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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설 이자의 알바 오디세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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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Hz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05-08 00:27 조회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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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에 젖은 60 마르크

가을이 되었다.
천고마비의 파란 하늘이 높게 떠 있는 그런 가을이 아니라 잔비가 하루종일 길을 적시는, 그래서인지 뼈속까지 으슬거리는 그런 독일의 가을이다. 여름에는 휴가로 빈 자리를 채우는 알바도 꽤 있었지만 가을에는 어쩐지 단기 알바라도 일자리가 궁했다. 매일 중개소에 가봤자 헛탕치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사실, 학교도 가야하니까 매일 중개소로 출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중개소에서 한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는데 명목상 '정원일' 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하루 8시간, 이틀, 시급은 10 마르크. 세부사항에 기록된 바로는 '잡초뽑기'. 일할 곳은 이자가 사는 도시의 위성도시였다.

​위성도시라고 해도 관광으로 많이 알려진 도시로서 독일역사에서도 제법 큰 역할을 한 곳 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자는 그 당시에는 아직 그 곳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위성도시의 중심부까지는 지상철을 타고 바로 갈 수 있을 만큼 교통이 좋고 - 이자가 사는 도시의 두/세번째 구역 (도시 중앙부터 외곽으로 교통행정상 세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다닐 수 있는 교통권으로 위성도시의 중앙역까지 따로 표를 사지 않고 갈 수가 있다. - 이틀뿐이니까, 잡초뽑기는 해 본적이 없긴 하지만 - 잡초 그냥 뽑으면 되지 뭐 - 큰 맘먹고 일을 하기로 했다.

​이자가 살던 기숙사는 지형상으로 도시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계까지 가는데도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리니까, 또 혹시 나중에 못찾아서 헤맬 시간까지 계산해서 새벽일찍 기숙사를 나섰다.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 언제라도 쏟아질 기세다. 아직 9월인데도 바람이 차다. 이자는 다니는 곳은 주로 도시 중심부에 다 위치하고 있어 첫번째와 두번째 구역만 다닐 수 있는 교통권 밖에 없어 역사에 도착하자 마자 세번째 구역을 갈 수 있는 교통권을 편도로 샀다 (당시에는 아직 대학에서 발행하는 Semesterticket - 대학생들이 한학기동안 도시의 전 구역을 통행할 수 있는 교통권 - 시행되기 전이었다). 지상철을 타고 위성도시의 중앙역에 도착했는데, 일하러 가야 하는 곳은 그곳에서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쯤 더 가야하는, 그야말로 오지 (Arsch der Welt) 였다. 차편을 미리 알아보고 와서 정말 다행이였다. 중앙역에는 다행히 교통편이 많아서 비교적 쉽게 갈아 탈 수가 있었다. 그렇게 가다가다 어느 정류장에 내려보니, 아침 이른 시간이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정말 건물하나 없는 '휑'한 곳에 다다랐다. 찻길 양옆으로는 철조망이 길게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라도 좀 지나가면 덜 삭막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꼭 그러한것은 아니었다.

​한참을 걸어가니 뜨문뜨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자신의 착각인지 몰라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것 같았다. 아마도 혼자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낯선 곳에 와 있으니까...어쩐지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니까....하며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좀 전에 이자를 마주보며 지나간 사람이 이자를 지나쳐 간 뒤에 자신의 길을 가지 않고 이자 뒤에 멈춰서서 몸을 돌려 이자를 보고 있었다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직접 물어본건 아니니까 아닐지도 모르겠다). 당시만 해도 그런 곳에서 동양인을 보기 어렵기도 했지만 이자에게도 조금 당황스러운 일인것도 사실이었다. 마주보며 지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구동독 시골에서 왔다고 했던 검은 머리의 동양계 혼혈의 독일 친구가 어려서 학교에서 괴롭힘 (hänseln) 당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학교에서 자꾸 아이들이 중국인이라며 괴롭혀서 유도할 수 있다고 하니까 무서워서 못살게 구는 것을 그만 두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거짓말인게 들통나서 결국은 괴롭힘 당하는게 싫어서 정말로 유도를 배웠다고 했다.

​걸음을 빨리 재촉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니, 철조망으로 만들어진 문이 있고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중개소에서 일자리를 받을 때는 그냥 무슨 가정집 정원쯤 되려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건 엄청난 착각이였다. 일단 철조망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알바생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왠 트럭이 문앞에 떡 하고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린 튼튼한 독일 남자가 알바생들을 모으고 할 일을 가르쳐 주었다. 조그마한 관상용 삽을 주며서 잡초를 뽑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철조망에 있는 쇠문을 열어 주었는데, 정원? 아무리 살펴봐도 건물은 커녕, 풀밭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슨 공원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숲 같다. 그 넓은 풀밭에서 잡초를 뽑으라니. 그보다 도대체 어떤게 잡초이고 어떤건 아니라는 건지. 그냥 다 풀일 뿐인데...........

여튼 그렇게 일이 시작되었다. 같이 일하던 알바생들은 한 열명? 쯤 된것 같다. 쭈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잡초 - 사실, 뭘 뽑았는지도 모르겠지만 - 를 뽑기 시작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한방울씩 머리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빗줄기가 점점 굳어져 갔다. 비가 심하게 쏟아지니까 감독하던 사람이 알바생들에게 하얀 비옷을 나누어 주었다. 일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들은 단기알바생들이니까 그날 만큼의 일을 해야하는 거다. 비옷은 없는 것보다 나았겠지만, 사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젖은 신발로 한기가 올라왔다, 결국은 옷도 점차 젖게 되었다. 손이 떨리고 몸도 떨렸다. 그렇게 잡초뽑기는 계속되었다. 점심시간이 지나니까 비는 좀 잦아들었지만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도중에 그만두는 성격은 아니지만 내일은 오지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당량을 채우고 일당 80 마르크를 받았다. 트럭에 놔두었던 가방속 지갑안에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넣어두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이 버스를 타고 중앙역에 도착을 하고 아무런 생각조차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집으로 가는 지상철에 젖은 몸을 실었다. 위성도시 중앙역에서 도시 경계를 지나 세번째 구역의 첫 정거장까지 불과 세 정거장. 세 정거장만 가면 집이구나. 집에가면 따뜻한 물로 씻고 누워야지..............이제 한 정거장만 가면 낯선도시도 끝이다...............문이 닫혔다. 걸걸한 독일남자의 외침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검시원이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 표를 꺼내려는 순간, 아침에는 세번째 구역을 통행할 수 있는 편도 표밖에 사지 않았다는것, 돌아올 때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표를 산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중앙역부터 다음 역까지 무임으로 가고 있다는 걸을 인지하게 되었다. 검시원에게 깜박잊고 표를 사지 않았다고 첫번째/두번째 구간을 다닐 수 있는 정기권을 보여주며 무임승차의 의도가 없다는 걸 말해봐자 소용 없는 일이었다. 명백한 규칙위반이기 때문에 사실 할 말도 없었다. 그자리에서 벌금용지를 떼어주었다. 언제까지 고객센터에 가서 벌금을 납부하라고 했지만, 나머지는 이미 들리지도 않았다. 다시 문이 닫히고 세번째 구역의 첫 정거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벌금용지를 보니 60 마르크 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을이라 해도 짧은데 해도 뜨지 않아 날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비가, 빗방울들이 창을 길게 내리치고 있었다. 창에 비친 모습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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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Hz님의 댓글

52Hz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교훈을 몸으로 터득하는 경험이었죠. 머리는 여전히 나쁜지만 ㅠ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천 1

나도향님의 댓글

나도향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에휴~!
그 힘든 일을 종일 하신 후 겨우 80마르크를 받고 60마르크나 벌금으로 물으실 때에는 정말 참담하셨겠네요.
그 다음날 감기 몸살을 앓으셨을 것만 같아요.

이자님, 경험하신 글 참으로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머리가 나쁘시다는 건
겸손하셔서 하시는 말씀 같구요,
이자님께서 부디 건강하시길 빌며

저는 또 다음 글을 기대합니다.


52Hz님의 댓글

52Hz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정말 참담했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부주의에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을 느꼈죠.
다음날 또 일하러 갔어요, 다행히 튼튼한 체질이라 병도 안나고요.
글 읽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나도향님도 건강하게 지내세요!


52Hz님의 댓글

52Hz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의 댓글

60 마르크가 엄청 (저에게는 더구나) 큰 돈 이었죠. 지나고 나니까 참 바보같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좋은 경험이었답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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