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얘기 독일여행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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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로자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5,109회 작성일 01-09-04 22:48본문
퀼른에서 트리어로 가는 기차는 1시간 간격으로 있었으나 정말로 혼자서 낯선 곳으로 발걸음을 내딪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다 잡을 시간, 그 복잡하고 이상하기 그지 없는 퀼른반호프에서 소리내며 화이팅을 외치고 또 외치는 사람은 나 뿐이였다.
기차는 비오는 모젤강을 왼쪽으로 두고 굽이굽이 달리고 화이팅도 허사였는지 한국으로 치면 비둘기호 같은 그 기차가 포도밭으로 뒤덮힌 산허리를 돌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해 처음엔 옆칸에 앉은 노트북으로 오락을 열심히 하고 있던 독일소년이 신경쓰여 그냥 눈물이였다. 그러다가 비를 맞으며 흘러가는 강물, 모든 역마다 다 정지하는 기차, 손님이라곤 소년과 나 두 뿐인 기차칸,지금 생각하면 울일도 아닌데 왜그리 서럽고 원통한 맘이 들던지 엉엉 소리내 울게 되었고 날 빤히 쳐다보는 소년을 의식할때쯤 결국은 스스로 수습을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위로라고 한 말이 '걱정하지마. 맑스가 다 돌봐 줄꺼야' 관념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중에 트리어였다.
아름답고 소박한 트리어와 트리어 사람들
트리어, 맑스의 생가가 있는 곳. 런던에서 빌려본 독일을 간다에서는 기대할만한 곳은 아니다라고 맑스생가를 소개해놓고 있었지만 맑스생가 그 자체가 나에겐 기대였다. 그러나 맑스는 처음부터 나를 돌봐 줄 기색은 아니였다. 역에서 내려 무거운 짐을 들고 택시아저씨가 가르쳐준데로 먼 길을 걸으니 시꺼먼 포르타 니그라가 나타났고 그 옆이 인포메이션이였는데 시간이 지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후 난 2시간 동안 노란비옷을 입고 트리어의 중심가를 휘젓고 다니고 전화도 여러번 했지만 결국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 왜 방이 없는 걸까, 내가 돈이 없어 보이나, 인종차별하는건가, 해는 질려고 했고 비도 계속 왔지만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 맘은 생기지 않고 이상한 오기만 불쑥불쑥 생기는 거였다. 길가는 여자를 붙잡고 재워달라고 했다. 여자는 독일말만 했고 난 영어만 했다. 멀리서 온 여행객에게 내줄 방하나 없는 이 낯선 도시에서 난생처음보는 이 우락부락한여자에게 내 사정을 설명하고 있으려니 또 그놈의 눈물이 쏟아나고 있었다. 눈물때문인지 내말귀를 알아들어서인지 그녀는 저녁 산책나온 듯한 독일어도 영어도 잘 하는 독일청년을 붙잡더니만 나에 대해 의논을 하는 거였다. 그 의논의 결과로 결국, 난 따뜻한 하룻밤을 지냈으며 너무나 맛있는 노란 맥주와 너무나 독해 한잔에 가는 흑맥주를 야금야금 밤새도록 마시고, 트리어의 특산물이 와인이며, 트리어가 독일내에서는 이름있는 관광지라는 것 그래서 주말엔 예약하지 않으면 방잡기가 힘들다는 거, 트리어에도 대학이 있다는 것 등 트리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한테 궁금해 한 것은 도대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여길 왜 온 것인가였는데 맑스하우스라는 내 말을 듣고는 그게 다냐는, 니가 잘못생각하고 있는데 트리어는 그것말고도 아름다운 볼것이 정말 많다는 예기들을 했었다. 그들의 얘기는 다음날 아침 그들이 데려다 준 강건너 산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참말로 판명이 났다. 유럽의 많은 도시를 헤매고 다녔지만 그 풍경만큼 아름답고 소박한 것은 이후에는 볼 수 없었다.
맑스는 프러시아지배하의 라인란트지방의 트리에르에서 1818년 태어났다.
흰색의 이층집인 맑스생가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겨우 현관을 찾아 초인종을 누르고 작은 방들을 하나하나 돌게 되었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맑스는 실존 인간,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고 형제자매와 함께 보낸 유년기가 있는 , 이 아닌 내가 지금껏 알고 있는 그 수많은 글귀와 테제로써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2층 햇살 잘드는 방에서 오래된 그의 초판본의 제옥을 하나하나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알수없는 안도감이 생겨왔다. 인간으로서의 맑스를 힘들어하고 공산당선언으로서의 맑스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어릴적 맑스가 뛰어놀았음직한 가운데 마당에서 붉은 베고니아꽃들을 보면서 아주 오랫동안을 앉아 있었지만 나의 맑스생가에 대한 이 생경스러운 태도는 쉽게 정리되거나 설명되지 않았다.
기차는 비오는 모젤강을 왼쪽으로 두고 굽이굽이 달리고 화이팅도 허사였는지 한국으로 치면 비둘기호 같은 그 기차가 포도밭으로 뒤덮힌 산허리를 돌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해 처음엔 옆칸에 앉은 노트북으로 오락을 열심히 하고 있던 독일소년이 신경쓰여 그냥 눈물이였다. 그러다가 비를 맞으며 흘러가는 강물, 모든 역마다 다 정지하는 기차, 손님이라곤 소년과 나 두 뿐인 기차칸,지금 생각하면 울일도 아닌데 왜그리 서럽고 원통한 맘이 들던지 엉엉 소리내 울게 되었고 날 빤히 쳐다보는 소년을 의식할때쯤 결국은 스스로 수습을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위로라고 한 말이 '걱정하지마. 맑스가 다 돌봐 줄꺼야' 관념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중에 트리어였다.
아름답고 소박한 트리어와 트리어 사람들
트리어, 맑스의 생가가 있는 곳. 런던에서 빌려본 독일을 간다에서는 기대할만한 곳은 아니다라고 맑스생가를 소개해놓고 있었지만 맑스생가 그 자체가 나에겐 기대였다. 그러나 맑스는 처음부터 나를 돌봐 줄 기색은 아니였다. 역에서 내려 무거운 짐을 들고 택시아저씨가 가르쳐준데로 먼 길을 걸으니 시꺼먼 포르타 니그라가 나타났고 그 옆이 인포메이션이였는데 시간이 지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후 난 2시간 동안 노란비옷을 입고 트리어의 중심가를 휘젓고 다니고 전화도 여러번 했지만 결국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 왜 방이 없는 걸까, 내가 돈이 없어 보이나, 인종차별하는건가, 해는 질려고 했고 비도 계속 왔지만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 맘은 생기지 않고 이상한 오기만 불쑥불쑥 생기는 거였다. 길가는 여자를 붙잡고 재워달라고 했다. 여자는 독일말만 했고 난 영어만 했다. 멀리서 온 여행객에게 내줄 방하나 없는 이 낯선 도시에서 난생처음보는 이 우락부락한여자에게 내 사정을 설명하고 있으려니 또 그놈의 눈물이 쏟아나고 있었다. 눈물때문인지 내말귀를 알아들어서인지 그녀는 저녁 산책나온 듯한 독일어도 영어도 잘 하는 독일청년을 붙잡더니만 나에 대해 의논을 하는 거였다. 그 의논의 결과로 결국, 난 따뜻한 하룻밤을 지냈으며 너무나 맛있는 노란 맥주와 너무나 독해 한잔에 가는 흑맥주를 야금야금 밤새도록 마시고, 트리어의 특산물이 와인이며, 트리어가 독일내에서는 이름있는 관광지라는 것 그래서 주말엔 예약하지 않으면 방잡기가 힘들다는 거, 트리어에도 대학이 있다는 것 등 트리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한테 궁금해 한 것은 도대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여길 왜 온 것인가였는데 맑스하우스라는 내 말을 듣고는 그게 다냐는, 니가 잘못생각하고 있는데 트리어는 그것말고도 아름다운 볼것이 정말 많다는 예기들을 했었다. 그들의 얘기는 다음날 아침 그들이 데려다 준 강건너 산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참말로 판명이 났다. 유럽의 많은 도시를 헤매고 다녔지만 그 풍경만큼 아름답고 소박한 것은 이후에는 볼 수 없었다.
맑스는 프러시아지배하의 라인란트지방의 트리에르에서 1818년 태어났다.
흰색의 이층집인 맑스생가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겨우 현관을 찾아 초인종을 누르고 작은 방들을 하나하나 돌게 되었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맑스는 실존 인간,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고 형제자매와 함께 보낸 유년기가 있는 , 이 아닌 내가 지금껏 알고 있는 그 수많은 글귀와 테제로써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2층 햇살 잘드는 방에서 오래된 그의 초판본의 제옥을 하나하나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알수없는 안도감이 생겨왔다. 인간으로서의 맑스를 힘들어하고 공산당선언으로서의 맑스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어릴적 맑스가 뛰어놀았음직한 가운데 마당에서 붉은 베고니아꽃들을 보면서 아주 오랫동안을 앉아 있었지만 나의 맑스생가에 대한 이 생경스러운 태도는 쉽게 정리되거나 설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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