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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시소설 이자의 알바 오디세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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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52Hz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2,421회 작성일 18-06-24 02:08

본문

1. Quaschkopf 와Quatschkoch
처음으로 구한 아르바이트는 중국식당에서 였다.
학교어학원을 다닐 때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인도네시아, 베트남 그리고 폴란드에서 온 남자아이와 지금은 어디서 왔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예쁜 동유럽 여자였다. 우리들은 수업이 끝나고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기도 하고, 저녁에 서로 번갈아 가며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해먹기도 했다. 때론 저녁에 술을 마시러 가거나 가라오케에 가기도 했다. 함께다니는 인원도 꽤 되서 돌아가며 다른나라의 음식을 시식하는 것도, 다른 문화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한국에 있을 때에 세계사를 배우고, 또 그런 역사를 좋아해서 대학시절 전공하곤 관계도 없는 수업을 청강하러 다니기도 했는데 (이자는 원래 엉뚱한데 관심이 많아 여기저기 필요도 없는? 수업을 많이도 들으러 다녔다, 그런데 그것이 아이러니 하게도 나중에 독일에서 전과를 할 때 아주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다), 그래봤자 소위 „잘나가는 나라“ 얘기 뿐이지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이렇게 많은 나라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바가 없어 독일에 왔을 때 적잖히 놀랐다. 사설 어학원을 조금 다닐때 만난 카자흐스탄에서 온 친구가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도 당시에, 무식한 얘기이지만, 몰랐다, 전부 다 소비에트 라고만 배웠기 때문에, 또 따로 관심도 없었으므로) 이자를 처음 봤을 떄 ‚자기 고향에 너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며 (그 친구는 금발의 파란 눈이었다), 친숙한 얼굴을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듣고 정말 놀랐다 (소비에트에 살던 한국인들이 강제 이동되었다는 말은 어딘서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이 파란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또 다른 친구는 쿠어덴이었는데 터어키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 많은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나라마나 한국과는 다르게 같은 나라사람이라도 민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문제가 많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 일자리에서 만난 친구는 코소보 알바너 였는데 내전시 세르비아 사람들에서 가족이 처참히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상황을 생생히 얘기해 줘서 그 생각으로 며칠밤을 뜬 눈으로 지세워야 했다.  그 친구들의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으니까 본론으로 넘어가야겠다).

학교 어학원의 장점은 이자와 같이 가난한 학생한테 당첨복권과 같이 어학비가 무료라는 것 (지금은 대학부설어학원도 학비를 받는 곳이 있는 것 같지만), 그리고 학생과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정원이 제한되어 있어 입학시험을 통과해야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지만. 여하튼 운이 좋게 입학시험에 통과해서 어학비 걱정을 줄이기는 했지만 생활비충당은 여전히 문제였다. 처음 가지고 온 돈은 다 떨어지고, 한국에 남겨 놓았던 예비돈을 받아두었지만, 그걸 써버리면 다음은 없으므로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학기 중에는 어학원을 다니고, 아직 어학능력시험을 봐야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어눌한 독일말로 일자리를 찾으러 다닐 용기도 유감스럽지만 사실 없었다. 집세가 싼 기숙사를 구해 고정지출이 적은게 그나마 다행이었고, 생활비가 많이 들지 않는 것도 다행이었다. 어느덧 학교 어학원의 한학기가 지나고 여름이 되어 어학능력시험을 보고 방학이 되었다. 이제는 머뭇거리며 더이상 공부한다는 핑계를 댈 수 없게 되어 알바를 구해보기로 맘을 먹었다. 어학할 때 친구들한테 자동차공장이 많은 남부에 가면 여름방학동안 단기로 일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 전화번호도 받아두고, 이자가 사는 지역에 과자공장의 전화번호도 가지고 있었지만 선뜻 전화를 하지는 못했다.
하루는 같이 어학했던 친구들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다들 방학에는 뭘하냐 하는 물음에 학기시작전에 집에 가거나 일을 하거나 계획이 있었는데 이자만이 그러하지 않았다. 그중 한 친구가 자기 집에서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친구는 인도네시아에서 왔지만 토속인은 아니고 중국화교였다. 그 친구말로는 인도네시아에서 화교의 비율은 아주 낮지만 국가의 상위층은 대부분 화교라서 토속인들과 갈등이 많고, 실제로 화교출신의 지역갑부에게 테러 (집을 불태운다든지) 같은 일들이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고향에 사시지만 다른 형제들은 전부 유학을 가서 그곳에 터전을 마련했으며 자기 오빠 역시 그렇게 독일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했다. 그 분은 학업을 마친 후에 이자가 살고 있는 도시의 위성도시쯤에 중국식당을 크게 차려 그 부근에 여러식당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방학에 그 한곳에서 일할 수 있을거라면서 오라고 하였다. 

당연히 망설이지 않고 다음날 기차를 타고 그곳을 찾아갔다. 한국에서도 알바는 많이 해봤지만 주로 단가가 높은 과외알바였고 다른 일을 해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자는 원래 몸을 사리는 편도 아니고, 또 그럴 처지도 아니라서 경험도 없는 웨이트리스를 써주는데 감사한 맘으로 기쁘게 열차를 탔다. 열차를 타고 한시간 정도 간 곳은 말이 위성도시지 그냥 시골이라서 아마도 중국식당도 거기가 유일무이 한것 같았고, 기차역에서 30분에 한번 오는 버스를 타고 좀 가야 식당에 닿을 수가 있었다. 식당은 건물의 일층과 이층을 쓰고 있었지만, 5층짜리 건물은 그 사장님의 소유였고, 또 다른 지역에 이런 식당 건물이 여러채, 그리고 이자가 살고 있는 도시에 집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식당일층은 그냥 일반 식당과 같았지만 이층에는 넓은 발코니에 야외석이 숲을 바라보고 있어 경치가 실로 으뜸이었다. 그래서인지 손님은 끊이지 않고 왔고 그만큼 일하는 사람도 넉넉했다. 그럼에도 이자를 써주는 것은 틀림없이 동생이 부탁해서 였을 것이다. 사장님은 친철하고 인상이 좋은 40대 중반의 아저씨였는데 이자가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급 10마르크를 주겠다고 했다. 서빙경험이 없음으로 이자가 해야할 일은 바에서 음료나 술을 따르고 부엌에서 식기를 정리하거나 쉬는 시간에 가게를 정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게는 아침열시에 준비를 하고 11시부터 3시까지 점심손님을 받고 두시간 휴식을 한다음 5시부터 저녁열시까지 저녁장사를 했다.

식당의 요리사는 중국인있었는데 처음만났을 때부터 그냥 실실 웃기만 하는 중년의 사람이었다. 독일에 꽤 오랫동안 있었다고는 하는데 독일말은 잘 못해서 매일 하는 말은 ‚할로? 구테 탁? 굿? (Geht’s dir gut?)‘ 이 전부였고 말끝마다 ‚하하‘ 겸연쩍어 하며 웃곤 사라졌다. 사장님의 말로는 15년전에 불법으로 독일에 넘어왔지만 자신이 서류를 해주어서 독일에 살 수 있게되었다고 했다. 부엌에는 조그마한 방이 딸려있었는데 그 쪽방에서 요리사가 살고 있었고 가게가 쉬는 월요일에도 혼자 그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벌써 10여년을 살고 있다고 했다. 점심장사가 끝나고 가게를 정리할 때면 가끔 부엌에서 나와 이자에게 말을 걸곤 했는데 (사실 언어장벽으로 하나도 못알아들었지만. 주인하고는 중국말을 하였다), 사장님이 와서 그 친구하곤 말하지 말라며 너무 혼자 쪽방에서 오래 살아서 머리가 이상해 진것 같다고 했다. 사장님은 요리사를 Quatschkopf 라고 불렀는데 다른 독일 종업원 (종업원은 이자와 요리사를 빼고는 전부 독일사람들이었다) 들은 그를 Quatschkoch 라 불렀다. 가끔 다른 종업원이 휴식하러 밖에 나가고 이자혼자 있을 때면 Quatschkopf 하고 둘만 식당에 있는것은 위험하다며 사장님이 시장에 데리고 가 주었다 (사장님은 가끔 휴식 시간에 저녁장사에 필요한 부족한 물건들을 사러 갔다). 정말 재미 있는 것은 이 사장님은 자기 요리사가 한 음심은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종업원 식사 때가 되면 모두 그 요리사가 한 음식을 먹었는데, 그때마다 사장님은 부엌에 들어가 손수 요리를 해서 자신이 만든 음식만 먹었다. 이자에게도 매번 자기가 만든 음식을 주었는데, 제는 요리산데 요리를 못한다며, 독일사람들은 맛을 잘 몰라서 먹는거라고 하였다. 한번은 이자에게 점심에 한국요리를 한번할 수 있겠냐며, 재료비는 자기가 내겠다고 한적도 있었다. 이자는 불고기를 만들었는데 엄첨 맛있어 하며 다른 종업원들도 다 같이 먹었지만 요리사는 쪽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청소와 설거지, 잡일을 하는 것, 음료를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제일 힘들었던 일은 맥주를 따라내는 일이었다. 그냥 맥주잔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맥주잔 위에 그어진 줄만큼 맥주를 따르고, 그나머지는 거품이 잔 위로 올라오게끔 하는게 예술이었다 (이자는 유감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예쁘게 맥주를 따르지 못한다, 매번 거품나 가득 잔에 차서 기다려야 하거나 거품이 전혀 없거나 둘중에 하나다). 사장님이 여러번 맥주통이나 병에서 따르는 것을 보여주었는데도 거품이 차지 않는 일이 많았다. 어떤 손님들은 그냥 마시기도 했지만 까다로운 사람들은 거품이 없다고 다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은 그냥 웃으며 되돌려온 맥주를 종업원들에게 마시라고 주곤 자기가 손수 맥주를 따랐다. 하루는 에어딩어를 사장님이 따랐는데 그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병을 순식간에 뒤집어 한방울도 흘리지 않게 맥주잔 바닥에 밀어넣어 다시 천천히 빼는데 병이 잔의 입구까지 올라왔을 때는 딱 병에 그어진 선만큼 맥주가 차있고 병이 잔에서 완전히 나오면 잔입구 위로 거품이 풍성하게 차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뒤로 이자는 맥주중 에어딩어를 제일 좋아한다. 지금도 어딜가든 에어딩어밖에 마시지 않는다. 가끔 이상한 크리스탈을 팔거나 아예없는 술집들을 보면 심히 실망스럽다.
사장님은 시장을 가야할 때를 빼고는 휴식시간에 점심을 먹고는 늘 신문의 단어 맞추기 (Kreuzworträtsel) 를 하거나 책을 읽었는데 하루는 이자가 궁금하여 물어 보았다. 사장님은 독일에서 엔지니어 분야의 공대생 출신이었는데 이제는 장사를 하고 있으니 쓰는 말이 한정되어 알던 독일어도 자꾸 잊어버리게 되서 이렇게라도 공부를 하는 거라고 했다. 이자에게 그말은 지금까지도 머리에 남아 나이가 들어도 그 사장님처럼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장사가 늦게 끝나 막차를 놓치게 되는 날이며 자신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자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장님은 원래 이자가 사는 도시에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매일 집에 가지는 않았고, 부인도 한번 식당에 온게 전부였다. 친구의 얘기로는 독일인 부인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 필요에 의해서 결혼한 사이일 뿐이라고 했다. 그 독일인을 만나기 전에 아주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고 여전히 그 사람을 못 잊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장님이 독일에서 공대를 다니던 시절에 같은 대학에서 한국여자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아주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서로 금방 한눈에 반했고 그래서 동거를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렇게 둘이 공부가 끝날 떄까지 한 몇년을 같이 살며 결혼 약속까지 했는데, 공부가 끝나고 잠시 한국에 갔다 오겠다던 여자친구가 그 이후로는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몇개월을 기다리다 아는 친구들한테 수소문하여 한국까지 찾아갔건만, 예전의 여친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있더라는 노래가사에나 나올 법한 얘기를 동생이 이자에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는 이 독일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여자를 못잊어 독일부인에게는 정이없어 애도 없고, 독일부인은 중학생정도되는 전남편의 딸을 데리고 왔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오빠는 서류상의 문제로 결혼을 하게되었다고 했다. 친구는 그 여자가 자기의 오빠를 돈 벌어오는 기계로만 생각하고 오빠의 재산밖에 관심이 없다며 탐탁해 하지 않았다. 결혼하면서 하던 일도 그만두고 집에서 벌어온 돈을 쓰기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오빠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사람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고 했다. 

하루의 일은 고되었지만 어쩐지 조금이나마 돈을 스스로 벌 수 있었서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할 무렵이 되었을 때는 식당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학교가 시작되면 매일 갈 수도 없었지만 주말이틀만 그 먼 거리까지가서 일하는 것은 시간적인 부담을 차지하고라도 그만큼 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자의 첫 알바는 여기서 끝나게 된다. 알바를 소개시켜 준 친구는 공부가 끝나고 큰 증권회사에 취직이 되어 스위스로 가게 되었다. 사장님은 마음을 어디에도 못 붙이고 도박에 손을 대어 큰 손해를 보게되었다고 했다. 실실 웃기만 했던 Quatschkoch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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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Hz님의 댓글의 댓글

52Hz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때는 고마운 맘밖에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서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 참 운이 좋은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일에 오게된것도, 독일에서 학업을 할 수 있었던것도, 공부가 끝나고 우연히 직장을 구한것도 또 새로운 직작을 구해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직장에서 여러가지 배울 것도 많고 부족한 나를 써주니 감사한 마음므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생때 여기저기 알바를 하다보니 좋은 소설을 써서 무슨 문예지에 뽑히면 상금으로 유학생활을 연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소설을 조금 쓰기 시작했습니다 (뽑힐 일은 없었겠지만. 웃음). 하지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어 조금씩 남겨 놓은게 있었지만 그냥 노트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뿐 누군가에게 읽혀진 적은 없었습니다 (읽혀질 만큼 대단한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이렇게 읽어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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