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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일기·수필·문학 - 유학 일기 외에 사는 이야기 혹은 직접 쓴 시와 소설을 게재하는 곳입니다.

유학일기 김광규의 시.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람소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2,343회 작성일 16-03-02 07:59

본문

지금 나이가 70대 중반쯤 되었을 김광규라는 사람의 시 중에 "墓碑銘"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오늘 다시한번 읽어보자:

한 줄의 詩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1.  이 시가 실린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이 197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내 나이 이십대 중반 쯤이었을 것이다. 1980년 6월 온세상이 핏빛으로 물든 그해, 나는 말년 휴가를 나와서 피앙세를 만나러 마산엘 갔다가 시내 '흑과 백'이라는 서점에서 이 시집을 샀다. '흑과 백'이라는 서점이 어디였는지 지금으로선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씨 성을 가진 나의 피앙새는 당시 경북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마산 장군동에 살았으니까, 아마 거기 어디 쯤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1980. 6월 27일 흑과백”이라고 날짜와 장소를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당시 정황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1980년 6월 휴가를 나오자마자, 피앙세를 찾아 마산엘 갔고, 당시에는 '모텔'이라는 용어가 유행하지 않던 시절이라, 마산의 어떤 장급 여관에서 스물 두 살의 노 아무개와 질펀한 섹스를 했을 것이고, (그 때 노 아무개가 사온 곰보빵을 먹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은 곰보빵을 소보루빵이라 한다던가...) 저녁때 쯤 서점에 들러서 이 시집을 사고 당일 늦은 밤에 대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 흔적을 오늘 발견했다.

2.  광주 사태 ---- 사람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역사화 된 공식 명칭을 쓰지만, 나는 이 용어가 공정한 역사적 평가에 기초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 광주 사태가 진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세상은 온통 뒤숭숭하였다. 터미널 대합실에서 반란의 수괴 전두환이 코를 벌렁거리며 '근엄하고 엄숙한 경고 발언'을 듣고, 노아무개와 작별하고 버스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1977년 가을에 교정에서 데모하다가 잡혀서 ---- 당시에는 대학 캠퍼스 내에 사복 경찰이 대학의 규모에 따라 다르긴하겠지만, 십여명~수십명 씩 상주하던 시절이었다 ---- 군대를 간, 이른바 녹화사업 대상자였기 때문에, 저런 폭력을 보고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가능한 한 외면하고 싶었다. 만약 내가 1980년 6월 마산 고속버스터미널에서 2년쯤 전에 대학 캠퍼스에서 했던 것처럼 “독재타도”를  외치고 잡혀갔었다면 삼청교육대를 거쳐 남한산성(육군형무소)에 갔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이 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여튼 그 시절 반란군 수괴가 버젓이 TV에 나와 국민을 상대로 협박하는 모습을 못 본 척하고 집으로 왔다.

3.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김광규씨는 “ ......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라는 "불평하는 자유주의자의 어중간한 욕구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나는 힘없는 시인의 저런 저항방식에 화가 났다. 나는 저렇게 무기력하게 살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4.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2016년 오늘, 김광규씨는 꿋꿋이 살아남아, 한양대학 선생을 끝까지 계속하였다. (한참 후에 김광규씨를 어떤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 지나가듯이 악수를 하고 명함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창비 창립 30주년기념 리셉션이었던 것 같기두 하구 ... ) 그 양반은 아마 10여년 전쯤에 정년퇴임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20대 중반 이후로 데모가 두려운 세대로 변해갔다. 돌멩이 대신에 <버캐뷰러리 22,000> 이라는 영어책과 이재옥 토플을 들고 다녔었다. 제대후 나는 보도블럭을 깨트려서 돌조각을 던지고, 어깨동무를 한 채, 구호를 외치며 대학주변을 시위하는 일에 한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데모하다가 잡혀서 18개월 형을 받고 안양교도소에서 고생하던 여학우를 면회간 적은 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피흘리며 대립하는 이념의 도살장 같은 한국이 싫어서 독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고, 그리고 그로부터 또 얼마 뒤 나도 한 대학의 선생이 되었다.

5.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던 그 해 12월에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나는 친구와 함께 파리로 도피여행을 갔다. 여행의 제목은 "독재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대한민국에 대한 항의"었다. 그 때는 정말 정치적 망명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파리 11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던 주씨 성을 가진 내 친구 ---- 그는 지금 서울 어느 대학에서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다 ---- 의 집에 머물면서 그와 밤새워 한국정치를 토론했다. 하지만 서로는 서로의 처지와 위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친구를 궁지로 몰아 넣는 막가파식 논쟁은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의 비중있는 원로가 되어 있는 최 모 교수도 함께 있었다. 그 때 있었던 그의 발언을 까발리면, 그는 지금의 명성에 큰 누가 되라라!!

6.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나는 36년전 애인이었던 노 아무개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그녀는 칠곡군 왜관읍에 있던 분도(장크트 베네딕토) 수도원에 머물던 독일인 에리히 헤르베르트 (Erich Herbert)신부 ---- 그 때 우리는 그 어른을 "허신부님"이라고 불렀었다. 당시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꽤나 알려진 반체제 인사였다 ---- 의 꾐, 혹은 권유로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운동>을 하고 있었다. 학생운동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지 않으면, 뭔가 소외되고 왕따당하는 것 같았던 것이 그 시절의 대학의 풍토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과격하지도 않은 ... 돌멩이 한번 던지지 않았던 무늬만 ‘운동권’이었다. 그런 그녀도 내가 전화했을 때에는 혁명과는 상관없이, 아니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 아주머니가 되어 "어쩐 일이냐, 무슨 용무라도 있는거냐"며 냉정하고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는 1984~5년 쯤부터 쭈욱 대구지역을 떠돌며 중학교 생물선생으로 살아왔노라고 말했다. 그게 전부다.

7.  노 아무개와 헤어지고 나서 1983년 겨울 내가 또 다른 연애를 하고 있을 즈음, 그녀는 성대 출신의 공돌이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도 나이가 들고 늙어 보니,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김광규씨와 나를 버리고 떠난 노 아무개의 삶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소시민(쁘띠 부르주아)였다. 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36년 전 유월 이맘때 산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이 지금 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 빌려 드릴테니 한번쯤 읽어보시길 .....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1979 문학과지성사.
추천2

댓글목록

fatamorgana님의 댓글

fatamorgana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바람소리님 반갑습니다. 마음이 드러나는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비록 님과 살아온 시간이야 다르지만 제가 가졌던 비슷한 느낌을 글에서 읽어내고는 조금 놀랐습니다. 사무치는 기억으로도 여전히 좀처럼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들. 굳굳이 뜨거움을 살아 남아 세워진 묘비도, 그 묘비의 이름도, 그 귀중한 사료(史料)들도,  묘비명을 지은 그 대단한 문인의 삶도, 이제는 그들을 다 이해하게 된 내 삶 마저도 얼마나 텅빈 것들인지 생각해 봅니다. '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덕분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그 시집을 다시 읽어 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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