. 멜라니는 이렇게 해서 동얀인 얼굴의 동생을 갖게 되었다. 멜라니는 알랙스에게 부모에 대한 기억이 원망 이외에 어떤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열 여덟이 되면서 알랙스는 독일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 다른 독일아이들처럼 혼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고 한국에 다녀와야겠다며 일년반동안 한국에 머물고 난 뒤 멜라니와는 전쟁이라는, 아니 그보다는 인권이라는 분명한 하나의 공감대가 생겼다. 베트남전의 패배에 보란 듯, 걸프전에 대한 승리의 주역을 페트리어트 미사일과 스텔스 전투기에 겸손히 돌리며 미국전체가 축배를 들고 있을 즈음 그는 멜라니에게 한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본 한국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어. 그들이 전쟁을 극복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말하려는 극복의 이면에는 수많은 거짓과, 전쟁만큼이나 커다란 희생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언제고 일본처럼 번듯한 겉모양에 내부는 텅비게 될지도 몰라.'
알랙스는 멜라니가 알 수 없는 낯선 몇몇의 한국이름들을 나열하며 그들의 독재정치를 이야기했다. 현대의 한국은 일본의 지배와 그로부터의 해방이후 문화뿐만 아니라 그들의 건전한 사고마저도 착취당한 세월이락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멜라니의 감성이 짙게 섞인 전쟁기사들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 아니라 한국같은 나라에 한번 가 보라는 뜻밖의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는 마치 90년대에 살고 있는 60년대의 독일 대학생 모습을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전쟁으로부터의 자유와 그로 인한 자유로부터의 해방을 그는 원했으며 아직도 우리가 딛고 있는 땅위에는 보이지 않은 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에 다녀온 이후 이렇듯 그의 논조는 언제나 도전적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한국에서 종렬, 자신의 붐를 찾아 보았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 한국서 보낸 일년 반의 시간 동안 말없던 그를 누가, 어떻게 한국에 대한 증오덩어리로 만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국을 다녀온 후 3년 뒤, 알랙스는 어느 누구와도 연락을 끊은 채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종전 50년을 맞아 당시 승전국과 패전국들이 세계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승리도 패배도 말할 수 없었던 동아시아 몇몇 나라들을 취재한다는 것이 그녀의 한국행의 명목이었지만, 사실 증오하면서도 잊지못해 했던 한국에서 혹시 알랙스의 행방을 알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역시 배제할 순 없었다.

비행기는 모스크바 영공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여러가지 상념으로부터 깨어났을 때 기내의 대형스크린에서는 미래의 전쟁속에서 새로운 무기에 의해 사람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ㅗ 있었다. 푸른 헬멧을 쓴 평화유지군 대신 그곳에는 디지털 수치로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특수렌즈와 서로 통신할 수 있는 소형 마이크가 부착된 신소재 헬멧을 쓴 군인들이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고 있었다. 그때까지 어떠한 이유이건 끊임없이 전쟁이 계혹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전후세대라는 혜택으로 직접 전쟁을 체험한 적은 없다 하더라도 바그다드와 사라예보에 머물며 경험했던 사실들이 아따금씩 악몽으로 되살아 오곤 했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멜라니를 보며 손가락질 하기도 했으며 군인들에게 인종청소의 명분아래 강간당한 크로아티아와 르완다의 검은 여인들이 괴물들을 잉태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녀는 잡다한 생각들을 지워버리기 위해 다시 음료수를 주문했다.

"지루하시면 저와 이야기라도 할까요."
지금껏 잠을 자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옆자리의 한국사람이 문득 말을 붙여왔다.
"한참 동안 원고를 읽는 것을 보고 기자이거나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름이 본이라고 소개한 그는 몇 마디를 나누고 난 뒤, 독일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멜라니의 전쟁칼럼을 읽은 기억이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지요. 전쟁은 심각하거든요. 누구나가 죽어가는 사람들과 전쟁고아들이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요. 목숨이 하나 없어지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이 다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걸 이용해 이익을 보는 쪽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다는 생각은 별로 못한단 말이예요. 그래도 그나마 지금의 전쟁은 기자님처럼 낭만이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셰계의 반핵 시위에도 불구하고 남태평양 한가운데에 시락이 터뜨리는 핵폭탄 몇 개만 더 있으면 아군이고 적국이고 간에 아무도 남지 목하는 삭막한 전쟁이 되거든요."
그는 유창한 독일어로 자신의 논조를 계속해서 밝혔다.
"혹시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핵이 얼마나 되는 줄 아시나요? 추정이긴 하다지만 전략 핵탄두는 2만개에 가깝고 전술핵까지 모두 포함하면 4만개 내지는 5만개까지 된다더군요. 시락의 핵실험에 방관해온 나라들이 바로 이들 핵보유국들이었죠. 그들은 핵의 안정성을 신앙만큼이나 믿고 있습니다. 무력침략은 절대 받지 않는다는 핵의 안정성 말입니다. 그런 핵이 딱총 쏘면서 전쟁놀이하는 보스니아에 몇 개만 사용된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겠죠. 그래서 지금의 전쟁은 그나마 낭만이 있다는 겁니다."
그의 말 대부분은 이전 알랙스가 자기에게 조심스레 건넨 말과 비슷했다. 알랙스는 행방을 감추기 며칠 전 멜라니의 신문사로 찾아 온 적이 있었다. 돈이 필요해서였다. 자신이 사라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고 그녀는 지금껏 생각하고 있다. 알랙스는 그녀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대신 손때 묻고 귀가 닳은 콘크리이트 조각 하나를 건네 주며 그것은 부모님의 나라에서 가져온 귀한 것이라며 입을 열었다.
'누나가 쓰는 기사는 지나치게 낭만적이야. 누나같이 낭만이 있는 사람은 차라리 시를 쓰는 편이 더 나을 걸 그랬나봐. 누나는 너무 모르는게 많아. 요즘 사람들은 전쟁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부등켜 안고 기념사진을 찍지. 자기가 선행을 했다고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은거야. 죽은 사람의 피를 자기의 깨끗한 옷에 아낌없이 바르고 고함이라도 지를 듯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단 말야. 이따금씩 보면 누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의심스럽곤 해.' 그가 멜라니에게서 돈을 받고 돌아서며 던진 말이었다.
동체의 엔진소리가 어느 새 귀에 익어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을 즈음 기내에는 자리를 비우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동양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짙은 화장의 스튜어디스들은 그들에게 가급적 자리를 지켜줄 것을 종용하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자신들이 만 피트 상공에 떠 있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즐거워했다. 아마 그 아래로 자유낙하가 이루어 질 때 머리부터 땅에 닿게 된다는 것과 그렇게 되면 흔적 조차 남지 않을 자신의 모습을 한번쯤은 상상할 법도 한데 그들은 스튜어디스를 피해 과감하게 좌석에서 벗어나려 했다. 순간 그녀에게는 사라예보의 어느 구석에서 포탄으로 널려진 시체들이 떠올라 메스꺼움을 느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는 후각, 미각, 청각이라고 했던가. 이륙할 때 맡기 시작했던 기내의 담배 냄새와 엔진소리에 감각들은 이미 둔해져 있었지만 수년전부터 사진으로 담은 전쟁의 잔인한 모습들은 그녀에게서 좀처럼 떠날 줄 몰랐다. 멜라니는 그러한 기억들이 다른 감각들처럼 둔해지리라 믿었지만 새로이 접할 수록 그 모습들은 그녀에 감각에 더욱 예민하게 찾아 왔다. 멜라니는 계속해서 떠오른 상념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계속해서 본과 이야기하려 했다.
"예 맞아요. 학생입니다. 80년중반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87년 한국이 너무 시끄럽다며 부모님이 저를 그냥 독일로 보내셨죠. 부모님도 독일에서 공부하셨거든요. 제가 본에서 태어났다고 이름도 본입니다. 한국의 학생운동이 부모님들은 정말로 불안하셨나 봐요. 그분들은 60년대와 70년대 독일을 직접 보셨는데도 말입니다."
60년대의 독일 학생이 한국 학생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자신은 어찌되었건 현실을 피해 독일로 잠적했으며 그것은 결코 떳떳한 일이 못되므로 스스로가 학생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만 했다.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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